정연두. 백남준의 뒤를 이을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로 주목받는 작가다. 그가 신작을 발표할 때면 세계 미술계의 눈이 쏠린다. 2009년 11월 19일 뉴욕의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에서 열린 정연두의 ‘시네매지션(Cinemagician)’ 신작 발표회에서도 기립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첫날 공연의 성공은 하루 사이에 입소문이 나 두 번째 날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공연 시작이 20분이나 지체되었다. 영상 작업과 공연을 결부시킨 그의 신작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 중에는 내로라하는 미국 미술계의 유력 인사와 유명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필름 큐레이터인 바바라 런던, 구겐하임미술관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 퍼포마(Performa) 설립자이자 큐레이터인 로즈리 골드버그가 그의 작품을 보러 왔다. 미술비평가 린다 야블론스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얼굴도 보였다. <뉴욕타임스> 미술담당 기자와 <아트 뉴스> 발행인 등 쟁쟁한 인사들의 관심을 이끌어낸 정연두의 행보는 워싱턴DC로 이어졌다. 스미소니언박물관 피어 앤 새클러갤러리에서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2009년 말부터 2010년 2월까지 개인전이 열렸다. 미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연달아 그의 작품이 선보인 것이다. 한국 관람객은 4월 26~27일 오후 8시 서강대 메리홀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정연두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외적인 변화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주차 시설이 매우 나쁜 사당동의 작업실도 그대로고, 작업실 입구에 걸려 있는 빨간 중국집 간판 ‘엘비스 궁중반점’도 그대로다. 좀 떴다 싶으면 작업실을 멋지게 꾸미는 여느 작가와 달랐다. 심지어 몇 년 동안 나이도 별로 먹지 않은 것 같다. “카메라 뒤에 있는 게 더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가 카메라 앞의 모델로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다. 예의 그 환한 미소와 트레이드마크가 된 수염도 여전하다. 겉으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그는 더 많이 바빠지고 더 많은 작업을 해냈고, 더 많이 유명해졌다. ‘미스터 원더풀’ ‘꿈의 작가’ ‘제2의 백남준’ 등 정연두를 칭하는 말들도 늘어나서, 그에 대한 세인의 애정과 관심, 그리고 기대가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네매지션〉 |
“당시에는 인생의 모든 것을 등산에서 배웠다”고 할 만큼 등산광이었던 정연두는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의 세인트 마틴 미술대학 조소과 수료 후 골드스미스 미술대학 석사를 졸업할 때 그의 손에는 조각이 아니라 사진과 비디오라는 다른 매체가 들려 있었다. 2001년 귀국 후 사진・영상・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작업을 해오면서 베니스 비엔날레며, 리버풀 비엔날레 등 세계적으로 중요한 미술 행사에 꾸준히 초빙되어왔다. 서른여덟이던 2007년에는 최연소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이때 출품했던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백남준 이후 한국 미디어 작가로는 처음 작품이 소장되며 ‘제2의 백남준’이란 기대 섞인 평가를 받았다.
뉴욕 공연장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린 ‘시네매지션’은 말 그대로 영화와 마술을 결합시킨 작품이다. 마술사 이은결이 무대에 올라와 마술을 보이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는 제작과정 자체가 작품이 된다. 마술사 이은결의 연기는 무대 위 스크린을 통해 실시간 상영되는데, 관람객은 이 상영물과 실제로 스태프들이 무대 위에서 분주히 오가며 마술을 돕는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된다. 퍼포먼스와 영상 작업을 결부시킴으로써 이미지와 실재, 가상과 실상, 편집된 가공물과 현실의 삶을 동시적으로 보여줘 눈 높은 뉴욕 미술계를 사로잡았다.
〈보라매 댄스홀〉 |
첨단 매체 활용하지만, 온기와 유머, 감동과 재미가 있는 ‘핸드메이드 작품’
세계 미술 무대에는 별의별 아이디어와 기법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정연두의 작품이 세계 미술계의 눈길을 끄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연두의 미디어 아트가 가장 원론적인 예술의 대상, 사람을 향하기 때문이다. 〈핸드 메이드 메모리:수공 기억〉은 그의 작품 제목인데, ‘핸드 메이드’라는 말은 그의 작업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가 사용하는 매체와 개념은 첨단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상에는 ‘핸드 메이드’의 온기와 유머, 감동, 재미가 녹아 있다.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정연두는 말한다. 그 ‘사람 냄새’를 작품 속에 담는 과정에서 정연두 특유의 유머와 재미, 감동이 생겨난다.
정연두는 지금까지 미술계에서 눈여겨 바라보지 않던 것들, 평범한 사람들의 못 이룬 꿈, 탱고에 여념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 아이들의 그림, 노인들의 오래된 기억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사진 이미지로 실현시켜준 〈내 사랑 지니〉,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그대로 재현해서 사진을 찍은 〈원더 랜드〉 시리즈, 우리네 이웃들이 로맨틱한 댄서가 되어 정열을 불사르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 작품 〈보라매 댄스 홀〉과 〈탱고 탱고〉, 노인들이 나와서 젊은 날의 기억을 회고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물 〈수공 기억〉 시리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담겨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인데, 그는 그들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춰 세상을 바라보며 함께 웃는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
평범함에 대한 존중이 그의 출발점이자 비범함을 이룬 첫 번째 요인이다. 그의 작품은 많은 경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경청 능력과 공감 능력이 그의 비범함의 두 번째 요인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담백하게 둘 다를 끌어안을 줄 아는 균형 감각이 그의 세 번째 미덕이다. “판타지가 없는 삶은 건조하고, 삶이 배제된 판타지는 공허하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꿈은 꿈이라는 현실로 존재한다. 꿈속에 빠져서 현실을 망각하게 하지 않는다. 그가 작품 속에서 실현해준 꿈은 가짜 현실이며, 손으로 만든(handmade) 것이라는 흔적을 잊지 않고 남긴다. 정연두의 작품에서 한번 보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강력한 힘, 의표를 찔린 듯한 새로운 감각이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다. 꿈과 현실, 가상과 실재가 섞여 굴러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공감을 만들어낸다.
〈원더 랜드-낮잠〉 |
‘핸드 메이드’의 또 다른 속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인 〈로케이션〉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시네매지션〉 〈공중정원〉 등은 안티 블록버스트 전략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대중은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아바타〉 등의 영화와 리니지,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의 세계 속에서 환상을 고해상의 리얼리티로 체험한다. 수백억, 수천억을 쏟아 부어 만든 이 영화와 게임들이 보여주는 가짜 현실들 속에 망실된 우리의 진짜 삶을 정연두는 예술적으로 구해낸다. 완벽한 영상을 만들기 위한 여러 설치 도구들, 이것들을 옮기고 설치하는 스태프들의 분주한 움직임까지 그대로 담아낸다. 이 작품 속에서는 진행을 위한 여러 가지 소리는 들리지만, 장면을 편집하기 위한 ‘컷’소리는 단 한 번도 들리지 않는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듯이 우리 사는 세상에는 편집이 없다. 손으로 우리의 꿈, 기억, 로맨스, 판타지 등을 만들면서 정연두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근사하지 않아도 그래도 견딜 만하지 않은가. 손으로 만든 세상에는 손의 온기가 남아 있는 법이다.
그의 사당동 작업실은 늘 분주하다.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과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계획을 하고, 그에 맞는 사람들을 섭외하고, 실행하고, 작품으로 만드는 긴 과정이 있다. 어디선가 계속 전화가 걸려오거나 다음 미팅 스케줄을 위해 움직이거나, 앞 미팅이 채 끝나지 않아서 기다리기 일쑤다. 그의 작품이 갖는 공감력은 그의 작품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게 한다. 작년에는 국내 최초로 공연되는 카바레 연극 〈몬스터〉에서 무대미술을 담당하기도 했다. 올해는 한 패션회사에서 그의 작품 〈보라매 댄스 홀〉과 〈탱고 탱고〉를 모티프로 하고 그의 이름을 딴 ‘정연두 라인’을 론칭하기도 했다.
〈내 사랑 지니〉 |
2010년에도 사당동의 작업실에서 태어나는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에서 전시하게 된다. 무라카미 다카시, 소피 칼레, 듀안 핸슨, 마리코 모리, 마리우조 카텔란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파리 에마뉘엘 페로틴 화랑에서 개인전을 준비 중이고, 네덜란드의 국제미술전 KAAP에서 신작 〈아버지의 초상〉을 발표할 예정이다. 싱가포르에서는 에르메스 후원으로 전시회도 열 계획이다. 인터뷰 중 그는 〈SIX POINTS〉라는 신작을 보여주었다. 뉴욕에서 작업한 이 새로운 작품은 정연두라는 이름을 또 세계 미술계에 강력하게 각인시킬 것이다. ‘제2의 백남준’이라는 표현은 그에게 부족해 보인다. 아마 그는 ‘제2의 정연두’라는 말을 후배에게 물려줄 그런 작가가 될 것 같다.
사진 : 최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