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하는 공부
부처 앞에 공양하는 일이 불공인데
그 공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감사의 공양, 사죄의 공양, 사랑의 공양, 미움의 공양, 은혜의 공양, 기도의 공양, 몸과 마음을 다 바칠수 있는 생사의 공양등.........
그때 그 일에 따라 하여지는 공양은 다양하다.
그런데 그런 공양을 하기까지는 먼저 내 마음에서 결정 즉 자성의 정이 세워져야 한다.
결정하기 까지의 내 마음에 공들이는 공양이 더 중요하다.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 불공하는 법인데 부처란 누구인가?
바로 부처는 나를 포함한 모두이다.
그런데 불공하라고 하면
나에게 공들이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공들이는 것만 생각한다.
부처에게 불공하는 일은 누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양을 받은 부처가 배은할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저에게 어떻게 했는데" 하며 나도 돌아서 버릴 것인가?
만약 그런다면 그것은 불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불공법이라 하지 않고 불공하는 법이라고 하신 것이다.
불공하는 길은 바로 내가 나에게 먼저하는 것이다.
“왜 나에게 공양을 받은 부처가 나를 배반 하였을까?” 하고
내 자신이 먼저 깊이 생각해 보는 불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반드시 이유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였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사죄를 하게 될 것이다.
사죄하면 돌아서 버린 상대 부처가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 원인을 파 해치지 않고 불공한다고
선물도 주고 그 사람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해보지만
그것은 내 마음을 바꾸어 가지 않고
상대만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니 불공이 아닌 처세에 불과하다.
때문에 또 다시 배반하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원망의 마음만 커 갈뿐이다.
그러니 상대에게 나를 믿어라가 아니고
먼저 내가 상대를 믿을 수 있는 근원을 파헤치라!
그것이 불공하는 일이다.
신정법문
지난해는 유난히도 많은 천재와 인재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큰 아픔을 겪었던 한 해였습니다. 원기 91년(2006)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겪은 이 아픔으로 모든 숙업(宿業)을 청산하고 국가와 세계와 교단의 앞길에 큰 희망이 깃들며 전 인류와 전 국민과 재가출가 우리 모두에게 법신불 사은(四恩)의 가호와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일찍이 대종사님께서는 「앞으로의 시대는 사람들의 지견이 크게 열리는 시대라 죄복(罪福)과 고락(苦樂)의 근본처(根本處)를 알게 되어 우주만유(宇宙萬有) 전체 가운데에서 복락을 구하게 된다」 하시며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법을 크게 드러내시었습니다.
☞ 죄복과 고락의 근원처가 어디인가?
바로 나에게 있다
내가 죄복의 주제자이고 고락의 주제자이다.
그러니 먼저 일어나는 내 마음을 보라
그리고 그 마음을 없게 하는 공을 드리라
그럼 내가 부처임이 드러나지고 부처임을 아니 상대도 부처로 보인다
그러면 상대에게 공을 드리되 빈 부처의 마음으로 하게 되어진다.
이것이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신앙이다.
또한 「인연작복(因緣作福)과 부귀빈천(富貴貧賤) 되는 것이 다생겁래(多生劫來)를 내왕하면서 불공을 잘하고 못하는데 있다」하시며 「실지불공(實地佛供)」과 「진리불공(眞理佛供)」의 원리까지 밝혀 주셨습니다.
정산종사께서는 「자기불공(自己佛供)」과 「상대불공(相對佛供)」법을,
대산종사께서는 「불석신명불공(不惜身命佛供) 금욕난행불공(禁慾難行佛供) 희사만행불공(喜捨萬行佛供)」법을 밝혀주셨으니
이는 다 불공을 통해 자타간 우리 모두의 앞길을 열어주시고 살려주시고 밝혀주신 자비 지극하신 법문(法門)들입니다.
☞ 인연작복(因緣作福)과 부귀빈천(富貴貧賤) 되는 것이
왜 불공을 잘하고 못하는데 있다고 하셨는가?
사람의 마음은 원래 좋은 사람 낮은 사람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밉게 보면 상대도 나를 미워한다.
내가 이쁘게 보면 상대도 나를 이쁘게 본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내가 고정시키고 보면
그 사람은 변해지지 않는다.
고정시킨 나의 틀을 벗기도 보면
원래 없는 빈 마음으로 보면 이미 상대도 변해져 있다.
그러니 상생 상극의 기운은 내 안에서 내가 막고 트고 한다.
내가 이뻐하고 잘해 준 만큼 상대는 나를 좋아하고 잘 해준다.
내가 어쩌다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보호해주고 감싸 줄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나로부터 은혜를 입고 내가 보호하고 감싸준 사람이 나도 감싸주고 보호해준다.
그것이 바로 인연작복을 잘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어느 처지에 있어도 도움을 받는 부귀자이다.
그러기에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사람마다에게 불공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당하는 자에게 비는 불공이다.
즉 천지에게 당한 죄복 천지에게 비는
부모
동포
법률에게 비는 실지 불공이다.
또 그런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불공을 잘한 사람이고 상대에게도 불공을 잘한 사람이다.
「불석신명불공(不惜身命佛供) 금욕난행불공(禁慾難行佛供) 희사만행불공(喜捨萬行佛供)」
☞ 나를 낱 없이 바칠 수 있다면 나라는 것이 비워져야 한다.
나를 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순간 일어나는 마음을 보고 원래 마음을 챙기면 비원진다.
일어나는 마음이 보이면 내가 나를 보고 웃어진다.
나를 보고 웃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고 낱없이 지금 너에게 바치는 불공이 되어진다.
이순간 불석 신명이 된다.
나를 보고 또 보고 .... 하는 공부를 하면
하고 싶은 것을 안하게 되어지는 금욕 난행의 불공도 나오게 되어진다.
나를 보지 않고 억지로 참고 참고 참고 또 참고는 잘수 없다.
설사 그렇게 참고 살다보면 인내의 힘이 길러져서 단이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또 하나 가슴에 응어리도 쌓인다.
즉 한이 쌓인다.
그래서 가슴애피라는 병도 얻어진다.
그런데 참을수 없는 그것을 참을 수 있는 길이 바로 나를 보며
그 때 그 때 원래 마음에 비추어 녹여버리는 것이더라
그것이 나의 마음을 녹이는 금욕 난행의 불공이다.
그렇게 녹여지는 마음을 볼수 있어야
이 법 만난 기쁨이 가슴에 자리하게 되어진다..
고가 고가 아니고 죄도 죄가 아니라 하시듯이
가시밭길이 가시발길이 아니라 오히려 공부시켜주는 고마운 은혜가 되어지는 것이 바로 내 마음에 공들이는 공부더라
이 일에 가쁘게 응할 수 있는 희사만행이 나와지더라
내가 상대를 향해서 불공이 안 되고 원망이 나올 때는
그 원망하는 마음을 먼저 보라
‘~없다면’이라는 법문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으로 공부하게 해주니 감사가 되어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분야 분야에서 자기만의 특성을 개발하면서 살아간다.
때문에 그 사람이 가지는 자기만의 기술이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일에 대한 기술이 바로 그동안 배우고 길러 축적이 된 힘이고
그 일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 일에 대한 부처이다.
또 원래 자리에서 보면 또 다 부처이다.
부처 아님이 없다.
그래서 곳곳이 부처라 하신 것이고
그 상대를 부처로 볼수 있도록 내가 나에게 불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부처로 만들고 보면
주방에 가면 주방장이 요리 여래 부처요,
공장에 가면 기술자가 물건 만드는 여래 부처요,
연구소에 가면 박사부처, 어린이는 천진부처, 농부는 농사부처이다.
부처 아님이 없다.
그래서 모두 나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다.
내가 부처임을 알면 다 부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