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주 설교 >
믿음으로 가꾸는 미래
성경 / 히브리서 10: 32 - 11: 3
지난 목요일 기독교 사회운동 연합 주최로 대통령 선거 평가와 새로운 선교정책을 위한 토론회가 백주년 기념관 소강당에서 있었습니다. 이날 주제 발제로 나선 최장집 교수는 새 정권하에서 다른 부문운동(노동, 농민등)들의 약화가 예상되지만 기독교운동은 그것이 지니는 도덕적 권위로 인권, 양심, 사회윤리문제,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정책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최교수는 93년 이후 기독교운동이 70년대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때처럼 그 역할을 증진시켜야 할것을 주장하였던 거지요. 김상근 목사는 최근 한교협등 공교회 조직이 사회선교의 중심축을 민주화,민생, 통일문제에서 환경,생명운동으로 전환하려는데에 이론을 제기하면서 개혁적 방향을 희석화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앞으로 교회는 개혁지향 블럭의 광범한 연대를 형성하는 조력자로 나서야 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번 토론회는 대선 이후 침체되어 있던 기독교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운동의 원칙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증대되는 기독교운동의 역할에 대한 요구에 어떻게 실천적인 응답을 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은 빠져버려 대안없는 토론회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속빈 강정이 되버렸다고나 할까요? 운동의 주체는 어디가 되야하는지, 효율적인 조직구도는 어떤 것인지, 대중들의 요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일할 것인지... 아직도 오리무중에 쌓여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사회운동 그룹 전반이 힘을 상실해 가고 있으니 더욱 안타까운 노릇이지요.
운동 조직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의미를 추구한달찌 무슨 개혁운동 전선에 다시 나선달찌, 이런일을 하는 것이 바보스럽기도하고, 혹 그런 생각은 있어도 몸이 말을 듣지않아 주저앉아 버리기 일쑤입니다. 요즘 각 민중교회마다 실무자를 구하지 못해 아우성입니다. 우리교회도 공부방 교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보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저는 감리교 투신학교 모임에 가서 민중교회운동을 소개하고 우리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및 평가를 가지고 토론하였습니다. 아직도 이런운동에 관심갖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구요. 최근 우리 사회 전반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사회를 유지시켜온 도덕적 윤리적 가치체계가 와해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한 사회의 미래는 그 사회의 교육이 말해준다는 경구를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 수서비리니, 정보사 터 사기사건이니 하면서 떠들썩 했어도 우리사회가 이렇게 절망적이라 느끼지는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보루인 교육계가 밑으로 부터 철저히 썩어있음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미래 모습이 어찌될 것인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렇게 썩은 교육계에 자신들의 희생을 무릎쓰고 교육의 발전을 위해 아직도 거리를 헤메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 없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시대의 격동기를 사는 우리에게 그런 점에서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아직 우리는 우리사회의 미래가 어찌될찌 예상하기 어려운 혼돈속에 막연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램으로만 가지고 있을뿐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 힘있게 나서지 못합니다. 왠지 그런일에 나서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되는 것같기도 하고 또 미련한 짓같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대충 자기와 주변이 편안하고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자식의 출세의 발판이 되는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라면 부정한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는한, 그것도 지도층에 있는 이들이 그러는 한 이사회의 미래가 밝을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사회를 뜯어고치고자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는 이들이 없는 한 우리 사회의 미래는 부정과 부패로 뒤덮여 멸망으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때 우리는 바울 선생의 권면에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바울 선생은 너희가 처음에 빛을 받고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온 시절을 상기해 보라고 권면합니다(32절).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인간해방과 하나님나라의 빛을 발견하고 그런 미래를 가꾸려다 많은 고난을 받았읍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 하지않고 그 시련들을 견디어 냄으로써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현대역사속에서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싸웠던 시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설립되던해 얼마 안되는 식구들이었지만 6월 민주화 투쟁과 그로인해 쟁취한 대통령 선거에 동참하년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듬해 8월 노동열사의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2명의 교우가 구속되었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한명의 교우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고 한명의 교우가 해고된 상태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출세와 영달보다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시절이 엊그제 입니다. 바울 선생의 표현대로 '갇힌자를 동정하고 너희의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것(34절)'은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2. 바울 선생은 계속해서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약속된 미래를 얻기위해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35-36).
잠시 잠간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니 뒤로물러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원을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곧 이루게될 새하늘과 새땅을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모양과 형태는 다르지만 보다 교묘한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읍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전에는 채찍으로 우리의 신념을 꺽으려 하였지만 이제는 달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세상은 귀찮은 일에 끼어들지말고 한발 물러서서 일신의 영달이나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3. 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울선생은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은 미래를 여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없는 것들을 확증해 주기 때문(11:1)"입니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고 일했던 선배들이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열어왔고 그것이 곧 역사의 진보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현실에 집착하여 풍랑에 휩쓸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복된 미래를 생각하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전심전력 합니다. 어느 유명한 곡예사가 그 문하생에게 공중그네 타는 법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무하생은 그가 타야할 그네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그만 두려움에 빠져 버렸습니다. 떨어져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두려워서 몸이 움추려들고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너는 할 수 있단다. 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마. 너의 온 마음을 그네에 얹어 놓으면 네 몸이 그대로 따라 움직일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조건이 좋지않고, 자신이 없을 수록 믿음을 가지고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하늘과 새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잠시 절망의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과 상황이 올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 전심전력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가꾸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