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가 내리는 5월 10일 아침,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 잡은 전태일재단 사무실이 시끌시끌하다. 재잘재잘 강의실에 자리를 잡은 건 휘경여자중학교 학생들. 아침 일찍 전태일재단에 들러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 영상을 시청한다. 그리고는 평화시장 부근 전태일다리에 들러 거리 청소 등의 봉사활동을 편다.
7년째 반 학생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김민석 교사는 “노동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하기 어려운 학생들과 지난 노동운동의 무거운 역사 사이에 가느다란 연결고리라도 이어주고 싶은 마음에 매년 재단을 찾는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타고 온 버스나 지하철을 만든 게 누구냐는 질문에, 정부나 국가라고 답하던 학생들이 50년 전 노동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물에 시선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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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로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또한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의 부조리함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다. 울산의 철탑에선 200일 넘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 청계천-모란공원-대구-부산, 전태일의 길 기획
50년 전 딱 저만 했을 또래의 전태일을 찾아 남쪽으로 향한다. 전태일재단(이사장 조헌정)은 전태일다리와 평화시장 등 청계천 일대와 전태일 열사, 이소선 어머니의 묘역이 조성된 모란공원 외에도, 전태일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대구와 부산지역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전태일의 길’이라 이름붙일 만한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다.
특히 전태일 열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대구와 부산지역의 삶의 궤적들이 개발 바람 속에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부분을 고려하면, 지금이라도 뜻을 모아, 이를 보전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강하게 대두되기 때문이다.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지금에 와서 다시 전태일의 길을 걸으며 발자취와 삶의 궤적을 되짚어 보는 것은 단순히 지난 자료를 수정 보완하고 보전하는 것 이외에도, 여전히 현실에서 억압받는 노동자의 삶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전태일재단 운영위원들을 중심으로 1차 답사팀이 꾸려지고,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살피는 1박2일의 계획이 정해졌다. 답사 일정 중간에 평택과 울산의 송전 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오늘날의 전태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방문하고 후원기금을 전달하려는 계획도 수립했다. 답사 출발 하루 전 평택의 농성 노동자들이 171일 만에 땅을 밟았다.
답사팀이 제일 먼저 확인하려고 한 장소는 대구의 열사 생가 터이다. 전태일 열사의 생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제적등본 상에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316번지로 되어 있다. 이곳은 전태일의 할아버지 집 주소이며, 원적인 셈이다. 이 부근은 현재 도심 속 휴게녹지 공간으로 남아 있다. 열사의 생가가 맞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지방자치단체와 협의를 통해 조그마한 추모 공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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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열사의 생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316번지는 주변의 건물들과 도로 사이의 작은 녹지 공간이었다. 이번 답사길에 올랐던 전태일재단 운영위원들은 신축건물이 들어서거나 새로 도로가 뚫린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공사가 시작되고, 한 달이면 금세 주변 풍경이 바뀌는 게 대도시의 일상이다. 운영위원들은 지방자치단체와 협의를 거쳐 열사의 생가 터를 기념하고 보존하는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 전태일의 할아버지는 남문시장 근방에서 포목점을 크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답사에 동행한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 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큰집에 왔던 기억이 있으며 주변 인근에 가지 밭이 무성했고, 담벼락을 따라 제비꽃이 피어있었다”고 추억했다. 손주들에게 쌈지를 풀어 용돈을 주시던 할머니도 생각난다고 했다.
전태일 평전을 쓴 고 조영래 변호사는 “1948년 9월 28일 이제 막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 민족이 다시금 강대국의 싸움의 희생물이 되어 좌우대립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전태일은 대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할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전태일 열사의 부친인 고 전상수 씨 역시 피복제조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로 살았다. 전태일 열사 생가 인근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으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의 생가도 위치해 있다. 특히 해방 직후 대구 지역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세력이 두드러진 것으로 유명했으며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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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열사 생가 인근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으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의 생가도 위치해 있다. 대구시는 이 일대를 역사와 문화체험 공간으로 새롭게 단장해 관광 코스로도 주목받고 있다.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는가 싶었지만, 다시 좌우 대립의 혼란이 극에 달할 무렵, 전태일 열사가 태어났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한국전쟁 와중에 부모와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피난처에서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기술로 소규모 양복제조업을 했는데, 염색을 맡긴 원단이 장마 통에 상하는 바람에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고 1954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다.
가진 것 없고 연고도 없는 서울살이는 혹독했다. 열세 살의 전태일은 첫 번째 가출을 감행하는데, 영등포에서 수원까지 온종일 걷고 다음날 밤 수원역에서 기차를 무임승차해 큰집이 있는 대구로 향한다. 거기서 며칠을 묵은 태일은 차비를 받아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긴 했으나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버지의 노여움이 걱정되었다.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갈 생각으로 구두닦이를 하며 남대문시장 일대를 떠돈다. 그렇게 1년 동안 돈을 벌기는커녕 어린 몸 추스르기가 벅차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1962년 여름 전태일은 다시 무작정 부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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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나가 1년 동안 고생한 끝에 전태일 열사는 대구에서 그리운 가족들과 상봉한다.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3동에는 전태일의 가족이 살았던 옛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탓인지 좁은 골목길과 동네 곳곳에는 60~70년대의 모습이 남아 있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 부산을 거쳐 다시 대구로
“나는 부지런히 걸었다. 영도 섬에라도 가면 누가 기다린단 말인가? 한 그릇의 쉰밥이라도 쓰레기통에 내버려져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가야만 한다. … 아, 마침내 저 그리운 영도다리가 보이는구나! 애타게 보고 싶던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을 보는 느낌이다.” - 전태일의 수기 중에서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굶주림, 험악한 거리의 삶에 지친 열네 살 소년 전태일은 어릴 적 기억을 따라 영도다리 방파제까지 내려 왔다. 사흘을 굶은 소년의 눈에 영도 앞바다 시커먼 바닷물 위에 “사면을 빼어버린, 나무 속처럼 허연, 주먹보다 약간 큰, 캬베츠의 속고갱이”가 들어온다. 상한 양배추 속대를 먹으려고 앞뒤 가리지 않고 바닷물에 뛰어든 태일은 어부에게 구출되어 가까스로 익사를 면한다. 죽음의 공포를 맛본 전태일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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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그리듯 찾아온 영도다리. 사흘을 굶은 소년 전태일은 영도 앞바다 구정물에 떠 있는 ‘캬베츠 속고갱이’를 먹으러 바다에 뛰어든다. 영도다리와 방파제, 그리고 조그마한 등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버릴지 모른다. 대형 백화점 건물이 들어서면서 매립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 50년 전 전태일뿐만 아니라 부산 영도 토박이들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았던 영도다리. 바닷물에 뛰어들어 사경을 헤맸던 방파제와 자그마한 등대는 아직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마저도 곧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이다. 영도다리 부근을 매립하고 고층 백화점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다리 자체가 갖고 있는 지역의 상징성 때문에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자, 지금 있는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리를 통째로 옮겨 놓는다는 계획이 수립돼 있다. 본래의 다리로서 기능하는 게 아니라, 관광객들이 도보로 오갈 수 있도록 생색내기 보전이라도 하자는 식이다.
부산진역 철조망을 넘어 몰래 기차에 올라탄 태일은 영천역을 거쳐 다시 대구역에 내린다. 큰집을 들르지 않고 외갓집으로 간 태일은 외할머니에게 가족이 대구로 내려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1년 만에 가족과 상봉하고, 이후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니게 된다. 당시에 전태일 가족이 살던 집은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 3동에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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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전태일이 철조망을 넘어 지치고 찌들은 작은 몸을 열차 간에 숨겼던 부산진역. 2005년부터 부산진역에는 여객 기차가 서지 않는다. 열차와 사람들로 북적였을 부산진역 인근은 이제 쓸쓸할 정도로 조용하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 다시 전태일을 떠올린다는 것은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전태일의 수기 중에서
서울과 대구, 부산을 오간 전태일의 유년 시절은 그의 삶에 깊숙한 자국을 내어 놓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극명히 대비되는 현실은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갖고 있어도 생채기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완강한 성채였다.
전태일 열사의 후배임을 자처하는 노동계는 혼란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중심축이라고 자부하는 양대 노총은 나란히 내부적 갈등과 혼란을 겪으며 아직도 진통 중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이정표조차 세우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양대 노총의 비호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이제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들의 입에서 주로 오르내리고 있다. 소년 전태일에게 높은 성벽처럼 느껴졌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현실 못지않게, 노동자들 간의 삶의 간극도 끝없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대로 포기하고 다 그만두어야 하는가? 나약해질 때마다 놀라운 정신력으로 소년 전태일은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다. 그가 기억하고 또 바라는 행복을 향해 또 다시 일어섰다. 전태일이 손수 남긴 기록들을 통해 지금도 우리는 다시 한 번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얻는다.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 1969년 12월 31일 전태일의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