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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 제목 - 되살아나는 고대문서 : 칠지문서가 전해준 고대의 세계
· 저자 - 히라카와 미나미[平川 南] 著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엮음
· 정가 - 14,000원
· 분량 - 288page
· 출판일 - 2011년 11월(초판 1쇄)
· 출판사 - 주류성출판사
· 평가 - ★★★★★
· 批評
오늘은 독특한 내용의 책 1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칠지문서에 대한 것인데, 아마 대부분 칠지문서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칠지(漆紙)는 '종이덮개'다. 옻은 먼지나 티끌을 극도로 싫어하며, 급격한 건조도 피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옻칠 작업에는 옻칠을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서 종이를 옻칠액 표면에 밀착시켜 뚜껑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것을 '종이덮개'라고 하며, 이건 칠 작업을 할 때는 벗겨서 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종이의 값이 비쌌기 때문에 옻칠 장인이 버린 종이덮개는 대부분 관청 공문서의 휴지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옻칠이 스며들어 완전히 코팅된 종이는 옻칠의 힘으로 지하에 있어도 부식되어 소멸되지 않은 채 1,200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라 한다.
어떤가? 굉장히 흥미롭지 않은가? 처음 이 책을 보고 칠지문서가 뭐지?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펼쳐봤는데, 1장 1장 살펴봤더니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대단한 것들이어서 읽자마자 이렇게 서평을 쓰는 바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분량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활자가 크고, 중간에 사진이나 도면이 많아서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이해가 어렵지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을 작업할때 참여한 선생님들의 이력을 보면 책 작업이 결코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책의 저자인 히라카와 미나미[平川 南]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 책의 입수와 번역, 출판에 이르기까지 일본측 역자로 활동하신 하시모토 시게루[橋本 繁] 선생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의 李恩仙 선생님과 하시모토 시게루 선생님의 초역과 미카미 요시타카[三上喜孝] 선생님의 역주, 李成市 선생님의 추천사와 감수, 金聖範 선생님의 부분 번역과 최종 교정,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의 金惠貞 선생님과 이은선 선생님의 실무 작업 등, 정말 많은 선생님들의 이 책의 번역 및 출간에 참여하셨고, 그 결과 이처럼 좋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게 되었다.
그럼 책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해 보자.
책의 앞부분에는 칠지문서 및 옻칠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칠지문서가 어떤 식으로 남게 되었고, 어떤 패턴이 확인되는지가 간략하게 소개된 다음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을 4개의 장으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었다. 칠지문서에 적힌 내용은 첫째 교과서와 달력, 둘째 일상생활을 알려주는 각종 문서, 셋째 군단과 병사와 관련된 문서, 넷때 주민파악 시스템과 관련된 내용으로 크게 나뉜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에 칠지문서를 두고 '지하의 정창원문서'라고 한다니 정말 공감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일본 고대, 중앙정부의 동북지방 일대 지배의 거점이었던 다하성(多賀城)에서 최초로 발견된 칠지문서는 처음에는 빛을 발하지 못 했다. 1970년 발굴조사에서 수혈유구 1기가 확인되었고, 그 안에서 지면에 달라붙어 있던 가죽과 같은 유물이 하나 발견되어다. 하지만 처음 보는 유물이었던지라 단순히 '가죽 제품'으로 분류하고 흙덩어리째 수습하였다. 그러고 3년 뒤 또 다른 발굴조사에서 토기 안에 말굽버섯 상태로 부착된 물건이 확인되었고, 그렇게 묵흔이 선명하게 적힌 유물은 바로 칠지문서(그건 別項이라고 해서 각 戶 말미에 호구의 이동을 기입한 計帳歷名의 흔적이었다)였다. 하지만 저자는 3년 전에 발견했던 가죽 제품까지 생각이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다하성 정청 서남부에 대한 발굴조사는 계속되었고, 가죽 제품과 유사한 단편들이 지속적으로 출토되었다. 그러다가 문서에 적힌 글자들을 해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내 다하성 유적 내에서 나온 100점에 가까운 문서 단편들에 대한 조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샬레 안에 물을 넣고 칠지문서를 띄어 글자를 확인하는 방법에서 발전하여 적외선 텔레비전 카메라를 이용해서 잘 안 보였던 글자까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칠지문서는 거의 다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옻칠을 만드는 데에 종이덮개를 사용하는데, 버릴 때는 원형과 반원형, 2가지로 버리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다 사용한 종이덮개를 그냥 버리면 원형이 되고, 옻칠 액이 부착된 면을 안쪽으로 접어 버리면 반원형이 된다는 것이다(우리가 코를 풀고 휴지를 안쪽으로 반 접어 버리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싶다. 비유가 좀 그런가?). 그 밖에 비틀어 꼰 형태로 출토되는 것도 있는데, 이는 종이덮개가 아니라 옻칠을 거르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 토기에 부착된 채 확인된 것이 있는데, 이는 팔레트로 사용한 토기의 종이덮개로 사용한 것을 옻칠 액이 경화되자 토기와 함께 버린 것이라고 했다. 암튼 이렇게 버려진 칠지를 통해 그것이 사용된 칠기의 크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칠기는 대부분 정형화되어 있어 小(직경 14~16㎝), 中(직경 22㎝ 내외), 大(직경 33㎝ 내외) 3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버려진 칠지는 당시 종이값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휴지로 버려졌고, 관청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되었다. 물론 관청에서 사용된 것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쓰였기 때문에 칠지문서는 당시 일본의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필자가 흥미롭게 봤던 부분을 몇개 언급하도록 하겠다.
1. 달력과 일기를 통해 당시 귀족의 삶 일부를 엿볼 수 있음
헤이안[平安]시대 중반에 만들어진 책 중『구조전유계(九條殿遺誡)』라는 책이 있단다. 이는 右大臣까지 올랐던 권력자, 藤原師輔(908~960)가 자손을 위해 남긴 유훈을 정리한 것으로, 일상의 세세한 일과 생활태도, 몸에 익혀야 할 교양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귀족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달력 이용법이 적혀 있는데, 그 안에 적힌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칠지문서에서 확인되었다고 한다. 즉, 10세기 무렵의 달력이 출토된 것이다. 생각해보자. 당시 귀족들이 벽에 걸어놓고 매일매일 보면서 그날 그날의 계획을 세우고, 몸가짐을 바로했을 그 달력을 말이다.
또한 그 책에는 달력의 여백에 '어제의 일을 기록하라', 즉 일기를 쓰라고 적고 있는데, 이러한 귀족의 일기에는 '역(曆)'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직 이 일기가 적힌 칠지문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창원에 남아 있는 제일 오래된 달력인 天平 18년(746) 2월 7일~3월 29일까지 53일간을 기록한 단편에는 10군데에 글씨가 쓰여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조칙의 요점을 써 놓은 부분도 있지만, 나들이를 간 이야기를 적은 사적인 내용도 있었다. 정말 당시 사람들의 살아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2. 문서를 봉하는 방법과 고대 역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음
이건 개인적으로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인데, 목간과 달리 종이문서나 편지를 봉하는 방법을 복원한 것이다. 편지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작성한 다음(지금의 반대 방향), 편지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말아간다. 그렇게 되면 편지를 풀면서 편지의 맨 처음부터 차근차근 내용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와 반대로 말면 편지를 다 펴야지만 처음부터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방법은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존에는 정창원문서 등에서 역방향으로 말은 방법이 확인되어 고대에는 그렇게 했다는 설이 있었다가, 칠지문서의 확인으로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다. 암튼, 그렇게 말다가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일부 길게 잘라서 그 길게 자른 면으로 둥글게 말은 편지를 한바퀴 감싸고 매듭을 짓는다. 그리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덜 마른 상태에서 印을 찍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封泥다. 지금까지 봉니에 찍힌 인장에 대한 연구성과는 여럿 봤지만, 이처럼 종이문서를 어떻게 봉인하는지에 대해서는 처음 봤던 부분이라 정말 신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칠지문서에 남아있는 봉했던 띠의 방향과 형태를 통해 복원했다니~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고대의 出羽 지방을 다스리던 秋田城에서 발견된, 하급관원이 출자지에서 제출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1장의 편지때문에 밝혀지게 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추전성에 근무하는 '竹田繼依'라는 役人이 釜(철제 또는 동제가마솥)의 수납을 확인하기 위해서 蚶形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가, "부 1개를 확인했지만, 잊어버리거나 깜빡해서 未收(미처 못 거둔)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점을 다시 한번 지시하고 싶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상부에 보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蚶形의 蚶이 피조개(아카가이)의 옛 이름인 키사가이를 언급하며, 그 위치가 일본해에 접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즉, 그 곳에서 몰수한 가마솥은 製鹽用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한 편지가 쓰인 시간이 卯時(오후 5~7시)였으므로, 편지를 보낸 이가 다음 날 아침 驛家에서 제일 빨리 출발하는 國使(국내를 순회하는 국부의 役人)에게 부탁했을 것이라는 것까지 추정하였다.
그렇게 '竹田繼依'는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돌아올 때까지 역가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역가는 都에서 '7道(서울에 가까운 대화, 산성, 하내, 섭진, 화천 5국을 기내로 하여 그 외의 제국을 동해도, 동산도, 북륙도, 산음도, 산양도, 남해도, 서해도 등 7도로 나눠 서울에서 도마다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諸國'으로 통하는 각 도로에 설치된 것으로서 간선도로 상에서 30리(약 16㎞)마다 두어 왕래하는 사절이 그 곳에서 구비된 역마와 인부를 이용하게 한 시설이다. 이런 것들을 보니 정말 편지 1장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추정할 수 있어서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저자는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더 소개하고 있다. 1993년 東の上 유적에서 확인된 칠지문서에 그림이 그려진 것이 발견된 것이다(이는 최초 사례라고 한다). 그 유적은 武藏國分寺에서 발견된 東山道 武藏도로 유적을 직선으로 약 16㎞ 북상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미 약 12m 폭의 도로유적과 도로주변의 맣은 건물지 및 공방이 확인된 바 있기 때문에 역가 유적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었다. 또한 그 도로유적의 연장선상에서 다음 역가에 해당하는 지점에서는 驛長(역가의 장)이라고 적힌 묵서토기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물론 역가에는 많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스케치했을 수도 있지만, 회화 기법이 가볍고 붓의 움직임이 능수능란하여 저자는 이를 전문 화가에 국한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화가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도래했기 때문에(백제는 아닌가???) 저자는 이 회화를 그린 사람을 도래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3. 습서와 구구단에 대한 실물 자료가 확인됨
習書라고 하면, 글자 연습한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어느 날 목간에서 다음과 같은 글자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앞면)
'而察察察察察察察察察之之之之之之之之灼灼灼灼灼灼若若
(뒷면)
若若若若若若蕖蕖蕖出綠綠波波波波醲醲醲醲
어떤 글자들을 반복적으로 연습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뭘까? 저자는 고민하다가 上代 文學 연구의 일인자, 小島憲之의 자문을 받아『文選』제19장을 들춰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는 曹操의 아들 曹植(학문적 소양이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이 落水 강가에서 일찍이 사랑했던 甄 황후를 그리워하며 읊은 작품인「洛神賦」의 한 구절이었던 것이다. 그 구절을 잠시 옮기면 다음과 같다(혹시 무슨 뜻인지 아시는 분은 해석 좀~^^;).
追而察之灼若蕖出綠波 醲纖得哀脩短合度
『文選』이 6세기에 성립된 중국의 시문집으로서, 周에서 梁에 이르는 천 년간의 시문이 담겨 있어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일본 동북 변경 出羽國 추전성 내에서 근무하는 관인들의 소양 수준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고고학에서 지식관료층의 소양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벼루와 붓 정도가 고작인 것에 비한다면 정말 이러한 습서 자료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저자도 강조하고 있었는데, 습서를 단순히 낙서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고대의 役人은 '刀筆の使'(목간 등에 글자를 쓰고 잘못 썼을 때는 刀子라는 작은 칼로 깎아내고 다시 글을 썼다는 데에서 유래한 표현)이라고 불린 것처럼 문서 작성을 직무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행정문서를 작성하고 필요한 여러 문자를 연습하거나 하는 습서 하나하나에 율령국가의 지방행정 일부분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가까이 텍스트를 놓고 연습하거나 암송하면서 습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 역시 이런 습서 기록은 정말 중요한 자료라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필자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구구단[九九算]의 실물자료였다. 1964년 釜房댐 공사를 위한 긴급구제발굴이 5일간 실시되었고, 그 곳에서 헤이안시대 초기의 수혈주거지 1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철제 刀子, 사각 盆狀(동이 모양)의 칠기, 가죽 제품 일부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스에끼토기[須惠器]의 내측에 칠을 바른 상태의 종이가 확인되었다(보고서에는 이를 두고 '토기의 안에서 떡과 같은 물건이 보존되어 있다'라고 썼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1978년 이 자료 역시 칠지문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사를 하게 되었고, 칠지문서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앞)
九九八十一 八□□□□□□□ 便□□□□□□□ …
(옻칠면)
□□□□□自女
자아~앞면에 적힌 맨 앞의 다섯 글자를 한번 보자. 음운을 조금만 넣어 읽으면 우리가 많이 웅얼거리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구구팔십일'이다. 번역서를 보는 중간에도 놀랄 정도였으니, 이를 실물자료로 직접 봤을 저자의 감동이 어찌했을지 상상이 간다. 당시 일본에는 대학료(大學寮)에 算博士 2명과 算生 30명을 두었다고한다. 그리고 산생은 중국에서 전해진 각종 책들을 교과서로 하였으며, 그중『孫子算經』에 九九가 열기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사집으로 불리는『만엽집(萬葉集)』에도 구구단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목간 등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구구단은 2단부터가 아닌 이름 그대로 9단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기록된 칠지도에도 구구팔십일 다음에 팔이 나온 것은 '팔구칠십이'를 기록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실제 중국 漢代의 구구단에서도 1단은 빠져 있었다고 하니, 고대 동아시아에서 학생들이 외웠던 구구단 역시 지금 우리가 배우는 구구단과 똑같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구구단이 이렇게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이라니...정말 놀랐다.
4. 군단 편성과 병사 결근에 대한 당시 기록을 알 수 있음
당시 일본의 軍團은 기본적으로 병사 1,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國司의 지휘 아래 軍毅(대의 1인, 소의 2인) - 橋尉(5인) - 旅師(10인) - 隊正(20인)이 병사들을 통솔하고 사무직인 主帳이 있었다. 병사의 생활 · 행동상으로 10인 단위로 구성하며 그 단위로 火[카]라고 칭했는데(고대 당조에서도 10인을 火로 묶었는데,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10인을 火라고 불렀다니, 고대 삼국에서도 10인을 火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령에 상세한 규정이 있다고 하여도 제국 군단의 총수와 배치 등 구체적인 것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軍團印이 발견된 사례가 있다고 하지만, 군단이 제출한 사료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사료 중에서도 산견되어 개개의 군단명에서 실태를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하성에서 확인된 칠지문서를 통해 병사의 총수와 책임자(火長)의 이름, 사수의 명부, 당번병이 군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용 등이 확인된 것이다. 이처럼 다하성과 胆澤城 두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과 칠지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그 곳에 주둔했던 군단명과 상세한 내역 등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불어 단택성에서 발견된 칠지문서에는 '射手 2명과 健士(勳位가 있는 병사) 2명이 병 때문에 누워 있어 부임지로 갈 수 없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사수는 궁수이며, 건사는 무예가 뛰어난 자로 일반 병사와 달리 식량이 지급되는 병사라고 한다. 즉, 이런 병사들이 2명씩이나 병 때문에 부임지를 갈 수 없고, 番上(교대로 근무하는 것)할 수 없으니 이를 상부에 바로 보고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寫經生(행정관료 겸 필경사들)을 비롯한 하급 관인의 결근계 및 휴가신고서 190여 통이 정창원에서 확인된 바가 있다 한다. 또한, 결근계 뿐만 아니라 당시 병사의 장비를 검열한 장부도 확인되었는데, 이는 율령에 적힌 것과 일치하는 것이 많아 문헌을 뒷받침하는 고고자료의 가치를 제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군사생활사에 대한 많은 부분이 칠지문서로 확인되고 있는데, 이에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정말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내의 목간 자료에서는 솔직히 이런 군사생활사적인 측면이 많이 없는데, 이는 아마도 보안과 기밀이라는 측면에서 쉽게 파기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일본측의 이러한 자료는 정말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5. 문헌에서 확인하기 힘든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음
구구단 만큼이나 필자가 흥미롭게 본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計帳은 오늘날의 주민대장이라 할 수 있는데, 원칙적으로 1단계인 '手實'은 자기 신고가 원칙이다. 즉, 1단계로 개개인이 직접 자신의 이름과 나이, 특징 등을 작성한 문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모든 백성들이 글자를 몰랐으니 일부는 군의 역인이 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어왔다. 그리고 2단계로 개개인이 쓴 문서를 행정관료들이 깨끗하게 일정한 서식에 맞춰 다시 썼던 것이다. 하지만 정창원문서를 보면, 매년 작성된 계장에서 오탈자가 확인된 것이다. 즉, 매년 개개인이 자기신고서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행정관료가 작년에 작성된 것을 옮겨 적었다는 소리이며, 그 과정에서 대강 쓰다보니 전혀 다른 글자로 쓰거나, 탈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처럼 정창원문서에서 확인된 계장들을 통해 고대 일본 사회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칠지문서에 적힌 계장은 그보다 더 자세한 사실들을 담고 있었다. 계장역명에 대한 율령규정이 없고, 또 정창원문서에서도 일자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었는데, 칠지문서에서 일자가 명확히 기재된 계장역명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양파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듯이, 칠지문서를 파고들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더 나타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出擧(고리대금업)와 관련된 내용들도 칠지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눈길을 끌었다. 칠지문서를 통해 '봄 3월과 여름 5월 2회로 거의 동일하게 출거하고 있다.', '出擧額은 10~40까지 모두 10묶음을 단위로 한다.', '숫자상에서는 朱筆로 圈占(丸印)이 가해져 체크된 것을 나타낸다.', '9월 반납할 때에는 布로 代納도 하고 있다.' 등등 출거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들이 적혀 있었는데, 순간 고구려 초기 시행된 '진대법'이 떠올랐다. 이는 국내에서 확인된 목간 등지에서도 확인되는데 당시 고대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고리대금업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저자는 정창원문서를 통해 '당시 지방 유력자 중에서 國司와 결탁해 (검은) 돈을 번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즉, 벼를 빌린 농민이 죽으면 그 부채는 모두 면제된다는 맹점을 이용했다는 것인데, 면제에 해당하는 사망자를 써 놓은 명부를 보면 사망월은 3월과 5월, 6월이 압도적으로 많고 貸付額도 다른 월에 비해서 많다고 한다. 또한 12월, 1월, 2월은 이상하리만치 사망자가 0명이라고 한다. 이는 실제 출토된 칠지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봄 3월과 여름 5월이 貸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즉, 대부 기간에 그 이전에 사망한 농민 이름으로 다량의 벼를 빌린 후 사망신고를 하여 면제받는다는 교묘한 속임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작은 농민들의 힘으로 할 수 없고, 國司와 郡司가 결탁한 부정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중앙정부는 알면서도 필요한 재원만 확보되면 눈감아줬으며, 이후에는 정식으로 승인되었다고 한다(죽은 사람 이름 써서 남은 돈 해쳐먹는 것이??). 그동안 정창원문서에서 이상하게 생각됐던 사망명부가 칠지문서를 통해서 깔끔하게 해석된 것이니 이 어찌 중요한 자료가 아니라 하겠는가.
이상으로 칠지문서가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해봤다. 이밖에도 칠지문서는 단편적이나마 고대 일본의 인구를 추산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기도 하며, 기타 여러가지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칠지문서를 두고 靑木和夫 선생님이 '지하의 정창원문서'라고 명명했다니,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맞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 본서에서도 실제 칠지문서와 함께 정창원문서가 같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성격도 동일하고 보존된 성격도 닮았다. 차이점이라면 정창원문서가 비록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에 비해 지하의 정창원문서는 계속 그 양이 늘어나고 있고, 그 안에 담겨진 내용 또한 새로운 것들이 자꾸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목간이 가장 유용하면서도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는 문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삼국시대 당대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삼국사기』나『삼국유사』, 그리고 기타 중국 문헌의 단편적인 내용만을 고대사 연구에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간이 갖는 학문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그보다 한술 더 떠 칠지문서라고 하는 정말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새로운 고고자료에 주목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70년대에 처음 발견된 칠지문서가 빛을 보기까지 10여년의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 종이가 비쌌던만큼 고대 한국에서도 종이는 비싼 물품이었다. 하지만 고대 삼국에서 만들어진 종이가 동아시아에서 유명한 수출품으로 활용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당시 종이의 사용례는 일본보다는 한국이 더 활발했을 것이다. 단, 일본만큼 당시 한국에서도 옻칠의 제작이 활발했는지는 보다 두고 볼 일이다. 물론 창원 다호리 유적 등을 통해 봤을때 한국에서도 칠기 제작이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뭐라 단정짓기는 곤란할 듯 싶다.
암튼, 목간 이외의 문서 자료가 있다는 사실이 일단 놀랍고, 그것이 옻칠 제작시 사용되었던 종이덮개의 재활용품이라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형태가 덩어리 진 가죽 제품이라고 하니, 앞으로 필자도 발굴현장에서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면 한번 주의깊게 살펴봐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먼저 국내에서 확인된 각종 목간부터 공부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 흥분과 감동으로 읽은 책 한권에 대한 소개를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