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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본 |
1982년판 ꡔ조선력사ꡕ 고등중학교 4학년용 |
2002년판 ꡔ조선력사ꡕ 고등중학교 5학년용 |
해당 부분 전체 목차 |
제6장 1884년부르죠아혁명, 1894년농민전쟁과 부르죠아개혁(양력 사용) 제1절 1884년부르죠아혁명(111-117쪽) 제2절 1894년농민전쟁(118-127쪽, 10쪽) 제3절 1894년부르죠아개혁(128-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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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갑신정변, 1894년농민전쟁과 부르죠아개혁(음력 사용) 제1절 개화사상의 발생과 개화파의 형성(77-80쪽) 제2절 갑신정변(81-84쪽) 제3절 갑오농민전쟁(84-91쪽, 6.5쪽) 제4절 갑오개혁(91-95쪽) |
제 2 절 의
세 부 구 성 |
농민전쟁 전 나라의 형편, 농민봉기의 앙양 -갑신정변 실패 이후 외세침략상황 -천진조약 -쌀 수출과 방곡령 -미제 침략자의 침략실태 -봉건통치배들의 반동과 부패타락 -서울상인의 철시투쟁과 개성시민의 일본인 처단
1894년농민전쟁의 시작, 전주성 점령 -조병갑의 만석보, 물세 수탈 -전봉준 지도하의 고부 봉기 -보국안민, 척왜척양은 자주성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염원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충청도.경상도에서도 봉기
전주화의와 폐정개혁안 -청군 파견 요청과 휴전 제의 -전주화의 -폐정개혁안 분석 -집강소는 자치적 지방행정기관
일제의 무력간섭과 공주전투 -조선의 철병 요구,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 -일제의 경복궁 쿠데타, 청일전쟁 도발 -전봉준 농민군 10만 명 동원 -전투상황 서술 간략, 전봉준 사형 -실패원인: 투쟁목표 결여, 투쟁방법 오류 -의의: 봉건통치배.외래침략자에 타격, 부르죠아민족운동 발전의 추동력, 특히 1894년부르죠아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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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오농민전쟁은 아시아 3대항전의 하나 -중국 태평천국, 인도 시파이폭동 -20여만 농민군, 전국적 성격 -9세기, 12세기, 1467년, 1812년농민전쟁과의 비교 2. 농민전쟁의 시작 -잔인한 수탈자 조병갑: 82년판보다 조병갑의 악행을 상세히 서술 -갑오풍운의 총아 전봉준: 전창혁-전봉준-전해산 3대로 이어지는 애국투쟁 -고부농민폭동 -농민전쟁의 시작: 8천명의 농민,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및 <창의문> 인용 3. 농민군의 련속적인 승리, 전주성 점령 -농민군의 련속적인 승리: 백산전투, 황토현전투, 충청.경상도 봉기, 장성전투 이하 전주성 점령까지 82년판에 비해 소략 4. 일본, 청나라의 무력간섭, 전주화의와 집강소 -일본,청나라군대의 무력간섭: 82년판과 유사 -전주화의와 집강소: 27가지 요구, 82년판에 비해 축약 5. 농민전쟁의 재개, 공주대격젼 -전국적 성격 강조: 유생.양반, 관군과 하층지휘관, 각계각층, 충청.경상.강원.황해.평안도 -충청도 동학상층부의 반대와 설복 -일제침략군과 관군에게 <토벌>준비시간 제공 -목천세성산전투.리인전투.효포전투 등 전투상황 상세 -전봉준 이하 농민군 지휘자 사형 6. 력사적 교훈과 의의 -녹두가 수록 -실패원인 서술 상세화, “올바른 지도” 강조 -반침략반봉건투쟁의 력사, 부르죠아개혁 추동, 아시아반제민족투쟁의 새벽종 |
앞의 표를 중심으로 하여 1982년 판과 2002년 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공통점은 첫째, 고부봉기부터 시작하여 전주성 점령과 집강소 시기,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와 청일전쟁 도발, 공주대격전과 후퇴, 그리고 농민군 지휘부의 처형에 이르기까지는 대체로 다 서술하고 있다.
둘째, 2002년 판에서 농민전쟁이 재봉기할 때 ‘동학상층부’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뿐, 두 교과서 모두 동학과의 관련에 대해 전혀 서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앞서 정리한 북한 역사학계의 성과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용하지 않은 이유는, 북한의 교과서 서술지침을 입수하지 못한 상태라 확언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부정하려는 입장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학문적인 연구나 일반 시민 대상의 역사서에서는 이를 인정하더라도 남한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정도의 북한 학생들에게는 의식적으로 학습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의 소산이라고 보인다.
셋째, 실패원인으로 봉건통치제도 자체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제도를 세우지 못했다는 점, 전주성 점령 이후 서울로 직향하지 않고 군사기술적으로 우세한 적과 무모하게 정면전을 벌인 점, 일본침략자들의 무력간섭 등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전주화의에 대한 서술에서는 정부군과의 화의 체결이 불가피한 전술적 선택이었다고 하는 모순된 서술을 하고 있음도 공통적이다.
넷째, 두 교과서 모두 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로 반침략 반봉건 투쟁이라는 점, 곧이어 전개되는 1894년 갑오개혁을 추동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유물사관의 공식, 즉 발흥하는 부르죠아와 농민층의 동맹을 구성하려는 의도 하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당시 조선에는 부르죠아의 미성숙으로 인하여 혁신적 관료들이 부르죠아를 대신한 것으로 설정하고 이들에 의한 갑오개혁이 한국사회를 자본주의사회 단계로 추동한 것으로 치부하려는 의도의 소산이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욱 많이 나타난다. 첫째, 농민전쟁 배경 서술에서 1982년 판은 개항 이후 미곡수출과 중국∙일본상인의 침탈, 미제침략자들의 침략상황, 봉건통치배들의 부정부패와 수탈을 3쪽 분량에 걸쳐 서술하고 조병갑의 수탈은 간략하게 서술한 반면, 2002년 판은 도입부에서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 특징을 아시아와의 관련, 전국적∙전계층적 참여 양상 및 9세기 이후 1811년 평안도농민전쟁까지 여타 농민전쟁과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조병갑의 수탈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1982년 판에서 미제국주의의 침략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1980년 광주항쟁 직후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둘째, 2002년 판에서는 전봉준 개인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1882년 판에서는 고부봉기와 농민군의 재기 부분에서 전봉준의 이름을 거명할 뿐인데, 2002년 판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문장에서 전봉준을 주어로 설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녹두장군과 「녹두가」라는 민간전승까지 소개하고 있으며, 애국투쟁이 전창혁-전봉준-전해산 등 3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해산이 전봉준의 아들이라는 것은 금시초문이다.14) 이러한 역사 왜곡은 김응우-김형직-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가계와 연관하여 드라마틱하게 역사를 구성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1982년 판이 농민군과 지배계층과의 대립∙갈등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2002년 판은 그보다는 일제의 침략과 그에 저항하는 양상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까지 전투상황, 폐정개혁안, 집강소 등에 대해서 1982년 판이 상세하게 서술한 반면, 2002년 판은 간략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고 있다.
반면, 농민군의 재기와 공주 전투 이후까지의 상황에 대해 1982년 판이 단조로운 서술로 일관한 데 반하여 2002년 판은 공주 전투 이후 12월까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82년 판에서 농민군이 약 10만 명에 이른다고 한 데 반하여 2002년 판에서는 애국적인 유생. 양반, 관군병사들과 하층지휘관, 각계각층 인민들이 모여들어 23만 명 가량이나 될 뿐 아니라, 충청. 경상. 강원. 황해. 평안도 등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하였으며, 봉기에 반대하는 충청도 동학상층부까지 설복하여 10월 21일에야 봉기하게 되었다고 하여 반침략투쟁에 궐기하는 전민족적 투쟁이라는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넷째, 농민전쟁 실패원인을 지적할 때 2002년 판에서는 각계각층 광범한 인민들의 조직적인 폭력투쟁으로 봉건제도 자체를 뒤엎어야 한다는 사상의식을 가르쳐줄 로동계급의 당이 없었으며, 이로부터 인민들의 자주성을 위한 혁명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지도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앞서 전봉준을 서술문장의 주어로 내세운 것과 같은 의도, 즉 투쟁에서 지도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는 결국 주체사관에서 핵심적인 부분인 「수령론」을 역사의 교훈으로 설정하려는 것이다.
이상에서 비교 분석하였듯이, 2002년 판 역사교과서에서는 1982년 판과 달리, 갑오농민전쟁이 지역적으로는 전국을, 계층적으로는 애국적인 인민들 모두를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전개된 전민족적 투쟁임을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때의 투쟁 대상은 봉건정부보다는 일본제국주의였으며, 투쟁 과정에서는 지도자 또는 지도계급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논리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2002년 판 고등중학교 역사교과서 ꡔ조선력사ꡕ 제2학년용에서도 확인된다. 고등중학교 1-2학년용 ꡔ조선력사ꡕ는 한국역사에서 중요한 소재들을 이야기체로 알기 쉽게 서술한 교과서인데,15) 「제27과 애국에 피를 바친 전봉준」이란 제목하에 농민전쟁과 전봉준의 활동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농민군은 봉건통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튼튼히 하고 인민들을 비참한 생활에서 건져 낼데 대한 투쟁목표를 내세웠습니다”라고 하여 계급투쟁을 서술하지만, 그러한 내용은 2쪽 반 분량 중에서 10줄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모두는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농민군의 전투를 서술하여 일제에 대한 민족적 증오심을 강조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또한 교과서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로는 동학 그리고 천도교를 민족종교로 규정하고 그 역사에서의 진보적 역할, 농민전쟁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 밑에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제기되기 시작한 “우리민족 제일주의”라는 민족주의적 정향의 강화가 깔려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우리민족 제일주의”란 어떠한 내용을 갖는 것인가?
북한측 문헌에 의하면, 이는 “인민대중의 정치적 자주성,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진보를 이룩하려는 민족적 염원을 실현하며 진보적 사회제도에 대한 인민대중의 열망, 자주, 평화, 친선이 지배하는 새 세계를 건설하려는 인민대중의 지향과 투쟁정신을 집대성한 민족의식으로서...역사상에 있었던 모든 민족 의식의 긍정점을 투철한 민족자주정신에 바탕하여 새롭게 음미, 해석하여 계승하고 인민대중의 자주성 실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롭게 정립된 민족의식 발전의 최고 형태”로 규정되었다.16)
그리고 “우리민족 제일주의” 정신을 형성하기 위한 객관적 기초는 크게 두 가지, 즉 자기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창조한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 모든 민족이 다 고유한 내용과 방식으로 인류 역사에 공동으로 기여했다는 인식이다.
여기서 자기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시대의 지도사상을 창시한 수령, 시대의 지도사상을 자기 민족 운명 개척을 위한 투쟁에 올바르게 구현한 민족의 지도사상을 밝힌 탁월한 지도자를 모신 민족만이 가질 수 있다라고 하여 주체사상에서 이론화한 수령론으로 귀결되고 있다.17)
이렇게 볼 때 북한의 “우리민족 제일주의”는, 과학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투쟁에 올바로 구현한 수령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혈통∙언어∙문화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남한의 민족주의 역사학의 논리와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맺음말
1990년대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에서 두드러진 점은 북한사회의 국제적 고립 속에서 등장한 “우리민족 제일주의”에 입각하여 동학의 역할에 대한 높은 평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전민족적∙전국적 항쟁으로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1999년 이후 고급중학교에서 사용하는 역사교과서 ꡔ조선력사ꡕ 제5학년용 역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역사서술에서의 변화는 남한 역사학계의 변화와도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한역사학계에서도 1960년대이래 ‘동학외피론’이 일부 연구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까지 지배적인 연구경향을 이루었으나, 이후부터는 서서히 동학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고등학교용 역사교과서에도 동학의 창도부터 전파과정, 농민전쟁과의 관련성 등을 긍정적∙진보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남북한 역사학계가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에 대해서는 한국역사연구회 북한사학사연구반, 2003 ꡔ북한의 역사만들기ꡕ 71-83쪽 참조.
2) 김일성,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1977. 9. 5), ꡔ김일성저작집ꡕ 32, 374~375쪽(김한종, 2002 「북한 역사교육의 목적과 교육과정의 변화」 국사편찬위원회 편, ꡔ북한의 역사학(1)ꡕ 133-134쪽에서 재인용 .
3) 김한종, 위의 글, 134-135쪽
4) 김한종, 위의 글, 136쪽 및 지수걸, 「북한 중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서술체계와 내용」, 위의 책, 146-148쪽 참조.
5) 위에 인용한 지수걸의 글은 1994년의 통사체 ꡔ조선력사ꡕ와 1999년의 이야기체 ꡔ조선력사ꡕ를 분석한 것이다.
6) 양상현, 1989 「1894년농민전쟁과 항일의병전쟁」 ꡔ남북한 역사인식 비교강의(근현대편)ꡕ 일송정, 126-130쪽
7) 이종현, 1984 ꡔ근대조선력사ꡕ(일송정 복간본, 1989), 132쪽. 이 책은 북한이 한국역사를 집대성한 ꡔ조선전사ꡕ 13권(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0) 근대편을 축약해 놓은 것이다.
8) 위의 책, 134-164쪽.
9) 본서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갑오농민전쟁발생의 사회경제적 요인과 력사적 필연성」(원종규), 「최제우와 동학」(리종현), 「동학의 철학적 기초와 정치적 리념」(량만석), 「동학운동과 삼례, 보은 집회투쟁」(리택권),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김길신), 「전주화의와 집강소의 개혁활동」(박득준), 「갑오농민군의 거족적 항쟁호소와 정부의 대응」(김은주), 「갑오농민군의 반일투쟁」(김경수), ꡔ일본군국주의는 갑오농민전쟁의 교살자」(강석희), 「갑오농민전쟁의 성격과 특징」(허종호), 「갑오농민전쟁의 력사적 경험과 교훈」(박영해), 「일제의 천도교분렬와해책동과 그 후과」(최태진) 등 제목들에서만 보더라도 반봉건적 측면보다는 반침략투쟁의 측면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10) 원종규 외, ꡔ갑오농민전쟁 100돌기념논문집ꡕ, 39쪽
11) 량만석, 「동학의 철학적 기초와 정치적 리념」 ꡔ갑오농민전쟁 100돌 기념논문집ꡕ, 61쪽
12) 위의 책, 79쪽.
13) 위의 책, 176쪽.
14) 동학농민군의 후손을 추적 인터뷰한 기록에서도 전봉준의 아들은 전동일∙전장수 두 명이며 전봉준의 방계 후손 정도가 밝혀져 있을 뿐, 그 아들이 의병투쟁을 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전해산이 전봉준과 관련된다는 사실도 그간의 의병투쟁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다(역사문제연구소, 1997 「동학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방손 용호」 ꡔ전봉준과 그의 동지들ꡕ 역사비평사, 26-31쪽).
15) 이에 대해서는 지수걸, 앞의 글, 179-187쪽 참조.
16) 고영환, 1989 ꡔ우리민족제일주의론ꡕ 평양출판사, 93-94쪽.
17) 위의 책, 116~117쪽, 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