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92)
*빈 잔 외 5편*
홍 진 기
언제나 내 곁에는
빈 잔이 놓여 있다.
가진 것 모두 담아도
차지 않는 이 잔을
단숨에
그대로 들면
은회색 허공이 된다.
언젠가 달빛 한 줄기
이 잔을 다녀가고
아내의 한숨 소리도
가끔은 드나들지만
시대의
증언을 풀면
전쟁같은 물이 고인다.
*낙엽을 쓸며*
혀 끝에 감겨 도는
녹차의 여운 같은
봄처럼 피어오른
여인의 향기 같은
안으로
익는 살내음을
나는 알고 있는가
해마다 이맘 때면
무심히 뜰을 걷다
버릇처럼 쓸쓸하게
낙엽을 쓸지마는
정말로
쓸어야 할 것을
나는 쓸고 있는가
*봄소식*
오밤중에도 내 귀는
열두 폭으로 열려 있었다
일천문을 닫고 사는
모진 세월을 생각하며
떨어도
문틈으로 새는 바람을
막지 않고 있었다
나목이 진저리치다
유령처럼 우는 밤이면
모닥불 사윈 잿빛같은
어둠을 열어제치고
어디쯤
봄이 오는 소리를
내 귀는 듣고 있었다.
*풍경소리*
바람 한 알 건드려도 너는 같이 노래했고
산새 하나 깃을 쳐도 뎅그렁 줄을 골라
속세에
흩어진 정을 온몸으로 말하였다
무섭도록 고요한 날 여운의 실을 뽑아
밤중만 깊어지면 오욕의 귀를 씻고
뎅그렁
달여울에도 후광으로 둘렸다
*아내의 손*
아직도 아내의 손은 땀기가 남아 있다
저승보다 더 시린 이 도시의 막장에서
옹성을
지키는 병사의
이마처럼 끈끈하다
아내의 손가락은 어쩌면 쓸쓸하다
서 돈 짜리 금가락지 들렀다 간 자리에
장난감
흑진주 만한
저승꽃이 피어 있다
*산촌 일기*
한뎃잠에 길들여진
저 자유의 빈 손짓
사는 일 짐이 된다며
소식조차 끊고 사는
누이의
모진 가슴처럼
떨리는 저 매화 가지
양지에 손을 내미는
민들레 속잎에서
포박을 감고 나온
상처들도 참지 못해
밤새워
울던 문풍지
목이 시린 저 청매화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사화집『火中蓮』 pp.123∼128)
◐홍진기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1979년 <현대문학> 자유시 천료
* 1980년 <시조문학> 시조 천료
* 한국문협, 국제펜클럽, 현대시협, 시조시협, 시조작가회원, 경남문협 시조분과위원장, 한국문학회 기획상임이사, 가락문학회장, 창원문협, 함안문협 회장 역임,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
* 창원대학교 평생교육원, 경남문예대학 강사
* 작품집 5권
* 창원시 문화상, 경남예술인상(본상), 경상남도 문화상(문학)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