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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애상과 숙성된 지혜
- 허형만의 시선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 (문예바다 2021)
신원철
1. 노년의 애상
2021년 9월에 출간된 허형만 시인의 시선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에는 시력 50년에 이르는 노시인의 인생에 대한 달관이 보인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삶은 어떤 것일까. 그는 순천에서 태어나 목포국립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삶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이 시선집에는 회갑 이후 시인의 여러 감회, 특히 살아온 날에 대한 기쁨과 성찰이 담담하게 보인다. 한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흔히 한바탕 꿈이라고 말한다. 몇십 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으나 체감하는 시간은 그만큼 순식간이라는 이야기다. 다음의 시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가노니
본시 온 적도 없었듯
티끌 한 점마저 말끔히 지우며
그냥 가노니
그동안의 햇살과
그동안의 산빛과
그동안의 온갖 소리들이
얼마나 큰 신비로움이었는지
이제 가노니
신비로움도 본시 한바탕 바람인 듯
그냥 가노니
- 「이제 가노니」 부분
이 시는 마치 유언시처럼 읽힌다. 그동안 같이 잘 놀던 친구들과 술 한 잔 같이 나누며 나 먼저 가니 잘 있거라 먼저 가서 기다리리라 하는 것처럼 읽히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시인은 “나로 인해 눈물 흘렸느냐/ 나로 인해 가슴이 아팠느냐/ 나로 인해 먼 길 떠돌았느냐”라고 묻고 있다. 혹시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바가 있거든 이제 풀어버리자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참으로 무거운 인연줄이었던 것을”이라고 한탄하며 “허허청청 수월의 뒷모습처럼” 가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시인의 동양적 인생관을 말해준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 준 ‘햇살,’ ‘산빛,’ ‘온갖 소리’들의 신비로움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고마운가. 시인은 생의 후반에 이것을 깨닫고 있다.
「종심의 나이」라는 시에서도 이것은 뛰어나게 시화되고 있다. 시는 “참 멀리 왔다고”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는 않겠다며 시작된다. 이어지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왔던 길 지워져 보이지 않고
가야 할 길 가뭇하여 아슴하나
내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 「종심의 나이」 부분
“나이 일흔”이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이제 일흔이 되어서 내가 마음대로 내뱉아도 실수가 아니라면 이제 그렇게 털어놓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끌려다닌다. 만일 인생을 뜻대로 끌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길섶/ 해와 달, 낡은 발끝에 치일 때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노라”고 토로하고 있다. 인생길 무수한 굽이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허형만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이런 인생론이 곳곳에 숨어 있다. 「석양」이라는 시의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라는 구절도 예사롭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 시는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로 끝맺고 있다. 사람들이 바닷가 횟집에 모여 술을 유쾌하게 마시고 있는데 넘어가는 석양이 마치 사람들의 모임이 부러운 듯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취한 눈으로 보니 나무도 바다도 모두 발갛게 취해 있더라는 것이다. 재미있으면서 짠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자연물을 보면서 거기서 자신의 감정을 도출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나무 의자 하나가
늙은 홍매 아래에서
온몸으로 꽃잎을 받는다
꽃잎 사이사이
꽃그늘도 받는다
- 「홍매」 부분
그는 지금 홍매를 보면서 인생을 생각하고 있다. 꽃잎이 지고 있다. 그 아래 놓인 의자는 꽃잎을 계속 받고 있다. 이것에 이어지는 “꽃잎과 꽃그늘에 어린/ 한 삶이 저리 고울 수가 없다”는 영탄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떨어지는 꽃잎과 그것을 받는 의자가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를 보는 시각에서도 유사한 점이 있다. “알몸으로 부딪치며 으깨지며/ 망망대해/ 하이얗게 눈물꽃 이워내는” (「파도」) 파도를 보는 눈은 그것의 파괴적인 힘이나 출렁임에 주목하는 보통의 시각과는 다르다. 부딪히고 으깨지는 아픔에 주목하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을 맺고 있는 “아 우리네 삶이란/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도 그 연장선이다. 이러한 자연물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꽃잎들이 하롱하롱 수를 놓는다
우주는 수틀이다
바람결도 바늘귀에 끼워
햇살도 바늘귀에 끼워
하롱하롱 수를 놓는 꽃잎들
- 「수틀」 부분
우주가 하나의 수틀이라니, 꽃잎과 바람결을 그 수틀 안에서 수를 놓고 있다니....... 햇살도 한몫하여 우주라는 큰 틀 안에서 햇살과 바람과 꽃잎이 춤을 추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런 경지까지 시인의 사유가 미치고 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오랜 관찰과 경험과 지혜의 집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의 영탄도 다음과 같이 뛰어나게 시화된다.
한 생애가 텅 빈 항아리 같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파도도 고요해지고
창문에 반짝반짝 별빛을 매달고 달리던
야간열차의 기적소리도 아스라이 잦아지고
- 「오직 적막」 부분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니 적막하다. 항아리와 적막은 대치를 이룬다. 적막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폭풍 같은 파도와 아스라한 야간열차의 기적소리이다. 이 둘은 젊음의 질풍노도와 노년기의 아득한 회한으로 읽힌다. 젊다는 것은 에너지이다. 그것은 “한때는 부글부글 들끓음으로 가득 찼으나/ 한때는 한기 돋는 소소리 바람에도 출렁거렸으나” 나이 들어서는 “텅 빈 항아리”같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을 맺는 “이제는/ 오직 적막”이 마치 종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이 시에서는 자연물의 움직임이 아주 적절히 차용되고 있다. 이제 한 생애의 영욕이 다 지나고 적막하다. 그런데 그 적막이 마치 거대한 커텐처럼 시인을 감싸고 있다.
「한 생애가 적막해서」라는 시도 “빗소리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팔을 끄집어다가 팔베개하고 눕는다”라는 인상적인 구절로 시작되어 이어진다.
밤새 가슴으로 파고드는
빗소리가 가창오리 떼처럼 꿈처럼 뒤덮는다
한 생애가 적막해서
잠 못 이루는 걸 안다는 듯
말랑말랑한 빗소리가
이불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 「한 생애가 적막해서」 부분
노년이 되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빗소리가 친구 하자는 듯 가만히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가슴을 파고 든다. 그리고 이불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 빗소리에 대한 묘사가 보통이 아니다. 그것은 날아오르는 “가창오리 떼처럼” 꿈속을 가득히 덮거나 “말랑말랑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즉 요란하게 덮쳐들기도 하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위로는 시인에게 이제 마음을 편히 하라는 것이다. 왜 이리 적막한가. 시인은 자신의 지나온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산수국」에서도 “가담가담 오시어 가만히 들여다보는/ 여우비 갈맷빛 이파리마다 조롱조롱/ 매달려 가슴 졸이는 물방울”의 안타까움에 주목하고 있다. 아름답게 피어난 산수국 이파리에 조롱조롱 달린 물방울은 무언가 대단히 아슬아슬한 아련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시인의 결론은 지나온 자신의 생애이다(“나에게도 산수국처럼 탐스러웠던/ 시절 있었지 물방울처럼 매달렸던/ 사랑 있었지 오지고 오졌던 시절/ 한 삶이 아름다웠지/ 한 삶이 눈물겨웠지”). 바로 지나온 삶에 대한 영탄이다. 저 산수국처럼 탐스럽고 아름다웠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다. 그것을 그는 오졌던 시절이라고 말하며 지나온 한 삶이 아름답고 눈물겨웠다고 말한다. 노경에 든 시인이 지나온 세월을 아름답고 눈물겨웠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슬픈 사연이 있었다기보다는 노년에 흔히 겪는 심리상태일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청춘의 힘과 활력은 사라지고 약을 한 줌씩 달고 살아가는 노년은 누구에게나 슬프고 고달플 수밖에 없는 시기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찾고 있다.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실성했다 해도
허파에 바람 들었다 해도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 「가는 길」 부분
그냥 웃는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선배는 소가 물어도 웃는다는 말을 곧잘 하셨다. 시인이 그렇게 웃는 이유는 “내 가는 길/ 훤히 트이어 잘 보이므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삶의 혜안은 색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는 갑자기 「그늘이라는 말」에서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신선하다. “그 깊고 아늑함 속에/ 들은 귀 천년 내려놓고// 푸른 바람으로나/ 그대 위해 머물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그늘의 매력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경험이 쌓였고 어느 정도 내려놓았음을 말한다. 명상음악을 들으며 느낀 감회(“활짝 열린 창 너머/ 새 떼들 맑고 경쾌한 날갯짓/ 부풀어 오르는 공기 방울”(「참 아늑하다」 ))도 주목할 만하다. 음악을 듣다 보니 새의 날갯짓, 공기방울, 느티나무 잎새까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일제히 눈을 뜨는 것이다. 같은 시에서 시인은 ”우주는 신비의 악기를/ 하나씩 간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라고 감탄하고 있다. 노시인의 눈이 참으로 천진하다.
2. 깨달음의 시
늙음에 대한 탄식, 인생을 정리하며 느끼는 애상 같은 것이 이 시선집의 한 흐름이라면 또 다른 흐름은 깨달음이다. 만일 늙음에 대한 애상만 있다면 그 시집은 슬프기만 할 것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에서는 그것 말고도 삶에 대한 수승한 깨달음이 보인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그는 자연물 하나하나를 그냥 보아넘기지 않는다. 다음의 시는 그런 깨우침의 좋은 예이다.
빗방울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 없지
가벼워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운 속내의 처절함도 툭툭 털고
저렇게 매달릴 수 있지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나뭇잎에 매달리고
그래도 매달릴 곳 없으면 허공에라도 매달리지
- 「가벼운 빗방울」 부분
빗방울을 보면서 그것의 가벼움에 주목하고 있다. 만일 저것이 무겁다면 저렇게 매달릴 수 없으리라. “무거움을 뿌리치고/ 무거운 속내의 처절함도 툭툭 털고” 매달린 물방울은 가볍다. 이것은 물방울의 물리적인 무게도 되지만 마음의 무게로도 연결된다. 저 물방울이 곳곳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은 가볍기 때문이다. 내 마음도 가볍다면 역시 온갖 곳에 매달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이 시인의 지나온 삶과 연관된다. “이 몸도 수만 리 마음 밖에서/ 터지는 우렛소리에 매달렸으므로/ 앉아서 매달리고 서서 매달리고/ 무거운 무게만큼 쉴 수 없었던 한 생애”였다. 우렛소리는 시인이 겪은 수많은 고난이었을 것이다. 그 소리에 이리저리 매달리며 잠시도 쉴 수 없었던 그 생애, 그것은 “그래서 빗방울은 아득히 사무치는 문장이지”로 맺어지고 있다.
물방울 하나에서 인생을 읽어낸 시인은 우리가 흔히 보는 풍경 하나에서도 그것을 보여준다.
새떼들 솟아오르고
갈대 눕는다
다대포구로 떨어지는 해
뻘 속을 파고드는데
묻지 마라
쓸쓸한 저녁의 속내를
만월 일어서고
별 하나 진다
- 「순천만」 전문
순천만 갈대밭에 새 떼가 날아오른다. 다대포구로 해가 떨어지는데 이 “쓸쓸한 저녁의 속내를” 누가 알겠는가. 이 시는 만의 저녁이 떨어지고 솟아오르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갈대가 눕고, 해가 떨어지고, 별은 진다. 조용하게 가라앉는 저녁이지만 그 와중에 솟구치는 것이 있다. 새가 날아오르고, 만월이 떠오르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하나의 저녁 풍경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떨어지고 있는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것이 솟아오르고 있다. 인생 말년을 맞이하는 시인이 담담하게 생의 순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새의 날갯짓을 바람을 가르는 칼로 인식한 다음의 시도 좋다.
새가 지상으로 박차 오르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개는
칼이 된다.
예리한 칼날이 된다.
잠시라도 한눈팔면
허공에 갇히거나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치는 시의 날개가 바로
바람칼이다.
- 「바람칼」 전문
*바람칼-새의 날개를 이르는 순우리말
새가 허공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은 날개가 예리한 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한눈팔면/ 허공에 갇히거나/ 추락하”게 되는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새의 날개가 잠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긴장을 풀면 바로 추락이다. 시인은 이것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치는 시의 날개”도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시의 날개나 새의 날개나 잠시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는다. 저 아슬아슬한 허공을 건너기 위해 혹은 언어의 진수를 유지하기 위해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상황의 비유는 뛰어나다.
생명에 대한 무한 상상과 경탄은 불교적 사유와 통하고 있다. 「쌀벌레 한 마리」에서 시인은 밥을 푸다가 깜짝 놀란다. “하이얀 쌀밥 속/ 하이얀 쌀벌레 한 마리”를 발견해서이다. 이 쌀벌레는 “압력밥솥 뜬 김에/ 쌀과 함께 익어가”며 “한 끼 양식이 되어 주기 위해/ 이렇게 제 한 몸 공양하는 목숨”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소중한 소신공양인가. 시인은 그 고마움을 깨닫는 순간을 “새벽 빛살, 촉촉한 바람기 털며/ 열린 창문으로 마악 들어서시는 순간”이라고 집어서 말하고 있다. 밥을 푸다가 잘 익은 쌀벌레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더럽다 아니하며 목숨의 공양이라고 고마워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특정한 때이다. 바로 새벽 빛살이 열린 창문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빛이 첫 햇살을 내릴 때 깨달음처럼 쌀벌레의 헌신이 발견되고 그것이 무한 공덕의 보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순간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배롱나무 부처」는 “송광사 대웅전 앞에/ 배롱나무 한 그루/ 너른하게 꽃 피우고 있었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너른하게”이다. 부처의 품처럼 넓게 벌어진 가지들에서 배롱꽃들이 발갛게 피어 있다.
다붓한 절간
눈맛 나는 붉은 꽃숭어리마다
술렁이는 꽃 빛발에
대웅전 부처님은 낯꽃 피고
나는 꽃멀미로 어지러웠다
밤그늘이 조계산 기슭을
바름바름 기어 내려올 때쯤에야
이곳에서는 배롱나무가 부처였음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 「배롱나무 부처」 부분
그 붉은 꽃숭어리에 대웅전의 부처도 낯을 붉히시고 나도 꽃멀미를 한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오는데 바로 그 배롱나무가 부처이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견성의 순간으로 볼 수도 있는데 부처란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곳곳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나무, 거대한 느티나무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백운면 애련리에 삼백오십 년 묵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것을 그는 가부좌를 틀고 있다고 묘사한다. 나무가 오래되어 둥치가 굵어지고 뒤틀리며 뿌리까지 울툭불툭 튀어나와 있으니 마치 가부좌를 틀고 앉은 풍만한 몸체의 선승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무수한 잎사귀 즉 사리까지 달고 있다. 시인은 그 그늘 아래서 시원함이 지나쳐 한기가 드는 것을 느끼고 일어나 나무의 우듬지를 우러러보는데 그 묘사가 좋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야채 사이를 포릉포릉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찍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부분
그 나무를 보금자리로 하는 멧새들의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이고 수많은 사리들이 서로 몸을 비벼대며 고요한 파동이 일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나무둥치와 잎사귀들과 거기에 깃들어 사는 새들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일 테지만 마치 법열의 경지에서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현상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빈산」이라는 시에서의 “알몸의 나무들도 아주 미세하게/ 가냘픈 숨결로 온몸을 떤다”와 통한다.
이 나무는 근처에 살고 있던 오탁번 선생을 비유한 것이다, 수많은 사리를 거느린 분은 바로 오선생이시다(“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 그는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 체로 걸러 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살고 있었다. 세상의 욕심을 다 내려놓은 듯 애련리 원서헌에서 여생을 보내시던 오탁번 선생의 삶이 사리를 가득 단 느티나무와 같더라는 것이다.
유사한 생각은 티벳 기행을 마치고 쓴 시에서도 보인다. “누가, 내 몸이 화살, 인 줄 알고? 티베트까지 쏘았나”라고 시작되는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당신이 오체투지 마치고 돌아온 날이면
나는 야크 똥이 되어 온 집안 따끈한 불길이 되리
당신이 탕구라 만년설 봉우리마다 숨 쉬는 흰 눈이면
나는 야생의 맨살 그대로의 햇살로 스며들리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난 몸
그렇다. 당신이 내 정신의 영주인 한 편의 시라면
내 삶의 팽팽한 긴장감, 죽는 순간까지 늦추지 않으리
- 「내 몸이 화살」 부분
당신은 누구일까. 당신이 오체투지를 마치고 돌아오면, 흰 눈이면, 한 편의 시라면, 나는 야크 똥의 불길이 되고, 햇살로 스며들고, 죽는 날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겠다는 것이다. 티벳의 관습에 근거한 신선한 발상이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있음이 보인다. 그것은 미얀마에서의 경험에도 적용된다. 「맨발」에서 사원을 참배할 때 맨발을 시행하며 그들의 맨발 관행에 주목한다(“지상의 고독, 지상의 슬픔도/ 모두 맨발보다 더 위에 떠도는 것”). 맨발과 신발을 신은 것의 차이는 겸손과 비겸손의 차이일 것이다. 땅의 숨결을 그대로 느끼거나 부처의 자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인공으로 덮는 것의 차이이다. 문명에 의해 인간은 오만해졌다. 어느 종교이든 그 오만을 경계하고 있다. 맨발을 제대로 깨달아야 비로소 참인간이 된다. 이것을 시인은 겸손이라고 말한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공처럼 구부려야” 맨발이 보이고 그래야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존재를 깨닫게 되며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가장 순수한 영혼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허형만 시인의 노년은 겸손함과 고개 숙임으로 흘러가고 있다.
- <강원작가>(2023 겨울) 수록
[출처] 노년의 애상과 숙성된 지혜 - 허형만의 시선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 (문예바다 2021)|작성자 신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