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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좋은 나라
8월 15일 부터 8월 19일까지 4박 5일 하기휴가 동안 중국 관광여행을 했다.
중국 천진 공항으로 입국하여 2일간 북경에서 이화원 만리장성 자금성 천안문을 관광하고 고속열차 편으로 장춘을 거쳐 백두산을 관광한 package 관광여행을 택하였다.
다음은 관광여행에서 보고 느낀 점을 나름대로 정리해본 글이다.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천진공항을 도착한 것은 2009년 8월 15일 현지 시간 13시 20분이었다. 공항에서 중국 입국 신고를 마치고 수화물을 찾은 후 공항 출구로 나오니 예정대로<oz연합>이라는 안내판을 들고 나온 서진항공 북경지사 소속 현지 가이드 박향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45인승의 버스가 우리 일행 29명을 태우고 북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번이 외국 여행이 처음이 아니건만 외국 여행 때마다 항상 느끼는 기대와 설래 임으로 버스에 승차하여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경으로 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안내원은 관광국인 중국의 현황(인구, 지리, 역사 등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도 밀린 피로감에 젖은 우리를 꿈속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안내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창밖으로 시선이 간다. 차창 밖은 뿌연 안개인지 매연인지 미세 먼지인지도 모를 그 무엇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구름은 없는 날씨였으나 하늘의 해는 희미한 구름에 싸인 듯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공기 또한 쾌쾌한 냄새를 발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구름 없는 8월 중순의 날씨라 이글거리는 태양이 정열을 폭염으로 발산하여 사람들을 해변이나 계곡등 피서지로 유인하여 맘껏 즐기게 하련만 이곳의 날씨는 금방이라도 뿌연 재를 뿌릴 듯 찌푸린 날씨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고 있었다.
버스는 계속하여 북경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넓은 들판만 보일뿐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산과 들과 강과 마을이 어울려진 교향곡과 같은 아름다움은 이곳에서는 맛볼 수 없다.
2시간 30분 만에 우리 버스는 북경 이화원에 도착하였다. 이화원에 대하여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이화원은 북경시 서북 교외에 위치, 도심으로 부터 16km의 거리로 청나라 때의 황실 원림과 행궁이었다. 이화원은 중국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되고, 규모가 가장 큰 황실 정원으로 전국중요문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화원의 원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조되었다. 부지가 290ha, 그중 수면이 220ha이다. 이화원의 중심을 이루는 곤명호는 15년에 걸친 대 공역 끝에 완성한 인공호수로 여기서 파낸 흙과 돌은 대부분 그 옆에 자리한 인공산 만수산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더욱이 이렇게 조성된 공원 안에는 3000여 칸에 달하는 다양한 전각과 누각, 정자 등이 곳곳에 있으며 황제와 황후가 정치활동을 하며 휴식하고 유람하던 곳이다.
이화원은 중국의 4대 정원 중 피서산장과 함께 청나라 왕실전용 정원으로 청나라 말기의 복잡한 정세를 40년 동안 한 손으로 틀어쥐고 멸망의 길로 이끈 여성 서태후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실제 이곳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 불 연합군에 의해 형편없이 파괴되었던 것을 서태후가 1888년에 해군의 군함 건조비 500만 냥을 유용해서 재건, 10년 만에 완공, 이름을‘이화원’으로 고쳤다. 서태후 자신도 이화원의 인공호수 곤명호의 버드나무 새싹이 날 때부터 잎이 질 때까지 이화원에 머무르며 정무를 살폈다고 하니 이화원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이화원의 정문은 동궁문이다. 동궁문(東宮門)의 중간 정문은 ‘오로’로 황제, 황후가 출입하고 양쪽문은 왕공, 대신들이 출입하며 태감, 병졸들은 양측 옆문으로 출입하였다. 편액의‘이화원’세 글자는 광서황제(서태후의 이질)가 쓴 것이다. 운룡석에 구슬을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용은 황실의 존엄성의 상징이며 또한 유지와 칙령의 표징이다. 동궁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숨 가빴던 청말 정세의 중심에 서 있던 인수전(仁壽殿)이 보인다.
인수전은 궁정구의 주요 건축물의 하나로서 원명은근정저, 광서 연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 어진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이곳은 서태후(자의태후)와 그녀가 옹립한 광서황제가 외국사신을 접견하며 정무를 살피던 대전으로 가장 먼저 문 앞에 서 있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과 용 조각이 눈에 띈다. 보통 궁궐이라면 대부분 문 쪽에 왕을 상징하는 용을, 그 옆에 왕후를 상징하는 봉황을 놓기 마련인데 이곳 이화원 그중에서도 정무를 보살피던 인수전 앞에 그 위치가 뒤바꿔져 버린 채 서 있는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바로 이곳을 오는 관료들이나 사신들에게 청나라의 실권자는 '왕이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서태후의 과시욕의 발로였다. 또한 이곳은 중국 근대 사상 변법 유신 운동의 획책지의 하나였다.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의 지지 하에 1898년에 '유심변법'의 실시를 통해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103일 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서태후에 의해 이화원의 옥란당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다음 낙수당은 대형 사합원으로 자희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희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화려하다.
대회루는 큰 정원 ‘덕화원내에 건조,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최대의 고대 극장으로서 높이21m 상, 중, 하 3층으로 나뉜다. 아래층 천정판 중심에 천창을 내어 위층 무대와 통하게 되어 있으며 중간층 무대는 권양기로 도구와 배경을 위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게 교묘하게 설치하여 변화무궁하다.
불향각은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색기반위에 건축,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 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 날개를 펼치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 마리의 박쥐 모양을 하고 있다. 1860년 불향각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 버리고 그 후 원 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청연방은 석방이라고도 한다. 1755년에 건조, 몸체는 거석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총길이 36m 상하 2층 선실이 있다. ‘물(백성)은 배(왕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취하여 청 왕조는 반석과 같이 튼튼하여 물이 전복 시킬 수 없음을 비유하였다.
17공교는 곤명호 동쪽 제방과 호심의 남호도를 연결하는 대형 석교로서 총길이 150m이다. 교두와 난간 기둥에 도합 544마리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는데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인수전을 지나면 곤명호를 끼고 건설된 중국 정원 중에서 가장 길다는 장랑을 만난다. 장랑은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길이 728m, 도합 273칸의 화랑으로 중국 회랑 건축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은 장랑이다. 장랑의 제재는 꽃, 새, 나무, 들, 산, 물, 인물등 매우 광범위하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1736-1796)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546폭의 서호 경치를 그려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그렸다. 금세기 60년대 중국정부는 서호 풍경화를 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 특성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나 서유기와 같은 민담, 산수화 등 채색화 1만 4천 여폭을 더 그려 장랑을 제일의 화랑으로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인수전부터 시작된 의문은 곤명호를 끼고 건설된 중국 정원 중에서 가장 길다는 728m의 장랑을 걸으면서도 계속되었다. 늘 이곳 장랑에서 산책을 즐겼다는 서태후는 산책을 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모에게 있어서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의 죽음은 두고두고 가슴 속 송곳이 되어 아픔을 준다는데 권력욕으로 친아들을 몹쓸 병에 걸려 죽게 하고 조카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그녀의 마음은 이 드넓은 곤명호처럼 편안할까?
이제나 저제나 곤명호는 말이 없지만 곤명호 주변의 한껏 늘어진 능수버들과 이 늘어진 풍광은 마치 항주 서호의 축소판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안내원이 이야기하는 서태후에 대한 모든 것을 소개 하고자 한다.
서태후(1835~1908)의 성은 예허나라(葉赫那拉), 이름은 옥란(玉蘭) 또는 난아(蘭兒)이다. 함풍황제(咸豊皇帝: 1831~1861)의 의귀비(懿貴妃)이자 동치황제(同治皇帝: 1856~ 1875)의 생모로, 함풍황제가 병사한 후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치황제 재위 기간과 광서황제(光緖皇帝) 재위 초기, "백일유신" 진압, 이후 이 세 차례에 걸쳐 그녀는 수렴청정을 하였으니, 동치~광서 시기에는 그녀가 바로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48년간 집권을 하다가 74세 때 이질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지는 정릉(定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 遵化縣 )에 있다.
서태후는 원래 그녀의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태후(太后)는 황제의 모친을 일컫는 말로 우리 조선시대의 대비와 같은 개념인데,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태후를 칭할 때 그 앞에 성씨를 두어 "여태후(呂太后)"·"등태후(鄧太后)" 또는 "여후(呂后)"·"무후(武后)"라 칭했다. 그렇다면 서태후(西太后)는 혹 그녀의 성이 "서(西)"씨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함풍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후 뉴구뤼씨(鈕鈷錄氏)에게는 아들이 없어 의귀비(懿貴妃)의 아들 재순(載淳)이 6세의 나이로 황제(同治皇帝)에 즉위하였다. 이에 함풍황제의 황후를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라 하고, 어린황제의 생모인 의귀비(懿貴妃)를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라 불렀다. 그 후에 다시 그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명호에 따라 성모황태후를 자안태후(慈安太后)로, 모후황태후를 자희태후(慈禧太后)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자안태후의 거처가 자금성 내 동쪽의 종수궁(鍾粹宮)이었고, 자희태후의 거처가 자금성 내 서쪽의 저수궁(儲秀宮)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자안태후를 동태후(東太后), 자희태후를 서태후(西太后)라 부르게 되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서태후는 바로 이 자희태후를 일컫는 말이며, 이 자희태후가 바로 그녀의 공식적인 칭호이다.
서태후는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 혜징이 자금성에서 안휘성 휘녕지 광태도의 도원(행정을 감찰하는 지방관리)을 역임하기 위해 안휘성으로 이사하였으나 청렴결백한 아버지가 아무런 유산도 없이 죽자 집안은 경제적인 타격을 입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 세 식구는 많은 고생을 하였고 집안의 모든 살림은 서태후가 맡아서 하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서태후는 이때부터 남의 밑에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 보다 남을 부리면서 남의 위에 군림 하면서 살기를 원했다. 서태후가 고생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연인 영록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를 주면서 이것을 팔아 같이 살자 하였으나 가난하고 장래 희망이 없는 삶을 원하지 않는 서태후 이었기에 과감히 거절하였고, 또 서태후를 안타깝게 여긴 부근의 갑부가 자기의 아이를 낳아 주면 여생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해준다고 하였으나 이것마저 거절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난한 삶을 계속하였고, 여자로서 제일 출세하는 길이 황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며 때를 기다리고 고생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환관을 매수하여 환관의 도움으로 수녀(궁녀)의 심사를 통과하여 마침내 그리던 황궁에 들어갔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 년 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때문에 후일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 산보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 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서태후가 부른 노래는 산서민가(山西民歌)였다. 서태후는 산서 등지의 민가는 잘하면서도 만주 노래는 못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서 노안부(潞安府)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의 민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노래에 반한 함풍황제는 서태후와 함께 15일 동안을 떨어지지 않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기거를 같이 하게 되었고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서태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함풍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서태후를 총애하기 시작하여 서태후의 말은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서태후는 황후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질투하여 태아 및 자신에게 해를 입힐 가 노심초사 하던 중 함풍황제에게 친정어머니와 자기의 여동생을 황궁 안에 같이 살도록 부탁하여 허락을 받고 황궁 안에서 같이 기거하게 되었다.
1856년 3월 서태후(慈禧)는 아들 재순(載淳: 同治皇帝)을 출산하여 의비(懿妃)즉 비(妃)에 봉해 졌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의귀비(懿貴妃), 즉 귀비(貴妃)에 책봉 되었다. 궁녀에서 귀인을 거쳐 귀비에 이르기 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 녀의 마음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1860년 영프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함풍황제는 열하[熱河: 지금의 하북성 승덕(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몽진하였다. 이때 함께 따라가지 못하고 원명원(圓明園)에 남아 있던 함풍황제의 비빈들은 원명원이 점령당하여 불길에 휩싸이게 되자 모두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듬해 8월 함풍황제는 피서산장에서 병사하고 말았다.(중국의 황제들과 우리나라의 왕들은 주색을 너무 즐긴 까닭인지 수명이 다 길지 못하다.) 함풍황제가 죽자 그의 유일한 아들인 서태후가 낳은 6세의 어린 태자 재순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서태후와 함풍황제의 황후 뉴구뤼씨(鈕鈷錄氏)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추대되어 휘호를 자희(慈禧)와 자안(慈安)이라 하였으니 사람들은 자희태후를 서쪽 채에 살았기에 서태후 자안태후를 동쪽 채에 살았다 하여 동태후라 불렀다.
함풍황제는 죽기 전에 6세의 어린 태자 재순이 무난히 황위를 계승하여 유지할 수 있을지 염려 되었다. 아들의 황위 계승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 바로 자기의 동생이자 태자의 숙부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과 태자의 생모인 의귀비(즉 서태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풍황제는 죽기 전날 태자의 황위 계승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친왕(怡親王)재원(載垣), 정친왕(鄭親王)단화(端華)와 숙순(肅順)등 8명의 대신에게 아들의 정무를 보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이 8명의 대신 중에 공친왕은 제외되었다. 또 함풍황제는 어린 황제를 끼고 생모가 전권을 휘두르다 보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중국 역사상 여인들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서 전횡을 일삼다 망국의 길로 치달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생모 서태후는 역대 어느 여성 못지않게 정치적 역량과 권력욕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함풍황제로서는 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함풍황제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후궁들을 불러 친견하면서도 의귀비는 그 자리에 제외시켰다. 함풍황제는 밀지를 한통 써서 황후[즉 자안태후(慈安太后)]에게 주면서 의귀비가 정권을 장악하려하면 그 밀지를 공개하여 그녀를 제거하라고 지시해 두었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의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태후는 먼저 자안태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지금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마마나 저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재원과 단화, 숙순등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라고는 없을 것입니다. 공친왕과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시렵니까?”자안태후는 서태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자안태후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서태후는 공친왕 혁흔등 귀족 관료세력과 합세하여‘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고명대신 재원(載垣), 단화(端華), 숙순(肅順)등을 죽이고 조정의 대권 등을 탈취하였다.
결국에는 동태후가 제1태후 서태후가 제2태후였고. 동태후는 동치황제의 양모였고 서태후는 동치황제의 생모였다. 즉위한 동치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두 사람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흥취를 가진 반면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사리 밝고 품위가 있는 동태후 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서태후는 동태후를 미워하게 되고, 6살에 즉위한 동치황제가 1874년 18세가 되어 황제가 성인이 되었으니 자연히 서태후와 자안태후는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치황제 자신도 생모인 서태후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폭주가이고 성격도 날카로 왔다. 그 후 생모인 서태후는 항상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무슨 일이나 보고를 받기를 원했고, 아들 동치황제는 주관대로 정치를 하려 하였으나 서태후로 인하여 소신 있는 정치를 못하다 보니 둘은 충돌이 많은 반면, 동태후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동치황제와 관계가 좋았다. 그러니 동치황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동치황제가 결혼하게 되자 황후 후보를 서태후와 자안태후는 각각 한 사람씩 추천하였는데, 동치황제는 자안태후가 추천한 사람을 황후에 봉하고 서태후가 추천한 사람을 혜비(惠妃)에 봉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서태후는 동치황제가 결혼식을 올린 후에 자주 황후를 구박하고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였다. 동치 황제에게는 혜비를 찾아가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으며 못살게 굴었다. 이에 너무나도 실망한 동치황제는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런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동치 황제는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1874년 11월 머리와 얼굴에 붉은 반점이 번지기 시작하여 핏물이 흘러나오는 등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서태후는 동치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랄 것을 염려하여 양심전(養心殿)의 모든 거울을 치워 버리게 했다. 궁중에서는 황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단지 황제가 천연두에 걸렸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하루는 동치황후가 양심전으로 문병을 가서는 동치황제에게 서태후가 사소한 일로 자신을 구박한다고 하소연하면서 마치 실성한 듯이 대성통곡을 하였다. 자기가 심어둔 내시로부터 황후가 황제를 찾아갈 것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서태후는 몰래 양심전 옆으로 가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때 서태후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뛰어 들어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따귀를 때리며 내시에게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 광경을 본 동치황제가 깜짝 놀라 졸도해 버리자 서태후는 더 이상 황후를 문책하지 않았다. 이후로 동치황제는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87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동치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그 책임을 황후에게로 돌렸다.
서태후는 그 후 동치황제의 죽음을 동치황후에게 뒤집어 씌워 그녀를 자금성 은밀한 곳에 감금한다. 처음 그녀는 서태후의 등쌀이 무서워 금가루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녀를 발견한 궁녀들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당시 동치황후는 동치황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서태후는 그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난다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것이라 예상을 하고 일부러 물과 음식을 주지 말라고 엄포했다. 동치황후는 추위에 떨면서 친정에서 조달하는 음식만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했다. 황후는 몰래 친정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으나, 그 녀의 친정아버지는 그 누구도 그 녀를 구해줄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내 왔다. 결국 절망이 가득 찬 동치황후는 1875년 2월 20일 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후를 택할 때 동치황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는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사이의 관계가 벌어진다고 판단하였으므로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어느 해 추석날 동태후, 서태후는 궁중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황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 지낼 때 동태후는 서태후더러 한 발자국 뒤에 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함풍황제 생전에 동태후는 중궁태후(제1황후)고 서태후는 황비였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함풍황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한테 준 밀서였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함풍황제는 서태후가 자기 아들이 황제로 되었다 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서태후는 이 밀서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동태후가 감기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서태후는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갔다. 동태후는 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니가 몸져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 피를 중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하면서 함풍황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 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져누웠다. 동태후는 서태후를 보러 몇 번 다녀왔는데 서태후의 태도는 웬 일인지 친절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몸져누운 서태후가 동태후한데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동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이 궁중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소식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 무엇 때문인지 동태후는 며칠 앓지도 않고 동태후가 죽었다.
동치황제가 죽고 나자 서태후는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인 재첨(載湉)을 광서황제로 옹립한다. 재첨(載湉)은 도광제의 제7서자 순원친왕 혁현의 아들인데 이때부터 그녀는 부계로 왕위를 잇던 청나라를 모계 혈통으로 이끌고 만다. 서태후가 옹립한 황제(광서황제)는 서태후 때문에 제대로 된 정치도 못해본 황제이다.
광서황제가 19살이 되자 서태후와 정치상 충돌이 있었고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에 의해 군정 실권을 잡으려 하였고 개혁을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하였다. 허나 103일 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가택연금으로 생활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황제는 10년간 갇혀 있었다.
광서황제의 후궁 중 진비(珍妃)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언변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광서황제가 총애하는 후궁이었었다. 서태후는 진비를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진비 역시도 광서황제가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황제로 탈바꿈 할 수 있도록 주선을 했다. 당시 청나라는 보수파와 수구파들이 있었는데 서태후는 보수파였고, 진비는 수구파 즉, 변법파였던 것에 서태후는 진비를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구 8개의 연합국이 자금성에 침입하여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서태후는 황후와 광서황제, 궁녀와 내관 2000명만을 데리고 시안으로 피난을 가려고 헸다. 광서황제의 후궁들은 울면서 자신들도 데리고 가 달라고 했지만 서태후는 "너희들까지 가면 산시성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여기 남으라."라고 명령한다.
그 때 진비는 서태후의 발목을 잡아 "죽어도 폐하 곁에서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서태후는 진비의 머리채를 잡고 우물로 끌고 갔다. 지금도 자금성 내부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이 우물의 이름은 '진비정(珍妃井)'이라 하며 '진비가 살해당한 우물'이라는 표시가 있다. 서태후는 진비의 손발을 잘라 우물에 처넣고 그 후 진비의 몸뚱이 자체를 우물 속에 내던져 버렸다.
진비를 잃고 상심한 광서황제는 1901년 화친이 성립되고 북경으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 상심하던 그는 서태후로부터 유폐생활을 끊임없이 당하다 1908년 병으로 사망하였고, 서태후도 그가 죽은 지 하루 뒤에 죽었다. 그녀의 나이 76세 천수를 누렸다. 그녀는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앞으로 절대 여자가 정사를 농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광서황제가 죽고, 그녀가 죽고 나서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 부의가 즉위를 하게 된다.
서태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나돌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이렇다고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 그녀가 세계 역사상에서 두 번 다시없을 여걸, 혹은 악녀로 군림을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서태후는 극히 부와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식사는 항상 두 개의 식탁을 준비했다.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의 한 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짝은 빵)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이 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는 사치 꾼이었고, 또한 아주 거짓투성이였으며,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했는데 광서황제의 아버지는 아들을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사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 정상적 사람도 하루에 머리카락 50개 정도 빠진다.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자기 머리가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는데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 이때부터 셴양(남자가 여자의 젖을 먹는 것)의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서태후는 함풍황제가 죽고 나자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사랑했던 영록(榮祿)을 보좌관으로 삼고 그에게 대권을 맡겼다. 그리고 밤마다 그와 정을 통하여 왔다. 한동안 이런 생활이 계속되었으나 이에 만족치 않은 서태후는 매일 밤 젊은 미소년을 골라 하룻밤동안 환락을 즐긴 후 낮이 되면 비밀이 탄로 날 것을 염려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또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하였으므로 서태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였다.
보석광 서태후의 정치적 업적은 보는 사람들마다 관점을 달리하는데 교육열이나 실업,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업적을 평가받으나 그 밖의 일들은 혀를 내두를 만큼 만행을 했다는 점에서 관점을 달리한다. 그 후 중국에서는 강청이나 송경령, 송미령 같은 스스로를 여걸이라 칭하는 여성 정치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서태후만큼 넓은 청나라 전체를 흔들고 쥔 여성은 없다.
1994년 홍콩에서 경매가 붙여졌는데 서태후의 신발이 경매가 되었다. 한 짝만 있었는데 서태후라는 여자가 신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금은보화로 치장이 된 신발이었는데 현재 홍콩인 어느 사업가가 소유하고 있고, 시가는 2억에 경매되었다. 한 짝 더 있었다면 4억에 경매가 되었을까?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 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으며 황제의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자안태후를 동태후라 하고 자희태후를 서태후라 한다. 이 두 황태후의 능은 모두 하북성 준화현(遵和縣)의 청동릉(淸東陵)에 동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태후의 능이 서쪽에 있고 서태후의 능이 동쪽에 있다. 이에 관해서 민간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첫째, 능을 놓고 내기를 걸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동태후가 동쪽에 서태후가 서쪽에 묻혀야 했다. 귀비에서 태후로 승격된 서태후가 황후에서 태후로 승격된 동태후에 비해 지위가 한 단계 낮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 많은 서태후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동태후에게 능의 위치를 정하는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서태후는 자기가 동쪽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내기에서 동태후를 이길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동쪽의 능을 자기가 차지하였다고 한다.
둘째, 서태후가 동태후의 능을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서태후는 자기가 죽자 동태후가 자기를 서쪽에 묻게 지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서태후는 만약 동태후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자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면 동태후를 어디에 묻더라도 거역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태후는 계략을 꾸며 동태후를 살해한 후 그녀를 서쪽에 묻고 동쪽은 자기의 무덤으로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로 그칠 뿐 역사적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의 장례제도로 보나 이치상으로 보더라도 동태후가 서쪽에 묻히고 서태후가 동쪽에 묻히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동태후와 서태후의 명칭은 능의 위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생전에 살았던 처소의 위치로 정해진 것이었다. 자안태후는 생전에 자금성 내의 동쪽 종수궁(鍾粹宮)에 거처했기 때문에 동태후라 일컬었고, 자희태후는 서쪽 저수궁(儲秀宮)과 장춘궁(長春宮)에 거처했기 때문에 서태후라 일컬었던 것이다.
이상이 조선족 안내원이 이야기하는 서태후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태후는 만주족의 상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따라 안휘성으로 이사한 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어린 서태후가 가족의 의. 식. 주를 맡아야했으므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원망하면도 강한 자부심으로 여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온갖 수모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지위를 얻기 위한 노력 끝에 궁녀에서 ‘의귀비’에 까지 이르렀으며 세자를 낳고 함풍황제가 죽자 6살에 황제가 된 아들 동치황제와 4살에 황제가 된 동생의 아들 광서황제 때에 수렴청정을 하여 온갖 권력을 휘둘렀고 이로 인한 희생자가 부지기수 여서 희생자의 원혼을 두려워한 서태후는 매일 불향각에 올라가 향을 피웠다고 한다.
이화원을 관람하다 보니 중국의 인구가 13억 명이 넘어서인지는 몰라도 관광지에서의 공중 질서가 너무나 형편없음을 절실히 느낀다. 입장에서 부터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나 모두가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하나씩 입장하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질서는 어디로 실종 되었는지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줄을 서서 기다고 있는데도 자기들만이 먼저 입장하겠다고 무조건 앞으로 와서 입장을 하고 있다. 누구하나 제지를 한다거나 질서유지 요원 하나도 없다. 검표원만이 입장표 받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세치기를 하여도 이 나라 국민들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관광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이외로 거칠다. 오죽하면 생활이 어려워 구걸을 하겠느냐만 상대방의 처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돈에만 혈안이 되어 관광객을 괴롭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 나라가 되며 이런 나라를 어찌 대국이라 하고 강국이라 하겠는가?
13억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 국민들이 모두 이화원에 다 관광을 왔는지 이화원 가는 곳마다,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앞뒤 좌우를 둘러보아도 모두 중국 사람이다.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데도 사람에 밀려 앞으로 나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안내원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한다. 기념사진 촬영할 장소가 없다. 간신히 사람이 뜸한 틈을 타서 사진을 촬영하려고 샤-터를 누르려고 하는 순간 화면 안으로 사람이 들어온다. 사진 촬영할 때는 잠시 멈춰 서주는 것이 예의이지만 이곳에서는 이 자그마한 예의도 없는 모양이다. 지나가다 보면 관광명소에 술이 취했는지 아니면 굶어서 일어 설 기력도 없는지 여기 저기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옷은 몇 년을 입었는지 흰색이 검은 색으로 변하였다. 그나만 뚫어진 곳이 많은 누더기 옷이다, 목욕은 물론 세수는 언제 했는지 얼굴색이 먹물을 방불케 한다. 그럭저럭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이화원 관광을 마치니 오후 5시가 훨씬 넘었다. 이화원을 나와 보니 저녁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도 중국에 관광 왔으므로 중국 음식에는 조금 익숙한 편이다. 원탁에 9-10명 이 둘러 앉아 원하는 음식을 떠서 작은 접시에 잠아 먹는 원탁 식탁이었다. 모두 둘러 앉아 식사를 하였다. 음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북경오리구이였다. 오리구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훈제와 같았다. 기름을 많이 써서 느끼하며 진한 향신료 때문에 우리의 입맛에 거부감이 있는 일반적인 중국 음식과는 달리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먹는 훈제고기 보다는 많은 요리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고기 자체가 수분이 쪽 빠져서 말라 있었고 언제 요리를 한 것인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메뉴에 비교하면 그런대로 낳은 편이어서 점수를 먹인다면 평균 점수보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다시 관광 일정표대로 북경에서도 유명하다는 기예 쇼를 관람하였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빌리면 이곳에서 공연하는 쇼는 출연자가 어려서부터 기예만 연습하였기 때문에 세계의 일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나이는 20세를 넘지 않은 어린 나이임에도 어려운 곡예도 실수 없이 무난히 소화하고 있었다. 기예 쇼를 관람하고 나니 10시가 넘었다. 비행기를 타고 온 피로 때문인지 일찌감치 숙소로 가서 쉬고 싶었다. 그러나 관광 일정 때문에 한 가지 코스를 더 가야 한다고 한다.
다음에 간곳이 왕부정 거리이다.
베이징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 중심가 왕푸징(王府井)에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점이 밀집해 있다. 가히 중국 문명과 대륙의 축소판이라고 부를 만하다. 진시황릉 병마용 모형부터 마오쩌둥 빼지까지 중국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과 이야기를 진열해 놓았다. 변검의 가면과 판다 인형도 엑스트라로 출연한다. 왕푸징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먹자골목도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다. 알록달록한 단청으로 장식된 패루에 왕푸징소흘가(王府井小吃街)라고 적혀 있다. 패루 안으로 들어서면 공중에 걸린, 커다란 흑백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20세기 초 이곳의 모습을 담은 기록사진이다. 상인들과 행인들의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고파는 것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지상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는 전부 요리해서 팔고 있었다. 귤, 키위, 파인애플 등 과일을 먹기 좋게 쪼개고 잘라 나무에 꽂은 후 얼음같이 투명한 설탕옷(糖衣)을 입힌 빙탕호로(氷糖葫蘆)가 대표적이다. 산사나무 열매로 만든 빙탕호로가 가장 인기가 높은데, 방울토마토처럼 입 안에서 '툭' 터진다. 꼬치 포장마차는 왕푸징의 백미였다. '중국스럽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꼬치의 향연은 상상을 초월한다. 닭고기, 양고기는 물론이고 도마뱀, 전갈까지 꼬치 재료로 사용되었다. 굼벵이와 지네, 해마와 불가사리도 기름에 튀겨 꼬치에 끼어 판매대 위에 죽 늘여 놓았다.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재료는 기름 솥에 들어가지 전까지 살아 있었다. 혐오감을 뛰어넘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사람을 제외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꼬치에 꽂을 수 있다는 게 그네들의 생각 같다.
북경에서 가장 먹거리로 유명하다는 거리지만 빈약하기는 짝이 없다. 우리나라의 60-70년대의 포장마차 규모라고나 할까? 거리의 먹거리 문화 치고는 비위생적이고 우리나라의 소도시의 포장마차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다. 이곳에서 사람을 물으면 독한 독이 사람을 사망케도 한다는 전갈을 구은 전갈구이를 먹어보았다. 맛은 구수한 것이 메뚜기를 구어 놓은 맛과 흡사 했다. 이곳을 둘러보고 나니 11시 가까이 되었다. 피곤한 나그네의 몸을 이끌고 호텔로 향했다. 내일의 관광을 위하여 오늘은 푹 쉬어야 했다.
오늘은 관광 2일째를 맞는 날이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만리장성을 관광한 후 점심을 먹고 자금성을 구경한다고 한다. 먼저 만리장성을 가기 위하여 아침 7시에 식사를 한 후 버스에 승차하여 만리장성을 보러 출발하였다.
만리장성에 대한 안내원의 설명을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만리장성은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축조된 성이다. 이 성을 축조하는 인부는 중국 전국의 청년들을 모아 부역케 했다.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부역자를 성을 쌓는 밑에다 놓고 그대로 쌓아 수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묻었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길고 큰 무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구상에 가장 긴 무덤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나라별로 부분적으로 쌓았던 것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이 공사는 10년 동안 이어졌으며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들이 징발되어야 했다. 그 후에도 역대 왕조들이 개수하였고 명나라 때 와서는 200여 년 동안 18차례나 수축되어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팔당령', '모전욕', '사마대'가 개방되어 있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6,700km에 달하고 이것을 쭉 늘어뜨리면 747비행기로 7시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단연 '팔당령'인데 이곳은 길이 잘 닦여져 있고 복원상태도 매우 잘 되어있다. '사통팔달'이란 말도 이곳 '팔당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장성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모전욕'과 '사마대'도 점점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의 가장 경탄해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강줄기처럼 이어진 장성의 웅장함이다.
통로의 넓이는 5.7∼6.5m, 높이는 8.5m로 되어있어 예전에 말 몇 필이 나란히 이동하기에 편리하게 제작되었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가 110m마다 설치되어 있다. 또 벽돌 하나하나를 찹쌀 풀로 이겨 쌓았기 때문에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이렇게 견고한 만리장성도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있다. 생태환경의 악화와 자연풍화, 사막화의 진행, 인공적인 파괴 등의 원인으로 3분의 2 가량이 완전히 파괴되었거나 궤멸 중에 있다고 한다. 또 문화혁명 때는 농부들이 집을 수리하고 가축우리를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의 돌을 훔쳐가 많이 훼손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의 후손들은 만리장성을 역사책에서만 존재하는 유적으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인들은 이런 만리장성을 보고자 한해에도 수백만이 몰려든다. 지금은 중국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원래의 목적에는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국민을 착취하고 고통을 줌으로써 국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니 말이다.
안내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이 버스는 팔달령에 도착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기위해 또 줄을 서야만 했고 무질서한 중국인들의 새치기에 시달리며 차례를 몇 번 지난 뒤에야 케이블-카를 탈수 있었다. 이날따라 뿌연 북경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이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만리장성을 올라가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가랑비를 맞으며 비바람 치는 팔달령 정상에 올라가니 보이는 것은 비와 안개뿐이었다. 머나먼 이역만리 까지 와서 팔달령 위에서 동서남북 사방의 풍광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찹찹하고도 아쉬운 마을을 뒤로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안내원이 ‘하룻밤만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옛 고사를 들려주었다.
만리장성이 유명한 만큼 이곳의 전해져오는 일화들도 유명하다. 흔히 우리가 속담처럼 '하룻밤만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중국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 어떤 사람이 산골 마을을 지나다 홀로 사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있었지만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노동자로 강제로 징용되어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하룻밤을 바치는 대신 이 남자에게 “자신의 편지를 남편에게 전해달라고”부탁하였다. 이 남자는 그 여자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감독관이 그를 잡아 성 쌓는 일을 하게하고 남편을 여자에게 돌려보내 주었다>
또 전설적인 이야기로 '맹강녀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