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원군과의 대립
1868년 (戊辰 고종5) 윤4월에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 1868 - 1880)이 태어났다. 궁인 이씨는 살결이 희고 키가 훤칠한 미인이었는데 완화군을 낳고 영보당이라는 당호를 얻었다. 이 첫 왕자가 영보당의 미모와 고종의 후덕함이 조화된 결함없는 용모를 가졌기에 완화(完和)라는 군호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완화군의 탄생을 가장 반긴 것은 대왕대비 조씨였다. 그의 아들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전계군(全溪君)의 3남 원범을 철종으로 삼았고 철종마저 후사가 없어 흥선군의 2남을 불러들여 고종으로 삼았던 대왕대비였기에 왕손을 얻었다는 것은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었다. 완화군이 13세 갑자기 죽자 대왕대비는 완화군이 생시에 즐기던 군밤을 상청에 올리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는 것만 보아도 대왕대비가 얼마나 애지중지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물론 고종과 대원군의 기쁨도 컸다. 고종에게는 첫아들이요, 대원군에게는 자기의 혈통을 이은 첫 왕손이었다. 궐내의 이런 기쁨이 명성황후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적서(嫡庶)의 차별이 없었던 왕실이었으므로 나중에 명성황후에게서 왕자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세자가 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5대 조모인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급기야 궁궐에서 쫓겨나게된 기막힌 사연을 기억하고 있던 명성황후로서는 심상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쁨의 한켠에 비켜서 있는 명성황후와 미움의 표적이 된 대원군과의 거리는 이미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명성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얻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전개하는 한편 대원군의 반대세력을 규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민승호, 민규호 등 근친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대원군에게 중용되지 못한 대왕대비의 친정조카 조영하와 조성하에게 접근하여 민씨 일족과 결탁하게 하였다. 실각한 안동 김씨들을 부르고, 대원군과 친하지 않은 조두순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대원군의 큰아들 재면(載冕)을 교묘히 이용하여 대원군측의 기밀을 캐내고 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의 불만을 부추겼다. 또한 서원철폐와 호포제 실시로 앙앙불락해 있는 양반 및 유림들과도 제휴하면서 최익현 같은 유림의 거물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 1866년부터 대원군이 몰락하는 1873년까지 7년 동안 30여명의 명성황후 친족들이 등용되었는데 요직에 있었던 주요 민씨들은 다음과 같다.
민승호(閔升鎬) - 1866년 이조참의, 1867년 1월 호조참판, 1872년 2월 형조판서, 1873년 9월 병조판서.
민규호(閔奎鎬) - 1867년 8월 이조참의, 1869년 1월 형조참판, 1873년 2월 이조판서.
민겸호(閔謙鎬) - 1872년 3월 이조참의, 1872년 9월 대사성, 1873년 6월 형조참판.
민태호(閔台鎬) - 1873년 황해도 관찰사.
민치구(閔致久) - 1869년 5월 공조판서.
민치상(閔致庠) - 1870년 5월 공조판서, 1872년 8월 예조판서, 1872년 10월 공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
1872년 (辛未 고종 8) 11월 4일 고종의 사랑을 독점하는데 성공한 명성황후가 마침내 원자를 낳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통변불능이라는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원자는 4일만인 11월 8일 사망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의 슬픔은 극에 달했고 그 원인을 대원군이 보낸 산삼(山蔘)탕과 연관지으면서 대원군에 대한 미운 감정은 증오로 변해갔다.
대원군의 척왜(斥倭)정책은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한론이 공론에 그치지 않고 병력동원설로 발전하면서 조정내의 의견이 분분하자 이를 계기로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안으로 고종에게 대원군만 믿어 정권을 그대로 위임해 둔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국란이 다시 올지 모른다고 진언하는 동시에 밖으로는 이항로(李恒老)의 수제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로 임명하여 대원군 휘하 대신들의 무능을 상소로 통박케 했다.
대원군의 퇴진
1873년 10월 25일에 올려진 최익현의 상소를 본 고종은 「충성된 마음으로 나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라 칭찬하며 그를 일약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대원군은 자기 측근들을 동원하여 최익현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10월 26일 좌의정 강노, 우의정 한계원이 최익현의 상소를 철회하라는 연차상소(聯箚上疏)를 올렸고, 27일에는 영돈녕부사 홍순목이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의 대답에는 변함이 없없다. 이날 사간원과 사헌부, 승정원 관리들도 최익현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28일 성균관 유생들이 최익현의 상소문중에 명륜(明倫)이란 두글자를 모독한 구절이 있다하여 권당(捲堂: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그러나 고종은 도리어 유생들의 과거 응시자격을 정지하는 정거(停擧)의 처분을 내리고, 최익현을 탄핵하는 대간과 여러 조신들을 모조리 파직시켰다. 명성황후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29일 장령 홍시형에게 만동묘와 서원을 다시 세우고 호포제를 혁파하며, 원납전과 결전을 폐지하고, 백성을 수탈하는 행위 일체 금단하며, 청전(淸錢)의 유통을 금하라는 구폐칠조를 상소하게 했다. 고종은 그를 가상히 여겨 부수찬에 임명하고 8도에 교를 내려 원납전 및 결전을 폐지토록 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힘겨루기가 절정으로 치달은 11월 3일 최익현은 대원군을 직접 겨냥한 상소문을 올렸다. 『전하께서 어리신 것을 기화로 정치를 마음대로 전횡하였다』면서 대원군이 이끌고 온 정치전반을 공격한 다음 『임금이 재위하는 동안 종친된 자에게는 그 지위를 높이 받들고 녹을 후하게 하는데 그칠 것이요, 국정에 관여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대원군의 거세를 강력히 주장했다. 최익현을 처벌해야 한다는 대원군 측의 상소가 또 다시 빗발쳤다.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가 과격했음을 지적하고 그를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대원군의 반발을 무마하는 한편 혹시 있을지도 모를 암살의 위험으로부터 최익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있다.
1873년 (癸酉 고종 10) 11월 5일 마침내 고종은 친정(親政)을 선포했다. 국왕 친정선포의 명령이 조보(朝報)에 실려 전국 방방곡곡에로 퍼져나갔다. 창덕궁에서 운현궁으로 통하는 2개의 문, 임금 전용의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도 막아 버렸다. 대원군의 권력에는 국법의 근거가 없었다. 임금이 어리다는 이유로 집정이 되었으나 국법으로는 항상 임금이 최고 권력자로서 명령과 포고는 모두 임금의 이름으로 내려지고 있었다. 고종의 나이 21세 『훌륭히 어른이 되신 임금이 예지와 인덕으로 친정을 하시는 것이 지당하다』고 하니 대원군이 그것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대원군은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 산장에 나가 있다가 덕산군 가야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 묘소에 성묘한 뒤 양주군 직곡(直谷) 산장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대원군이 53세, 명성황후가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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