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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형태(Les formes de l'oublie, 1998)
막 오제, 김수경, 동문선, 2003, P.178.
- 오제(Marc Augé, 1935-) ENS 출신, 고전문학으로 교수자격. 프랑스 인종학자, 인류학자.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EHESS) 원장이다.
- 김수경: 단국대 불문학과, 프랑스 프로방스대학 석사.
*망각이 주제이지만, 머리말[preface]에서 이야기 하듯이, 시간 사용법(l'emploi du temps)에 대한 작은 개론서이기도 하다. 다시 읽으면 흥미있는 책이다. - 역자는 잘 쓰여진 문학 같은 이 철학 책을 번역에 신경을 더 써야 한다. 가능하면 철학하는 이와 윤독을 하는 것이 좋다. (47LLD)
** 개인에서 추억과 기억의 문제를 도덕성과 연관시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민족 또는 한 사회의 추억과 기억은 역사에 연관되어 있으며 사회의 정의 평등 자유라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을 것 같다. 저자는 후자의 인종학적 기억과 추억에서 역사 속에서 민족지(民族誌)의 문제로 보는 듯하다. 민족지를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적 상징성으로 보면, 추억은 한시대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흔적들이며, 이것들은 만들어지고 조작 가능한 것이 된다. 이 조작성은 신화 같은 착각(허구)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조작가능성은 상층으로서 이념이며 토지체(정복노예제), 군주체(농노제), 자본(임노동제)의 지배방식의 연속적 변형으로 이루어져 왔다. 심층의 역능은 억압 속에서 실재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다가 자유임노동자로서, 자유예술가로서, 본성자유주의자(아나키스트, 자연주의자)로서 인격의 위상들이 연대할 수 있는 시대에 와서야 기억을 공유로 추억의 재생산을 실재성에 맞게 해나가게 된다. 생물학에서 변형론이, 사회학에 실증이, 심리학에서 무의식이 그 자연 자체 안에서 연대와 흐름으로 표출되는 시기여야 가능할 것이다. 상층을 착각으로 여기고 심층이 자기 권능을 표출하는 시기에는 추억의 흔적에 대한 새로운 실증을 통하여 발생과 생성을 욕망한다. 심층에서 표면으로 저항, 봉기, 혁명이 필수적이다. (48LKI)
#망각 중에서 완전한 망각이 있을까? 망각은 변장한다. 망각된 것을 버리고 만든 상상의 과거는 왜 서술을 경우마다 달라지며 판본들이 여러 가지 일 수 밖에 없을까? 사실을 지워지고 흐릿한 추억의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꿈을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이 서술은 서술하는 자의 것이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서술의 기원일 수 있다. 다음으로 망각은 없다. 망각이라는 것은 사실을 수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은폐된 것이다. 사실은 있으며 현재의 의식에 등장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망각은 사회 문화라는 외피의 힘에 의해 경계 선 밖으로 밀려난 (비)존재로서 존재이다. (비)존재는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다. 있기는 있지만 개인의 자신도 잘 모르는 것으로 있는 것이다. 혹시 있다는 것을 알아도, 지난(있었던) 것을 현재(있는)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 모든 상황은 흘러갔고 그것을 다시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망각은 없으며 은폐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각은 있다. 생명에서 또 다시 불러내지 않은 것으로 망각이다. 그 망각은 퇴화현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잊혀져서 또는 은폐되어 더 이상 사실의 현상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은폐된 흔적은 흔적으로서 화석같이 있었던 것이지만 더 이상 실재성의 현상을 불러낼 수 없을 수 있다. 재생불가능이라고? 그것도 생명종에서 개체발생의 과정에서는 반복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개체로서 다시 시작에 등장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망각은 있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서 만들었던 여러 문화적 방식에서 어떤 부분은 더 이상 반복의 양태로서 위상을 찾을 수 없기에 망각은 있다. 현실에서 필요와 조건으로서 관련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망각은 있다. 그래서 크게 보아 종의 분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현생 인류가 걸어온 길의 일부를 은폐를 넘어서 망각으로 넘기고자 한다면 인간 종은 다른 종으로 분화하는 과정이라해야 할 것이다. (48LMB)
오제의 망각이란 주제가 인종학적 또는 사회학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엇이 망각되어 현재에 등장하지 않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1990년 말 소련이 해체되고, 맑스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망각되었는가? 아니면 임정의 전통이 사라지고 쫑일파 꼴미파 등이 등장하여 자주 정신이 망각되었는가? 역사적으로 수운의 동학정신으로 일어난 농민혁명이 망각되었는가? 남한 사회는 1959년 조봉암의 사형으로 사회주의를 망각하였는가? 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프랑스에서 1945년 이래로 파리에서 무슬림들의 정치적 진출이 있어왔던 것이 드골의 중앙집권화(1959-1969)와 알제리 독립전쟁으로 사라졌다. 망각인가? 이런 점을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제가 다룬 뒤마의 소설이나 줄리앙의 소설은 19세기 중반의 사회상의 반영으로한 장면들일 뿐이지 않는가? 그래 좋다. 소설, 동화, 드라마, 영화 등에다가 망각의 세 형태를 어떻게 적용하는 지를 잘 알 수 없다. (48LMD)
# 플라톤 작품에서 망각** *** *
파이드로스(Phedre, Φαῖδρος)(아름다움에 관해서, Sur le Beau), M. Dixsaut, in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266-267. (P.2190.) .. <<퇴트(Theuth)의 신은, 회상의 미약이 아니라 망각의 치료제를 발명했다. 작가들의 글쓰기(l'ecriture 문자 남기기)의 불모성에 비해 철학적 로고스(logos, λόγος, 말씀씀이)의 풍요성이 대립된다.>>
**참조: 파이드로스(274e-275a)
<<소크라테스: 퇴트의 신, 글쓰기의 발명자이며, 이집트 왕에게 말하기를 “자, 이집트인들에게 지식과 기억을 더 잘 제공하기 위한 발명입니다. 기억과 지식을 위하여 나는 치료제(le remede[φάρμακον, pharmakon])를 발명했습니다”. 왕이 대꾸하기를 “매우 부지런한 신은 하나의 기술을 발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인간과 다르고, 신 자신이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손해나는 부분과 이익있는 부분을 분간할 수 있는 인간과 다르다. 글쓰기(표기법) 철자의 아버지인 당신은 만족하여 이집트인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힘과는 반대되는 힘을 부여하는 중이다. 철자들을 인식하는 이집인들에게 그들의 기억을 훈련하는 것을 부정하도록 이끌어가는 데,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영혼에 도입한 것은 망각이다. 쓰여진 것을 신뢰하는데, 낯선 기호들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이며, 안으로부터(le dedans)가 아니다. 그들의 고유한 자원들에 의해서, 그들이 회상하게 될 것은 안에서부터이다. 따라서 당신이 치료제를 발견했던 것은 기억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을 회상하기 위해서 이다.”>>
-(ma) 파이드로스편은 영혼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한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들 한다. 이 운동은 끊임없이 갈망(사랑)하며 상승하고자 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망각을 치료하는 것은 잊지 않는 것이다. 즉 기억을 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퇴트는 “글쓰기”를 발명했다. 퇴트의 생각으로는 글을 써두는 것은 기억을 하기 위한 장치이다.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기억은 내재적으로 스스로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자기 상승의 노력이 기억이며, 이 기억은 자기 완성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벩송이 기억론을 내재적으로 본 것은 플라톤의 사고보다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오제의 “망각”은 허구(fiction)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양식인 것처럼 설명한다. 내가보기에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망각은 착각(illusion)이며, 통시적 현재로서 실재성이 있어야 인격, 즉 영혼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다. 오제는 사회학자로서 망각의 기능을 공시태에서 다루면서, 현재의 이야기가 설화, 전설, 신화처럼 작동하는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실재성과 연관 없이 기표로서 떠다닌다는 점에서 오제의 “망각”이라는 주제는 현상학적이다. 그는 인격을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라는 외연적 일반성을 다루면서 개인 또는 인격을 다루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결국 그는 이야기(소설, 동화, 영화)가 망각을 행사하는데 유용하다는 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48LME)
# 내용 ****************************
차례 5
1. 머리말 7.
개인에게 그러하듯 망각은 사회에도 필요하다. 현재, 순간, 기다림의 맛을 음미하려면 망각할 줄 알아야 하지만, 기억 그 자체가 망각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오래된 과거들 되찾기 위해선 가까운 과거는 잊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시간의 사용법(l'emploi du temps)에 대한 작은 개론서처럼 보이는 이 책의 주된 요지이기도 하다. (7)
첫째 ‘수업’에선 정신분석학자들과 더불어 ‘기억의 자취’(trace mnesique)의 개념에 관하여, 그리고 추억과 망각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인류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과 둘째 대화는 어떠한 삶이건 하나의 이야기로서 체험되는 것이라는 가정을 테스트해 보기 위한 것이다. 그 셋째 것은 몇몇 소설가의 도움으로 망각의 세 가지 형태인 귀환(retour)[회귀], 기대(suspens)[미결상태], 그리고 다시시작하기(recommencement) 등에 대하여 조명해 보려고 한다. / 끝으로[넷째] 내가 민족학자인 만큼 현장을 중심으로 한 내 고유한 추억들과 민족학 문헌 안에서 그 세 가지 항목들이 답변하고자 했던 질문들에 대한 소재를 취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탐색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답변을 제시하지만, 질문을 제기하지는 않으므로 역할이 뒤바뀐 민족학 훈련이 될 것이다. (7-8)
2. 기억과 망각 9
그것이[사고] 날개를 펴고서 대낮의 빛에 펄럭이자마자 사고는 자신을 다시 수용하고 보호하며 은닉하는 단어들을 향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어쩌면 그것은 야조(夜鳥)들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널리 퍼져 있는 견해일 수도 있다. 어째든 전문적인 사색가이며 사육자가 된 사고의 새 사냥꾼은 먼저 경계하는 것을 배우는 데, 어떤 것들은 물어뜯기 때문이다. 그는 해를 끼치지 않고, 그것을 새집에서 끄집어 내어 진정시킨 다음, 그것을 관찰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어떤 색다른 사고들과 합류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단어 안으로 도피하는지를 볼 양으로 풀어 주면서 눈으로 감시하는 걸 배운다.(10) [이야기는 밤이다. 그리고 올빼미처럼 밤에 날아오른다. 서사적 이야기는 밤에, 또는 눈감은 호메로이드들에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새 사냥꾼인 지성은 내면(심층)에서 솟아오르는 사유를 감시하고 경계한다. / 내가 오제의 이 문장을 읽으면서 작가가 학자라가 보다 진지한 문필가로 느꼈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드라마인 것처럼.(48LLC)]
조르주 드브뢰(Georges Devereux, 1908-1985) (14)
망각 쪽으로는 ‘용서’, ‘무관심’ 또는 ‘게으름’처럼, 기억 쪽으로는 ‘후회’ ‘강박관념’ 또는 ‘원한’ 같이 .. 그리고 또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 바로 모든 단어들 중에서 가장 단순하지 않은 [단어로서] ‘삶’과 ‘죽음’이다. (16)
망각에 찬사를 보낸다는 것, 그것은 기억을 비방한다는 것 더욱더 추억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망각의 작업을 인정하고 추억 안에서 그것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은 어떤 의미로는 삶이나 죽음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17)
삶과 죽음 그리고 기억과 망각, 이 두 쌍의 이러한 유사성은 어디서나 느낄 수 있고 표현되었으며, 상징으로까지 나타난다. .. 죽음이 내 앞에 있고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것임을 명심해야 하는 지금의 경우가 그러하고, 죽음이 내 뒤에 있으며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다른 경우가 그러하다. . [전자는] 그리스교적 사고인 구원에 대한 개념.. [후자는] 계속 이어지는 환생에서 비롯되는 회귀에 대한 개념은 이교도적인 사고...이를테면 집단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교인은 과거(원죄)를 지니고 있고, 이교도들은 미래에 무관심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개념들은 완전히 상충되지 않으며, 우리의 현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감과 추억에 대한 혼동들 사이를 빈번히 왔다 갔다하고 있는 것이다. (18) [예수라는 미래에 예배하는 것과 조상이라는 과거를 예배하는 차이를 말하려고 하는가? 미래에 예수를 만나 그의 옆에 앉는다는 것은 미신이고, 과거의 조상이 환생하는 것은 환상이다. 전자는 미래의 구원이라는 점에서 인격의 내부에 만들 수 없는 것이라 초월적이고 후자는 내부를 길어 올린다는 점에서 순한 회귀이다. 정신의 주지주의적 놀이는 전자에서 타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몸의 생명으로서 영혼의 노력과 실천은 후자에게서 유비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48LKH)]
리트레(Littre, 1801-1881)
기호론자의 언어로 diegege(이야기) .. histoire (0)
이러한 정의로는 망각한다는 것, 이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내면의 소재, 처리된 사건이며, 따라서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외재성이 아니라 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연속일지도 모르는 첫째 처리(인상)의 산물인 것이다. (20)
분명히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도 않는다. 기억을 하건 망각을 하건 간에 그것은 선별하고, 쓸데없는 가지를 쳐내는 정원사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추억들이란 식물과도 같은 것이니까. (20) [플라톤의 지성은 살과 고기를 바르는 요리사라는 비유가 있는데, 여기서 의식한 것을 자의식으로 만드는 것은 정원사라는 비유를 쓴 것이 흥미롭다. 리좀의 연결은 인민의식을 만드는 것일까? (48LLC)]
이렇게 표현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네가 잊어버리는 걸 말해 봐, 그럼 네가 누구인지 말해 줄게. (21) [이 질문에 대답이 말이 될까? 역설적으로 잊고 있는(의식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용, 잠재내용, 망각의 실재성),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본인이 말할 수 있을까? 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스님이 면벽을 하면서 연습하는 것은 그것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 자신이 찾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수 할 수 있을가? 고르기아스의 비존재를 알아도 전할 수 없다고 하듯이, 전수하기도 어렵다. (48LLC)]
퐁탈리스(Pontalis, 1924-2013)
쉬뻬르빌(Jules Supervielle, 1884-1960) 샘에서 마시다(Boire a la source, 1933)(recit).
사바띠에(Robert Sabatier, 1923-2012) 피흘리는 오리(Canard au sang, 1958)(소설), (23)
요컨대 망각은 기억의 살아있는 힘이며, 추억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산물인 것이다. (25) [개인에서나 집단에서나 망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재해 있다. 어떤 계기에는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이 기억의 현상이 추억의 한 장면으로 등장할 경우 문제를 야기한다. 박근혜가 되살린 박정희의 추억은 한 장면들은 인민이 보았던 장면과 다르다. 박근혜의 저도의 추억과 그 시기 그 인민이 겪은 추억의 장면은 다르다. 누군가의 인격에 의해, 잠재성이 총체적 기억의 잠세성으로 등장하는 경우에 망각은 기억의 살아있는 힘이다. (48LKI)]
‘추억’을 이야기로 만드는 모험을 강행하기가 무섭게 우선은 ...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로 만들면 이야기만 남고 사실의 기억은 사라진다. 역사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기’로 남긴 이야기는 남고 나머지는 사라 진 것이 아닌가? 혹시 다른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사’처럼 다른 방식으로 남은 것 만이다. 그런데 다를 사실도 있다. 글자가 아닌 유물, 유적 등이다. (48LLF)
그렇더라도 이야기에서 멀어지자마다, 우리가 ‘추억’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야기로 만드는 일을 포기하자마자 어쩌면 기억에서 멀어질지도 모른다. (26) [사회에서 서로 대상화하여 이야기하는 그런 이야기로도 남기지 않으면 기억 속에 ‘추억’의 장면으로도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기록 또는 일기가 사실의 장면을 남기더라도 ‘기억’속의 장면으로서 추억은 없다. 단지, 되돌려보는 경우에 현실의 생활과 연관이 있을 경우 그 추억은 다시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48LLF)]
프로이트(Freud 1856-1939) (26)
프루스트(Proust, 1871-1922) (26)
리꾀르(Ricœur, 1913-2005) (29)
시간의 사용법 [누구의 것인가?]... 비록 그것이 명의 대여인에 의한 것일지라도 질문을 제기할 자들(타인들)이 아니라, 질문에 대답하고자 애쓸 사람들,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일 것이다. (30) [시간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인가? 대여인인 자연 속에서 생명있는 존재들... 그 사용이 대리인으로 인간이라 하더라도, 물음에 답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다. 즉 추억과 망각의 주인공은 ‘나’라는 인격성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성보다 인격성이 돋보이지만, 답하는 인격성은 사회성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별종이 있지만 말이다. 빨강이는 별종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성이다.(48LLC)]
3. 이야기로서의 삶 31
망각의 형태들에 관한 검토에 앞서, 나는 현실과 허구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미묘한 관계들에 대한 몇가지 단어를 말하고 싶고... (31) [허구(fiction)이겠지]
클리퍼드 거츠(C. Geertz, 1926-2006) (32)
리꾀르 .. 미메시스 I, 미메시스 II (32) [fr.Wiki에서 미메시스 개념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상징적 매개물들’에 관하여 리쾨르는 원문(texte)이 아니라 정확히 짜임새(texture)에 관해 이야기하고, 동시에 행위의 짜임새는 “학문자체의 고유한 기탁물이며, 결과적으로 하나의 문화가 그 자체로 이해되어지는 범주들과 뒤섞일 수도 있다는 법률학 원칙을 따른 개념으로서” 민족학자가 서술하고 있는 테그으와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33-34)
리쾨르 .. 미메시스에 대한 개요.. 미메시스I, 그것은 말하자면 ‘자발적-미메시스’로서 주어진 세계의 내부에 가능하고 생각할 수 있는 행위를 재현하는 다양한 상징적 매개체들이고, 미메시스 II는 줄거리로 구성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세계로서 세계를 역사적인 이야기나 허구로 지어진 이야기들로 변화시키는 ‘서술적인 형상들’이며, 미메시스 III은 “청취자 또는 독자의 세계와 텍스트의 세계에 대한 상호작용”인 것이다. (34-35)
쟝 2세(Jean II, dit Jean le Bon, 1319-1364) (38)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
파비안(Johannes Fabian, 1937-)
요컨대, [바티이유나 파비안과는 다른 길이겠지만] 나는 민족지[Ethnographie]의 허구적 이야기를 재현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39) [민족지학자로서 오제가 쓰고 있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허구의 일종으로 남을 수도 않을까? 그러면 사실로서 역사(la histoire)의 한계(경계)는 어디까지 일까? 다양체로서 이야기 덩어리? 골뱅이(나선형)의 열려진 입구일까? (48LLF)]
전통 민족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실 조사원들과 피조사원들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데, 문자 그대로 그들은 동시대인들이 아닌 것이다. (39)
그러나 타인들의 허구적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허구적 이야기를 살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그 의미가 달라진다. ... (41)
우리가 한꺼번에 여러 이야기를 산고 있다고 한들, 그것에 대해 어떤 의심을 품겠는가? 그 각각의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역을 맡을 것이고, 거기서 항상 좋은 역을 맡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이야기들 가운데 어던 것을 다른 것들보다 훨씬 은밀하며, 우리에게 보다 개인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 때때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일기를 .. 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조차 하는 것이다. (41-42)
수천 또는 수백만의 여타 개인들이 그들이 공들여 완성하는 판본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듯이, ... / 판본들은 다수 개개인들의 극도의 다양한 풍부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은 예전 아프리카에서 영국인 인류학자들이 분석한 논리의 유형에서 나온 단편적인 논리에 따라 정돈될 수 있을 것이다. (43)
스탕달(Stendhal, 1783-1842) 로마에서 산책(Promenades dans Rome, 1829 (44)
하나의 일관성을 부여할 필요를 깨닫는 모든 유형의 이야기들(고백, 속내 이야기, 술자리에서 이야기, 증인식)에서 표면화되는 그 두 가지 현존 사이에서 오가는 리턴 운동, 다시 말해서 리꾀르가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들을 반복하자면 기대, 주의력, 기억 가운데서 분할된 영혼의 이완과 긴장 사이의 유희, 또는 아주 단순히 시간들의 불협화음과 여러 개의 목소리를 지닌 이야기들 안에서 그것의[그것들의 시간들의] 화해를 기다려온 화음 사이의 유희인 것이다. (46)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속에서 기억에 관한 부분이 아닐까?] /[운동과 정지의 양극 안에는 여러 다양한 양태들이 있다. 그 양태들 중의 하나로서 개인의 인격(영혼)은 그 나름으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들 한다. 문화 속에서 고착적이든, 새로운 개방사회를 만들 동적 노력이든, 양태의 일관성이 그 인격의 영혼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갈 일관성... (48LLF)]
에반스-프리처드(Edward Evan Evans-Pritchard, 1902–1973) .. 아잔데 족... (47)
이야기 되고 있는 중의 삶들(연속되는 의식을 따라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삶 - 이야기 - 자신의 삶을 타인들에게도 이야기 해주고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옳다고 여기는)의 형상화 속에서 망각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다루기 전에 나는 허구의 개념을 재검토하하든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이제 막 간략하게 언급한 존재의 서술적 차원, 즉 말의 가장 일상적 의미에서 이야기들(이야기되거나 씌어진 이야기들)과 자연의 기원, 인류의 탄생과 국가들의 건설에 영향을 미친 신화들인 최초의 ‘큰 이야기들’을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모방하는 긋 보이는 미래에 관한 현대의 신화들, 즉 ‘큰 이야기들’에 관하여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언급했던 이야기들의 그 특별한 범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자문하고 싶다. (49) [왜 작은 일상적 이야기로 잘 안되는 것일까? 플라톤은 정의의 문제를 개인에서 보아 어렵다고 해서 국가의 범위로(폴리테이아 편) 넓혔고,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우주의 차원으로(티마이오스 편) 확장했다. 인류가 행하는 이 서술적 차원은 그것도 모자라서 미래를 끌어들여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간다. 미래의 신화는 얼마나 더 많은가? 그것은 과거의 신화의 투영이며 상징이 아닌지를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 존재의 서술적 차원: 현존의 서술적 차원일 것인데, 큰이야기들이 형이상학적이라면 현존의 서술은 실재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48LLF)]
[아래 흥미로운 것은 역설에서 찾는 것, 신화, 동화, 소설, 종교 ...]
우선은 하나의 역설이기도 한 기록인데, 즉 허구적 이야기를 통해서 신화로부터 빠져 나온다는 것이다. 장 삐에르 베르낭은 그리스인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눈에는 허구적 이야기들로 보였던 작품들, 서사시와 비극을 통하여 그것을 지각한 만큼 그들의 종교를 더욱더 강렬히 지지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주제를 다루고 있다. (49)
발터 벤야민은 동화가 “신화적인 악몽을 쫒아내기 위하여 인간이 취한 최초의 조처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거리두기’를 암시했다. .. ‘순진한 바보’, 막둥이 동생, 나그네, 현자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 동화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50) [순진한 바보: 톨스토이의 바보이반, 막둥이는 제우스가 막둥이인데 많은 동화에서 형제들이 실패하고 난뒤에 막내가 문제를 푸는 것으로 나온다. 나그네 또는 현자(걸승): 이런 소재는 (불교의 의미를 지닌) 설화 동화에 많이 나오는 것들이며, 나그네는 개별적 이익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등장한다. (48LLI)]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 같은 소설가의 역설은 그가 한사람의 화자(정확히 이중의 화자인 셈인데, 왜냐하면 일관된 이야기의 화자가 익명으로 남아있는 것에 반해서 말로는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화자이기 때문이다) .. 즉 이중의 화자를 창조했다는 점에 있다. (50) - [이중의 화자는, 실재에서 한 인격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점일 것이다. 스키조이지. // “떡 하나 주면 안잡아 먹지” 이야기에 죽음, 어둠, 삼킴 등이 있는데 해와 달은 이중성일까? (48LLI)] - [프로이트에서 부재의 현상으로 “다에라”를 다룬다. 우리나라 깍꿍 놀이이다. 이 반복은 이중성이 아니라 이원성에 대한 경우이고, 범(虎 호) 즉 밤(夜 야)에서 언어의 중첩적 효과의 등장은 두려움과 잠식이라는 이중성이 낳은 부재의 현상에 대한 이해이다. 해님과 달님이 답이다. (48LMB)]
프로프(Propp, 1895-1970)는, 사실 리쾨르가 주목한 프로프의 이야기의 형태학(Morphologie du conte, 1928)에서 이야기는 종교의 변형(추억과 망각의 혼합인 변형)인데, 말하자면 “하나의 문화가 소멸하고 하나의 종교가 사라지면 그것의 내용물은 이야기로 변모한다”고 주장했다. (50)
사회학회, 특히 과스탈라(? ?), 까이유와(Roger Caillois, 1913-1978), 루즈몽(Denis de Rougemont, 1906-1985)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러한 이원론적 대립[종교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은 .. 문학을 자신의 대용물로서 이끄는 신화의 퇴화로서도 아니고, 반드시 무조건적인 내면의 실행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51)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론의 여지없이 민족학의 첫째 교훈은 개별적이고 사적인 삶들이 동화되는 내면의 이야기들이, 그점에 관해서 특별한 장르에 속한 문학적 이야기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51) [둘째는 무엇인지?]
[둘째] 민족학자들은, 상담자의 삶에서 중요한 에피소드와 관련되었던 그들의 진술에서 나온 것들이, 그러한 동시성 행위 자체 때문에 참신한 전개와 해설들로서 참고 신화를 풍부히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51-52)
레리스(Michel Leiris, 1901-1990) ... 에티오피아에서 자르(Zar)에게 혼을 빼앗긴 사람들에 대한 ... [신들림(la possession)] (52) ..
그러므로 신화 안에서 귀환을 도모하는 것은 개인의 이야기인 셈이다. (52)
지금껏 나는 단기적이나 장기적으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땐 서술적인 차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 점에 관해서 그것의 서술적인 발전이 그것의 신화적인 기원을 억압하는 종교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의 실례를 들었으며, 끝으로 그 서술적 발전은 단지 인정된 문학적 형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말하는 가운데서 각각의 삶, 개인의 매시간을 접어 감치는 이야기들과 관련이 있음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54) - [종교적 역설, 실재성을 다시 주름 잡는 것과 같다. 즉 불상이 우상이라는 것을 아는 스님도 불상을 부셔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에게 믿게하려고 불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쳐가야할 과정으로서 무어라고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부셔버릴 것이 아닌가.. 현실의 표상인 현상을 부수어야 관념와 상징을 부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보살님들이 현상에 대고 절하고 구복을 구하는 것을 어찌 나무랄 수만 있겠는가? 추상에서는 모순이 있지만, 실재성은 모순이 아니라 엉켜있는 실재성의 재주름(repli)이니, 대립적 주름를 떼너내면 바로 그 순간 주름이 아니게 되지 않는가? 그래, 재주름은 우리 속에 혼합으로 남아서 어느 부분이 현상에 접하여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며 또는 안다고 해도 개인의 특이성에 의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그것을 타인이 이해하기는 어렵고, 안다고 해서 타인이 자기 신체를 지니고 있는 한 실재성의 표출로서 행동하기란 더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알레고리로 이야기하며 장황할 정도의 서술적 표현으로 대서사시(소설)이 등장할 것이다. 인간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간극이 있고 이것을 떼어놓을 수 없는 긴장 속에 있는데, 겉으로는 느슨하게 끈을 놓지 않고서 살아간다. 그 긴장이 팽배하여 끊어지면 파국으로 개체 사이에 대립과 반대라는 불화와 부조리로 나타난다. (48LMB)]
고셰(Marcel Gauchet, 1946-)의 세계의 마법풀기: 종교의 정치사(Le Desenchantement du monde. Une histoire politique de la religion, 1985), ... (54)
레지아니(Serge Reggiani, 1922-2004) [가족이 파시스트에 반대하여 프랑스로 이주.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희극배우, 46살(1968년) 샹송가수] (54)
파시즘 신봉자는 기억이 없는 자이다.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강박관념들로 이루어진 불멸의 현재를 살고 있으며, 그것을 전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예전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환상으로 만든 과거를 회고했다. 우리는 결코 타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55) - [저자는 교묘하다. “예전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환상으로 만든 과거를 회고했다.” 그거보다 비판해야 할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일신앙자들은 그들의 환상으로 만든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이것이 파스즘을 생성하는 토양이다. 자연주의자(유물론자)는 자연의 과거와 생명의 과거를 통해 실재성을 재구성(재주름)잡으면서 겸허하게 수정하고 탐구하고 실행한다. (48LMB)
4. 망각의 세 가지 형태들 57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기대, 현재에 있어서 긴장은 아프리카의 중요한 의례들 대부분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러한 이류 때문에 무엇보다도 시간을 사고하고 관리하도록 되어 있는 장치들처럼 나타난다. (57) - [저자의 교묘함, 자국에서 장치들을 연구하기보다, 반복적으로 연구하러 가는 아프리카에서 인가? 그것은 아프리카 현상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그것의 표면화가 더 명백하다는 것일까? 그럼에도 예들을 프랑스 소설이다. 왜? (48LMB)]
망각의 세 가지 형태들 또는 형식들은 .. / 그 첫째 것은 귀환의 형태인데, 그것의 최초의 열망은 보다 오래된 과거와 더불어 연속성을 되살리기 위해서, ‘단순’ 과거를 유지하도록 ‘복합’ 과거를 빼버리기 위하여 현재를 - 그리고 뒤섞여 버리는 경향이 있은 근접과거를 - 망각하면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것이다. (57-58) ... / 둘째 것은 기대{긴장감}의 형태로서 그것의 최초 열망은 현재를 과거와 미래에서 잠정적으로 격리시키면서, 좀 더 정확히 말해 미래가 과거로 귀환과 동일시되면서 그것[과거]을 망각하며 현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58) ... / 셋째 것은 시작 또는 다시 시작하기(re-commencement)의 형태이다. 그것의 열망은 과거를 망각하면서 미래를 되찾는 것, 그 무엇보다도 우서하지 않고 당연히 가능한 모든 미래들에 열려 있는 새로운 탄생의 조건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59) -[아마도 역자가 기대란 말에 {긴장감}을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58쪽 기억(과거), 기대(미래), 긴장(현재)와 비교하여보면 뭔가 정합성이 없는 것 같다. 원문의 대조가 필요하다. (48LMD)]
‘망각의 형태들’과 그것을 예시하고 있는 ‘상징적인’ 관습들은 양면성[이중성, 가지치기]을 지녔다는 것인데, 이를 테면 그것들은 공동체, 그리고 개인들과 동시에 관련이 있다. (60) .../... 둘째 고찰은 개인에 관한 개념을 다루는 것이고, 이전에 있었던 대립(공동체/개인)을 상대화하는 것이다.(61) - [저자는 공동체와 개인을 동시에 다루는 한 측면과, 개인을 다루는 것을 구별하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회(문화)의 망각과 개인(추억)의 망각을 양면성으로 보는 것 같다. 천체 속의 부분이어야 하지 않나... 개인은 일상적으로 그 사회 문화의 망각에 합류하지만, 개인의 고유한 추억을 지닌다. 그런데 그 추억이 사회체에 속한다. 그 사회체에 벗어난 추억과 기억작용은 다른 반복을 하는 가지치기이다. 새로운 가지치기는 미비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의 부조리와 환상을 깨는 요소가 될 것이다.(48LMB)]
※ 62 [소 단락을 나누었는데 왜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귀환의 예로서 오뒤세우스, 에드몽 당테스 / 귀환의 예의 작품은 뒤마와 프루스트이고 ... ]
내가 귀환에 관한 가장 강렬한 체험을 한 것은 아프리카에서이다. 난 그곳에서 몇 해를 살았고, 그리고 나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어서 몇 달 동안의 체류를 하고자, 정기적으로 늘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62)
오뒤세우스(Odysseus, Ὀδυσσεύς)[율리시즈]는 그의 개하고만 재회할 수 있을 뿐이다. 페넬로페이아(Penelope, chez Homere Πηνελοπεια, 나중에 Πηνελόπη/페넬로페) (64)
불가능한 망각과 완성되지 않은 귀환에 관한 소설, 복수의 욕망에 관한 소설, 그것을 쓴 이는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이다. 몽떼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 1845–1846)은 복수하는 주인공들이 시간의 끈을 다시 이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비극적이고도 불꽃 같은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64)
※ (65)
에드몽 당테스.. [첫째 불행은] 하지만 과거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둘째 불행은 .. 기억을 찾아가며 그가 발견한 것이란 망각뿐이기 때문이다. (65)
알렉상드를 뒤마는 이 비극적인 사건 전부를 일종의 카타르시스(그의 과거에서 자유로워진 에드몽은 다른 사랑, 그리고 다른 삶을 되찾을 것이다)처럼 그리고 있다. (67)
기독교식으로 교육받은 아이였던 나[작가 오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환기하는데서 항상 실망을 느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70)
소설의 관점에서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뒤마와 반대이다. 기억을 찾아나서는 몽테 크리스토가 발견한 것은 망각 뿐인데 반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de 1913 a 1926)의 화자는 망각을 찾는데도 기억과 재회한다. (71)
자아로 귀환은 지정코 망각의, 그리고 기억의, 문학적 형태인 것이다. (73). [망각의 문학적 형태는 귀환에 속한다. 기대와 다시시작하기가 남았다. ]
모든 비극이 멜로드라마로 변모될 수 있듯이... [문학이외에 그런 작품으로] 영화 프랑스와 1세(Francois Ier, 1937) .. 페르낭델(Fernandel1, 1903-1971)[주연배우] .. 삽화가 있는 라루스 소사전(Le Petit Larousse illustre, 1903)...(74)
[영화에서도]
챨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 가난한 떠돌이 .. 술 취한 부자. (74)
베르제(Pierre Edouard Leopold Verger, 19021-1996)[프랑스 사진작가, 인종학자], .. 오리사족과 보두족의 숭배에 관한 노트들(Notes sur le culte des orisha et vodou a Bahia de Tous les Saints au Bresil et a l'ancienne Cote des Esclaves. 1951 (75)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1885–1957)[유태계 오스트리아출신 미국 감독, 배우)의 영화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 1937) (76)
플라톤의 국가(Politeia)편
※ (80) [현재에 대한 서술일까? 모르겠네... / 중단상태(긴장)의 예로서 스탕달의 작품이고.. ]
“오 시간아, 네 비행을 멈추어 다오! - 그러지요라고 시간이 말했다. 그런데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말인가요?” / 나는 라마르틴적인 돈호법에서 이렇게 재치있는 응답을 한 기억은 나지만, 누가 거기에 해당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혹시 지드일가? (80-81) [저 감탄의 구절을 내가 알기로 뽈 발레리의 시에 있는 구(句) 같은데 ... 발레리와 베르그송의 관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인용되는...(48LMC)]
지드(Andre Gide, 1869–1951)의 늪지대(Paludes, 1895) (81)
뤼시앵 뢰뱅-〉 스탕달의 둘째 소설 뤼시앙 뢰뱅(Lucien Leuwen, 1834)(1894 출간) 미완성이었다.
샤틀레 부인 [- 적과 흑에 나오는 부인들의 명칭은 아니고, 뤼시앙 뢰방에서 나오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볼테르의 동거 여인(샤틀레 부인)이었던가? 아니다. 뤼시앙 뢰뱅에 나오는 여인은 과부로 샤스텔레 또는 샤뗄레(Madame de Chasteller) 부인이 있다. 이 이름 번역인가보다 ... “녹색 사냥꾼”이란 카페도 이 작품 속에 나오나 보다. ]
파브리스 델 동고(Fabrice del Dongo): 스땅달의 파름 수도원(1839)의 주인공 / 쥘리앙 소렐(Julien Sorel): 스땅달의 적과 흑(1830)의 주인공이다. (82)
라 보에시(Etienne La Boetie[labɔesi], 1530-1563) 프랑스 인문주의 작가, 시인. 자발적 복종에 관한 담론(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1548년경, 18살)
파름 수도원(1839) ...적과 흑(1830) .. 바타이유(1897-1962)
사회생활에서와 같이 허구적인 이야기 속에서 휴식, 일시적인 멈춤은 일상적인 겉모습에 대한 그러한 포기를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부영화의 이미지가 바로 그러하다. (94) -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휴식이라고? 이데올로기 공세이다.ㅋㅋ, 현재를 잊게 하는 종교처럼 현실을 덮어버리는 허리우드 영화는 마약이다. 내가 보기에 김기춘의 자칼의 날의 이야기도 마약처럼 쓴 것은 아닐까 한다. 영화는 1973년에 나왔고(우리나라에서 그 당시 개봉되지 못했다?) 육영수 피살 사건은 1974년이다. 그러면 망각의 한 형식인가? 사건은 가고 이야기가 남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남는 잉여찌꺼기를 자본으로 바꾸는 것이 자본체이다. (48LMD)]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 반복하는 분위기에서 생각하는 걸 망각하는 것, 그것은 고독한 개인의 독서에 제공되는 그것을 포함해서,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형태를 품고 있는 허구적 이야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 허구적 문학(축제와 사랑처럼)은 그러한 의미에서 언제나 잠재적으로 반체제적인 것은 아닐까? (85) - [저자 오제가 소설(예술)에서 허구성이 잠재적으로 반체제적이라는 것은 형태심리학의 관점 또는 식민지 지배의 영국에서 제국주의 인류학 또는 인간중심주의 사회심리학의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 들뢰즈처럼 소설에서 다양체의 모습들을 발견하고 또 그 모습들의 확장이 인류의 삶을 풍부하게 그리로 즐겁게(유쾌하게)하는 실상을 이야기로,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별종들의 노력을 이야기로, 서술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48LMD)]
※ (86) [시작의 예는 그락의 작품에서]
우리는 모두 시작의 장엄함에, 현재가 작동시키는 미래에 대해서 아직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은 채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순간들의 특별한 자질에 민감하다. (86)
돈 후안(Don Juan) (86) -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 본명Gabriel Tellez, 1583-1648)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 극작가. 317편의 희곡을 썼다. 수도사. 세비야의 호색가(El Burlador de Sevilla, 1630경: Le trompeur de Seville) 여기에 전설(신화)적 인물 돈 후안이 나온다.]
스무 살이었을 때, 나는 무조건적으로 쥘리앙 그락을 좋아했었다. (86)
메츠(Christian Metz, 1931-1993)
탁월하다는 것 이상으로 프루스트가 우리로 하여금 귀환의 경험을 공유하게 했다면, 스탕달은 중단상태의 경험을, 그락은 가장 정확히 말해서 우리를 시작의 경험에 동참케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작의 경험을 그는 ‘여행’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나 그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는 탐험이나 낯섦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 ‘출발’을 생각한다. (87)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프랑스 시인
그락(Julien Gracq, 1910-2007)의 더 좋아하는 것들(Preferences, 1961)
[실패에서 시작이 되고, 시작이란 말은 끝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죽음에 견주어보면] 죽음 그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재시작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그것이 시작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으로만이 정의 내려지는 데, 바로 미지의 세계가 그것이다. 보를레르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오 죽음, 노선장, 시간이 되었네, 닻을 올리게” (88-89)
5. 망각의 의무 91
오늘날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기억의 의무’라는 표현은 어느만큼의 모호함을 동반하고 있다. (91)
기억에 대한 의무는 후손들에 대한 의무이며, 그것은 추억과 경계[한계]라는 두가지 양상[양태]을 가지고 있다. (92)
기억과 망각은 서로 굳게 결속되어 있고, 그 둘라 전적으로 시간 사용법이 필요하다. 몽테뉴는 분명히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 [고르기아스가 말하는 카이로스가 있다.]
망각은 그것이 모든 시제들과, 이를테면 시작을 체험하기 위해선 미래와, 순간을 즐기기[긴장과 이완] 위해선 현재와, 귀환을 실천하기 위해선 과거와,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그 모든 경우와 결합할지라도 우리를 현재로 귀착시킨다. 현재에 속해 있으려면 망각해야 하고, 죽어가지 않기 위해선 망각해야 하며, 변함없이 남아있기 위해선 망각해야 한다. (마지막 문장, 93) - [저자 오제는 이 마지막문장을 보면 생성론자 또는 자연론자가 될 수 없고, 아직도 지니고 있는 그리스트교의 잔재 위에 현상학적 현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리꾀르 영향인 듯하다. 그 현재에서 자아가 변함없이 진행할 것이라는 것은 망각이 아니라, 강박관념이며, 종교에서 받은 에이도스를 자기 속에 먼저 가지고 있고 그리고 현재로도 가지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힐 때, 영원 속에서 미래의 죽음도 망각할 것이다. 그에게는 벩송의 확장도 들뢰즈의 새로운 반복, 다양체로서 생성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인지 그가 인용한 것들과 들뢰즈가 의미 논리에서 인용한 것은 차이가 있다. (48LMD)]
- 각주[미주] 95-102 [번역자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정해야할 부분들이 있다.]
[문학비평을 읽은 기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망각의 주제는 바칼로레아 문학부분에서 다루는 것이 아닌지. / 번역에 한 가지 배운다. 말씨라는 용어이다. 그래서 말씨(parole) 말씀(langue) 언어(laguage)이렇게 번역해보면 좋을 것이다.]
(11:27, 48LMD)
# 등장 인물들 **********
오제(Marc Auge, 1935-) 쁘와띠에(Poitiers, Vienne)출생, ENS 출신, 고전문학으로 교수자격. 프랑스 인종학자 인류학자.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현지 인종학을 연구하며 신들림의 의례(Rites de possession)에 관심이다. 브로델(Fernand Braudel), 르고프(Jacques Le Goff), 퓌레(Francois Furet) 다음으로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EHESS) 원장이다. 비장소: 초근대 인류학 입문(Non-Lieux, introduction a une anthropologie de la surmodernite, 1992, 동시대 세상들의 인류학을 위하여(Pour une anthropologie des mondes contemporains, 1994(Paris, Aubier), 망각의 형식들(Les Formes de l’oubli, 2001), 인류학(L'Anthropologie, 2004)(PUF, avec Jean-Paul Colleyn), 이중으로 삶: 여행, 민족학, 글쓰기(La Vie en double. Voyage, ethnologie, ecriture, 2011), 자기 민족학: 시대 없는 시간(Une ethnologie de soi : Le temps sans age, 2014) [인종학자인 오제의 사회적 위상이 의문이다. 실증적인 것 같으면서도 서사적 서술에 치중하는 것이 왜일까? 단지 이 책 한권으로 그의 성격규정이 어렵다. (48LMB)]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 프랑스 작가. 눈 이야기(Histoire de l'œil, 1928(sous le pseudonyme de Lord Auch), 에드와르다 부인(Madame Edwarda, 1941)(antidate de 1937, sous le pseudonyme de Pierre Angelique), 내면의 체험(L'Experience interieure, 1943), 문학과 악(La Litterature et le Mal, 1957), 피의자(Le Coupable, 1944),
까이유와(Roger Caillois, 1913-1978) 프랑스 작가, 사회학자, 문학평론가. ENS 삼수후 입학 문법학으로 교수자격 통과. 신화와 인간(Le Mythe et l'Homme 1938), 인간과 성스럼(L'Homme et le Sacre 1939), (놀이들과 인간들(Les Jeux et les Hommes, 1957)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 미국영화 / 감독 커티즈(Michael Curtiz, 본명 Mano Kertesz Kaminer, 1886-1962) 헝거리 유태계 미국 감독. 주연 보가트(Humphrey Bogart)와 버그만(Ingrid Bergman) .
챨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dit Charlie Chaplin, 1889-1977 ) 미국 배우, 영화제작자. Les Temps modernes (1936), Le Dictateur (1940), Monsieur Verdoux (1947)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vrai nom Teodor Jozef Konrad Korzeniowski, 1857-1924) 폴란드 귀족가계 출신, 영국작가. 어둠 한가운데(Heart of Darkness 1899)(Au cœur des tenebres), 귀족 짐(Lord Jim 1900)(Lord Jim), 노스트로모(Nostromo 1904)(Nostromo), 황금화살(The Arrow of Gold 1919)(La Fleche d'or). , :
드브뢰(Georges Devereux, 헝거리명 Győrgy Dobo, 1908-1985) 태어날 때 헝거리 땅인데 현재 루마니아. 유태인 가계 출신,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인종학자. 인종정신분석학문 개척자이다. 평원의 인디언의 정신치료: 실재성과 꿈(Psychotherapie d'un indien des plaines: realites et reve, 1951)(Jimmy P. (Psychotherapie d'un Indien des plaines), film sorti en 2013), 여성과 신화(Femme et Mythe, 1982), 모하비 인디언들의 민족정신의학(Ethnopsychiatrie des indiens Mojaves, 1996)
돈 후안(Don Juan): 방탕을 상징하는 가공의 인물. 원래 민간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스페인의 극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가 쓴 비극 세비야의 호색가(El burlador de Sevilla, 1630)에서 문학적 주인공으로 처음 선을 보였다. /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 본명Gabriel Tellez, 1583-1648)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 극작가. 317편의 희곡을 썼다. 수도사. 세비야의 호색가(El Burlador de Sevilla, 1630경: Le trompeur de Seville) 여기에 전설(신화)적 인물 돈 주앙이 나온다.
뒤마, 아버지 뒤마(Alexandre Dumas, Alexandre Dumas pere, 1802-1870) 프랑스 작가.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 1844, 몽떼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 1845–1846), 여왕 마고(La Reine Margot, 1845), 천하나의 환영(Les Mille et Un Fantomes, 1849),
에반스-프리처드(Edward Evan Evans-Pritchard, 1902–1973) 영국 인류학자. 사회인류학의 토대를 세웠다. 아잔데 족에서 마법, 신탁, 주술(Witchcraft, Oracles and Magic Among the Azande. 1937), 누에르 족(The Nuer: A Description of the Modes of Livelihood and Political Institutions of a Nilotic People. 1940), 사회 인류학(Social Anthropology and Other Essays. 1950)
파비안(Johannes Fabian, 1937-) 암스테르담 대학 인류학 교수. (구 독일)현 폴란드 태생, 시간과 타자(Time and the other: how anthropology makes its object, 1983)(재 2002), 문화에 반대하는 기억(Memory against culture: arguments and reminders, 2007), 주석으로써 민족지학(Ethnography as commentary: writing from the virtual archive, 2008)
페르낭델(Fernand Contandin, dit Fernandel1, 1903-1971) 프랑스 배우, 가수, 만담가(유머가) 프랑스와 1세(Francois Ier, 1937)의 주인공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그는 과거로 돌아가 프랑스와1세 궁전에 삽화가 있는 라루스 소사전(Le Petit Larousse illustre, 1903)을 들고 간다. 그리고 그 시대의 예언가로서 명성을 날린다. 그리고 다시 현실 파리로 왔다가 다시 궁정으로 간다.
프랑스와 1세(Francois Ier, 1937) 프랑스 영화, 크리스띠앙-자끄(Christian-Albert -Francois Maudet, dit Christian-Jaque, 1904-1994) 감독 작품. 주연 페르낭델(Fernand Contandin, dit Fernandel1, 1903-1971) 프랑스 배우, 가수, 만담가(유머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신경정신과의사, 정신분석학 창시자.
고셰(Marcel Gauchet, 1946-) 프랑스 철학자, 역사가. 잡지 토론(Debat)의 편집장. 세계의 마법풀기: 종교의 정치사(Le Desenchantement du monde. Une histoire politique de la religion, 1985), 힘들의 혁명: 1789-1799년 사이 주권, 인민, 대표(La Revolution des pouvoirs : la souverainete, le peuple et la representation 1789-1799, 1995), 무엇을 할 것인가?: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대화(Que faire ? Dialogue sur le communisme, le capitalisme et l’avenir de la democratie, 2014)(avec Alain Badiou)
거츠(Clifford James Geertz, 1926–2006) 미국 인류학자. 상징인류학, 문화들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1973, 신화, 상징, 문화(Myth, Symbol, Culture, 1974)(편집한 책), 「Centers, Kings, and Charisma: Reflections on the Symbolics of Power, 1983」 in Local Knowledge: Further Essays in Interpretive Anthropology(pp. 121–146), 「문화체계로서 종교: 종교 연구에로 인류학적 접근(Religion as a Cultural System. In Anthropological Approaches to the Study of Religion, 1966」, in ASA Monographs, 호, pp. 1–46.)
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 1869–1951) 프랑스작가. 1947노벨문학상 늪지대 Paludes, 1895)
쥘리앙 그락(Julien Gracq, 본명 Louis Poirier, 1910-2007) 프랑스 작가. 중요작품으로 La Litterature a l'estomac (1950), Le Rivage des Syrtes (1951), Un balcon en foret (1958), Les eaux etroites (1976), Carnets du grand chemin (1992) / 역자 소개 아르골 성에서(Au chateau d'Argol, 1939) 낚시꾼 왕(Le Roi pecheur, 1948), En lisant en ecrivant (1980), La Forme d'une ville (1985)
[과스탈라(s.d.) 없음 / 과스탈라(Enrico Guastalla, 1826–1903) 이탈리아 군장교..]
쟝 2세(Jean II, dit Jean le Bon, 1319-1364) 런던에서 죽다. 발르와 왕가, 프랑스왕 필립4세 와 왕의 쟌느(Jeanne de Bourgogne)의 아들. 1350년에서 1364까지 그 동안에는 프랑스왕이다.
라 보에시(Etienne La Boetie[labɔesi], 1530-1563) 프랑스 인문주의 작가, 시인. 몽테뉴의 내밀한 친구이다. 자발적 복종에 관한 담론(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 ou Contr'un)(1548년경, 18살 작성, 1576출판) / 바이프(Jean-Antoine de Baif, 1532-1589) 프랑스 시인.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Alphonse Marie Louis de Prat de Lamartine, 1790-1869) 프랑스 시인 소설가.
레리스(Michel Leiris, Julien Michel Leiris, 1901-1990) 프랑스 작가, 시인, 민족학자, 예술비평가. 인간시대(L'Age d'homme 1939), 여명(Aurora 1946)(roman), 종족과 문명(Race et Civilisation 1951), 공다르의 에티오피아인들에게서 신들림과 그것의 연극적 측면(La Possession et ses aspects theatraux chez les Ethiopiens de Gondar 1958)(1980 증보판), 민족학 연구 다섯편(Cinq etudes d'ethnologie 1969), 놀이 규칙(La Regle du jeu)(I. Biffures, 1948; II. Fourbis, 1955; III. Fibrilles, 1966; IV. Frele Bruit, 1976). 사후 출판으로 아프리카의 거울(Miroir de l'Afrique 1996)(recueil posthume illustre comprenant ses principaux ecrits d'ethnologie africaine).
리트레(Emile Maximilien Paul Littre, 1801-1881) 프랑스 사전학자, 문헌학자, 철학자, 정치가.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caise, (Le Littre)(1863-1872)의 사전편찬으로 유명하다.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 1924-1998) 프랑스 철학자. 후기구조주의자. [유태인가계라는 말이 없다] 후기근대(postmoderne) 개념의 비판적 사용 때문에 알려졌다. 소르본 출신, 교수자격 4등. 과격좌파인 “노힘”(≪ Pouvoir ouvrier ≫)을 조직했다. 맑스와 프로이트로부터 일탈(Derive a partir de Marx et de Freud, 1973), (Economie libidinale, 1974, 후기근대의 조건: 지식에 관한 보고서(La Condition postmoderne : rapport sur le savoir, 1979, 디페랑(Le Differend, 1983), 비인간: 시간에 관한 한담들(L'inhumain: Causeries sur le temps, 1988).
메츠(Christian Metz, 1931-1993) 영화의 기호학 프랑스 이론가, 영화의 기호화에 관한 시론들(Essais sur la signification au cinema, 1968 et 1973), 언어와 영화(Langage et Cinema, 1971), 기호학 시론들(Essais semiotiques, 1977), 상상적 기표(Signifiant imaginaire, 1977)
오뒤세우스(Odysseus, Ὀδυσσεύς) 그리스 신화의 인물, 이타크의 왕이다.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L’Odyssee, Ὀδύσσεια)의 주인공이다. / 페넬로페이아(Penelope, chez Homere Πηνελοπεια, 나중에 Πηνελόπη/Penelope)의 남편이 오디세우스이다.
퐁탈리스(Jean-Bertrand Lefevre-Pontalis, 1924-2013)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작가. 1953년에 라깡(Jacques Lacan)과 더불어 교수법적 분석을 7년간 계속했다. 라가쉬(Daniel Lagache) 지도아래 라쁠랑쉬(Jean Laplanche)와 함께 정신분석 어휘사전(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을 폈다. 흐르지 않는 시간(Ce temps qui ne passe pas, 1997)
프로프(Vladimir Iakovlevitch Propp, 1895-1970) 러시아 형식주의자. 이야기의 형태학(Морфология сказки 1928; Morphologie du conte), 기담의 역사적 뿌리(Les Racines historiques du conte merveilleux (Исторические корни волшебных сказок), 1946, 러시아의 토지 축제(Les fetes agraires russes (Русские аграрные праздники), 1963.
프루스트(Marcel Proust: Valentin Louis Georges Eugene 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 작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de 1913 a 1926).
레지아니(Sergio Reggiani, dit Serge Reggiani, 1922-2004) 파시스트에 반대하여 가족이 그의 나이 8살에 프랑스로,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희극배우, 46살(1968년) 샹송가수로. 나중에는 화가로 1991년 첫 전시회를 가졌다. .
리꾀르(Paul Ricœur, 1913-2005) 프랑스 철학자. 현상학과 해석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크리스트교 실존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시대과 이야기 1: 황당과 역사이야기(Temps et recit. I: L'intrigue et le recit historique, 1983), 시대과 이야기 2: 허구 이야기의 모양(Temps et recit. II: La configuration dans le recit de fiction, 1984, 시대와 이야기 3: 이야기된 시기(Temps et recit. III : Le temps raconte, 1985).
루즈몽(Denis de Rougemont, 1906-1985) 스위스 작가, 철학자, 대학교수, 어느 실업자 지식인의 일기(Journal d'un Intellectuel en chomage, 1937), 사랑과 서양(L'Amour et l'Occident, 1939), 유럽인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Lettre ouverte aux europeens, 1970), 사랑의 신화들(Les Mythes de l'Amour, 1972).
사바띠에(Robert Sabatier, 1923-2012) 프랑스 작가, 시인. 여름철 아이들(Les Enfants de l'ete (1978), (소설), 피흘리는 오리(Canard au sang, 1958)(소설), 시집으로 태양축제(Les Fetes solaires)(Prix Artaud 1952), 내일의 새(L'Oiseau de demain, s.d.), 강독(Lecture, s.d.),
스땅달(Henri Beyle, pseudonyme de Stendhal, 1783-1842) 프랑스 작가, 사실주의자. 로마에서 산책(Promenades dans Rome, 1829,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1830), 파름 수도원(La Chartreuse de Parme, 1839)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1885–1957) 유태계 오스트리아출신 미국 감독, 배우,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 1937)
쉬뻬르빌(Jules Supervielle, 1884-1960) 우루과이 출신 프랑스 시인, 작가. 중력들(Gravitations 1925(poemes), 팜파스의 인간(L'Homme de la pampa, 1923(roman), 샘에서 마시다(Boire a la source, 1933)(recit). 세헤라자드(Sheherazade, 1949(theatre), L'Enfant de la haute mer 1931(nouvelles). 피흘리는 오리(Canard au sang, 1958)
베르제(Pierre Edouard Leopold Verger, 19021-1996) 프랑스 사진작가, 인종학자. 오리사족과 보두족의 숭배에 관한 노트들(Notes sur le culte des orisha et vodou a Bahia de Tous les Saints au Bresil et a l'ancienne Cote des Esclaves. 1951 (Fluxo e Refluxo do trafico de escravos entre o golfo de Benin e a Bahia de Todos os Santos. 1985)
베르낭(Jean-Pierre Vernant, 1914-2007), 프랑스 역사가, 고대 그리스 전문가. 꼴레쥬드프랑스 교수. 그리스 사유의 기원들(Les Origines de la pensee grecque, 1962), Mythe et pensee chez les Grecs. Etudes de psychologie historique, 1965)(Editions Maspero), Mythe et societe en Grece ancienne, 1974(Editions Maspero), 신화와 정치 사이(Entre mythe et politique,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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