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후반에 미국 동남부에서 감리교에 뿌리를 둔 웨슬리안 성결운동을 하던 성도들이 기도 중에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이 터져 나오자 이를 성령세례의 증거로 인정하는 측과,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측이 갈라지게 된다. 후자는 성결교회를 조직하여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의 교회를 완성하고, 전자는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에 성령세례를 더하여서 오순절교회의 오중복음을 완성하고 1903년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오순절교회시대를 열게 된다.
1)“성서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of Prophecy)”는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로서 신구약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믿으며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며, 역사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며 성령님의 내주 인도 충만케 하심을 의지하여 중생, 성결, 신유, 성령세례, 재림의 오중복음을 전파하는 오순절 교단이다.
2) 교리는 따로 없고 신약 성경을 신앙의 모범으로 삼으며, 침례를 주며 장로 제도가 없으며, 남자에 한하여 감독(Bishop)과 집사(Deacon)안수를 받을 수 있으며, 여자도 목사와 전도사(Minister)로서 단독 목회자(Pastor)가 될 수 있다(단. 한국에서는 2004년 총회에서 장로와 권사 임직을 허용하기로 하고 2008년 총회에서는 여목사 안수를 허용하기로 함).
3) 교회의 정식 회원은 서약교인(Covenant Church Member)이라야 되며 교회의 의결기구는 행정회의(Business meeting)로써 다수결 의결이 아닌 만장일치이며 감독(Over- seer)이 주재한다.
감독(Overseer)은 각 지방감독(District Overseer)과 각국의 감독(National Overseer)과 세계총감독(General Over- seer)이 있다.
4) 세계총회는 1903년 6월 13일 성령세례를 받은 25명의 사람들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North Carolina) 체로키(Cherokee County)에서 탐린슨(A. J. Tomlinson)목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교단명칭을 하나님의교회(Church of God)로 하였다. 1904년 총회 본부가 테네시주 클리블랜드로 옮겼고 1909년 탐린슨 목사가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7월 24일 탐린슨 총감독 중심파와 반대파가 서로 분열됨으로써 하나님의교회(Church of God)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교단이 분리 운영되다가 1952년 탐린슨 총감독측 교단이 “성서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of Prophecy)”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미국은 물론 전 세계 150여개 국가에 총회와 교회가 조직 부흥되고 있다 (상세한 교단 역사는 하나님의교회 역사 참조).
5) “기독교 한국 성서 하나님의 교회”는 1968년 1월 23일 다니엘 제이 콜벹(Daniel J. Corbett)목사가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76년 7월 20일 김두한목사를 한국총회장으로 임명하고 교단 명칭을 기독교한국성서하나님의교회라 칭하였으며 세계총회는 한국에 성서훈련원(Bible Training Institute)을 개설, 신앙교육을 실시해 왔다. 세계본부는 1996년 3월 1일에 이철재 목사를 한국총회 감독으로 임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육기관인 C. B. L.(Center for Biblical Leadership)은 전 세계 각국에서 공동학사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다.
* 다음은 성서 하나님의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특성과 정체성을 오순절교회의 특성으로 요약한 것이다.
(오순절교회의 정체성. 이철재 저. 프리칭아카데미 참조).
2. 오순절교회의 오중복음
1)성령은 예수가 누구(who)시며, 예수가 무엇(what)을 했는지를 성도에게 알게 하시고(to know),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to be) 예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분(to do)이시다.
2)성령은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Savior)이시며, 예수가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분(Sanctifier)이시며, 예수가 우리의 치료자(Divine Healer)이시며, 예수가 우리에게 성령세례주시는 분(Spiritual Baptizer)이시며, 예수가 다시 오실 왕(Coming King)으로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3) 구세주와 성결케 하시는 분과 치료자 예수는 오신 예수(초림)를 경험함이고 성령세례 주시는 분과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예수는 재림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다.
4)성서하나님의교회의 오중복음
* 성령님은 예수를 증거하시는 분(구원 + 성화 + 신유 + 성령세례 + 재림) (*다음 페이지 표 참조)
3. 오순절교회의 예배, 그 특성과 신학
성령의 역사하심은 오순절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천주교내에서도 성령운동을 하는 은사주의교회(Charismatic Church)가 있고 개신교내에서도 교단과 관계없이 은사주의교회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교회는 예배의 특성이나 신학적 해석이 다르다. 천주교는 아무리 은사 충만하더라도 미사(제사)가 예배의 중심이며, 개신교는 아무리 성령 충만한 교회라도 말씀이중심
구분
순서
사법적 선언
경 험
성도의 삶
예수를
알고(Know)
나는
되고(Be)
삶은
행동하고(Do)
오
신
예
수
⌢
구
세
주
⌣
1
구세주(Savior)
<구 원>
구원받은 자(Saved)
자유자(Delivered)
1. 자유 하는 자(Freedom):
세상, 죄, 문제
2. 자유케하는 자(Liberty):
보여주고, 되게 함.
3. 벽의 제거: 신분, 인종, 남녀
2
성결케 하시는 분
(Sanctifier)
<성 화>
거룩해진 자
연합(Fusion)-분리(Fission)
(Sanctified, Cleansed,
Pure in Heart)
1. 성결의 삶을 보여주고(사랑)
2. 타인의 성결을 도와주는 자
(사랑)
․ 말씀(Word)․ 피(Blood)
․ 성령(Spirit)
3
치료자
(Divine Healer)
<신 유>
치료받은 자(Healed)
영혼, 마음, 몸, 관계, 일,
놀이와 문화, 역사관
1. 영, 육간의 치료를 간증
2. 타인의 치료를 도와주는 자:
병, 고통, 저주의 의미, 인내, 소망
오
실
예
수
⌢
심
판
주
⌣
4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
(Spiritual Baptizer)
<성령세례>
성령 세례 받은 자
(Filled with Holy Spirit)
능력 받은 자, 은사 받은 자(방언), 증인이 된 자
1. 능력, 은사(방언), 증인이 됨을 보여주고
2. 타인으로 능력, 은사, 증인이
되게 함
3. 받은 자의 겸손, Team, 갈등의
화해
5
다시 오실 王
(Coming King)
<종 말>
재림을 소망하는 사람
(Hope Coming Kingdom Encourager)
종말론적 가치관의 사람
1. 종말론적 가치관을 실천:
성결(신랑, 신부)
2. 종말의 소망을 갖게 함. 용기, 소망: 선교
3. 천국의 삶을 살아냄 (실현된 종 말의 삶).
결론
믿 고
경 험
행 동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님으로 일하시게 하라
이 되고(Orthodoxy) 그 말씀을 따라 바르게 느끼고(Ortho- pathy) 그 말씀을 따라 바르게 행동하는 (Orthopraxy)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오순절교회의 예배는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고 예수가 내용이 된다. 따라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먼저 바르게 느끼고(Orthopathy), 그 성령의 계시를 따라 살아 계신 말씀(예수)을 바르게 깨닫고(Orthodoxy),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르게 행동하는(Orthopraxy) 예배가 된다.
오순절교회는 영적경험과 영적실천을 기록된 조직신학보다 우선시하는 일종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어신학(Oral theo- log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오순절교회는 공통적인 예배의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Daniel Albert). 첫째, 찬양과 경배다(Praise/Worship). 둘째, 목양적 설교다(Pastoral Message). 셋째, 응답과 반응이다(Altar Response). 물론 헌금과 교제와 기도나 성만찬이나 세족례 같은 의식과 간증이 함께 진행된다. 예배는 오순절신앙 인격형성의 가장 중요한 교육의 현장이 되는 것이며 침례, 성만찬, 세족례, 간증, 신유, 성령세례, 찬양과 댄싱 등 오순절신학의 핵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Chery Johns).
그리고 예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이어져 나아가는 것이다.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다. 성령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는 은사주의교회(Charismatic Church)와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4. 오순절 예배의 특징
오순절 예배에 있어서 주된 요소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이 예배의 주체가 되고 예수가 내용이 된다. 천주교는 예배가 아닌 미사(제사)를 드린다. 또 어떤 교회는 예배의 형식이 도식화 된 의식적인 교회(a liturgical church)도 있다. 그러나 오순절교회는 형태나 질서(form and order)가 거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만 의지한다.
성령께서 예배를 인도하실 때 모든 것은 단정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지며 활기차고 소망과 생명이 넘치는 예배가 된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의 단순성을 회복하려는 것이 오순절교회의 예배적 특성이다.
첫째, 신약적인 예배의 특성인 주님의 권속으로서의 함께 함(New Testament Togetherness)이다. 즉 오순절교회의 예배적 특성은 신약교회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함께 함의 정신(a spirit of togetherness)이다.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은 예수의 피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죄의 벽을 허셨듯이 인간과 인간사이의 모든 벽을 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이다(행 2:44). 로마 같은 신분사회에서 성령이 강림하자 로마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 남녀노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벽이 헐어지고 믿는 사람이 하나가 되는 가족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늦은 비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미국의 백인농장주와 흑인노예의 벽이 헐어지고 한국의 반상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띠는 혈육의 관계보다 강하게 거룩한 관계 속에서 가족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엡 3:15). 오순절 예배의 특성은 바로 사랑으로 하나 되는 평화와 환희의 축제인 것이다(고전 12:13; 엡 4:25; 갈 3:38; 엡 4:3).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요 가장 존귀한 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이다.
둘째, 공동예배(corporate worship)의 특성이다. 오순절 예배는 개인적인 수양을 지향하는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교제(fellowship), 위로(comforting), 덕을 세움(edifying), 권고(exhorting)와 기도함이 함께 있는(약 5:16; 살전 4:18, 5:12; 히 10:25) 공동적 성격이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에 전 교인이 참여해야 하는 것은 의무요 특권이다.
5. 오순절 예배의 요소들
첫째, 오순절예배는 기도의 특성이 있다. 기도는 오순절예배자들의 생명혈(life blood)이다. ①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②합심으로 기도한다(praying in concert). ③단체로 기도한다(corporate prayer). ④방언기도를 한다(praying in tongues).
둘째, 영적 찬양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노래로 표현한다(엡 5:19). 오순절 교인들의 찬양은 전통적 교회의 찬송가가 아니라 즐거운 소리로 분출되는 영혼의 음악(music of the soul)이다.
셋째, 영적은사들이 있다. 오순절 예배는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은사의 체험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 14:26).
넷째, 헌금이 있어야 한다. 헌금은 은혜이며 예배의 한 행위이어야 한다. 헌금의 기본은 십일조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함을 의미하며(신 14:22), 전체를 상징하며(학 2:8), 거룩함을 의미한다(마 23:23).
다섯째, 예배의 반응들(Responses of worship)이 다양하다. ①손을 들어올린다. 기도, 찬양, 간구, 복종의 표시로 예배 중에 손을 들어올린다(시 134:2, 141:2). ②손뼉을 친다. 손뼉을 치는 것은 즐거움의 표현이다(시 47:1).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사랑의 감정적 분출이다. ③찬양의 외침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즐거워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반응한다(레 9:24; 행 2:13). ④엎드려지거나 무아경(prostration or trances)에 빠진다(행 10:9, 10). 이런 무아경의 영적 환상(vision)들은 오순절적 예배의 독특한 경험이다(행 2:17, 16:9; 단 10:8).
여섯째, 오순절적 설교가 있다(고전 2:4-5, 13).
오순절 설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고, 성도는 함께 아멘과 감사와 기쁨의 표현으로 응답한다.
6. 오순절 교회의 성례론
오순절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므로(행 2:4) 침례(Water Baptism)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과 세족례(Feet Washing)외의 어떤 기계주의적 예식도 거부함으로써 원시 기독교(Primitive Christian Church)의 단순성을 지키고 있다.
1) 물침례(Water Baptism) :
침례는 우리 주님이 세우시고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실행한 교회의 규례(성례)다. 그리스도의 명백한 명령에 따라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이 되려면 이 침례는 침수에 의해야 하고 중생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그것은 신자의 삶속에서의 행위이다.
침례(baptism)란 말은 헬라어 밥티조(baptizo)에서 온 것으로서 담그다(to dip)란 뜻이다. 이는 단순히 넣어두는 잠기다(immerse)라는 말보다는 넣었다가 꺼낸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부활한다는 신앙고백이다(롬 6:1-5; 골 2:11-13).
침례는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에 의한 것이다(마 28:19). 따라서 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아야 된다. 이는 복잡한 신학적 해석을 떠난 주님의 단순한 명령에 단순하게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침례는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침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구원에 대한 순종의 고백으로써 필요하다.
누가 침례를 받아야 하나? 오직 중생한 자들만이 침례를 받을 자격이 있다(행 2:41). 중생은 침례 전에 완전히 성취되어야 하며 그래서 그 사람은 마음이 변화되고 신앙과 회개로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시켰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침례는 공허한 형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 침례를 준다는 교리(마 3:11)에 반대한다. 침례는 회개하고 받는 것이다(행 2:38). 오순절교회는 죄인에게 침례를 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에게 침례를 준다. 침례는 이미 이루어진 영적인 변화를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침례는 유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침례는 생각할 수 있는 한 개인이 완전히 굴복한 결과이지 믿는 자가 전혀 알 수 없는 하나의 의식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결과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순절교회는 유아세례와 세례에 의한 중생의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는 사도시대에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 초기 국가교회의 성례주의자들이 만든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국가교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럴 경우 전 국민이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늘날의 몇몇 교회의 유아세례가 이런 국가교회주의자들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침례의 상징은 무엇일까?
첫째, 침례 받은 사람은 그가 죄에 대하여 죽고 영적인 삶으로 일어났음을 세상에 공언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벧전 3:21; 갈 2:19-20; 골 3:3).
둘째, 침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들의 연합을 상징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엡 4:5; 고전 10:3-4).
셋째, 침례는 몸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롬 6:1-5). 침례는 죽음과 부활, 모두의 표이다. 침례 받은 자들은 그 말이 의미하고 그 비밀이 상징하듯이 전적으로 물속으로 담가진(dipped: 잠겼다가 나온)것으로 여김으로써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성령운동은 어떤 지도자에 의해 일어난 신학운동이 아니라 성령의 늦은 비 강림사건의 신앙운동이기 때문에 오순절교회 내에서도 성례전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2) 성찬목회는 회복되어져야 한다.
주의 만찬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신자의 신뢰를 보여주는 하나님께 대한 증거로써 하나님이 지정하신 규례(성례)이다. 믿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한 자주 이 만찬에 참여해야할 것이다. 오순절교회는 주의 만찬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행위로써 교훈을 줄 뿐 아니라 영감을 주고 또한 확신시키는 것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①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고전 11:6). ②우리가 예수의 죽음의 혜택을 개인적으로 채용함을 상징한다(고전 5:7). ③신자가 모든 영적 삶을 위해 한번 죽으셨으나 이제 살아계신 구세주를 계속하여 의지함을 상징한다(요 6:53). ④신자가 주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의 안에 영적으로 재생함으로써 성화됨을 상징한다(롬 8:10). ⑤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과적으로 연합됨을 상징한다(고전 10:17). ⑥주의 만찬은 하나님 나라의 다가오는 기쁨과 완전을 상징한다(막 14:25).
설교가 선포되는 말씀이라면 성만찬은 보는 말씀이다.
3) 세족례, 사회적 관습인가? 주님이 명하신 성례인가?
세족례는 주의 만찬과 함께 우리 주님이 제정하셨다.
첫째, 이 규례에 대한 성경적인 뿌리를 살펴보자. 세족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먼저 세족례는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족례의 광경은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전혀 다른 새 계명의 시작인 것이다(요 13:4-17). ①이것은 결코 사회적 관행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저녁을 먹은 후였다. 그 관습은 집에 들어섰을 때 바로 그 발을 씻기는 것이었지 식사 후가 아니었다. ②예수께서 홀로 씻기셨다는 사실은 그가 한 가지 새 교훈을 이해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계셨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성결의 수업이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라고 말씀하심은 당시 관습에서 종이 상전에게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겸손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은 관습 또는 위생적인 발 씻음의 차원을 초월한 섬김의 새 계명인 것이다. 동일한 장소 동일한 때의 주의 만찬이 중요하다면 세족례도 동일하게 중요한 주님의 성례이다. ③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취소할 수 없는 계명으로 확증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으라고 특별히 명하셨을 뿐 아니라 만약 그들이 그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이 있음을 약속하셨다(요 13:17).
둘째, 이 규례를 지키는 영적인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자. ①예수께서는 주의 만찬 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성경에 세족식의 시간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주께서 하신 만찬 후를 기억하면서 예배 후, 부흥회 후 또는 수련회의 끝부분에 함이 좋다. ②이 의식은 경외심을 가지고 시행되어야 하며 오직 같은 성(sex)의 성도들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이 의식은 아주 성스러우며 이 의식을 통해서 자아는 전적으로 죽고 그리스도 안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족례는 기도와 진지함을 가지고 행해져야 한다. ③오순절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이나 세족식을 행하는 것을 교인이 되는 조건으로 삼지는 않지만 구원받은 성도가 성결하고 승리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은혜의 성례전에 참여하여 개인적인 성결은 물론이고 성도간의 교제에 참여하는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침례와 성만찬이 구원에 대한 고백이라면 세족례는 성결(성화)에 관한 고백이다(요 13:10).
7. 오순절교회의 성령세례
오순절교회의 중생, 성화, 신유는 초림예수와 관계가 있고 성령세례는 재림예수와 관계가 있다.
성결과 선교, 이 종말론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성도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다. 이 성령세례는 다시 오실 주님의 권세를 경험하는 성도의 특권이다. 오순절교회의 성령세례는 중생한 자가 받는 선교를 위한 영적 특권이다. 성령세례는 성령 충만할 때 나타나는 초자연적이며 경험적인 사건이다. 사람이 거듭날 때 성령으로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이 경험은 중생이 일어나는 같은 시간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거듭난 자가 성결해 질 때 주어지는 또 다른 은총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가장 큰 목적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일이다(행 1:8). 신약교회의 사역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성령받기 위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다린 후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성령세례와 신생(거듭남)은 별개의 것이다. 성령을 모시고 있음과 성령으로 충만함은 구별된 것이다(행 19:2).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실 때 최초로 나타난 은사가 방언이다. 성령의 말하시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했다(행 2:4). 이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요 은사다. 그러나 방언이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라는 뜻은 아니다. 성령세례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봉사의 일을 하며 세상의 마귀 권세를 이기고 선교의 사명을 잘하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초대교회의 성령세례가 언약된 이른 비의 성취라면 지금의 성령세례는 늦은 비의 언약 성취다(욜 2:23).
8. 성령으로 거듭남과 성령세례
성령으로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총론적인 넓은 의미에서는 같고 각론적인 좁은 의미에서는 다르다. 성령세례는 불신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정죄 받고 회개하여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요 능력이다.
성령의 하시는 일은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시며, 예수가 우리를 성결케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치유자이시며,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며, 우리의 소망이신 다시 오실 왕이심을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은 예수를 초월하시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초월하시지 않으신다. 물론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이시요 그 능력에 있어서나 권위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예수의 피로 완성하신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법적 선언이다. 이 사법적 선언인 칭의를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성도의 개개인의 것으로 경험케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요, 이것을 성령으로 거듭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남이란 예수의 피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마귀의 자녀(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남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마귀의 소굴이다. 이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개인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을 유지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성령세례를 받아 은사와 능력을 힘입어야 예수의 증인으로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성령세례는 구원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고 선교와 성결에 관계가 있다.
9. 오순절교회의 성결의 특징
성결은 오순절교회의 핵심교리이다. 성결은 교리일 뿐 아니라 살아내야 할 삶이다. 1850년에서 1900년 사이 미국교회를 압도한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의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결운동이 일어나고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서 오순절교회가 태어난다.
1)성령은 부정한 전에는 거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정결한 마음에 뒤따르는 성령세례를 믿는다. 그러므로 성화된 삶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선결조건이다. 성결의 현관을 통과하지 않고는 오순절의 다락방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성결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상태이다. 성결은 교리를 넘어선 삶을 말하는데 그것을 지속 가능케 함이 성령세례이다.
오순절 운동은 예수 중심의 삶이다. 구원, 성화, 신유는 오신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고 성령세례와 재림은 오실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행2:28),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케 해야 하며(행 15:9), 순종해야 하고(행 5:32),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요 14:15). 다시 말해서 성결에 뿌리를 둔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와 은사에 뿌리를 둔 은사주의교회(Charismatic Church)는 다르다.
2)성결의 수단은 먼저 내적이며 영적이고 외적이며 실천적이다(갈 2:20).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결의 시작이다(요 15:12; 고전 1:30).
3)성결의 본성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속성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간적이거나 지상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출 15: 11).
5)성결은 첫째, 세상과 분리되고, 변화되며, 나타내는 것이다(롬 12:1-2). 분리는 수도원적 고립이 아니라 빛으로 세상 속에 있는 것이다(요 17:15-16). 둘째, 거절하는 것이다. 금욕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기 때문에 자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성결은 세상과 분리되는 위기의 경험이며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닮아 가는 하나의 과정이요 또한 규칙이요 계획이다.
10. 은사주의교회와 오순절교회
은사주의교회(Charismatic Church)와 오순절교회(Pente- costal Church)는 다르다. 은사주의교회는 모든 교파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령세례로 인한 은사체험을 강조하는 교회다. 그러나 아무리 은사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교리나 예배모범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성령의 역사는 절대로 예수를 초월하시지 않는다. 성령은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이시며, 우리의 치료자이시며, 우리에게 성령세례주이시며, 다시 오실 심판주이심을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이 예수를 우리에게 알게(know)하시고,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be), 예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분(do)이시다.
11. 구원의 사법적 선언과 구원의 개인적 경험
지식과 경험은 다르다. 예수의 피에 대한 지식과 예수의 피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구원의 사법적 선언과 구원의 개인적 경험은 별개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으로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인류의 구원은 다 이루어졌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언약의 성취를 선포하시는 사법적 선언이다. 이 구원의 사법적 선언을 믿을 때 구원을 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따라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거룩해지는 것이다. 구원은 거룩한 하나님과의 연합(fusion)이요, 죄의 아비 마귀와의 분리(fission)된 거룩한 상태이다.
성화는 윤리와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의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과 성화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구원사역은 이중적이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위하여(for us) 성취된 일로써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목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은 동시에 우리 안에서(in us) 성취된 일로써 우리의 성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성결은 순간적으로 완성되기도 하지만 점진적으로 성장한다.
12.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구원은 예수의 피로 완성되었다(요 19:20). 이는 하나님의 100%의 은혜다. 사람이 이 구원의 은총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그 구원의 길을 따르는 고백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첫째, 회개(Repentance)의 고백이다.
둘째,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고백이다. 칭의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선언이다.
셋째, 중생(Regeneration)에 대한 고백이다. 회개하고 칭의를 받아들이면 중생을 경험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3:8).
넷째,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고백이다. 성화는 중생의 조건이 아니라 중생의 상태다. 중생도 성화도 경험이다. 경험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기능이며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경험의 기능이다.
13. 성결,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가?
오순절 신앙의 성결은 신앙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구원과의 관계로 보고 있다. 즉 성결은 구원의 상태인 것이다.
성결은 얻을 수 있다. 성결은 영적 성취의 최고봉이다. 성령세례의 은사와 능력은 성결의 무리(The holiness folk)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오순절 신앙의 성결,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가(Holiness what it is and what it is not). 먼저 아닌 것은
1) 성결은 연속적인 열광적 기쁨의 상태가 아니다.
2) 성결은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3) 성결은 약점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4) 성결은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5) 성결은 우리가 거기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면 성결은 무엇인가? 성결은 하나님의 신성과 뜻에 따르는 상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거룩한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다.
14. 신유는 성결의 통로를 거칠 때 얻어지는 구원의 열매다
오순절교회의 오중복음은 성결교의 사중복음에다 성령세례를 더한 것이다. 오순절교회의 교리가 전통교회의 교리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이 성령의 초월적 계시에 의해 새롭게 해석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신유는 구원과 성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 예수를 초월한 성령의 신유는 없는 것이다. 성령이 치유자가 아니라 예수가 치유자다. 신유는 성결의 통로를 거칠 때 얻어지는 구원의 열매다. 성결을 초월한 치유는 없다. 또한 구원을 초월한 성결도 없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자는 예수의 피로 성결해지고 성결해진 자가 치유를 경험한다. 다른 종교에서도 육신의 병을 고친다. 그러나 그 치유는 예수와 관계가 없다.
온전한 치유는 영혼의 치유, 마음의 치유, 몸의 치유, 관계의 치유, 일의 치유, 놀이와 문화의 치유, 역사관과 가치의 치유를 모두 포함한다. 구원과 성결을 초월한 치유는 오순절교회의 성령운동이 아니다. 치유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서 성결의 거룩한 통로를 거치고 만날 수 있는 개인적 은총의 경험이다.
15. 오순절교회의 성결, 교리가 아니라 살아야 할 삶이다
성결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의 피와 부활을 믿을 때 구원받는 것이다. 오직 믿음 외에 성도가 보탤 의는 없다. 그러나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결해지는 것이다. 성결은 구원의 상태다. 오순절교회의 오중복음에서 성결은 구원의 본질이요, 신유의 본질이요, 성령세례의 본질이요, 종말소망의 본질이다.
성결은 믿어야 할 교리일 뿐 아니라 또한 살아내야 할 삶 자체이다. 어느 누구도 성결의 현관을 통과하지 않고는 오순절의 다락방(upper room of Pentecost)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은 성화된 성도들에 그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성결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요(fusion)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fission).
16. 오순절교회의 신유(Divine Healing)는 구원의 열매이다
오순절교회의 오중복음에서는, 구원과 성결과 신유는 초림예수와 관계가 있고, 성령세례와 다시 오실 왕에 대한 믿음은 재림예수와 관계가 있다.
치유는 영혼, 마음, 몸, 관계, 일, 놀이, 역사관(가치)의 치유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인적 치유이다.
1) 치료하신다는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은 지금도 유효하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우리는 몸의 치유에 대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언약을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치유를 언약하셨고 예수님은 그 언약을 다 성취하셨고 성령님은 그 치유를 우리 개인의 것으로 완성시키신다.
3) 신유는 성도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권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고 주님이 하신 일보다 큰일을 하시도록 명하셨다(요 14:12).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분이시다.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는 당연히 신유의 능력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사용하여 병든 자에게 손은 얹은즉 나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특권이요 주님께서 성취하신 은총이요 성령님의 임재하신 표적이다.
17. 오순절교회의 삼위일체
1) 복된 소망
주님은 다시 오신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복된 소망이요 신앙의 지배적 주제였다. 우리는 천년왕국 전 예수의 재림을 믿는다. 첫째로는 죽은 성도들을 다시 살리고 살아남은 성도들을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지상에서 천년동안 다스리기 위해서 강림하심을 믿는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으며, 의인에게는 영생이 있고, 악인에게는 영벌이 있음을 믿는다. 이것이 오순절교회의 신앙고백이요, 성경이 예언한 복된 소망이다.
성경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예언하고 있지 않다. 이 세상은 점점 더 사악해 질 것이고 종말론적 심판으로 끝날 것이다. 구원은 멸망 받을 세상으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이요 성도의 소망이다. 설교는 세상의 없어질 거짓 소망을 몰수하고 영원한 천국의 참된 소망을 주는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심에 대한 복된 소망을 가진 성도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을 신부로서 성결하게 살아야 하고 영원한 멸망의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하나라도 더 건지고 싶은 선교적 열정으로 불타야 한다.
성결과 선교, 이것이 오순절교리의 종말론적 부활신앙의 주제다. 성령세례는 성결과 선교라는 종말론적 신앙윤리를 실현하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주님은 다시 오신다. 이 복된 소망으로 구원의 감격과 선교의 열정을 새롭게 불태우자.
2) 하나님, 그 분은 누구신가?
오순절교회의 신론은 역사적 전통교회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삼위,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아버지의 독생자이심을 믿으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을 믿으며, 그는 승천하사 중보자로 오늘 아버지 우편에 계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본성과 사역들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서, 그 분은 영원하시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시간의 연속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으시며 그 자신 안에 시간의 원인을 갖고 계신다. 공간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은 신장됨도 없고 공간에 의하여 제한 될 수가 없다(왕상 8:27).
창조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편재(omnipresent)하신 분이시며(대하 2:6; 시 139:12; 사 66:1; 행 17:28) 전지(omniscient)하신 하나님이시며(마 10:29; 시 33:13-15; 사 44:24-28) 또한 전능(omnipotent)하시다(사 44:24; 창 18:14; 시 115:3; 마 19:25). 하나님은 신실하시고(벧전 4:19) 진실하시다(요 3:33).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며 반드시 그의 약속들을 이루신다(롬 3:4; 고후 1:20; 히 6:18; 요 14:17).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자비하시고 선하시다(롬 2:4; 딛 3:4; 요 3:16).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공정하시다(벧전 1:16; 시 5:4-5; 신 32:4; 마 5:48).
우리 오순절 신자들은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엘로힘(Elohim)이란 말은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의 복수 형태인데 구약성경에 2000번 이상 쓰이고 있다(창 1:1). 엘로힘은 복수이며 신격(Godhead)에 있어 세 인격들이 있으나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심을 뜻한다. 신약에 있어서도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한 분 하나님의 세 인격이 임재하심을 볼 수 있다.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하늘로서 말씀하시고, 순종하는 아들은 세례를 받고 있으며,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임재하신다(마 3:16-17).
신약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세례의 형식에서(마 28:19), 사도적 축도(고후 13:13)에서, 예수 자신(요 14:16)이 하나님이신 아버지(요 6:27; 롬 1:7) 하나님이신 아들(요 1:13; 히 1:8) 하나님이신 성령(행 5:3-4)을 계시하고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구약에서 준비된 교리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리요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다. 요약하면 그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삼위일체이시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통일된 삼위를 예배한다. 인격들을 혼동하지도 않고, 실체를 나누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한 인격이 있고 아들의 또 다른 인격이 있으며, 성령의 또 다른 인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신성, 그리고 성령의 신성은 모두 하나이고, 영광은 동일하며, 위엄은 함께 영원하신 분이시다.
아버지는 창조되지 않으셨고, 아들도, 성령도 창조되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모두 측량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모두가 영원하시다. 똑같이 아버지는 전능하시고, 아들도 전능하시고, 성령도 전능하시다. 그런데도 세 전능자들이 있지 않고 한 전능자가 계시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시다. 똑같이 아버지는 주님이시고 아들도 주님이시고 성령도 주님이시다. 그럼에도 세 주님이 아니시고 한 주님이시다. 아버지는 창조되지도 않았으며 태어나지도 않으셨다. 성령은 아버지께 속하고 아들에게 속하며 창조되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셨고, 오직 나오신다. 그러므로 한 아버지가 계시고 세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며, 한 아들이 계시고 세 아들이 계시지 않으며, 한 성령이 계시고 세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삼위 안에 누구도 먼저 있지 않고, 나중 있지도 않다. 누구도 더 크거나 덜하지 않고, 오직 세 인격들이 함께 같이 영원하시며, 같이 동등하다.
3)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는 오순절 신앙의 기본이요 오순절 신학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성취하신 모든 것에 근거해서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통치자이시며 우리의 순종을 통해 지금도 그의 능력을 현현하시는 분이시다.
둘째, 하나님의 본성은 거룩하시다(The Holy one)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유일하신 분이다. 거룩이란 바로 이 하나님 되심의 절대적 구별을 의미한다.
셋째, 하나님은 충족시키는 분(The sufficient one)이시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다. 만물은 만물의 바탕이 되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이다(창 1:1; 행 17:24-25). 창조란 하나님의 부족보다는 그의 충만함을 보이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하나님의 성결은 구약 계시의 핵심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계시의 본질이다. 그러나 거룩함도 창조의 충족함도 모두가 사랑에 귀착한다. 하나님 사랑의 절정적 현현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다(요일 4:9; 롬 5:8).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얼굴과 가슴을 보여 주셨던 긍휼과 진리가 만나는(시 85:10) 하나님 이외의 다른 하나님은 없으며 그분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신다.
4) 예수, 그 분은 누구신가?
성경은 두 개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첫째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구약이고(출 3:13-14), 두 번째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계시적 응답이 신약이다(마 16: 15-16).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저는 성부와 더불어 영원히 계셨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신을 입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두 완전한 본성,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신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신인(神人)이 되심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진정 죽은 몸에서 다시 살아나시고 인간의 완전한 본성을 갖추신 몸으로 하늘에 올라가셔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심을 믿는다. 또한 역사의 종말, 그 날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를 믿고 소망한다.
신앙은 두 개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첫째 질문은 “예수, 그 분은 누구신가?”이다. 성육신전인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계셨다. 말씀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를 흘릴 수가 없다. 말씀이 성육신하신 것은 피를 흘리기 위해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 값으로 생명(피)을 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수가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응답이다. 그는 구약에서 예언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언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사법적 선언의 완성이다. 예수의 피는 성경의 핵심적 계시다.
5) 성령, 그 분은 누구신가
성경은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다(요 5:39). 성경은 축소해도 예수, 확대해도 예수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은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구세주)는 성자예수님이시다. 성령님은 그리스도가 아니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Savior)이시며,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분(Sanctifier)이시며, 우리의 치료자(Divine Healer)이시며, 우리에게 성령세례 주시는 분(Spiritual Baptizer)이시며, 다시 오실 왕(Coming King)이심을 계시하시고 증거케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님의 현재적 역사하심과 체험을 중요시하는 오순절교회 특성상 방언이나 다른 은사의 증거를 포함한 다양한 몸짓과 찬양과 기도의 모습이나 신유의 역사하심을 표현하는 오순절 신앙형태에서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고 예수님을 증거하신다는 점이다.
즉 예수님을 초월하시지 않으시고 예수님 중심의, 그리고 예수님을 내용으로 하는 성령운동의 신앙이란 점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을 이른 비로 20세기 초에 폭발한 성령운동을 늦은 비로 계시하신 요엘 선지서의 예언의 성취라고 믿는 것도(욜 2:23, 28-29) 모든 오순절교회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하겠다.
18. 오순절교회의 종말신앙
1) 오순절교회의 정체성
20세기 초의 오순절 성령운동은 신앙운동이지 신학운동은 아니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이 성서해석상의 문제로부터 출발한 일종의 신학운동인데 비하여 오순절 운동은 체험적이며 살아있는 신앙현상이 그 출발점이다. 따라서 오순절교회의 정체성 규명은 성령이 주체가 되는 경험적 측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요 성도가 믿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 20:30-31). 이는 하나님의 뜻이요 구원사적 계시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이루신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피를 흘리심으로(히 9:22) 구원의 약속을 다 이루셨고(요 19:30), 성령 하나님은 그 구원을 나의 것이 되게끔 확증하시는 분이다.
오순절 신앙은 그리스도 중심(Christ-centered)의 성령운동을 의미한다. 성령이 오순절 운동의 모든 신앙과 삶의 주체라는 뜻은 성령이 그리스도란 뜻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증시키는 주체라는 뜻이다. 예수의 피와 부활은 오순절 운동의 핵심이며 종말론적 소망은 성화와 선교의 열정이요 에너지며, 가장 큰 특징은 성령세례와 은사의 현현이다.
2)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예수에 관한 예언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에 관한 예언이요, 신약은 오신 예수에 관한 성취된 예언이며 다시 오실 예수에 관한 예언이다. 주님은 다시 오신다. 이는 이른 비 성령의 초대교회의 소망이요 또한 늦은 비 성령의 오순절교회의 소망이다.
예수의 재림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1) 교회의 소망이기 때문이다(딛 2:13; 벧후 3:11-12).
(2) 그것은 기독교적인 삶에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눅 21: 34-36; 마24:44-46).
(3) 그것은 기독교인의 위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살전 4: 14-18).
성경은 예수에 관한 예언과 성취다.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의 예언은 역사 속에서 다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예언은 재림이다. 만약 재림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없다면 이는 기독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3) 오순절교회의 천년왕국 교리
오순절 신앙은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재림 이후의 종말론적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이다. 이는 다시 오실 신랑예수를 기다리는 신부처럼 성결한 삶을 오늘에 살아내며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한사람이라도 구원코저 하는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오늘을 최후의 날처럼 살아내는 것이다.
오순절교회는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교리를 믿는다. 천년왕국에 대해서 적어도 세 개의 사상적 학파들이 있다.
첫째, 후천년설이다. 17세기 영국의 신학자인 다니엘 휘트비(Daniel Whitby)의 이론으로 천년왕국은 아직 미래이나 현재의 교회를 포함한 복음적 기관들에 의해 이 지상에 세워질 것이라고 했다. 이 사상은 인간 이성의 절대 신봉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주의자들의 인본주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둘째, 무천년설이다. 이 사상의 기원은 로마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천년설은 어떤 천년왕국이 있든지 그것은 현시대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 20장에서만 6번이나 새로운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셋째, 전천년설이다. 이 사상은 모든 근본주의적 교회들이 공통으로 지지하는 교리로써 오순절교회도 이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교리를 지지한다. 세상은 점진적으로 더욱 나빠질 것이고, 오직 능력과 영광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만이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의 미혹하는 권세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다. 성도들은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할 것이다(계20:4).
그렇다면 그 분은 언제 오실 것인가? 홀연히 닥칠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매일을 최후의 날처럼 긴장하며 목 타는 기다림 속에서 성결하게 살아야 할 것이며 주께서 부탁하신 지상명령을 최선을 다해 완수해야 할 것이다.
조심할 것은 다시 오실 예수는 구세주로 오심이 아니라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4)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예수의 재림은 두 개의 국면이 있을 것이다. 먼저 휴거 또는 강림은 예기치 않은 때 그리고 갑자기 올 것이다. 이때 의롭게 순교한 자들은 부활하고 살아있는 성도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들림 받아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 첫째 부활이다. 다음은 그의 나타나심(appearing) 또는 현현(epiphany)이라고 불리는데 환난(또는 7년 환난)이 끝날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오심에서 주님은 지상에 그의 천년왕국통치를 확립하실 것이다. 그의 성도들과의 천년통치 후에 또 다른 마지막 부활과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둘째 부활이다.
5) 마지막 상태 (The Final State)
오늘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매일을 영원을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창조와 종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은 과학의 세계관이 부정적인데 반하여 긍정적이고, 과학적 세계관이 물질적인데 반하여 윤리적이며, 과학적 세계관이 우주 진화론적인데 반하여 창조적이고 인격적이고, 과학적 세계관이 소멸과 죽음으로 끝나는 때에 그것은 인격적 불멸성으로 마친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영이 인간의 영이든 천사의 영이든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의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있어야 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하신 것이다. 이 구속의 은총을 믿으면 영생을, 안 믿으면 영원한 사망에 이른다. 이것이 기독교적 구원관인 동시에 종말관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이고 윤리적 성격을 가지신 분이시다. 이와 같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의 신적인 의지와 명령에 의해 그것을 규제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거룩하심과 죄의 악함을 보이시기 위해 지옥은 사실이어야 한다. 지옥이 사실인 것처럼 천국도 또한 사실이다. 천국은 실제의 장소로써 그 곳에서 모든 시대의 구속받는 자들이 영원한 복락가운데 살 것이며 그리고 서로 간에 교제를 즐길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영원히 교통할 것이다.
천국은 새롭고 영원한 마지막 고향이 될 것이다(계 21:22 -25).
19. 계시(Revelation)와 성경
성경은 예수가 누구시며 예수가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다. 믿음은 그 예수와 내가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다.
성경 자체가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예배의 대상으로 함은 우상숭배다.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성경은 예수에 대한 기록이다(요 5:39). 성경은 축소해도 예수, 확대해도 예수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그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20:30-31).
다음 세 가지의 중요성을 전폭적으로 인정할 때 성경을 온전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of God)이다(are).
둘째,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Word of God)을 담고 있다(contain).
셋째, 신앙이 있는 자에게는 성경이 하나님의 개인적인 말씀(the personal Word of God)이 된다(become).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경을 수레로 하여 우리 심령 속에 오신다.
우리는 성경의 문자적 영감을 믿는다. 이것이 오순절교회의 신앙적 선언이다. 성령의 개인적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예수의 피란 안경을 쓰고 보아야 한다. 성경은 피로 가득 차있다. 피는 곧 생명이다.
20. 오순절교회의 정치와 조직
교회정치의 형태는 감독제, 장로제, 회중제(Episcopal, Pres- byterian, Congregational)가 있다. 초기 오순절교회는 감독제와 회중제의 병합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모든 조직은 성령을 최종 권위로 하는 교인총회 안에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다.
1) 정치의 중앙 집권화:초대교회가 성장 확산할 때(행 1:8), 예루살렘교회가 중앙집권적 형태로 이 모든 교회를 감독하고 있었다(행 8:14, 15:2). 이는 독재적인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이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동의를 얻어 다스리는 정치 제도이다. 직분 자들은 자발적으로 권위를 취하지 않고 교인 총회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 지도자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다(고전 7: 17, 4:17, 16:1).
2) 보이는 교회의 직분 자들: 에클레시아(Ecclesia)는 불러냄을 받은 자들(the called out ones)이란 뜻인데 영어의 교회(church)와 상응하는 헬라어다. 이 용어가 전 신자들 집단에 적용될 때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라고 불리며(골 1:18), 하나의 지교회를 말할 때(계 2:1)는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라 한다(계 1:4; 고전 16:1).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교회의 머리시다.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역한다(고후 5:20; 눅 19:13). 사역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고, 봉사하는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고, 지교회를 통해 이러한 소명을 이루어 갈 기회를 갖는다.
3) 감독의 필요: 감독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한을 권위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앞서가는, 마치 양을 치는 목자와 같게 하신다(삼하 23:3-4).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부여하신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한다.(히 13:17; 살전 5:12-13; 딤전 5:17-18).
4) 직분자들의 선택: 지교회의 목사는 지교회의 교인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감독들에 의해 임명된다. 성경의 제도는 안디옥교회의 시작에서 보듯이 임명제이다(행 14:23; 빌 2:19; 딤 1:12).
5) 교회의 권위: 특별한 능력들과 권위가 교회를 이끌도록 선택된 지도자들에 주어진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하여 예수께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통해서 교회로 온다. 속죄의 권한은 교회에게 있음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께만 있다. 천국의 열쇠는 주님께 있는 것이다(마 16:19). 교회의 모든 권한과 능력들은 위(주님)로부터 오는 것이며(행 1:8), 성경이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율례이다.
6) 신자들의 훈련: 하나님은 ①교회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②외부세계에 교회의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③교회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④형제의 회복을 위해(마 18:15) 교회에게 성도를 훈련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7) 중앙 집권화 된 정치의 장점: 교회와 실천의 통일성이 유지된다는 장점과(행 15:22, 16:4), 교리의 보존, 교세의 확장, 전도와 선교를 위한 전 세계적인 연합된 힘을 갖게 한다.
8) 정치와 영성의 유지: 정치와 영성은 양립할 수 없다(행 20:28, 13:2). 성령께서는 지도자들을 구별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시지만(엡 4:11) 그들을 인정하고, 임명하고, 보내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다(행 13:3). 이것은 성령을 통한 정치의 역사다.
21. 변화하는 시대와 오순절운동
오순절 신앙은 신약 성경에서는 활발하게 역사하였으나 교회사에서 등한시 되어온 성령의 역사를 되찾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행 2:42-47; 욜 2:23,28) 성령이 말하시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한 것처럼(행 2:4) 성령이 신앙의 주체가 되고 예수가 내용이 되는 신앙운동이다(요 20:30-31).
첫째, 유대교와 다른 오순절 기독교의 탄생.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특징은 예수를 높이고, 활발한 전도활동을 했고,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에 열심이 있었으며,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고, 성령 충만하였으며, 성령의 열매가 풍성했고, 사랑으로 하나 되고, 기사와 이적, 치유, 축사의 현상이 나타나고 불신자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다(행 10장). 구약은 예수의 피 앞으로 오게 하는 주소이다.
둘째, 초대교회 이후의 교회의 타락과 성령의 은사가 사라짐.
교회의 성장은 각종 직분(집사, 장로, 감독)이 생겨나게 되면서 성령에 대한 의존도가 하락하고 조직에 의존하면서 성령의 역사와 은사와 기사와 이적이 소멸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313년 기독교의 공인을 거쳐 로마의 국교로 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와 동일시되며 회심과 성화의 교리가 변질되어 급속히 세속화된다. 천주교의 타락에 저항한 수도원운동은 성령운동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윤리운동이다. 금욕, 노동, 명상, 성경 읽기 등 세속적인 것을 배제하고 경건한 생활을 강조한다. 그러나 공로주의 신앙으로 변질되고 신비주의와 미신으로 전락되고 만다.
셋째, 종교개혁과 대각성운동과 신성운동.
1517년 루터가 95개 조항의 신학적 논제를 제기함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빈 등 많은 개혁자들에 의해 루터교나 장로교 같은 개신교가 세워진다. 특히 존 웨슬레(1703-1791)의 감리교 부흥운동은 근대 오순절 운동의 뿌리가 된다. 그의 성령 체험과 성결운동은 초대교회의 성화(Sanctification)의 교리를 부활시키게 되면서 마침내 미국의 대 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1726-1750)으로 이어지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1860년대의 신성운동(Holiness Movement)이 시작되면서 성령의 은사가 폭발하고 완전주의(Perfect- ionism)운동이 일어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외에 성령의 성결을 체험하게 된다(파머 1807-1874). 요한 웨슬레는 이를 제2의 은총이라 했고 피니(Finney)는 성령세례라고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치유부흥운동(Faith Healing, Divine Healing Movement)으로 나타난다.
넷째, 근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
근대 오순절 운동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교회 갱신운동이다.
1) 전통적인 오순절 운동(Classical Pentecostal Movement)
1900년 1월 1일 아그네스(Agnes)양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을 기원으로 해서 1903년 하나님의교회(성서하나님의교회)가 공식적으로 오순절교회로 창립된다.
1906-1909년까지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된 L. A의 아주사거리의 성령부흥운동은 미국 전역과 한국(1907), 인도, 웨일즈 등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오순절 운동의 특징은 방언이다. 기성교회의 배격과 교회의 부흥은 교단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교회, 성서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성회, 대한예수교복음교회, 오순절성결교회 등 많은 교단이 미국에서 창립된다.
2) 은사주의 운동(Charismatic Movement)
1950년대 들어서면서 기성 교회들도 성령세례와 은사를 경험하고 인정하게 되지만 예배모범이나 교리는 변하지 않는다. 1980년대 들어서 와그너 박사 등이 제3의 물결의 새로운 성령운동을 주장하지만 은사주의 운동의 변형이라 하겠다.
현재 제3세계의 오순절 성령운동이 불같이 일어나고 있으나 토속문화와의 유착 등의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인 정체성 확립이 시급하다.
결론적으로 성령은 예수가 누구시며(who)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what)에 대한 성경적 계시를 개인적으로 경험케 하시는 분이다.
22. 예수의 증인인가? 여호와의 증인인가?
성경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다. 첫째는 “예수가 누구신가?”이고 둘째는 “예수가 무엇을 했느냐?”이다. 믿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문자적 계시다. 성경은 축소해도 예수, 확대해도 예수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이 예수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성령은 성도를 여호와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은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다. 성령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구약은 예수를 찾는 주소이다. 구약이 없이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를 잃어버리고 구약 속에서 헤맨다면 큰일이 아닌가.
첫째로 우려되는 일은 성막에 관한 오해이다. 성막의 계시를 통해 십자가의 피에 대한 구속적 계시를 깨닫는 것은 매우 필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언한 예수의 피를 망각하고 다시 성막의 제사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많은 돈을 들여서 성막을 복원하고 마치 그 성막에 구원의 길이 있는 것처럼 현혹함은 무지를 넘어서 적 그리스도적 행위임을 왜 모르는가? 다시 짐승의 피의 제사를 구원의 길로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성막은 광야 생활의 종말로 끝났다. 솔로몬의 성전의 시대도 끝났다. 성막과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영원하신 예수의 피로 완성한 구원을 등한히 하고 다시 성막으로 돌아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린다는 말인가? 천주교는 유대교의 제사처럼 제사(미사)를 드린다. 그러나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신약교회는 성전의 제사가 아니라 예배를 드린다. 예배는 성령 안에서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제사가 아니다. 만남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성막신앙과 복음은 다르다. 성막은 복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두 번째 우려되는 일은 여호와의 증인인지 예수의 증인인지 구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모세의 제자인지 예수의 제자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신앙적 형태는 여호와의 증인이요 모세의 제자인 것 같다. 거기다가 교묘한 장사꾼들의 돈벌이의 수단으로 성지순례가 상품화되어 예수의 증인을 모세의 증인으로 만드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성지순례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 속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신 현장을 순례하는 것은 좋지만 마치 성지에 무슨 특별한 계시나 능력이 있는 것처럼 된다면 이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지순례에 대한 신학적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세 번째 우려되는 일은 성령강림의 무속화이다. 무당이 치성을 드리고 백일기도를 해서 신이 내리듯이 기도원에서 또는 특별한 작정기도에서 또는 신들린 능력 있는 무당처럼 능력 있는 종들을 통해 성령이 강림하는 것 같은 오해가 한국교회를 무당사상에 오염되게 하고 있다. 성령은 절대로 예수를 초월하시지 않는다. 성령이 오심은 “예수가 누구시며 예수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계시하시고 경험케하며 성도의 교회공동체를 보존하시기 위함이다. 오순절이란 이름으로 또는 성령이란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예언을 하고 은사집회라는 비복음적인 신앙형태를 한국교회가 스스로 정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채찍이 한국교회를 정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는 간단하다. 성막은 예수의 피에 대한 예표다. 성령이 오심은 여호와의 증인이나 모세의 제자가 되게 하심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요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하심이다. 성경은 “예수가 누구시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하신 그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하고 있다. 성령 또한 “예수가 누구시며 예수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계시하시고 증거하신다. 그렇다면 교회도 그래야 되고 성도의 삶도 그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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