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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천은사
 
 
 
카페 게시글
삼척의 역사 스크랩 삼척죽서루
동은 추천 0 조회 68 11.01.14 1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척죽서루三陟竹西樓

 

                           1)삼척죽서루

                        2)죽서루 관련인물

                           죽죽선녀

                           여류시인 이옥봉

                           심동로

                        3)죽서루 고지도

 

삼척죽서루(三陟竹西樓)

 

1)삼척죽서루三陟竹西樓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원종 7년(1266)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내용으로 보아 죽서루는 적어도 1266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태종 3년(1403) 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 중창하였으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중수되거나 단청되었으며, 증축되었다. 죽서루는 누의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었고 죽림 속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다는데서 명명되었으며, 죽서루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었다는데서 유래한다는 설도 전한다.

 

누각의 전면에 게시한 "죽서루"와 "관동 제1루" 현판은 숙종 41년 부사 이성조의 글씨이고, 누각 내에 게시된 "제일계정(第一溪亭)" 현판은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의 글씨이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 부사 이규헌의 글씨이다.

 

 죽서루는 그 하층이 17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9개는 자연석에 세웠으며, 8개는 석초(石礎) 위에 건립하였다는 건축사적 특징을 갖으며, 그 상층에는 20개의 기둥에 팔작지붕이다.

 

현재 누정 내에는 부사 허목이 지은 "죽서루기(竹西樓記)", 당성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 등 기문과 "죽서루",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 등 제액, 그리고 일중 김충현이 쓴 율곡 이이의 "죽서루차운(竹西樓次韻)", 정조의 어제시의 시판 등 모두 26개의 현판이 게판되어 있다.

 

 

죽서루 죽서루
죽서루 죽서루
죽서루 죽서루

상세내용

누각은 정자와 함께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을 대변하는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흔히 누각과 정자라 하면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경관을 조망하기 편리한 곳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건축물로서, 개인이나 단체 등의 집회 강론 휴식 접객 그리고 정기적인 회합의 공간으로 건립되어진 정자. 누대. 누각. 성의 문루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정자와 누각의 차이점은 정자가 자연 속에서 개인적인 수양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인 집단 수양공간이 되는 셈입니다. 또한 누각은 보통 2층에 우물마루를 둔 대규모이고, 정자는 누각보다 작은 규모로 주로 단층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누각이 언제부터 건축되어 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형태상의 특징으로 보아 고구려의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와 오늘날의 원두막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문헌상으로는 백제 무왕37년(636) 8월 "신하들과 망해루에서 잔치를 치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가장 빠른 것입니다. 그 후 고구려 신라 쪽에서도 누각과 정자건축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삼척지역의 정자에 대한 내용도 보입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수로부인"조에 나타나는 "임해정"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삼척지역에도 삼국시대 후기쯤엔 누각이나 정자가 지어졌으리라 추측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사료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강가에 자리잡은 "죽서루" 역시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죽서루 시(詩)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190년 이전부터 이미 죽서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누각은 조선 태종3년(1403) 삼척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다 새로 지은 이후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누각은 그 기능에 따라 군사시설로서의 누각, 교육적 종교적 회합장소로서의 누각, 순수한 접대나 향연을 위한 누각으로 나누어지는데, 죽서루는 객사(동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휴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향연을 위한 누각"이라 하겠습니다. 죽서루는 "관동 제1루"라는 명성에 걸맞게 주변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조선 중기의 화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고려시대 이후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에는 그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멀리 태백준령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가까이는 근산 갈야산 봉황산이 솟아있어 죽서루를 에워싼 모습이 마치 삼신산의 선계(仙界)를 느끼게 하는 경지입니다. 성남마을의 전원풍경, 오십천 응벽담의 맑은 물, 그 속에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떼, 바람과 물과 뱃사공을 희롱하는 갈매기, 대나무숲을 울리는 바람... 이러한 자연환경과 조화롭게 천길 벼랑 위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갈 듯 우뚝 솟아있는 죽서루이니, 이 경관은 가히 신선의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죽서루의 건축구조 또한 그러한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했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기단과 초석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그렝이질하여 자연암반 위에 직접 세운 것입니다. 누각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꽃으로 수놓은 연등천장이며, 우물마루가 끝나는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세우고, 기둥 사이는 벽체나 창호없이 모두 개방했습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눈비와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발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처마는 겹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입니다. 죽서루는 정면 7칸으로,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좌우 각 1칸이 놓인 공포의 모습이 다르고, 또 내부 천장에 있어서 측면 밖으로 나와있던 도리의 뻘목들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서루라는 이름은 누각 동쪽에 대나무 숲이 있었고 그 속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죽장사 서편에 있는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 이름지었다는 이야기와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는 그 서편의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누각 잎쪽에 게첨된 [竹西樓]와 [關東第一樓]라는 편액은 숙종41년 삼척부사 이성조의 글씨이고, 누각 안의 [第一溪亭]은 부사 허목의 글씨입니다.


                      ▒참고자료 :『삼척시지』삼척시 1997

                                         [죽서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삼척시, 1999년 

2)죽서루관련인물

「죽서루」이름의 주인공 - 죽죽선녀竹竹仙女

죽서루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는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하나는 죽서루 동쪽에 대나무밭이 있었고 그 대밭 속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죽장사 서편에 있는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죽서루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어 죽서루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각종 사료에 의하면 첫 번째 이야기가 보다 사실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죽선녀의 집 서편에 있는 루]라고 해서 "죽서루"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훨씬 인간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동의 경승지인 삼척 땅을 찾아온 많은 시인묵객과 관리들은 아름답고 지혜롭고 청순했던 죽죽선녀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녀의 곧은 정조는 대나무와 같았고,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선녀같았기에 세속의 이름마저 죽죽선녀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지식인이라 자처하던 선비와 관리들이 즐겨 죽죽선녀의 유희소로 모였고, 그들은 죽죽선녀의 유희소 서쪽 오십천 절벽 위에 절묘하게 세워진 누대를 죽서루라 불렀던 것입니다. 죽죽선녀는 강릉 경포대와 연관있는 홍장과 함께 강원도내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녀입니다. 물론 많은 기녀들이 있었겠지만 역사상 그 이름이 알려진 기녀로서는 최초의 여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생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역사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진흥왕37년(576) 봄 원화(源花)를 뽑은 것(남모와 준정 ⇒화랑)이 기생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 또한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라 김유신의 기생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부터 기생이 있었다고 보여지고,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면 6대 현종(1009-1030) 때부터 기생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의 의종. 예종. 문종시대 여악(女樂) 창우잡기(倡優雜技)는 곧 기생을 말함인데 당시 이들은 재색이 있고 노래와 춤이 능한 여자노비 중에서 선발하여, 교방에서 교육을 시킨 후 연회장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기생은 정식 기적, 즉 기생족보에 오르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러나 23대 고종(1213-1274) 때에 오면 기생을 기적에 올리기 시작합니다. 고종 때 이지영이 자운선이란 기생을 기적에 편입시킨 것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지영이 자운선을 첩으로 삼았고, 이지영이 죽은 다음에는 최충헌이 자운선을 첩으로 삼았습니다. 충렬왕 때에는 자운선처럼 된 기녀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니까 죽죽선녀는 충렬왕 대 이전의 여성이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죽죽선녀가 실제 인물인지, 전설 속의 인물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고려 23대 고종 이전의 기적에 올라있지 않은 자유인이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기생은 신분이 천하더라도 위로 임금과 정승의 벗이 될 수 있고, 연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아래로는 무명한량들의 벗이요 연인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젊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고, 지조가 높아야 하고, 노래와 춤과 시와 그림이 뛰어나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생들은 봉건시대에 가장 첨단을 걷던 자유여성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죽죽선녀 역시 삼척을 오가는 관료 시인 묵객들과 벗하고 지냈던 자유여성이었습니다. 두타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부처님처럼 멀리 좌정하고, 근산 갈야산 봉황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가운데 푸른 오십천이 흘러내리다가 한바퀴 감도는 천길 절벽 위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처럼 자리한 죽서루는 오늘도 관동제일루의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 죽서루에서 남아대장부들과 노래하며 춤추며 시를 짓던 죽죽선녀, 자연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말은 죽죽선녀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참고문헌 - 김영기『실직문화』제4집 삼척문화원 1993

                            김태수『삼척의 역사·문화이야기』 삼척시립박물관 2002

 

「죽서루詩」를 남긴 여류시인 이옥봉

옥봉의 이름은 원이며, 옥봉은 그녀의 호이므로 흔히 이옥봉이라 부릅니다. 옥봉은 조선 선조대왕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충북 옥원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였습니다. 비록 서녀였지만 왕손으로서 그녀의 집안은 당당했고, 또 지위도 높았습니다. 옥봉은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번 결혼했던 여성은 재혼할 수 없었으므로 옥봉은 수절하면서 고독을 달랬습니다. 그녀는 다행히 시문이 능했기 때문에 시를 짓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옥봉의 시는 재기발랄한 풍류를 갖추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시가 우연히, 승지벼슬까지 하게 되는 조원에게 알려졌고, 조원은 시작품으로서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옥봉이 조원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조원의 늠늠한 모습에 반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홀로 있던 옥봉은 조원에게 첩이 되길 간청했지만 선비의 법도에 철저했던 조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과 풍류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나 그들의 사랑은 맺어지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사랑은 맺어졌습니다. 조원의 장인이 나서서 사위에게 옥봉을 첩으로 맞이하도록 한 것입니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은 그처럼 조선시대에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옥봉이 삼척에서 출생한 것도 아니고, 집안의 연고가 없는데도 삼척의 여성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삼척에서 일시 살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척 죽서루에 대한 유명한 시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옥봉을 첩으로 맞아들인 조원이 삼척부사로 부임할 때 옥봉이 따라와 부중에 살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삼척부사의 첩이던 그녀가 삼척부의 기생이라 와전되기도 했습니다. 옥봉이 조원을 따라 삼척으로 올 때 영월에 들리게 되는데, 그때 단종능을 지나던 회포를 읊은 것이 [영월도중시]이고, 삼척에 와서 그 유명한 [죽서루시]를 남깁니다. 이승휴가 죽서루에 올라 지은 시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가 있지만 옥봉의 시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옥봉의 죽서루시는 그만큼 유명했고, 찬사를 받았습니다. 죽서루시편은 짧으면서도 자연과 인생과 우주를 포괄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읊었습니다.

강에 잠긴 갈매기의 품은 넓고도 넓고 /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도 하네

5언절귀 10자에 옥봉은 죽서루 풍광을 형이상학적으로 끌어올렸고, 자기의 인생까지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옥봉의 진면목은 사랑의 시에서 동서고금에 독보적인 데가 있습니다. 옥봉의 사랑 시만큼 간절하고, 정열적이고, 혼이 가득 찬 것이 없습니다. 옥봉은 이웃에 살던 남자가 소도둑질로 관가에 끌려간 뒤 그 아내가 눈물로 지새우는 것을 보고 그 여인의 슬픈 신세를 글로 적어 주었습니다. 그 간절한 글을 보고 관원은 그 사람을 석방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조원이 알게 되고, 부녀자가 함부로 공사에 관여한다고 옥봉을 내보냅니다. 옥봉은 사랑하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지만 간절한 사랑을 읊었습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나요 / 사창에 달이 뜨니 한만 서려요 / 꿈 속에 오고간 길 흔적이 난다면 / 그대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겠네요 온다던 그대 왜 이리 늦을까 / 뜰에는 벌써 매화가 지는데 / 까치가 운다 임이 오시려나 / 공연히 거울 들고 눈썹 그리네 내일 밤이야 짧든 말든 이 한밤만 길었으면 / 저 닭아 울지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리 / 가실 님 생각하니 눈물만 앞서노라 옥봉이야말로 한국여인의 사랑과 소망을 읊은 로맨티스트요 사랑의 여류시인이었습니다.


                   ▒참고문헌/김영기『실직문화』제4집 삼척문화원 1993

                                    정연휘 『죽서루에 오르면』문왕출판사 1997

 

죽서루의 가객 - 심동로

삼척심씨의 시조이며 죽서루의 가객으로 이름 높았던 심동로는 고려 공민왕 원년(1352)에 통천군수를 지낸 분입니다. 본래 이름은 한(漢), 호는 신재(信齋)이며 검교(檢校)로 있던 심문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심동로는 고려말 충혜왕3년(1342) 생진과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그해 가을 직한림원사. 성균관학록이 되었으며, 1351년에는 내직으로 들어가 우정언이 되었습니다. 그후 공민왕 10년(1361)에는 봉선대부 중서사인 지제고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심동로는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해 지방수령으로 나가기를 원했을 정도로 효성스런 분이셨습니다. 강원도 통천군수를 지내면서 고려말의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임금에게 간청했습니다. 공민왕은 여러 차례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했으나 의지가 워낙 굳어서 어쩔 수 없이 귀향을 허락하면서 그 뜻을 높이 사서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심한이란 이름 대신 심동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학사승지가 되었을 때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심동로는 신보다 학식이 높고, 나이도 신보다 많으며, 벼슬길도 먼저 올랐으니 신의 직책을 그에게 내려주십시오" 공민왕이 이색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당대 유학의 거장인 이색이 그러한 말을 하였을 정도이면 심동로가 어떠한 인물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당시에 김구용이 안사가 되어 삼척에 왔을 때 심동로를 찾아와서 그가 거처하는 집을 방문하여 심동로의 호인 "신재"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편액으로 그의 집에 걸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삼척으로 오는 많은 관원들은 반드시 심동로를 찾아와서 나라 일을 함께 논하고 시를 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충렬왕8년(1282) 원나라에서 진사 급제 후 돌아와 예빈시승의 벼슬에 있던 이구(李球)는 "관동의 군자는 두 사람으로 심동로와 최복하다"라고 평했는데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척의 관루는 죽서루이고 / 누중의 가객은 심중서로다 / 지금과 같이 백발임에도 / 시와 술에 의탁하여 / 한가한 나를 위해 자리를 베풀었네"

심동로는 삼척에 살면서 날마다 죽서루와 해암정을 오가며 시를 썼습니다. 추암 능파대 서쪽에 지은 해암정은 삼척의 해금강이라 할 만큼 경치가 좋으며, 해암정 서쪽 신재공이 은거했던 터를 "신대감터"라고 부릅니다. 세조7년(1461) 체찰사 한명회는 이곳에 들러 능파대(凌波臺)라 이름을 지었고 1530년 안찰사 심언광이 중건했으며, 1675년 송시열이 해암정 현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심동로가 은거하던 곳은 지금의 동해시 추암동 산기슭인데 이곳을 휴산(休山) 또는 퇴평(退坪)이라 하며 1931년 후손들이 그자리에 유허비를 세웠습니다.

심동로는 삼척에서 후학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남은 인생을 다바쳤습니다. 그러므로 삼척지방의 학풍을 진흥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년에는 나라에서 예의판서와 집현전제학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임금은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산수와 시를 벗하였습니다.

심씨가 삼척을 본관으로 한 것은 심동로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그의 덕행과 문장은 [해동명신록]에 수록될 정도입니다. 삼척의 자랑인 관동팔경 제1루 "죽서루"와 심동로는 이러한 인연이 있습니다.


                           ▒참고자료/김영기『실직문화』제4집 삼척문화원 1993
                                          『삼척시지』삼척시 1997.

                                          『삼척의 충효열 인물』삼척군 1994 

죽서루 고지도

정선(鄭敾, 1676~1759)의 죽서루 그림 정선(鄭敾, 1676~1759)의 죽서루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金弘道, 1745~?)의 죽서루 그림

김홍도(金弘道, 1745~?)의 죽서루 그림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죽서루 그림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엄치욱(嚴致郁, 생존년대 미상)의 죽서루 그림

엄치욱(嚴致郁, 생존년대 미상)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죽서루그림

작자미상. 서울대 규장각 소장

허필(1709~1768)의 죽서루 그림

허필(1709~1768)의 죽서루 그림.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죽서루 민화

죽서루 민화. 소장자 미상

죽서루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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