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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옹기꽃화분 (The Kiminsun Flower Art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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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주이야기 스크랩 [인물열전5]고려(高麗)의 마지막 자존심 박서(朴犀)
스톤콜드 추천 0 조회 51 07.02.28 15:2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高麗)의 대몽(代蒙)전쟁중 몽고 20만 대군을 맞이하여 굴하지 않고 끝까지 분전한 박서(朴犀)장군.
그리고 그와 함께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김중온(金仲溫)장군, 김경손(金慶孫)장군, 송문주(宋文胄)장군 및 고려군사들.
그들을 여러분께서는 아십니까?
박서(朴犀)는 죽주(竹州) 사람이었습니다. 고종(高宗) 18년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몽고 20만 대군이 고려를 내침(內侵)하던 때였습니다.
특히 몽고(蒙古)군은 성이나 고을을 공격할때마다 남자는 씨를 남겨두지 않고 학살했으며, 여자는 무조건 겁탈하며 진격하였습니다.
몽고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철주(鐵州)를 도륙하고 귀주(龜州)에 이르렀을 때, 박서 장군은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과 정주분도장군(靖州分道將軍) 김경손(金慶孫) 그리고 정주(靜州), 삭주(朔州), 위주(渭州), 태주(泰州) 등의 고을 수령들과 더불어 각기 군사를 인솔하고 귀주로 모였습니다.
박서는 귀주성에 모인 군사들 앞에서 말하기를,

"우리 고려(高麗)국이 건국이래 최대의 국난(國難)을 맞이하였소이다. 몽고 오랑캐들이 철령(鐵嶺) 이북지역을 휩쓸며 이곳 귀주근처까지 몰려오고 있소이다. 이곳 귀주는 강감찬 장군이 거란(契丹) 오랑캐를 맞아 대승을 거둔 곳이오. 우리는 여기를 거점으로 삼아 오랑캐놈들을 모조리 무찔러야 할 것이외다."

라고 말하니, 고려군사들의 함성은 떠나갈듯 하였고 사기는 충천하였습니다.
박서는 김중온 부대로 하여금 성(城)의 동서쪽을 담당하게 하였고, 김경손 부대는 성의 남쪽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호별초(都護別抄), 위주, 태주 별초 250여 명은 세방면(동, 서, 남쪽)으로 구응(救應)하게 하였습니다.
멀리 몽고군의 깃발이 보이기 시작하자 귀주성은 숨죽인듯 조용해졌습니다.
몽고 대군은 귀주성을 수십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치열하게 서(西), 남(南), 북(北)문을 공격하였으나 박서 및 그 휘하 제장들의 목숨을 건 방어에 물러났습니다.
이 때 박서장군은 기회를 보아 성의 병사를 이끌고 적진을 기습해 무수히 적을 베고 적을 패주시켰습니다.
몽고군은 쉽게 귀주성이 점령되지 않을 것을 알자, 항복한 위주부사(渭州副使) 박문창(朴文昌)을 성 안으로 들여 보내어 항복하라고 권유하였으나 박서는 "어찌 오랑캐 따위에게 항복한단 말인가!"라고 단호히 거절, 박문창의 목을 베어 효수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몽고군은 정예부대 3천을 선발하여 북문을 기습하였으나 박서는 군사를 이끌고나가 이를 섬멸시켰습니다.
몽고는 공성전(攻城戰)에 있어서 실로 비상한 재주및 병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박서에게 계속하여 패퇴당하자 몽고는 누차(樓車)와 큰 침상과 같은 병기를 이용하였는데, 소가죽으로 겉을 튼튼히 싼 이 병기는 속에 병사들을 30~50명씩을 숨기고 성 밑까지 다가와서, 가죽상자 안의 병졸들은 굴을 파고 누차 위에 있는 병졸들은 화살을 날리며 성을 기어 올라가는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가공할 병기였습니다.
몽고군은 이러한 병기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박서 장군은 적의 계략을 모조리 꿰뚫어 보았습니다. 성 안에서 몽고군과 같이 굴을 파게 하고, 적이 뚫고 있던 굴과 고려군이 뚫던 굴이 같이 뚫리면 즉시 그 곳에 끓는 쇳물을 부어 몽고병은 각 굴마다 한 명도 남김없이 타 죽고 말았습니다. 또한 박서는 성 위의 병사들에게 불화살과 불 붙은 짚으로 누차를 공격하여 그 속에 남아있던 몽고병을 모조리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나 몽고명은 이러한 사상에도 굴하지 않고 대포차(大砲車) 15문으로 성(城) 남쪽을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박서는 성 위에 높은 대(臺)를 쌓게 하고 그 위에 포차(砲車)를 설치하여 돌을 내려 쏘아서 적의 포차를 박살내었습니다.
몽고군이 이번에는 섶 나무에 사람의 기름을 적시고 시체를 많이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했습니다. 시체 타는 냄새와 불길이 성벽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이에 박서는 물로는 끄기 힘듦을 알고, 병사들에게 진흙을 가져다가 물에 풀어서 시체더미에 뿌리게 하니 금새 불길이 꺼졌습니다. 그러자 몽고군은 수레에다가 건초를 가득히 적재하고 불을 질러 성 문루(門樓)를 공격하였으나 박서는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물을 퍼 부어 불을 껐습니다.
이와 같이 몽고군이 30일 간이나 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갖은 지혜를 다 짜고 모든 수단을 다하여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임기응변으로 제장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방어를 굳게 하였으므로 적군은 귀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고, 그대로 남하하여 고려 조정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다시 몽고군은 북부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그곳의 병력을 강제로 끌고 와서 포차 30문을 배치하고 공격하여 성벽 50 간(間)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몽고군이 부서진 성벽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박서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성이 허물어진 곳을 즉시 보수하게 하고 쇠사슬로 봉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수하는 곳을 적이 맹렬이 공격하자 이에 박서는 결사대 3천을 이끌고 적을 막으며 "전군 목숨을 버리고 분전하라!"라고 말한뒤 몽고군을 향해 돌진, 적을 무수히 쳐 죽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고려군의 희생이 막대했지만 박서는 적의 포차 30문을 모조리 박살내고 적의 목을 베기 수천급,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몽고군이 또다시 큰 포차로 재공격을 시작했으므로 박서도 이에 대항하여 포차를 배치 돌을 발사하여 진격하던 몽고군이 돌에 맞이 무수히 죽었습니다.
기진맥진한 몽고군은 퇴각하여 목책(柵)을 세우고 그 안에서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성이 함락되지 않자, 살례탑은 고려사람인 통역관 지의심(池義深)과 학록(學錄) 강우창(姜遇昌)을 파견하여 회안공(淮安公) 왕정(王挺)의 서한을 가지고 귀주성으로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박서는 듣지 않았습니다. 살례탑이 또다시 사람을 보내어 권유하였으나 박서는 끝까지 성을 고수하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몽고군은 이번에는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였으므로 박서는 대우포(大于浦)로써 마주 공격하게 하니 분쇠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적군의 운제가 감히 성벽에 가까이 닿지 못하였습니다.
참고로 이때까지 고려군의 칼은 매우 짧아서 접근전에서 매우 불리하였다 합니다. 특히 긴 창과 방패를 잘 다루는 몽고병의 경우에는 더더욱 불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박서는 대장장이들을 불러모아 직접 제작한 대우포라는 병기를 만들게 하였는데, 이는 칼날이 길고 넓은 무기로 가히 무겁지도 않으면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병기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진 고려군은 몽고군이 운제를 타고 올라올때마다 적을 베어, 한번에 적의 목을 2~3개씩 베었다고 합니다.
이듬 해에 고려왕이 후군 지병마사(知兵馬使)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림수(崔林壽)와 감찰어사(監擦御史) 민희(閔曦)를 파견하여 몽고 사신을 인솔하고 귀주성 밖에서 박서에게 타이르기를,

"조정에서 이미 회안공을 파견하여 몽고군과 강화하였고 우리 3군도 이미 항복하였으니 전투를 그만 두고 나와서 항복하라!"

고 말하였으나 박서는 그래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민희가 박서의 고집에 격분하여 제 칼로 제 목을 찌르려고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최림수가 다시 타이르니 그제서야 박서도 왕명을 어기기 어려워서 비로소 항복하였습니다.
이때 박서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합니다.

"만일 소장에게 고려3군을 맡겨 주신다면, 어찌 오랑캐 앞에 성상께서 치욕을 당하시도록 내버려 두겠사옵나이까..."

그 후에 몽고 사신이 와서 박서가 성을 고수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하여 그를 죽이도록 고려 조정에 닥달하였습니다. 이에 최이가 박서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절개는 비할 바가 없소이다. 허나 몽고인들의 보복도 두려운 일이니 그대는 부디 몸을 보중하기 바라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박서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몽고군 중에서 70세에 가까운 늙은 장수가 있었는데 그가 귀주성의 성과 보루, 병기계를 자세히 돌아보고 한탄하기를,

"나는 20세 부터 종군하여 천하의 각종성지(城池:당시 몽고의 세력은 유럽까지 뻗친 시기였습니다)에 대한 공방전을 무수히 보고 참전하였으나, 이처럼 맹렬하고 오랜 공격을 당하면서 끝끝내 항복하지 않은 곳은 내 일찌기 본적이 없다. 이 성(城)을 고수한 여러 장수들은 후일에 반드시 대장군(大將軍)이나 재상(宰相)으로 될 인재들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후에 박서는 과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정2품 벼슬)로 되었습니다.
박서 휘하 장수중 송문주(宋文胄)도 역시 귀주 전투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그 공으로 양장(良將)으로 벼슬이 올랐으며, 그 후 23년에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으로 되었습니다. 이때 몽고병이 죽주에 와서 항복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송문주가 성중의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워서 물리쳤습니다.
몽고병이 또 포(砲)로 공격하여 사방의 성문이 부서지고 무너졌으나 성중에서도 포(砲)로써 역습하여 몽고병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몽고병이 사람의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공격하였으나, 이때 성중의 군사들이 일시에 성문을 열고 돌격하니 몽고병의 죽은자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몽고병이 갖은 방법을 다하여 공격한지 15일 간이나 지났으나 결국 함락하지 못하고 성을 공격하던 기구들을 소각하고 퇴각하였습니다.
송문주는 귀주에 있을 때부터 박서휘하에서 몽고군의 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배웠고,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적의 공격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매번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적군이 반드시 이러한 기계를 사용하여 공격할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대비를 해야한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적이 이른 뒤에 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으므로 성중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 존경하고 따라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는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몽고 20만 대군을 맞이하여 고려에도 사람이 있음을 알린 박서(朴犀)장군을 볼 때마다, 진정 그야말로 영웅(英雄)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그의 준비자세, 적의 전략및 전술을 철저히 꿰뚫어 본 뛰어난 지혜로 인하여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못지않은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제장들과 고려군사들의 충의(忠義)는 영원토록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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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02.28 16:08

    첫댓글 어마어마 하죠~~~ 입이 따~악 벌어집니다~~^@^ 한번만 봐주이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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