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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m][삼상25:28]-[삼상31:13]
[h.k.m 주석] 사무엘상 7
성 경: [삼상25:28]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 여기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의 불미스런 행동이 자신 때문임을 재차 언급한다(24, 25절).
여호와께서 반드시...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권(王權)을 굳건하게 하실 것을 가리킨다(삼하 7:11, 26, 27; 왕상 2;24; 11:38). 그런데 여기의 `집'(*, 바이트)은 `가문', `일족'이란 의미이다(창 12:1; 삼하 3;6;7:16). 그리고 `든든한'(*, 네에만)은 `신뢰하다', `믿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만'(*)의 수동형 분사이다. 특히 이 단어는 신적(神的)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시 89:28, 29; 사 55:3). 따라서 여기의 `든든한 집을 세우리니'라는 말은 (1)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며 (2) 다윗의 후손 중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 2:10)를 통하여(마 1:1)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실 것(고전 15:25; 빌 2:11)이라는 `다윗 언약'을 예시하는 말임이 분명하다(삼하 7:11).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은 예언적 영안(霙眼)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한편 이같은 예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의하여 이미 언급된 바 있었다(2:10).
이는(*, 키) - 이 단어는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성전(聖戰)을 가리킨다(18:17; 삼하 5:19-23). 아비가일은 이처럼 다윗이 `성전(聖戰)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임을 강력히 시사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나발을 죽여 손에 피를 흘리는 사사로운 보복을 중지토록 하려고 한다. 아무튼 아비가일이 여기서 `성전 수행(修行)'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한조건처럼 언급한 까닭은, `성전수행'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그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다윗도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비가일은 `성전'(聖戰)과 `왕권'(王權)을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즉 그 두 가지 해석은 (1)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른 다윗의 형통(Smith, Lagne,Keil), (2) 다윗의 윤리.도덕적 무흠(Hertzberg, Klein)등이다. 그런데 본 문맥은 첫째, 다윗의 왕권이 굳건하게 확립될 것을 말하고 있으며 둘째, 본절을 이은 29절의 내용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다룬다는 점에서, (1)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아무튼 이와 같은 축복스런 예언을 언급함으로써, 아비가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소한 일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변한다.
성 경: [삼상25:29]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본절은 28절의 끝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일어나서 - 여기서 `사람'(*, 아담)은 단수라는 점에서, 다윗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했던 한 인물 `사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아비가일은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 말은 더넓은 의미에서 사울처럼 다윗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Fay).
내 주의 생명은...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 이 은유적 표현은 값진 보화나 귀중한 물건의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그것을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서 유래했다(Abarbanel, Targum, Talmud). 한편 여기서 `싸개'(*, 체로르)는 `주머니' 또는 `보자기'(bundle, KJV)를 가리킨다(욥 14:17; 잠7:20). 아무튼 본 문구는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하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여호와의 불꽃같은 눈이 다윗의 생명을 항상 지켜 보호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매로 던지듯...던지시리이다 - 오랫동안 물매를 사용했으며 심지어는 그것으로 블레셋의 용장 골리앗을 죽이기까지 했던(17:49) 다윗은, 한 번 던져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물맷돌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원수의 생명을 물맷돌에 비유함으로써, 원수의 회복 불가능한 완전한 멸망을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아비가일은 `생명싸개'(*, 체로르 하하임;the bundle of life) 속에 곱게 싸여 여호와의 품속에 간직되어 있는 다윗의 생명과, `물매 속의 물매돌'처럼 획획 돌려져 멀리 날려 버려질 원수의 생명을 대조시킴으로써,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기원하고 또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25:30]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여호와께서...하신 말씀 - 이것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16:13)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약속받은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별도의 게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에도 별도의 계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이썽아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총명하고 신앙적인 여인 아비가일은 다윗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말씀을 아마도 선지 생도들과의 교제 등을 통하여 알고, 오늘날 이처럼 성숙한 예언적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Keil, Fay).
모든 선을...행하사 - 구체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왕위에 올리는 일일 것이다.
지도자(*, 나기드) - 엄밀히 말하여 이 말은 `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9:16; 10:1).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왕'을 의미하는 `멜렉'(*)대신에 이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그 당시 사울이라는 `왕'(멜렉)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이 `나기드'는 왕에 대한 조심스러운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5:31]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본절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나발을 죽이지 않을 경우, 다윗은 후일 왕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슬퍼하실 것도 없고 - 여기서 `슬퍼하실 것'(*, 레푸카)은 `거침돌이 될 것'이란 뜻이다. 순간의 격분과 분노로 사람을 죽인 후 자신의 잘못을 나중에 개달았을 때, 그 사람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즉 두고 두고 양심의 거침돌이 되어 괴롭힐 것이다. 바로 그같은 예 중의 하나가 바로 밧세바 여인과의 간통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남편 우리아를 죽였다가 다윗이 겪어야 했던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겠는가(삼하 11:14-21; 시편 51편)!.
마음에 걸리는 것 - 여기서 `걸리는 것'(*, 레미크숄)도 앞의 `슬프게 하는 것'처럼 `걸림이 되다'란 의미이다(렘 50:32).
후대하신 때 -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올리실 때'를 가리킨다.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 아비가일의 이 청원은 나발을 죽이지 말아달라는 자신의 청원을 들음으로써, 다윗이 후일 왕이 된 후에 마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공로임을 은연 중에 내세우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가일의 이 말은 자신의 공치사(功致辭) 자체에 핵심이 있지는 않다. 다만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아비가일은 어떻게 하든지 다윗이 자신의 간청을 듣게끔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25:32]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본 절에서 다윗은 아비가일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을, 그녀의 남편 나발의 구명(救命)이라는 사사로운 차원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인식한다(Klein, Fay).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 당신의 계약적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찬송할지로다 - 이같은 언급은 하나님의 오묘한 주권적 섭리에 따라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종종 나타난다(왕상 1:48; 5:7;8:15, 56; 10:9; 눅 1:68; 엡 1:3).
성 경: [삼상25:33]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 여기서 `칭찬할지며'(*, 바라크)는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동일한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여기의 이 `칭찬'은 말할 나위 없이 아비가일에게 그같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의 `지혜'(*, 타암)는 신중한 행동을 동반하는 분별력 혹은 판단력을 가리킨다(욥 12;20; 시 119:66; 잠26:16).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바는, 위와같은 `지혜'를 소유한 여자만이 진정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3절; 잠 11:22).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 바라크)도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앞의 `칭찬할지며'와 그 기본형이 동일한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 이 단어는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복이 있기를 하나님께 비는 일종의 기도로 이해해야 할것이다(삼하 14:22; 19:39). 바로 이같은 점에서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와 같은 성경적 축복 행위는, 복을 주는 주체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없이 의례적으로 하는 우리나라 전래의 `복 받으세요'라는 축복적 인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 경: [삼상25:34]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 맹세의 불변성과 신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관용적 술어이다.
남자(*, 마쉐틴 베키르) - 문자적으로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one who urinates against the wall)란 뜻으로서, `남자'(man)를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인 `이쉬'(*)의 속어(俗語)이다. 2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5:35]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네 청을 허락하노나 - 여기서 `허락 하노라'(*, 나사 파님)는 문자적으로 `얼굴을 들게 해주다'란 의미이다(창 19:21; 32:20, 21).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청원을 허락하다'란 의미를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청원의 당사자는 겸손한 자세를 취한 나머지 항상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25:36]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죽음]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배설하고 - 나발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던(7, 15, 16절) 다윗의 자그마한 요구(8절)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던 사실(10, 11절)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즉 나발은 자신이 욕심껏 먹고 마시는 데는 아낄 줄 몰랐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몫을 조금 나눠주는 데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실로 `미련한 자'였다(25절).
대취하여 - 양털을 깎는 잔치 때에 술에 취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삼하 13:23-28). 그러므로 나발이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이같이 취했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술에 취하는 일 재는 경건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죄되어 마땅하다(롬 13;13; 고전 5:11; 6:10). 따라서 성경은 `술취하는 일'을 어리석은 자의 한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잠 20:1; 23:21; 26:9; 눅 21:34).
마음에 기뻐하므로 - 만취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방종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겁탈했던 자신의 이복 형제 암논을 양털 깎는 잔치에 초대한 후, 그가 바로 위와 같은 상태에 빠지면 그를 살해하려고 했었다(삼하 13:28).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 여기서 `다소간의 말'이란 다윗이 나발의 모욕적인 응답(10, 11절)에 격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러 병사들을 데리고 쫓아왔던 사실을 가리킨다(13절).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이같이 행동한 까닭은 (1) 나발이 술에 취한 그때는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며 (2) 술에 취한 나발에게 다윗이 그를 죽이려했다는 말을 할 경우, 그는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성 경: [삼상25:37]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죽음]
이 일 - 이것은 91) 다윗이 나발을 죽이러 갈멜로 향했었다는 사실(13절). (2) 아비가일이 다윗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많은 음식을 다윗에게 가져다 주었으며, 또한 다윗에 대한 나발의 냉대(10, 11절)를 그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렸다는 사실(Kle-in, Keil, Lange; 25절) 등으로 이해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의 `이일'(*, 하데바림 하엘레)이 복수(複數)라는 점에서, 위의 (1)(2) 모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발에게 더 큰 충격을 준 `일'은 (1)의 사실일 것이다.
낙담하여 - 문자적으로는 `그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서 죽었다'(his heart diedwithin him, KJV)란 뜻이다. 즉 나발의 `기뻐하던 마음'(36절)이 이제 `죽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린 것을 뜻한다(Klein).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 `돌과 같이 되었더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돌이 되었더니'란 뜻으로, 즉 강한 충력(shock)에 의하여 어떤 심인성(心因性)질환에 걸린 것을 말한다.
성 경: [삼상25:38]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죽음]
한 열흘 후 - 여기서 `열흘'은 나발이 병고로 고생하던 기간이다. 아마도 나발은 어떤 충격 내지는 고혈압 등으로 인한 전신 마비의 중풍(中風)에 걸렸던 듯하다.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 여기의 `치시매'(*, 나가프)는 `상처내다', `쳐부수다'란 의미로서, 신적(神的) 징벌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12;15; 슥14:18). 결국 나발의 죽음은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이 분명하다(29절).
그가 죽으니라 - 나발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다윗에게 자기 소유물 중 일부를 공급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1) 공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이 속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17:41-51; 18:5, 30; 19:8; 23:1-5). (2) 개인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의 양떼와 소유를 보호해 준 은인(恩人)이었다(7절). (3) 이 외에도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신 10:18, 19)을 생각한다면, 나발이 다윗 일행을 접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발은 예의를 갖춘 다윗의 정당한 요구(4-9절)를 교만한 말로써 일축하였다(10, 11절). 나발의 이 악한 행동은 스스로가 자기 무덤을 판 격이되고 말았다. 즉 나발은 그의 행동에 격분한 다윗(12, 13절)에게 복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공의의 하나님에 의해 병으로 죽게됨으로써 보응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재물과 돈을 생의 최고 목표로 추구하는 자의 말로(末路)는 파멸이라(딤전 6:9, 10)는 엄숙한 경고와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성 경: [삼상25:39]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나발에게 당한...욕 - 여기서 `욕'은 문자적으로는 `욕의 원인'이란 의미인데, 그 구체적 내용은 10, 11절을 참조하라.
신설하사(*, 라브) -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다'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억울한 형편(2절)을 살피셔서, 그의 원수를 갚아 주신 것을 가리킨다(38절).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 자신이 행한 악한 행위만큼 결국 자신이 그 악행의 대가를 받는 일을 가리킨다(왕상 2;44).
다윗이 아비가일로...아내를 삼으려고 - 이와같은 구혼(求婚)은 미망인의 법적 애곡(哀哭) 의무 기간인 칠 일이 지난 다음에 제안되었을 것이다(Smith). 그런데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구혼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그녀는 지혜와 신앙에 있어서 자신의 내조자가 되기에 매우 적격자였으며93, 33절) (2) 다윗의 처 미갈이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기(44절)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25:40]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사환(*, 에베드) - 아비가일에 대한 구혼(求婚)은 사적(私的)인 문제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공적(公的)인 문제와 관계되어 사용되는 단어인 `소년'(*, 나아르)이라는 단어 대신에 `에베드'가 사용되고 있다(8절; 14:1).
성 경: [삼상25:41]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그가...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 이와 같은 겸손한 행위는 그녀가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취해졌었다(23절). 따라서 여기 아비가일의 이 행동은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겸허한 태도이다.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 - 이미 다윗의 수하에 있던 `사환'들처럼 아비가일도 다윗에게 `내 주'라는 말을 적용시킴으로써, 자신도 그들처럼 다윗의 사람이 될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발 씻길 종이니이다 - 발 씻기는 행위는 종들이나 하는 지극히 미천한 행위이다. 따라서 다윗의 구혼을 받은 아비강리은 그러한 다윗의 구혼은 자신의 분에 넘치는 과분한 것으로서 감사하게 받아 들임은 물론, 요구하신다면 다윗의 수하에 딸린 사환들의 발이라도 씻기는 지극히 미천한 일도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고 겸손히 말하고 있는것이다.
성 경: [삼상25:42]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급히 일어나서 - `급히 일어나서'는 아비가일이 이같은 문자적인 의미의 행동을 취했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일어나서'는 특별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의 단호한 결심을 시사해 주는 관용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 여기의 `처녀 다섯'은 아비가일을 수종드는 시종(侍從)들을 가리킨다(창 30:4, 9). 아비가일의 집은 대단한 부호였으므로, 이러한 개인 몸종이 있었던 것이다.
사자(*, 말아크) -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천사' 및 그 밖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기 위해 다윗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할자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단어가 사용된 듯하다.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이 사건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즉 순수한 애정이나 신앙적인 목적 이외에도, 후일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기 위하여 헤브론으로 입성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한, 그것도 갈렙의 후예인 아비가일(3절 주석 참조)을 대동함으로써, 유다 지파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Klein). 아무튼 이같은 결혼에 따라 다윗과 아비가일 사이에는 `길르압'(삼하 3:3)과 `다니엘'(대상 3:1)등, 최소한 두명의 아들이 출생하였다.
성 경: [삼상25:43]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의 아내들]
이스르엘 아히노암 - 여기서 `이스르엘'은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14:50)과 구별하기 위하여 덧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이 `이스르엘'(Jezreel)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심'이란 뜻이다. 추측컨대 이곳은 마온과 갈멜과 십 근처인 헤브론 남서쪽 약 10km 지점의 고지대일 것이다(Beek ; 수 15:56). 따라서 잇사갈 지파에 소속된 동일한 이름의 성읍과는 구별된다(수 19:18). 한편 `아히노암'은 `나의 오빠는 유쾌하다'란 뜻이다. 다윗은 아히노암과 결혼함으로써 아비가일과의 결혼에서처럼(42절 주석), 그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됐을 때에 유다 지파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데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Klein). 아무튼 다윗은 아히노암과의 사이에 `암논'이라는 아들을 두었다(삼하 3:2).
성 경: [삼상25:44]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의 아내들]
사울이...미갈을...발디에게 주었더라 - 일찍이 사울은 골리앗을 죽인 대가로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변덕스러운 짓을 하기도 했었다(18:19). 여기서의 이같은 사울의 행동 역시 메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윗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을 것이다(18:8, 10, 11). 한편 `발디'(Phalti)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란 뜻으로, 삼하 3:15에서는 `발디엘'(Phaltiel)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발디'란 이름과 동일한 이름의 소유자가 가나안 정탐을 했던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 중에서 발견된다(민 13:9). 그는 곧 베냐민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정탐에 참여한 `라부'의 아들 `발디'였다. 그렇다면 여기의 `발디'는 자신의 조상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22:5).
갈림에 사는 - 문자적으로는 `갈림 출신인'이란 뜻이다. `갈림'(Gallim)은 `무더기'란 뜻으로, 이곳은 이사야 10:30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사울의 기브아 사이의 베냐민 지파의 땅에 위치한 성읍이다.
성 경: [삼상26:1]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십 사람이...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 본절 이하에서는, `십 사람'의 밀고 행위가 23:19이하에 이어 두번째 언급된다. 혹자들은 본문과 23:19이하 사건의 여러 유사성을 근거로하여 동일한 사건이 반복 기술되었다고 주장한다(Ewald, De Wette, Thenius).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유사성과 아울러 더 많은 상이점(相異點)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절 하단에 나와 있는 24:1-22 사건과 본장 사건의 비교 도표를 참조하라.
십 - `십'(Ziph)은 헤브론 남동쪽 약 8km, 마온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23:14 주석 참조.
기브아 - 사울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다. 10:26 주석 참조.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의 장소는 `광야 남편'이었다(23:19).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광야 앞'은 문자적으로는 `광야의 얼굴'이란 의미로서, `광야의 남편'과는 전혀 다른 `광야의 인접 지역'을 가리킨다(Drinkard, D-river, Klein). 따라서 아비가일과 결혼한 다윗은(25:42) 갈멜을 떠나서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에 거주했던 곳보다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듯하다.
하길라 산 -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당시에 다윗은 여기처럼 `하길라 산'(the hill of Hachilah)이 아닌 `하길라 산 수풀 요새'(Horesh, on the hill of Hachilah)에 있었다(23:19). 그런데 `하길라 산 수풀 요새'는 `십 황무지'의 또 다른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 같이 보아야할 이유는 여기의 `수풀'(*, Horesh)은 고유명사로서, 별도의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는 지명이기 때문이다(23:15).
성 경: [삼상26:2]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사울이...다윗을 찾으려고 -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때에 자신에 대한 다윗의 선대(24:4, 10, 11)에 따라 다윗을 축복까지 했던 사울이(24:16-22), 여기서 다시 다윗을 죽이러 찾아나서고 있다.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악신의 영향하에 있는(16:14; 18:10) 그의 지극히 불안정하고 변덕스런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의 그같은 성격이 결국 잠정적으로 억제됐던 다윗에 대한 증오심을 다시 폭발시키게 한 것이다.
십 황무지 - 23;14 주석 참조.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 이들은 `십 사람'의 1차 밀고 때에도 동원했던 사울의 정예병을 가리킨다. 24:2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6:3]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광야 앞 하길라 산 - 1절 주석 참조.
길가에 - 여기에 `길' 은 예루살렘(Jerusalem) 방향에서 네게브(Negeb) 지방의 `아랏'(민 21:1)으로 통하는 대로(大路)를 가리킨다(Smith, Fay). 이같은 사실에서 볼때, 본절의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의 동쪽임이 분명하다. 아하로니(Aharoni)도 그의 `성경지도'(Bible Atlas)에서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 당시 다윗은 사울의 진 서쪽 지점 고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다. 이는 6절의 `진에 내려가서'란 말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의 동태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6:4]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탐정을 보내어...알고 - 여기서 `알다'(*, 야다)란 말은 체험적이리만큼 확실히 깨달아 아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2:12; 22:22; 창 4:1; 48:19). 즉 척후병의 보고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쫓겨 도망하기에만 급급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오히려 이제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비록 전력에 있어서는 약자의 처지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연고로 강자인 사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성 경: [삼상26:5]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넬의 아들...아브넬 - `넬'은 사울의 숙부이다(10:14; 14:50, 51). 따라서 `아브넬'과 `사울'은 사촌 관계이다. `아브넬'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갔었다(17:55-58). 그후 아브넬은 사울의 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 쫓아 다니는 위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사울이 죽은 후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힌 다음, 자신은 실세(實勢)로서 위치하였다(삼하 2:8-11). 그러나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사건으로 이스보셋과 관계가 악화되자(삼하 3:7-11), 이스보셋의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버리고 말았다(삼하 3:17-21). 그렇지만 아브넬은 전쟁의 와중에서 요압의 동생을 죽였던 연고로 인하여 결국 요압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삼하 3;27).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 여기의 `진'(*, 마갈)은 `방책'(barricade)을 의미한다(17:20). 그런데 당시 이 `방책'은 병거 및 마차 등으로 이뤄졌을 것이다(Calvin, Smith, Keil). 한편 사울이 이같은 위치에서 잠을 잔 가닭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신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 이같은 언급은 앞의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란 언급과 함께 다윗의 용맹성을 강조.시사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준다. 즉 저자는 여기서 당시 사울이 소지하던 창과 물병을 바로 위와 같은 삼엄한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서 가져갔던 다윗의 확신에 찬 영웅적 행동을(11, 12절) 부각시키려는 것이다(Klein). 한편 여기서 `백성'은 사울의 3천 병사를 의미한다(2절; 14:2; 수 8:1).
성 경: [삼상26:6]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헷 사람 아히멜렉 - `헷 사람'(the Hittite)은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였다(수3:10).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 때도 이미 팔레스틴 땅에 거주했었으며(창 15:23), 이스라엘의 출 애굽 후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복되었다(삿 1:6; 왕상 9:20). 바로 이같은 헷 조속으로서 다윗을 좇았던 또 다른 유력한 인물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였다(23:39; 삼하 11장). 한편 `아히멜렉'(Ahimelech)은 `왕의 형제'란 의미를 갖는 가나안식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름을 소유했던 제사장 `아히멜렉'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21:1). 그런데 헷 사람 `아히멜렉'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당시 이스라엘 임족과 함께 섞여 살던 `헷 족속'에 대하여 사울이 어떤 압박을 가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e; 22:2).
스루야의 아들...아비새 - `스루야'(Zeruiah)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시집오기 전 `나하스'라는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다(삼하 17:25). 따라서 다윗의 이부(異父) 누이이다. 한편 `아비새'(Abishai)는 `아버지가 계신다'란 의미이다.그런데 이 사람은 후에 비록 다윗의 용사 중 최상급인 `세 용사' 그룹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 다음인 `삼십 용사' 그룹의 두령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삼하 23:18, 19;대상 11:20, 21).
요압 -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명실 공히 다윗의 제 1 무사(武士)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삼하 5:6 이하; 8:16; 20:23; 대상 11:4 이하; 18:15; 27:34).
누가...내려가서 - 다윗의 일행이 사울의 일행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때 사울은 `길 가'(3절)에 있은 반면 다윗은 `산'(1절)에 있었다.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 이것은 `아히멜렉'과 `아비새' 중 `아비새'가 더 용기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본서와 사무엘하의 저자는 `아비새'에 대해서는 다윗을 도왔던 훌륭한 인물로서 계속 말하지만, 본절에서처럼 다윗의 요청에 묵묵부답(黙黙不答)했던 `아히멜렉'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히멜렉이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그의 위와 같은 침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Klein). 여기서 우리는 `아히멜렉'이 `아비새'보다 먼저 먼저 언급되는 등 더 우위에 있었으나, 그 자신의 지나친 소심성 때문에 그 위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성 경: [삼상26:7]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 여기서 `창'은 `홀'(笏)과 같이, 사울의 왕권(王權)을 상징한다(Keil, Fay, Smith). 이같이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창'을 자신의 머리맡에 꽂아 놓은 것은 (1) 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엄을 높이며, (2) 또한 왕으로서의 자신이 잠자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삼상26:8]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하나님이...원수를...붙이셨나이다 - 아비새의 이같은 판단은 다윗의 각오 여하에 따라서는 사울이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결과였다(24:4). 즉 그는 이같은 상황 전개를,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본 것이다.
단 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자고 있는 사울에 대해서 이같이 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울의 부하들을 깨우지 않고 달아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단 번'에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아비새의 이 말은 당시 사울이 완전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아마 사울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긴 출정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했던 관계로 모두 곯아 떨어진 것 같다.
성 경: [삼상26:9,10]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여기서 다윗은 사울을 친히 죽여 복수해서는 안될 이유를 제시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그 첫째 이유이다. 즉 여호와께서 택하사 기름 부은 자는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그 생명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그런고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침해하면, 곧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침해하고 모독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것은 단순히 다윗의 관대한 성품이다. 혹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두번째 이유이다(24:12). 즉 이 두번째 이유 역시 첫번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기름 부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곧 사람을 택하사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분이 하나님이시듯, 또한 왕을 폐하고 죽이는 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하에 속한 것이라는 사상이다. 다윗은 시종 일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사울을 대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사울을 전쟁터에서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이심으로써(31:3, 4), 다윗과 사울간에 당신의 주권적인 심판을 행사하셨다.
성 경: [삼상26:11]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손을 들어...치는 것을...금하시나니 - 사람이 그 원수에 대하여 친히 복수하는 일을 금하고, 그 모든 선악간의 판결을 공의의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성경의 복수관(復讐觀)이다(신 32:35; 롬 12:19; 히 10:30). 그러므로 여기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단번에 처치하자는 아비새(8절)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임을 들어 그것을 만류하는 다윗(9-11절) 사이에서 우리는 신앙의 차원을 느낀다. 즉 전자는 이성에 근거한 인간적 사고의 발로요, 후자는 신앙에 근거한 신본주의적 사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만일 다윗이 아비새의 말대로 했다면, 나중에 그가 경험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된 승리'(21, 25절; 롬 12:21)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조그마한 일로부터 원수 갚은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와 선한 판결을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참된 지혜와 판단력을 허락하신다(롬 12:19, 20).
그의...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증할 증거를 삼기 위함이었다(24:4).
머리 곁에 있는 - 이것은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이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었던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기 위한 언급이다. 왜냐하면 `머리'는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곧 사울을 단번에 죽일 수 있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8절).
성 경: [삼상26:12]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본절은 사울을 죽이지는 아니하고, 다만 그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만을 남기려고 한 다윗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돕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깊이 잠들에 하셨으므로 - 여기서 `깊은 잠'에 해당하는 `타르데마'(*)란 단어는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들기 위한 갈비뼈를 빼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리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창 2: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동물을 쪼개게 하신 후, 그와의 언약이 비준되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를 깊이 잠들도록 하시는 장면을 다루고 있는 문맥에서도 나타난다(창 15:32).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사울과 그의 일행이 다윗의 접근을 전혀 인식치 못할 정도로 깊이 잠이 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 사실 이때 다윗은 아비새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사울을 자신의 손에 붙이신 것으로 해석하여 사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생명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을 더욱 존중함으로써, 끝까지 모든 일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주건을 인정하는 다윗을 기뻐하셨고, 결국 당신의 선하신 계획을 다윗을 위해 베푸셨다. 즉 다윗은`선으로 악을'이긴 것이다(롬 12:1).
성 경: [삼상26:13]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아브넬을 책망하는 다윗]
건너편...산꼭대기에 서니 - 다윗과 아비새는 이때 계곡 하나를 건너 맞은편 언덕, 즉 하길라 산 정상으로 올라간 듯하다. 그리고 여기의 이 `산 꼭대기'는 사울의 동정을 살필 목적으로 `탐정'(4절)이 정탐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상거가 멀더라 - 다윗이 이처럼 사울로부터 먼 거리에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깨우고, 또한 사울과 대화를 하려고(14-25절) 한 까닭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사울에게서 도망갈 안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다윗이 사울의 변덕스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6:14,15,16]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아브넬을 책망하는 다윗]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경호 책임을 맡고 있던 군대 장관 아브넬(14;50)의 직무유기를 비난함으로써 (1) 사울로 하여금 그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절감케 하며, (2) 그리고 다윗 자기 자신은 사울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고 또한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아브넬아 - `아브넬'(Abner)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가는 등 이미 다윗과 친교가 있었다(17:55-58; 20:25). 더구나 `아브넬'은 사울과 사촌간이며(14:50, 51)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다는(18:27; 25:44) 점에서 본다면, 다윗과 아브넬이 상호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 이 말은 여자적(如字的) 의미로 이해되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이 아닌 아브넬을 불렀기 때문이다(14절). 따라서 우리는 이 말을, 다윗이 아브넬을 큰 소리로 불러 소란케 함으로써 잠자던 사울을 깨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 Lange).
네가 용사가 아니냐 - 이것은 아브넬이 왕을 경호하는 그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한편 여기의 `용사'(*, 이쉬)는 `여자'(*, 잇솨)와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창 2:23).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남자다운 남자'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Klein).
네 주...네 주 - 여기서 `네 주'라는 말이 반복 기술된 것은 아브넬이 자신의 상전인 사울에 대한 경호 책임을 게을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아브넬은 자신의 `주' 사울을 보호해야 했어야만 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25:26 주석 참조.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 이것은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려 했던(8절) 가로막았던 다윗의 행동과 잘 대조된다. 즉 다윗은 이같은 언급을 통하여 아브넬의 직무 유기와 자신의 선행(24:17, 18)을 대조적으로 강조한다. 나아가 다윗의 이 말은 진정 사울을 지키고 보호해 줄 자로서 아브넬보다 자신이 더욱 적격자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따라서 자신은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며, 오해려 사울을 주(主)로 모시고 충성된 신하로서 지키고 보호해 줄 자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 문자적으로는 `너희는 죽음의 아들이니라'(20:31)란 뜻이다. 다윗이 여기서 아브넬과 병사들에 대하여 `죽음의 아들'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은 것은 곧 그를 죽인 것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9절).
성 경: [삼상26:17]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 이때는 캄캄한 밤 또는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을 것이므로, 사울은 음성을 통해서만 다윗이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아들 다윗아 -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다윗이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한 결과였다(24:16). 아마도 이때 변덕스런 사울은 다윗을 아브넬보다 더 나은 호위병으로(16:21) 생각했을 것이다.성
경: [삼상26:18]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어찌하여...쫓으시나이까 - 사울은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24:2-7)으로 다윗과 화해를 했었다(24;16-22).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또다시 추격하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성 경: [삼상26:19]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 이같은 표현은 주로 악행을 선행으로 전환할 도 한번의 기회를 줄 때 사용되었다(15:1). 즉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았던 사울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면서 이와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다윗의 이 말은 최후 통첩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종 다윗의 이 최후 통첩을 무시하고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27:1-4) 하나님께서 결국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다는 사실이다(10절; 31:4-6).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상(대상 29:11; 시 103:19)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선(善) 뿐만 아니라 악(惡)도 주관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사울을 격동시킬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다윗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사울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악이 나왔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그 악을 교사(敎唆)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악인이 그 소욕대로 저지르는 악을 묵허(黙許)했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편이며, 따라서 악한 행동 자체에 대한 책임은 항상 본인이 져야하는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까지도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상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난(亂)을 피하여 도망을 가는 자신을 향하여 온갖 모욕적 언사를 아끼지 않았던 시므이(Shimei)도,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고 그를 해하지 아니하였다(삼하 16;10, 11).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 다윗의 이 말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1)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달게 죽겠다는 뜻(Hertzberg, Klein), (2)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주기를 원한다는 뜻(Keil)등이 있다. 그런데 첫째, 여기의 `제물'(*, 민하)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창 8:21) 그분 앞에서 태워지는 소제 제물의 향기를 가리키며 둘째, 사울이 격동된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일 `인자(人子)들'에 의한 것이라면 다윗이 아닌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본절의 언급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다윗 자신이 달게 죽겠다는 뜻의 (1)의 해석이 타당성이있다.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저주를 받으리니 - 다윗은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에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간신(奸臣)들의 중상 모략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악신(惡神)의 영향하에 있는 사울의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이지만, 이와 더불어 사울 주변에는 베냐민 사람 구시(시 7편)와 같은 중상 모리배(中傷謀利輩)들이 있어 그러한 사울의 증오심을 더욱 부축긴 것 같다. 24:9 주석 참조.
이는(*, 키) - 앞 부분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절(節)을 이끄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접속사 이하는 사우을 격동시킨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를 말해준다.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는 땅,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인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물론 사울을 격동시킨 자들이 이같은 말을 직접, 구체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을 격동시켜 그로 하여금 다윗을 추격케 함은 곧 다윗에게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살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Calvin). 그런데 다윗의 이같은 염려는 실제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즉 다윗은 사울로부터 다가오는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결국 이스라엘 땅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27:1, 2).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 여기서 `여호와의 기업'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출 19;5). 그리고 `붙지'(*, 하스타페아흐)는 `연합하다', `모이다'라는 의미의 동사 `사파흐'(*)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유기체적 구성원이 됨을 가리킨다. 따라서 `붙지 못하게 한다'라는 말은 그 언약 공동체에서 강제로 추방시킴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6:20]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 도망가 결국 이방 땅에서 객사하게 되는 그러한 비극이 없게 해달라고 사울에게 간청한다. 그러면서 다윗은 만일 자신이 타국땅으로 도망간다면 그것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고자 쫓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여호와 앞 -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으며, 따라서 그분께 제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Hertzberg). 물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만을 특별한 약속의 땅으로 지정하셨음도 사실이었다(신 12;5). 그래서 모압 출신의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 땅을 떠나 유다의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면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들어간다고 말하였다(룻 2:12).
먼 이곳에서(*, 아르차 미네게드) - 직역하면 `~(앞)으로부터 떨어진 (그) 땅에서'(to the earth away from ~, RSV; to the ground far from~, NIV)란의미이다.
나의 피로...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 다윗은 이 말을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가게될 경우 나타날 결과로서 말한다. 따라서 다윗은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울로 하여금 자신을 추격하는 일을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한다. 아울러 다윗은 여기의 이 언급을 통하여 만일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이방 땅에서 죽게 될 경우 사울은 다윗 자신의 그 피에 대하여 결코 무관치 않으며,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만일 다윗 자신이 이방 땅으로 도망가 그곳 우상의 땅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울의 추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사울은 다윗 자신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되며, 그럴 경우 아벧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했던 가인처럼(창 4:10) 사울 역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 이것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의 행동이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메추라기'는 `산'이 아닌 광야에 많기 때문이다(출 16:13, 14; 민 11:31). 따라서 메추라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메추라기가 떼지어 다니는 광야의 들로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사울은 어쩌다 산에 한 마리있는 메추라기를 잡으려고 설치는 사냥꾼 같이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Winer). 아무튼 우리는 이 비유의 초점이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의 행위가 매우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지적하는 데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려 -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과 `벼룩'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으며, 또한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를 역설한다. 24;14주석 참조.
성 경: [삼상26:21]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본절에서 사울은 다윗의 호소(18-20절)에 전적 수긍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 즉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격한 자신의 행위를 (1) `범죄'로 (2) `어리석은 일'로 (3) `대단히 잘못된 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다윗을 자신보다 의롭다고 여긴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 직후 때(24:17) 보다 훨씬 고무적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이같은 태도 역시 진정한 회개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사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27:1). 실로 참된 회개란 단순한 후회 또는 반성의 차원을 넘어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지한 죄의 고백과 더불어 더이상 과거의 범죄나 실수를 범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전인격적 변화요 결단이어야 한다.
내 아들 다윗아 - 이것은 다윗에 대하여 하등의 적의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24;16).
돌아오라 - 옛 직책으로의 복귀를 가리킨다(18:13, 30). 또한 이것은 이방 땅으로 도망갈 필요도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19, 20절).
성 경: [삼상26:22]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왕은 창을 보소서...가져 가게 하소서 - 본절에서 다윗은 사울로부터 자신이 가져온 `창'과 `물병'중(12절) 다만 `창'만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창에 비하면 `물병'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Klein). 한편 여기서 `물병'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때 다윗이 창과 아울러 물병까지 사울에게 넘겨주었을 것은 당연하다.
성 경: [삼상26:23,24]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여호와께서...갚으시리니 -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 모든 일에 대해 여호와께서 심판해 주실 것을 다윗이 간구한 것처럼(24:15), 여기서도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공의로운 처신을 한 자신에게는 상급이 있고, 다윗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울에게는상급이 있고, 다윗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울에게는 징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의 이 말은 혹자들(Thenius, Stahelin)의 주장처럼 결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말은 아니다. 다윗의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수하고 선한 양심의 선언이요, 또한 공의와 진리의 하나님을 전적 의뢰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Keil).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 이 말은 사울의 반성과 태도 전환에도 불구하고(21절), 다윗이 사울로 인하여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여기의 `환난'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의 살의(殺意)에 따른 다윗 자신의 정처없는 위험한 방랑 생활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6:25]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 사울의 이말은 구체적으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가리킨다(24:20). 물론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훌륭한 업적을 남길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 사울의 이 말 역시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의 말(24:20)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다윗이 사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대적들을 꺾고 이스라엘의 왕위를 오를 것을 가리킨다(20;15, 16).
다윗은...사울은...돌아가니라 -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별의 장면을 묘사할 대 사용되는 전형적 방식이다(24:23; 민 24:25).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의 이 표현은 사울과 다윗이 아직껏 화해하지 못한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사울과 다윗의 마음은 하나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각기 자기 길을 따라 따로 가야만 했다"(Berleb Bible)
자기 곳 - 여기의 `곳'(*, 마콤)은 24:23의 `집'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2;20; 29:4; 왕상 8:21). 따라서 여기의 `곳'을 `집'이 아니라고 보고, 사울이 기브아의 자기 궁성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다윗을 계속 쫓았다는 주장(Keil, Lange)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R. Payne Smith).
성 경: [삼상27:1]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망하리니 - 본절과 같은 다윗의 생각과 판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굳게 맹세하고서도(24:16-22) 그 약속을 스스로 뒤엎는 등,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사울을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었다. 따라서 다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십(Ziph) 진(陳) 사건(26:6-12) 직후의 사울의 약속(26;21, 25) 또한 다윗으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울의 주변에는 사우로 하여금 다윗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인물들이 있었으며(24:9; 26:19),
특히 다윗의 은신처 주변에는 다윗의 행동을 밀고하는 `십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23:19; 24:1; 26:1). 따라서 600명의 군사와 그에 딸린 남녀 가족들을 거느린 다윗으로서는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도피 생활을 할수가 없었기에, 당시 사울의 추격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 당시 다윗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압(22;3, 4) 보다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상책(上策)으로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자신과 600명의 군사 및 그에 딸린 가족들의 보다 안전한 도피 생활을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보다 약소국인 모압 보다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이 더좋다고 판단되었으며, (2) 또한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엘과 더 인접한 곳에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엘과 더 인접한 곳에 있는 관계로, 유사시의 사건에 대비하는데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J.P. Lagn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아무튼 이방의 땅인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들어 가는 것'은 다윗이 최악의 경우 취하려고 했던 선택이었다(26:19, 20).
사울이...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려고 했다. 따라서 그때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7:2]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일어나(*, 야캄) - 성경 용례상 이 표현은 종종 결정적인 그리고 중대한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문맥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함께 있는 육백 인 - 다윗의 휘하 추종 병력으로, 여기의 이 숫자는 앞에서와 동일할(23;13; 25:13). 한편, 600명이란 숫자는 분명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출전할 만한 성인 남자들만을 계수한 수효일 것이다(민 1:3). 따라서 600명의 병력에 딸린 가족들의 수효까지 모두 계산하면, 다윗이 거느린 일행의 총수효는 대략 2,500~3,000명 가량 되었을 것이다.
가드 왕...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 비록 블레셋은 이스라엘과는 적대국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했던 사울 왕에 대해서 특별히 강한 증오심을 가졌던 관계로, 당시 사울의 강력한 경쟁 상대이자 증오의 대상인 다윗에 대해서는 오히려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기대하고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피해 들어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드'(Gath)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서(5:8; 수 11:22; 13:3 주석 참조), 그 위치는 당시 다윗과 그의 일행이 피신하고 있던 `십 황무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7km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드 왕'은 블레셋의 5대 방백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5:8 주석 참조). 또한 `아기스'(Achish)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21:10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때 다윗이, 전에 `아기스'로 부터 도망나온 일이 있었으면서도(21:10-22:1) 다시 그에게로 도피한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며, (2) 다윗이 아기스의 대적인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핍박을 받고 있었음이 그에게까지 틀림없이 알려졌을 것이며, (3) 또한 아기스는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군사적 세력을 확충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옥의 아들 - 여기서 `마옥'(Maoch)은 왕상 2:39에 나타나는 `마아가'(Maachah)와 동일한 인물인 듯하다(Keil, Smith, Fay). 그렇다면 아기스가 솔로몬이 즉위한 직후까지 블레셋의 가드왕으로서 계속 살아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스가 다윗의 즉위(B.C. 1010년) 직전부터 솔로몬의 즉위(B.C. 970년)직후까지 약 50여년간 왕위에 있었다면 이 문제는 넉넉히 해결될 수 있다(Keil & Delitzsch,Vol. II-ii. p. 255).
성 경: [삼상27:3]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 이것은 단지 몇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블레셋 땅에 들어갔던 21장의 경우와는 완전히 상이하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처럼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블레셋으로 간 것은 가족들의 안전과 정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아히노암...아비가일 - 다윗의 최초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이었으나, 그녀는 사울에 의해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졌기 때문에 다윗 아내의 명단 중에서 빠져있다(25:44).
성 경: [삼상27:4]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사울이...수색하지 아니하니라 - 본절의 내용은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가기 직전에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11절).
다윗의 도피 생활 3 - `엔겐디' 동굴 사건 후 사울과 일시 화해한 다윗은 사무엘 사후 또다시 위험을 느끼고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이후 다윗은 다시 `십 황무지'로 돌아왔으나, 십 사람들의 밀고 행위로 다시금 사울의 추격을 당한다. 그러나 십 진(陳) 사건으로 또다시 사울의 목숨을 해할 기회가 있었으나 다윗은 사울을 히하지 않았다. 이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으나, 다윗은 더이상 사울의 변덕스런 마음을 신뢰할 수 없어, 결국 블레셋 땅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기스 왕으로부터 식읍(食邑) `시글락'을 얻어 그곳에서 1년 4개월 동안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다윗의 목숨을 채던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다윗은 오랜 도피 생활을 마감하고 조국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24:1-27:12).
성 경: [삼상27:5]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시글락을 얻은 다윗]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 문자적으로는 `내가 당신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했거든'(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NIV, RSV)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다윗이 `아기스'와 용병(傭兵) 관계를 형성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다윗은 아기스와 용병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그에게 적절한 요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과 바로 이같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군사적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을 것이다.
당신의 종이 어찌...왕도에 거하리이까 - 당시 다윗의 군사가 약 육백 명이었다면(2절). 그의 가족까지의 숫자를 모두 합칠 경우 거의 삼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많은 숫자는 `왕도'(王都) 가드의 시민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항상 있었다. 바로 이같은 점을 내세워서 다윗은 왕도 `가드'를 떠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였다. 즉 다윗이 지방 성읍의 독립된 거주지를 요구한 진정한 이유는 (1)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가드에서 가주할 경우 자신의 백성들이 이교적(異敎的) 혼합주의에 빠져들 우려가 충분히 있었고(5:8, 9; 26:19), (2) 다윗이 아기스의 궁전에 자주 출입할 경우 아기스의 신하들에게시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또한 있었으며(21:11; 29:4, 5), (3) 그리고 다윗이 가드를 떠날 경우 아기스의 정치적 영향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점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경: [삼상27:6]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시글락을 얻은 다윗]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주었으므로 - 아기스 왕에 대한 다윗의 간청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아기스가 다윗과 자신을 호혜적(互惠的) 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드 왕 아기스가 망명객 다윗을 영접하고 그에게 식읍(食邑)으로서 `시글락'을 수여하는 등 다윗을 환대한 것은, 사울과 분명한 적대 관계에 있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을 자신의 신복(臣僕) 내지는 용병(傭兵)으로 포섭하여 자신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2절). 한편 여기 `시글락'(Ziklaq)은 가나안 정복 후 원래 유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가(수 15:31), 그후 다시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간 성읍이었다(수 19:5; 대상 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다시 빼앗겼던 것 같고, 그 이후 그 성읍에는 사람이 거주치 않은 것 같다(Keil, Fay). 그 위치는 가사(Gaza) 동남쪽 약 24km 지점으로, 그때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Gath) 남서쪽 약 40km 지점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같은 가드로부터의 먼 거리는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다윗의 진정한 목적(5절 주석 참조)을 넉넉히 충족시켜 줄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다윗의 목적과는 달리 아기스는 아기스대로 다윗을 그곳에 주둔시킴으로써, 자신의 영토의 남쪽 변경을 다른 민족들이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Klein).
시글락이...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 여기의 `왕'(*, 말키)은 복수(plural)이다. 따라서 `유다 왕'은, 정확히 하자면 `유다 왕들'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유다 왕들'이란 표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본서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할된 후(B.C. 930년)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아울러 본서 전체를 면밀히 고찰할 때 본서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에 대한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 보수주의 학자들은 본서(사무엘서)의 저작 시기를 분열 왕국 직후(B.C. 930년)로 부터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사이의 어간으로 본다(Steinmueller, Moeller, Young, Fay)
오늘까지 - 즉 본서가 기록된 때까지를 가리킨다(서론, 3 `기록 연대' 참조).
성 경: [삼상27:7]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시글락을 얻은 다윗]
블레셋 사람의 지방 - 여기서 `지방'(*, 사데)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빈들'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6:1; 창 2;5; 왕상 11:29). 따라서 이것은 다윗의 독립된 거주지 시글락이 변방에 위치했음을 시사해 준다.
거한 날 수는 일 년 넉달 - 여기서 `일 년'(*, 야밈)은 문자적으로는 `날들'(days)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요세푸스와 칠십인역은 다만 `넉 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의 `야밈'은 (1) 성경에서 `매년'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1:3; 2:19), (2) 또한 `일 년'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 점에서(Klein; 삿 17:10; 삼하 14:26),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일 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바로 이 기간이 지난 후 헤브론으로 돌아가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삼하 2:1-4).
성 경: [삼상27:8]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 여기서 `올라가서'(*, 알라)는 보통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오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당시 다윗이 침노한 족속들이 시글락보다 고지대인 바란 광야의 북동쪽 산악 지대에 거주했음을 시사한다(Keil, Smith, Fay). 또한 이 표현은 성전(聖戰)에 있어서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수 4:19; 6:5; 8:11). 따라서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비록 타국 땅에 도망나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온갖 애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술 사람 - `그술'(*, Geshur)은 정확치는 않으나, `교랑'이란 의미인듯하다. 그런데 이 종족은 아말렉 족속처럼 유랑 생황을 하던 족속으로서, 그 당시 어떤 한 지역에 모여서 살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즉 그들 중 일부는 요단 동쪽 지방에(신 3:14; 수 12;5; 13:11, 13; 삼하 13:37). 또 다른 일부는 `가사'와 인접한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같다(신 2:23).
기르스 사람 - 여기의 `기르스'(*, Girz)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즉 (1) 팔레스틴 중앙부의 그리심 산 근처에 살던 한 종족으로 보는 견해(Smith), (2) 블레셋 땅과 이스라엘 땅의 남부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보는 견해(IDB) 등이있다. 그러나 첫째, (1) (2)의 견해와 관계되는 민족들은 팔레스틴 남부에 위치하고 있던 다윗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없었으며 둘째, 그때 다윗의 또다른 공격 목표였던 `그술 사람 및 아말렉 사람'등이 모두 팔레스틴 남쪽에 거주하던 민족들이며 셋째, 본절은 다윗의 공격 목표가 되었던 세 민족을 `술과 애굽땅으로 지나가는 지방' 곧 팔레스틴의 남쪽에 사는 거민들로 말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아말렉 사람 - 이 종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5:2 주석을 참조하라. 이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일찍이 사울의 군대에 의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15:7,8), 오랜 세월의 지난 그 당시 아말렉 족속은 다시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한 듯하다(Fay). 그래서 이들은 다시 이스라엘과 블레셋 모두에게 심각한 골치거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옛적부터...지방의 거민이라 - 원문에는 본 구절의 앞 부분에 `왜냐하면'이란 의미를 갖는 접속사 `키'(*)가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다윗이 앞에 언급된 세 민족을 침한 까닭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본 구절을 해석해야 하는데, 우선 본 구절을 히브리 원문에 따라 `왜냐하면 그들은 옛날로부터 그 땅의 거민이었기 때문이다'로 바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곧 그 땅의 거민들이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다는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다윗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혀왔고 또한 괴롭히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Keil).
술과 애굽땅으로 지나가는 - 이것은 다윗이 공격했던 그 땅이 과연 어떤 땅인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로 볼 수 있다. 우선 본 구절은 히브리 본문에 보다 가깝게 `너희가 애굽과 술로 들어갔을 때의'로 번역할 수 있다. 즉 본서의 저자는, 15:7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족속을 쳤던 영역에 대하여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라고 언급한것을 염두에 두고 본 구절을 쓴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본 저자는 `그 땅'을 하나님의 군대로부터 엄중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 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15:1-3) 결국 본 구절은 앞에 언급된 세 민족에 대한 다윗의 침공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정당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언급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삼상27:9]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다윗이...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 다윗의 이같은 행위는 결코 종교적 목적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1)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들을 `진멸하라'(*, 아헤라메템)는 명령을 내리지 아니하셨다는 사실, (2)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혹시 `진멸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그 거민들에게 속했던 모든 가축 등의 재산도 동시에 진멸해야 했으나 다윗은 그것들을 진멸치 않았다는 사실, (3) 본서의 저자는 다윗의 이같은 행위를 비밀 유지의 목적상 그렇게 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11절) 등이다.
양...소...나귀...약대...의복을 취하고 - 사실 이처럼 노획물을 획득하는 것이, 다윗이 이스라엘 남방의 세 민족을 공격했던 주된 목적이었다. 즉 다윗은 이러한 노획물로써 (1) 자신에게 딸린 많은 식솔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했으며, (2) 또한 생활이 어려운 유대 사람들도 도와야 했던 것이다(30:26-30).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 다윗이 자신의 본거지 시글락(6절)이 아닌 왕도(王都) 가드로 향한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아기스에게 약탈물의 일부를 바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인 듯하다(Smith).
성 경: [삼상27:10]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 아기스는 자신에게 바쳐진 전리품(戰利品)을 보고 이같은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오늘'은 그 당일에 이스라엘이 남방에 거주하는 민족들에 대한 침공이 행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이번에'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침노하였느냐'(*, 파솨트)는 `벗기다', `강탈하다'란 의미로서, 주로 전리품의 탈취를 목적으로 한 노략과 공격 행위를 가리킨다(8절; 30:1; 31:8; 겔 16:39).
유다 남방...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겐 사람의 남방 - 이같은 다윗의 대답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지극히 애매한 답변을 함으로써, 자신이 아말렉 등을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한편 여기서 `유다 남방'은 브엘세바의 인근 지역을 가리킨다(8:2; 삼하 24:7). 그리고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가리킨다(30:29). 여기서 `여라므엘'(Jerahmeel)은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의미인데, 이 사람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이다(대상 2:3, 5, 9). 다라서 `여라므엘 사람'(Jerahmeel)은 이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또한 `겐 사람의 남방'은 `아말렉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지역과 인접한 곳을 가리킨다. 이전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치려고 하면서 겐 사람들도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겐 사람'(Kenites)들을 대피시켰던 일이 있었다(15:6주석 참조). 아무튼 여기서 다윗이 아기스의 질문에 실제로 그가 침노한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8절) 대신 유다, 여라무엘, 겐 족속이라고 답변한 이유는 다윗이 유다와 그 동맹.종속.우호 성읍들을 공격한 것처럼 아기스에게 믿도록 함으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더욱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다윗이 유다를 약탈하던 이방 종족들을 공격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쉽사리 은폐.거짓말을한 것은 당시 이방 땅에 머물러 있었던 다윗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즉 다윗의 답변은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인간적 기지(機智)에서 나온 말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선(善)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시글락 정착 시절에는 다윗의 신앙 상태가 연약해졌는데, 이는 블레셋의 시글락 정착 1년 4개월 동안(7절) 다윗이 지은 시편이 하나도 없다는 데에서도 입증된다. 즉 당시는 다윗에게 기도와 찬양이 메마른 때였다(F. B. Meyer).
성 경: [삼상27:11]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본절은 다윗이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 등을 공격하면서 그곳 거민들을 남녀 불문하고 몰살시킨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 이것은 패전국의 주민을 노예로 붙잡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일은 고대 전쟁에 있어서는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이같은 관습을 따르지 아니하고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 당시 다윗은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의 남방 족속들에게 자신이 행한 침노 행위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 보고될 것을 두려워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족속들은 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들로서 블레셋으로서는 하등 공격할 이유가 없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의 행위는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이적(利敵)행위가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시기하던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에 의하여 끌려왔을 노예들로부터 전해들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하고 악평하여 보고할 가능성이 많았으며, 또한 끌려왔을 노예들도 다윗에 대하여 앙심을 품은 나머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해서 떠들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다윗의 행적이 사실 그대로 아기스에게 알려지면 그 사실이 과장됐든지 안됐든지 간에, 아기스는 다윗의 그같은 이적적(利敵的)인 공격 행위로 인하여 다윗을 의심하고 또한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다윗은 바로 이 점을 사전에 방지코자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7:12]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 이것은 유다 남방 족속들을 공격했다는 다윗의 답변에 `아기스'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음을 뜻한다(10절). 따라서 아기스는 이제 다윗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의구심과 경계심까지 풀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이...이스라엘에게...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 다윗이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및 그 동맹.우호.종속 성읍들을 침공 몰살시킴으로써, 스스로 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되었다는 뜻이다. 이같은 아기스의 착각은 그가 다윗의 답변(10절)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반영해 준다.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 아기스는 동족을 무자비하게 친 다윗의 행위는 반드시 동족 유대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다윗은 더이상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이제 평생토록 자신의 심복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여기서 `사역자'(*, 에베드)는 `종', `신하'란 의미인데, 전에 `아기스'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한 `왕'으로(21:11, 12) 본 것과는 많이 대조된다. 즉 이같은 다윗에 대한 아기스의 인식의 전환은, 아기스가 다윗에 대해 품었던 경계심을 이제 더이상 갖고 있지 않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이때 `아기스'는 다윗이 그 자신의 동족을 침노하여 몰살시킨 일로, 다시는 조국 유대 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블레셋...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 여기서 `블레셋'은 가드 왕 아기스를 포함한 그들 모든 족속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전투는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의 연합군에 의해 발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5:8; 29:2, 3).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벤에셀 전투)(4:1-11)이후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전한 데 대하여 일대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14;52; 17:50-53; 18:6,30)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 이같은 아기스의 요구는 그로서는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같은 일을 위하여 아기스는 위험 부담을 안채 다윗을 자신의 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27:6, 12). 더구나 아기스는 이미 다윗이 자신의 동족을 침략함으로써 그들과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27:10, 12)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 이 말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다윗의 애매한 답변이다. 다윗이 이같이 애매한 답변을 한 까닭은, 그는 아기스의 요구대로 자신의 동족을 공격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들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히 피할 수 있는 훌륭한 은신처를 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 저자는 이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기술함으로써, 다윗이 극도의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의 애매 모호한 답변을 (1) 그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2) 그리고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머리지키는 자'는 `경호 대장' 또는 `시위 대장'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 나라 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전사(戰士) 다윗이 한낱 이방 왕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비극적 결과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의 손길을 전적 의뢰하여 조국 이스라엘 땅을 끝까지 떠나지 말았어야 옳았다. 따라서 당장 목전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윗이 우상의 나라 블레셋 땅으로 스스로 찾아든 것은, 기근을 피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창 12:10-20).
성 경: [삼상28: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사무엘이 죽었으므로...장사하였고 - 이 사실은 이미 25:1에서 언급되었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이같은 사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울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한 사실과 연결시킨다(8절).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쫓아내었었더라 - 이같은 종교적 숙정(肅正) 행위는 분명히 사울의 집권 초기에 이뤄졌을 것이다(Smith). 이 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1)사울은 왕위에 오르는 예식이 행해질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좇을 것을 명령받았으며(12:14), (2)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18:10-14)인 바, 처음 사울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심으로 이러한 일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의 `신접한 자'(*, 오보트)에 대해서는 어원학상의 여러 이론(異論)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즉 (1) `오브'(`오보트'의 단수)를 비히브리어계의 단어 `아브'에서 온 것으로 보고, 어떤 `제의적(祭儀的) 구멍'에서 유출되는 영혼 혹은 유령이라는 해석(Hoffner), (2) `오브'를 어원학적으로 `조상' 및 `아버지'의 의미가 있는 `아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형상' 및 `도구'라는 해석(Lust), (3) `오브'를 `가죽 부대'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오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귀신이 들어가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복화술사의 배'를 가리킨다는 해석(Smith), (4) `오브'를 `어리석은',`공허한'이란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우브'(*)에서 온 말로 보고, `공허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해석(Lange)등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여러 견해 중 첫째, 본절의 `쫓아내었더라'(*, 헤시르)란 말은 우상과 같은 유형적 형상의 제거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며(왕하 18;4; 23:19; 대하 17:6; 30:14; 사 3:23) 둘째7절의 `신접한 여인'은 문자적으로 `오브를 다스리는 여자'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등에서 볼 때, '오브'는 (2)의 견해처럼 죽은 사람의 혼(魂)을 불러내는 데 사용되는 어떤 '형상'이나 '도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미신적 도구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 사후(死後) 세계와 교통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19;31).
박수(*, 이드오님) - 이것은 `알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점(占) 또는 마술 등의 방법을 통하여 미래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자, 곧 점장이나 마술사를 가리킨다(Lust, Fay).
성 경: [삼상28: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블레셋 사람이...수넴에 이르러 - 여기서 `수넴'(Shunem)은 `두 개의 휴식처'란 의미이다(Gesenius). 그 위치는 침공해 오던 블레셋 군을 및이하여 사울이 진을 쳤던 `이스르엘'(29:1; 수 19:17, 18)의 북쪽 약 5.6km 지점으로, 바로 이 지점은 `모래 언덕(창 12;6)의 남서쪽 기슭이었다. 즉 이스르엘 계곡에 의해 분리되는 길보아 산 맞은편의 소(小) 헬몬산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Conder, Robinson). 아마도이때 블레셋 군대는 `아벡'(4:1; 29:1)에서 소집되어 `수넴'은 가나안 정복 후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며(수 19:18), 동녀(童女) 아비삭의 고향이고(왕상 1:3), 또한 엘리사를 영접한 귀한 여인의 고향이기도 하다(왕하 4:8-10).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술렘'(Sulem)이다(Eusebius).
사울이...길보아에 진 쳤더니 - '길보아'(Gilboa)는 사마리와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에 있는 길이 약 12.8km, 그리고 폭 약 8km 정도의 산악 지대이다. 그곳 중 가장 높은 지대는 해발 약 565m 정도이다. 이 길보아 산악지대의 특징은,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해발 약 10m의 에스들렐론 평지에 다다르며, 반면 북쪽과 동쪽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어 요단강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때 사울은 바로 이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스르엘'(Jezreel)에 진을 쳤다(29:1).
성 경: [삼상28: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사울은 불과 수 마일 거리에서 진치고 있는 블레셋의 엄청 많은 군대로 인하여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보고(*, 라아) - 미세한 것을 들여다 보듯이 세심하게 탐색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16:6; 23:23; 25:15; 왕하 7:13).
두려워서(*, 야라) - 이 말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점층적으로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8:29).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보고 사울이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떨린지라(*, 하라드) - 이 단어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의 기습 공격으로 인하여,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나타냈던 당혹스럽고 어쩔줄 모르는 심리적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4:15). 바로 이같은 단어는 사울의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13:7; 사 32:11). 아무튼 사울은 과거 대(對) 블레셋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14:21-23, 31, 47; 17:53), 금번 길보아 전투를 맞이하여 `두려워 크게 떨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엘라 골짜기 전투(17:1-3) 이후 가장 대규모의 전투인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힘의 원천이요 전쟁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더이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Keil, Clericus).
성 경: [삼상28: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사울이...묻자오되 - 여기서 '묻자오되'(*, 솨알)는 '요구하다' 혹은 '문의(問議)하다'란 의미로서, 사울은 이때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15:26; 16:14)을 잘 알면서도, 이처럼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모습은 블레셋 군대로 인한 사울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대답지 아니하시므로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희귀는 어느 인물 또는 어느 시대의 사악성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3:1).
꿈으로도 - '꿈'(*, 할롬)은 사람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을 잘때,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內面)의 사고 작용 및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 방편이다(창 20:6; 민 12:6; 단 2:4).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꿈, 우림, 선지자 등 3가지 계시 방편은 저급한 단계에서 보다 고급한 단계의 순서인 것 같은데(Fay), 꿈은 그 전달 방법이 간접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점진된 최하급의 계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Erdman).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라도 계시적(啓示的)성격의 현몽(現夢)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을 것이다.
우림으로도 - 여기의 '우림'(Urim & Thummin)의 약칭이다(출 28:30 주석 참조; 민27:21). 그런데 사울이 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철저히 사울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다. 즉 사울은 우매한 판단으로 놉(Nob)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킴으로써,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비아달'로 하여금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로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22:18-20; 23:6).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또한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대제사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추측컨대, 사울은 놉(Nob)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8,19) 이후 성막을 기브온 자기 궁성(宮城)으로 옮긴 다음 엘르아살 계열의 아히둡의 아들 '사독'(Zadok)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던 것 같다(대상 16:39). 그리고 이에 덧붙여 본래의 것을 본뜬 모조(模造) '우림과 둠밈'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 사후 다윗 시대의 두 명의 대제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된다(삼하 8;17; 15:24, 29, 35; 대상 15:11; 18:16). 한편 사울의 이러한 시도는 (1) 놉 제사장 학살 사건 이후 민심(民心)을 수습하고, (2) 자신의 측근들로 제사직을 독점하고자 한 정치적 계산 또는 왜곡된 종교적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울의 '우림을 통한 문의'에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리 만무한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0-261; Smith, Fay).
선지자로도 - 하나님의 대선지자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3절; 25:1). 또한 그밖의 선지자들도 이미 하나님께서 버린(13:13, 14; 15:26; 16:14) 사울의 왕국을 떠나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다(22:5).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선지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튼 꿈과 우림과 선지자는 모든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저냐 받는 방편이었다(15:10, 11; 23:9-12). 하지만 사울은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15:1-23).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만날 만한 때에', 즉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한다는 교훈을 절실히 암시해 준다(사 55:6; 고후 6:1, 2).
성 경: [삼상28: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 - , 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물으리라(*,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2).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성 경: [삼상28: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사울이...변장하고 -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같다(Fay).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위와 같이 철저히 변장을 한 까닭은 신접한 여인이 살던 엔돌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은, '엔돌'이 블레셋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혹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즉 만일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 그 의복에 의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 사울임이 밝혀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맹렬한 공격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왕상 22:30).
밤에...이르러 - 사울은 변장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이렇듯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신접한 술법으로 -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 카삼)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레 19:31; 20:27).
사람을 불러 올리라 -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8: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어찌하여...올무를 놓아...죽게 하려느냐 - 이 말은 신접한 그 무녀(巫女)가 변장한 사울을 몰라봤음을 말해 준다. 즉 이때 그녀는 사울 일행을 자신과 같은 점치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죽이기 위하여(출 22:18; 레 20:27; 신 18:11) 왕의 명을 받고 그곳으로 온 왕의 사신들로 알았던 것이다. 이같은 그녀의 판단은 (1) 이전에 사울이 복술 행위를 엄히 금지시켰으며(3절), (2) 사울 일행은 무녀의 눈에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편, 비록 밤늦게 방문한 낯설은 사울 일행에 대해서는 그 무녀(巫女)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라도, 그당시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통한 복술을 베풀어 유명한 무녀로 통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본절에서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사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여호와께서 사시는 것처럼, 또는 여호와께서 살아 존재하시는 한 맹세한 사항이 확실이 이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 맹세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다(25:26).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삼상28:1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 참조).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 사울이 많은 사람 중 하필 사무엘의 혼을 요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으로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조언자 역할을 담당했었으며(10:1; 15:1), (2) 또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7:10-12),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울은 그때 이같이 사무엘을 부름으로써, 그로부터 블레셋과의 싸움과 관련해서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사울은 다윗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8:1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즉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Henry, Grotius, Patrick), (3) 본문의 '사무엘'(*, 쉐무엘) 앞에 '이름'(*,쉠)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등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네가지의 견해 중 (1)의 견해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3)의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4)의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그 무녀가 본 것은, (2)의 견해대로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큰 소리로 외치며...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 이같은 무녀(巫女)의 언급은, 그녀가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한 인물이 사울인 줄 몰랐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비록 사울은 거구의 소유자여서(10:23) 타인의 눈에 쉽게 띄일 여지가 많았으나, 그래도 당시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8절), 무녀의 눈에 의해서 간단히 분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기서 어떻게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사울인 줄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때 그 무녀(巫女)는 사울이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울인줄 몰랐으나, 사무엘의 형상을 보는 순간 그가 사울인 줄 깨달았을 것이다. 즉 그 무녀는, 블레셋의 침공이 격렬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사무엘의 혼을 부를 사람은 그 전쟁으로 인하여 최악의 곤궁에 빠져있을 사울 밖에는 달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Keil, Lange, Klein). 더구나 그녀는 사울의 큰 키를 이미 본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3, 9절) 두려움과 공포에 차서 즉각 큰 소리를 내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1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왕이...이르되 두려워 말라 -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무당과 박수를 축출시켰던 장본인이다(3절). 따라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현장을 그 사울에게 목격당한 그 무당 여인으로서는 큰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절).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은 그 무녀(巫女)에게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안심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卜術) 행위 조차도 서슴없이 독려하는 자아 모순적인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 이 질문은, 그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Smith).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 여기의 '신'(*, 엘로힘)은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Hertzberg, Klein),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삼상28:1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그 모양이 어떠하냐 -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 사무엘이 83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25:1 주석참조), 사단적 유령이 이같이 '노인'의 모습으로 무당에게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 여기서 '겉옷'(*, 메일)은 발목까지 내려오는긴 망토식 가운으로서,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입었던 옷이다(출 28:4; 레 8:7; 삼하 13:18; 대상 15:27), 사무엘도 생전에 선지자의 외투로서 이같은 겉옷을 입었었다(15:27). 결국 그 무당은 자기가 본 형상의 주인공이 '노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이같은 '겉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가 사무엘임을 넉넉히 느꼈을 것이다(Hertzberg).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절하니라 - 이것은, 그때 사울이 사무엘의 형상을 직접 봤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은, 그 접신녀가 '노인'과 '겉옷'을 언급한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본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사울은 무녀가 사무엘이 올라온 곳이라고 암시하는 곳을 바라보며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8:1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나로 분요케 하느냐 - '분요케 하느냐'(*, 히르가즈타니)는 '격분하다', '진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라가즈'(*)의 사역형으로서 '안식을 방해하다'(disquit, KJV; disturb, NIV)란 뜻이다(렘 50:34). 특히 이 단어는 시돈의 왕 타브닛의 비문에서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Klein). 따라서 이 단어는 무덤을 평온하게 안식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고대 중근동의 내세관과 잘 부합된다(Klein; 욥 3:13-19; 사 14:9). 아울러 이 말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지하 세계인 음부(스올)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히브리인들의 고대 사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심히 군급하니이다 - 여기서 '군급하다'(*, 차르)는 대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하여 당하는 커다란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24:13; 욥 6:23; 7:11). 따라서 영역본들(RSV, NIV)은 '커다란 재난에 처해있다'(be in great distress)란 말로 번역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23:17).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시기로 -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 다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6절에는 언급되어 있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둠밈'을 생략한 것은 '우림과 둠밈'(Urim & Thummin, 출 28:30 주석 참조)이라는 계시 수단은 다른 것과는 달리 자신의 극심한 잘못 때문에 상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Talmud, Berach, Xii. 2). 즉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6절 참조.
행할 일을 배우려고 - '행할 일'은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방책(方策)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8:1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네 대적이 되셨거늘 - 이 말은 칠십역(LXX)의 번역대로 '네 이웃의 편이 되셨거늘'이란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15절).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만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등을 돌리셨다면,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묻는 행위는 가당치 않다는 뜻의 반문(反問)이다.
성 경: [삼상28:1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본절의 언급에 대해서는 15:27, 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28:1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는 사울이 왕이 된 후 하나님께 불순종한 여러 사건 중 '아말렉 진멸 명령'(15:3)을 어긴 사실이 가장 치명적인 사울의 범죄 행위임을 시사해 준다. 아마도 출애굽 후 가나안으로 향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여정을 최초로 그리고 비겁하게 방해하고 적대한(신 25:17-19)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회심(會心)의 복수전을 사울이 그의 사악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망쳤기 때문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행하셨고 - 본절은 이때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5:3)을 이행치 않음으로써(15:9)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15장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울에게 왕위(王位) 박탈 선언을 했다는 점(15:26)과 연결하여, 여기서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은 사울을 왕의 자리에 더이상 앉아 있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작업중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붙이시리니 - 여기서 '붙이시리니'(*, 나탄)란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의지로 어떤 당사자나 나라에게 확실한 승리를 부여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사무엘처럼 '죽은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뜻으로, 곧 '죽을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네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죽을 사울의 세 아들, 곧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가리킨다(31:2; 대상 10:2).
성 경: [삼상28:2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사울이...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 무릎을 꿇고 있던 상태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쓰러져버린 것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종일 종야에...먹지 못하였음이라 - 사울은 전투에 앞서 금식을 하곤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14:24). 이와 유사하게 당시에도 (1) 사울은 엔돌의 이 접신녀에게 자신이 행할 바를 묻기 위하여 (2) 그리고 엔돌로 향하는 과정에서 블레셋의 수비망을 뚫고 가야한다는 어려움을 예상하여(Klein) 일부러 금식을 하였던것 같다. 그러나 그러나 이 견해와는 달리, 먼거리를 오느라고 식사를 하지 못했으리라는 가정은(1) 당시 이스라엘의 진지인 이스르엘(29:1)에서 무당이 거주하던 엔돌까지의 거리는불과 8km 정도(Aharoni), 즉 두 시간 거리밖에 안되며 (2) 23절에서는 사울이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먹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성립되지 아니한다.
성 경: [삼상28:2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 이같은 언급은, 그 접신녀가 사울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사울은 접신녀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을(15절) 마치 사무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로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접신녀는 자신과 사울 사이의 시계(視界)를 흐리게 할 목적으로 향을 피웠을 가능성도 있다(Smith).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 여기서 '고통함'(*, 바할)은 '두려워 떨다'란 뜻이다(창 45:3; 출 15:15; 삼하 4:1; 시 6:2). 그리고 '보고'(*, 라아)는 자세하게 관찰하는 행동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같은 행동 뒤에 취한 접신녀의 태도는 국도의 공포로 떨고 고통스러워 하며, 또한 육체적 탈진으로 기력이 쇠잔해 있는 사울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Hertzberg, Smith).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 '왕의 말씀'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는 사울의 명령을 가리킨다(11절).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 사무엘을 불러내라는 사울의 명령(11절)은 초혼(招魂)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 그당시 상황으로 인하여(3절), 무녀에게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으로 들렸을 것이다(9절). 그러므로 그 무녀가 그같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1) 사울로부터 목숨 보장에 대한 맹세를 이미 받았고(10절) (2) 또한 당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통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이 자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는 마당에서, 그 무녀(巫女)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결코 생명을 건 모험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라는 무녀의 말은 자신의 공을 자찬(自讚)하는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8:2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본절에 언급된 무녀의 행동은 사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접신녀의 이같은 동정도 사울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는 정신적이며 근본적인 원인을 결코 제거할 수는 없었다.
성 경: [삼상28:2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 이것은 당시 만사가 귀찮은, 그리고 거의 자포 자기의 상태에 있는 사울의 탈진한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해 준다.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낙담한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수습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따라서 사울은 지금까지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았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침상'(*, 밋타)은 방의 벽을 따라 길게 배열된 푹신한 긴 의자를 가리킨다(Keil, Thenius, Smith).
성 경: [삼상28:2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살진 송아지...잡고 - 이것은 사울에 대한 무녀의 정성이 극진했음을 잘 시사해 준다(창 18:7; 눅 15:23).
무교병 - 이것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으로, 급히 장만할 수 있는 음식이다(출12:8, 15-20). 이때 그 무녀는 보다 먹기 좋은 유교병은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준비하지 못한 듯하다.
성 경: [삼상28:2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그 밤에 가니라 - 날이 밝을 경우 (1) 블레셋 군대에게 발각될 위험과, (2) 그리고 블레셋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이같 이급히 서두렀을 것이다(Klein). "실로 사울은 자신과 아들들과 백성들의 죽음과 패배를 괴로워하고 슬퍼하기에는 그 양심이 죄로써 너무 둔감해져 있었다. 따라서 사울은 그의 강퍅한 심령을 이끌고 자신의 운명을 맞으러 갔다. 즉 한때 여호와의 신이 임했으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는 축복을 누린 자 - 사울은 이처럼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으로 간 것이다"(O.V. Gerlach; 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9-270).
성 경: [삼상29:1]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본 절의 내용은 28:1, 4에 대한 또 다른 각도에서의 언급이다.
블레셋 사람들은...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 블레셋 사람들의 1차 군사 집결지는 '아벡'(Aphek)이었다. 블레셋 족속은 특별히 다섯 방백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부족 연합 성격의 정치 체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5:8), 이처럼 집결지를 정해 그곳으로 각 부족의 군사들이 총집결했던 것이다. 한편 '아벡'은 '요새'란 뜻으로, 이와 동일한 지명이 팔레스틴 여러 곳에 있다. 혹자들(Keil, Fay, Conder)은 여기 '아벡'을 잇사갈 지파에 속하는 오늘날의 '엘 아풀레'(el-Afuleh)로 추정하여, '수넴'과 멀지 않은 곳이라고 보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어쩌면 엘리 제사장 시절,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블레셋 족속에 의하여 이미 병력 집결지로 사용되었던 '에벤에셀' 근처의 '아벡'일 가능서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4:1).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 '이스르엘'(Jezreel)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림'이란 뜻인데, 헬라식 이름으로는 '에스드라엘론'(Esdraelon)이다. 이곳은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28:4), 기손 강의 영향으로 토지는 비옥하고, 길게 평원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샘'(*, 아인)은 '이스르엘'동남쪽 약 2.8km 지점에 있고, 길보아 산지 북쪽에 수원(水源)을 갖고 있는 우물로서, 오늘날의 '아인 잘루드'(Ain Jalud, '골리앗의 샘'이란 뜻)와 동일 지역으로 인정되고있다(Robinson). 그런데 이 우물은 화강암 절벽에서 흘러 내려온 물에 의하여 형성된 큰 웅덩이의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한다(Conder). 한편, 70인역(LXX)은 여기 '샘'을'엔돌'(*)로 번역하고 있는데 타당성이 없다(Keil, Smith, Fay).
성 경: [삼상29:10]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네 주의 신하들 -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다윗의 휘하 병력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을 이와 같이 표현한 까닭은, 다윗의 추종 병력들이 원래는 사울의 휘하에 있었으나 이후 다윗에게로 넘어온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22:2;23:13;대상12:19-21).
새벽에 일어나라 - 이는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의 참전(參戰)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한 때가 거의 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밝거든 곧 떠나라 - 이같은 아기스의 명령은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의 눈에 더이상 띄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즉 날이 밝은 그 다음날 아침에도 다윗이 블레셋 방백들에 의하여 발견된다면, 다윗은 또다시 그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고, 급기야는 블레셋 땅에서 완전히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도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7절).
성 경: [삼상29:11]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다윗이...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가고 -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시글락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블레셋 방백들로 하여금 다윗의 참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심으로써, (1)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 장애가 없도록 하셨으며, (2) 또한 때마침 아말렉의 침공에 의하여 납치되었던 자신의 가족등을 구출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일찌기 아침에 일어나서 떠나 - 다윗은 진퇴 양난의 위기에서 결국 동족 이스라엘에게도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하고, 또한 아기스 왕에게도 전혀 의심받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거처인 시글락으로 떠났다. 한편, 본절은 B.C. 1010년에 발발한 길보아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전투를 계획했던 블레셋 왕 아기스는 그당시 다윗을 상당히 신임하고 있었던 터라 다윗을 그 전투에 참가시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어떠한 행동을 취하든 결과는 반역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인의 신하가 되어 있던 다윗이었지만,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용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표시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다윗에게 그 전투에 참전할 수 없도록 섭리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사실들을 통해 (1) 인간의 실수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마 26:14-29)과 (2) 당신이 택하신 자를 결코(그가 범죄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신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고전 10:13).
이스르엘 - 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9:2]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 - 여기서 '장관들'(*, 세렌)은 본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방백'으로 번역된 단어이다(5:8, 11;6:4, 12, 18;7:7). 즉 이들은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을 그들의 수도 곧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수 13:3)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들을 가리킨다(5:1-12).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 이것은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 밑에는 천부장과 백부장이 있어서, 병력이 그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이같은 언급은, 블레셋의 군대가 병력도 많을 뿐만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잡혀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의 '영솔하여 나아가고'(*, 오브림)는 '건너가다','목적지를 향해 어느 곳을 통과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바르'(*)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블레셋 군대의 행진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Davidson). 그런데 여기의 '영솔하여'는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문맥상의 의미를 보강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 그렇다면 이때 블레셋의 군대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 이때 블레셋 군대는 자신들의 1차 집결지인 '아벡'<1절>을 떠나 자신들의 진(陳)칠 곳인 '수넴'<28:4>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같이 보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나아가고'(아바르)라는 동사는 먼 거리를 진행하는 행동을 나타낼때 주로 사용되며(창 33:3;민 13:32;신 29:16), (2) 다윗이 '아기스'를 제외한 다른 블레셋 방백들의 거부에 의하여 회군(回軍)하였을 때, 그 당시 그 자신이 위치했던 지점에서 '시글락'(27:6)까지 삼일만에 도착했다는 사실(30:1) 때문이다. 만일 다윗이 그 당시 '수넴'(Shunem, 28:4)에 있었다면, 자신의 거주지인 시글락까지 결코 삼일만에 도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Smith). 그러나 '아벡'에서 '시글락'까지는 약 75km 정도이므로, '아벡'에서 '수넴' 쪽으로 조금 진행한 지점에서 다윗의 군사가 다시 시글락까지 회군(回軍)하는 데 삼일 걸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윗...아기스와 함께...나아가더니 -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다윗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아기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28:1). 가드 왕 아기스는 그때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사역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27:12).
그 뒤에서 - 다윗과 그의 일행은 아기스의 후군(後軍)이 되어 본전투에 참여하였음을 암시한다.
성 경: [삼상29:3]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이 히브리 사람들 - 다윗과 그의 휘하 병력을 가리킨다. 여기서 블레셋 방백들이 이들을 이같이 '히브리 사람'(*, 이브림)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방백들이 이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7).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 - 아기스의 이 말은 다윗이 전에는 사울의 신하였으나 지금은 그와 원수가 되어 아기스 자신의 신하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블레셋 사람들까지도 다윗이 사울과 원수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아기스는 자신의 말이 다른 방백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 - 여기서 '여러 날 여러 해'란 표현은 다윗이 충실한 신하로서 아기스 자신과 함께 오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독특한 표현이다. 실제로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한 기간은 '일 년 넉 달'이었다(27:7).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 이는 아기스가 그때까지, 다윗이 자신 몰래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 이스라엘 적대 세력들을 침노했던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27:8, 12). 그리고 사실 다윗은 이러한 남방 민족들을 아기스 몰래 침노한 사실 이외에는 아기스에게 충성을 다하여 큰 신임을 얻었던 것 같다(Smith).
성 경: [삼상29:4]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 이는 다윗을 두둔하는 가드 왕 아기스에 대한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이다. 즉 블레셋의 다른 네 방백들은, 아기스가 자신들의 말보다 다윗을 더 신뢰하는 데 대하여 이같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한편 여기의 '방백'(*, 사르)은 '군주', '우두머리', '지휘관' 등의 의미로서,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소유자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창 12:15;출 1:11;삼하 2:8). 아무튼 본절은 블레셋 방백 회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당시 블레셋에는 5인의 방백이 있었으며, 그 방백들 중에서 한 명이 블레셋 연방 체제(聯邦體制)를 대표하는 왕이 되었다(6:4,16;수 13:3;삿 3:3). 하지만 이 왕은 절대적 왕권을 갖지 못하고 방백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따라야 했으며, 방백들의 제의를 무시하고 자의(自意)로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6:1-16). 여기서 아기스는 가드의 방백이면서 위와 같은 제한적 왕권을 지닌 블레셋의 왕이었다. 따라서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의 참전 문제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아기스 왕의 뜻을 꺾고 다윗을 되돌려 보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블레셋의 독특한 통치 체제에 기인한다. 그러나 다윗이 길보아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때문이었다.
왕이...정하신 그 처소 - 즉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식읍(食邑)으로 부여한 '시글락'(Ziklaq)을 가리킨다(27:6).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 이 말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군대가 진치고 있는 곳의 맞으편 언덕에 위치할 자신들의 진지에서, 전투를 위하여 이스라엘 군대와 자신들의 군대 사이의 계곡 혹은 들판으로 내려가는 행위를 가리킨다(Keil,Smith, Fay).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 이 말은 다윗이 막상 싸움에 임하여서는 블레셋을 배반하고 사울의 편에 서서 오히려 블레셋을 역공격하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블레셋 방백들은 이전에 믹마스에서 이스라엘과 전투할 때(13:5)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투항하였지만, 그들이 다시 블레셋에 대항했던(14:21) 뼈아픈 경험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대적'(*, 사탄)은 정관사(*, 하)와 더불어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악령의 두목 '사단'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대상 21:1;욥1:6;시 109:6;슥 3:1).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평강을 방해하는 자', 혹은 '은밀하게 대적하는 자'란 뜻이다(Hertzberg).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 이는 다윗이 사울의 편에 다시 서기 위하여 어떤 예물을 그에게 가져갈 것이라는 확신적 질문이다. 여기서 '화합하리이까'(*, 이트라체)는 '기쁘게 하다', '화해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라차'(*)의 재귀적(再歸的) 사역형이다. 따라서 여기의 '화합하리이까'는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울을 즐겁게 하는 것, 즉 블레셋을 배반한 후 도리어 사울을 도와서 블레셋에 역공(逆功)을 펼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또한 여기서 '그 주'는 사울 왕을 가리키는데, 이는 블레셋 방백들이 사울 왕에 대한 다윗의 신실함에 대해 의혹을 끝까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사역자'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과는(27:12) 크게 대조된다.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아니하겠나이까 - 이것은 다윗이 사울과 화해하기 위하여, 즉 사울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많은 블레셋 병사들의 머리를 그에게 예물로 바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전에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기 위하여, 즉 사울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이백을 그에게 바친 일이 있었다(18:27). 아무튼 블레셋 방백들의 이같은 언급은 그들이, 만일 다윗을 전쟁터로 데려가면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입힐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상29:5]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본절은, 다윗이 전에 골리앗을 꺾은 엘라 골짜기 전투(17장)에서 사울과 함께 블레셋에게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혔던 장본인이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언급이다(21:11). 이전에도 가드 왕 아기스는 바로 이같은 언급을 부하들로부터 전해 들음으로써, 자신에게 망명왔던 다윗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었다(21:12). 아무튼 다윗의 무공을 칭송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 노래는 당시의 민심(民心)이 반영된 채 이스라엘 인근 지역의 국가들 사이에도 익히 알려졌던 것 같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 18:7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9:6]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자신의 말의 신실성(信實性)을 강조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적 맹세의 한 방식이다(26:10). 그러나 여기에 언급되는 아기스의 이 맹세는, 그가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기스는 신실한 맹세를 하고자 할 때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같이 맹세한다는 것을 다윗으로부터 배운 후, 이제 오히려 그는 자신의 심경을 진지하게 표출하는 이 마당에서 도로 다윗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정직하여 - '정직하여'(*, 야솨르)는 어떠한 악의(惡意)나 사심(私心)없이 곧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형용사이다(출 15:26;신 12:28;수 9:25).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 '네가 정직하여'와 동일한 의미이다. 아기스는 이같은 동의어를 반복 언급함으로써 다윗의 의로움을 강조적으로 칭찬하고 있다. 한편 아기스의 이러한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 이방 사회에 거주하던 다윗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비록 이방 땅으로 피신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신중하게 생활했다. 이 사실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경적 삶의 원리를 일깨워 준다. (1) 성도의 어느 곳에 처하든지 정직하고 진실한 삶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마 5:13-16). (2)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한 까다롭게 대하는 상전들에게도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듯 진실하게 봉사해야 한다(벧전 2:18). 이처럼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실천적 삶으로써 하나님을바로 섬기는 자가 산 믿음을 소유한 자요(약 2:26),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이다(롬 14:18).
군중(*, 마하네) - 군대의 진영 혹은 진지(陣地)를 가리킨다(4:3; 13:17; 17:1).
성 경: [삼상29:7]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 사실 이 같은 아기스의 명령은, 다윗에게는 매우 기다려지던 바였다. 사실 다윗은 그때 블레셋 군대와 합세하여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과 절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전투에 참여치 않으려 노력했었다(28:2). 그러므로 그때 다윗을 시글락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하여 이같은 말을 하는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에 대하여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겠지만, 그 당사자인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였을 것이고,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 - 문자적으로는 '장관들의 눈에 악함이 보이지 않도록'이란 뜻이다. 이러한 당부는 아기스가 다윗을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사역자'로 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즉 만일 다윗이 다른 블레셋 방백들에 의하여 더이상 눈 밖에 나게 된다면, 아기스도 다윗을 계속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9:8]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본절에 나타난 바 다윗의 이 항변은 분명히 그의 양심에 반(反)하는 것이었다. 사실 다윗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할 수도 없었고, 또한 전투를 하고 싶은 마음도 결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같은 거짓된 말을 한 까닭은, (1) 블레셋 방백들의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고, (2) 또한 아기스가 한 말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Keil). 만일 그때 다윗이 잠잠히 있었다면, 아기스는 다윗을 고소한 다른 방백들의 말(4, 5절)을 참말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주 왕의 원수 - 여기서 '내 주'는 다윗의 의도를 따른다면, 사울을 가리킬 것이 분명하다(McCarter). 이처럼 다윗은 '내 주 왕'을 내심 사울에게 적용시켰지만, 아기스는 다윗의 교묘한 말투에 의하여 '내 주 왕'을 자신에 대한 명칭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같은 말투를 사용함으로써, 아기스가 자신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도 품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도 가책이 없도록 하려고 하였다. 한편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내 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이 사울을 다윗의 '주'로 말했던 것<4절>에 항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의 이같은 말투는 상대를 속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명예스럽지 못한 테크닉'(word-play)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9:9]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천사'를 의미하는데, 아기스의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는 항상 인간들을 위하여 좋은 일만 한다는 일반적 관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다윗의 정직함과 의로움을 강조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내가 아나 - 여기의 '아나'(*, 야다)는 체험적으로 깨달아 자세히 아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가...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 이것은 블레셋의 집결지 '아벡'으로부터 그들이 진을 칠 곳인 '수넴'까지 진군하는 것을 가리킨다(28:4). 한편 '올라간다'는 말은 북상(北上)한다는 뜻과 아울러 블레셋의 진지인 '수넴'이 '모레 언덕'이라는 고지대(高地帶)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삼상30:1]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다윗...시글락에 이를 때. - 이것은 다윗과 그의 일행이 블레셋 방백들의 거부로 인하여 (29:3-5)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여치 않고, 블레셋 군대를 떠나 다시 자신들의 본거지인 '시글락'에 돌아온 사실을 가리킨다(27:6).
제 삼일에 - 여기 '삼일'은 다윗 일행이 블레셋 군대로부터 떠난(29:11) 제 3일을 가리킨다(Keil). 이 기간 동안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약75km를 행군 했음이 분명하다(29:1).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 아말렉 족속들의 이같은 행위는 (1) 이전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행한 침노 행위(27:8, 9)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지니며(Fay, Keil), (2) 또한 생존을 위한 약탈물 확보(Smith) 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곳을지키던 다윗이 북쪽 '아벡'으로 이동함으로써, 그곳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기서 '남방'은 유다의 남부 지역을 통칭하는 '네게브'(Negeb)를 가리킨다(27:10). 그런데 원래부터 이곳은 항상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던 지역이었다(14:48). 그리고 '침노하였는데'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파솨트'(*)는 '홑뜨리다', '벗기다'란 의미로서, 이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침략 행위라기 보다는 갑자가 급습하여 필요한 노획물을 약탈해 가는 노략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27:8).
성 경: [삼상30:2]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 - 다윗 일행의 가족들인(27:3) 이들은 여자들인 관계로 다윗과 함께 전투에 참여치 않고 시글락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한편, 3절은 이 여자들 외에도 자녀들까지 아말렉 사람에게 모두 잡혀갔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끌고...갔더라 - 아말렉 사람들이 이같이 사로잡아 간 까닭은 그들이 결코 인정이 많아서가 아니었다(15:2). 다만 (1) 무장하지 않은 연약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공격에 대항치 않았으며 (2) 애굽에 노예로 팔 경우(창37:25-28)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이방 아말렉 족속의 관행을 오히려 선하게 이용하심으로써, (1)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셨으며 (2) 다윗 가문(家門)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계획을 차질없이 계속 진행시켜 나가셨다. 실로 세밀한 구석까지 친히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성 경: [삼상30:3]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아내와 자녀들 - 이들은 그때 시글락에 남아 있던 자들로서, 다윗과 그의 군사들에게 딸린(27:3) 모든 식구를 가리킬 것이다(Klein).
성 경: [삼상30:4]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다윗...울었더라 - 다윗의 이같은 비탄은 비단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겼다는 사실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즉 다윗은 시글락을 무방비 상태로 비워 놓고 경솔히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간 자신의 실책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부하들의 아내와 자녀가 포로로 잡혀간 그 엄청난 사실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긴 것이다. 한편, 다윗에게 닥친 이러한 큰 재난의 궁극적 원인은 목전의 안전과 정착을 도모코자 언약의 땅 이스라엘을 떠나 우상의 나라인 불레셋 땅으로 이주한 데 있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고생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언약의 땅에서, 언약의 백성과 더불어, 언약의 주를 바라고 믿으면서 울고 웃어야 한다.
성 경: [삼상30:5]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본절은 다윗도 자신의 부하들처럼 동일한 환난을 당했음을 말해 준다. 저자는 이같은 언급을 통하여 (1) 다윗도 다른 부하들처럼 동일하게 슬퍼할 수 밖에 없었으며,(2) 그리고 동일한 피해자인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한 백성들의 태도는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려는 듯하다(6절).
아히노암...아비가일 - 25:3, 42, 43 주석 참조.
성 경: [삼상30:6]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백성이...슬퍼서 - 여기서 '슬퍼서'(*, 마라르)는 '쓰리다' 혹은 '괴로워하다'란 의미이다(왕하 4:27;사 24:9). 이 말은 어떤 괴로운 사실로 인하여 마음이 극도로 낙망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 백성들이 이처럼 말한 이유는 재난의 책임이 전적으로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1) 다윗이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아말렉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려 놨으며(27:8, 9), (2) 또한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의 말을 좇아 시글락을 비워 둔 채 군사들을 모두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등, 백성들의 보호자 혹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치 못했다고 본 것이다(Klein).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 여기서 '군급하였다'(*, 야차르)는 '답답하다', '곤란하다'란 의미로서, 어떤 원인에 의하여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답답한 감정 상태를 가리킨다(창 32:7;삿 2:15;10:9;삼하 13:2).
그 하나님 여호와 - 여기서 '그'는 '그의' 혹은 '그 자신의'란 뜻이다. 그리고 '여호와'란 신 명칭(神名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의 계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15). 결국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때 다윗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으며, 또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신뢰했는지 분명히 보여 준다.
힘 입고 - 엄밀히 말하여 '...안에서'란 의미이다.
용기를 얻었더라(*, 이트하제크) - '힘을 내다', '견고히 하다'란 의미를갖는 '하자크'(*)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와 안에서)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힘을 내다'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삿 20:22;대하 12:13;17:1;겔7:13). 즉 이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하여 적극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새로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다윗의 신앙을 엿볼수 있다. 즉 이때 다윗은 휘하 군사들을 회유하는 설득이나 구구한 변명 대신 하나님께 그 어려운 문제를 맡기고 그분의 도우심을 전적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실로 신앙인이 불신자보다 월등한 점은 고난에 처했을 때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 그리고 당신만을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위로를 제공하신다(시 50:15;사 40:31).
성 경: [삼상30:7]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아히멜렉의 아들...아비아달 - 아비아달(Abiathar)은 자신의 아버지 '아히멜렉'을 포함한 놉(Nob) 제사장들이 사울에 의하여 집단 학살됐을 때(22:18-20), 단신으로 다윗에게 피신해 온 제사장이다. 그런데 그는 당시 다윗에게 도피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둠밈'이 부착되어 있는 에봇을 갖고 갔었다(23:6)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 이는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이었다<14:18;23:9>. 이는 당시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이 어디서부터인지를 잘 보여 준다. 즉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에 있었다. 즉 그는 대제사장의 에봇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령한 교신(交信)을 했으며, 결국 이것이 올바른 행동과 승리의 관건이 되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항상 복되고 의로운 길을 걸을 수 있는 방책은 매사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다(롬 12:1, 2;엡 5:17). 한편, 대제사장의 의복인 '에봇'(Ephod)에 대해서는 출 28:6-14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30:8]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다윗이...묻자와 가로되...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 이때 다윗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은 구체적으로 포로된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였을 것이다. 한편 '미치겠나이까'(*, 나사그)는 원래 '잡다', '치다'란 의미로서, 상대를 공격하여 그들의 소유물까지 자신의 것으로 삼는 행동을 가리킨다(출 15:9).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 '우림과 둠밈'(출 28:30)은 항상 어떤 질문에 대한 '가부'(可否)의 응답만을 했다. 따라서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전달될 뿐이었다(Fay, Hengstenberg).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중단되었으나(28:6), 다윗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계속적으로 계시되고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본서 저자는, 이제 사울의 왕권은 완전히 쇠퇴하고 반면 다윗의 왕권은 일취 월장(日就月將) 흥왕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쫓아가라...미치고...찾으리라 - 여기의 이 대답은 다윗이 질문할 때 사용한 말인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보다 '찾으리라'는 말이 덧붙여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고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삼상30:9,1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이 부분은 다윗의 지도자적 역량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즉 다윗은 자신을 돌로 치려 하는 큰 소요가 바로 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를 일순간에 반전시켜 그들 모두로 하여금 자신을 좇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성들 모두가 다윗을 좇은 것은 '우림과 둠밈'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긍정적인 답변(8절)으로 인하여, 아내와 자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한 육백 명 - 이것은 한 명의 항명자(抗命者)도 없이 다윗의 부하 전원이 다윗을 좇았음을 시사해 준다(27:2).
브솔 시내 - '시글락' 남쪽 약 24km 지점으로, 유다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가사' 남서방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내이다(Raumer). 헤르츠베르그(Hertaberg)는 나름대로의 어원학적 분석을 근거로 하여, '브솔 시내'(Besor Brook)의 뜻을 '좋은 소식의 시내'로 본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 '와디 에스 쉐리아'(Wady es -Sheriah)로 추정되어진다(Keil, Fay, Smith).
뒤떨어진 자를...머물렀으되 - 이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 까닭은 (1) 다윗과 그의 휘하 군사들은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약 삼 일 길을 이미 행군하였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태였으며(1절), (2) 거기다가 쉬지도 못한 채로 온 힘을 다하여서 아말렉 족속을 밤낮 추적한 관계로 몹시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힘들어하는 200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게 하였던 것이다. 물론 추격의 시급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지친 자들에게 무리한 강행군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신앙에 기초를 둔 다윗의 인도적 조처였다. 더욱이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남은 400명과 함께 하신다면 600명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대하 14:11, 12). 이와 같은 다윗의 신념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음(14:6)을 입증하듯 다윗에게 큰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16-20절).
성 경: [삼상30:1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곧 피곤하여...머물렀고 - 이것은 다윗이 육백 명 중 사백 명만을 데리고 아말렉 족속을 쫓아갔던 이유를 제시해 주는 구절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라는 말 다음에 놓고, 본 구절의 초두에 나오는 '곧'(*, 웨)을 '왜냐하면'이란 뜻으로 봄이 좋다(이러한 해석이 히브리 원문에 충실한 해석이다).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 여기의 이 '브솔 시내'(Besor Brook)는 유다 남방의 산악 지역에서부터 흘러 가사(Gaza) 지역을 통과한 후 지중해로 빠지는 하천이다. 그러나 이 시내는 '와디'(Wady) 즉 '건천'(乾川)이기 때문에 우기(雨期)를 제외하고는 항상 강바닥이 말라있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이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강물을 건너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 '브솔 시내'는 험한 골짜기를 따라 흘렀기 때문에, 비록 강바닥이 말라붙는 건기(乾期)라 할지라도 그 골짜기를 건너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친 군사들은 그 골짜기를 건너지 못하고 낙오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이들은 이때 뒤에서 짐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24절:25:13).
성 경: [삼상30:11,12]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애굽 사람 - 이 사람은 아말렉 사람들이 애굽의 어느 변방 지역을 노략하면서 노예로 붙들어 온 자였을 것이다<13절>.
무화과 뭉치 - 이것은 무화과를 재료로 하여 만든 과자를 가리킨다(25:18).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틴 지방의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랄 정도로 매우 강인한 생존력을 지닌식물이다(민 13:23). 그러므로 바위와 돌이 많은 곳에서도 약 9m의 높이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열매는 그 속에 꽃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르지 않고서는 꽃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화과'(無花果)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성 경: [삼상30:13]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애굽 소년이요 - 이것은 다윗의 '어디로서냐'(어디 출신이냐 ?)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한편 '소년'(*, 나아르)은 완전한 성인(成人)은 아니지만, 전투를 감당할 만큼 나이 든 젊은 남아(男兒)를 가리킨다(14:6).
아말렉 사람의 종 - 이것은 다윗의 '뉘게 속하였으며'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사흘 전에 병이 들매 - 여기서 '사흘 전'은 다윗이 아벡 근처에서 시글락을 향하여 출발할 즈음이다(29:10, 11;30:1). 이때 아말렉 족속들은 시글락에 대한 노략질을 마치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말렉 사람들의 시글락 노략은 다윗이 아벡의 집결지에 도착했을 무렵에 이루어진 듯하다(29:1, 2). 한편 '병이 들매'(*, 할라)는 '약해지다', '쇠약하다' 등의 의미로서, 병으로 인하여 움직일 기력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삿 16:7;사 57:10).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언급이다. 즉 주인은 병들어서 노동력을 상실한 이 종에게 치료를 해주고 먹을 것을 주는 등 보살필 경제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마치 물건 버리듯 들에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성 경: [삼상30:14]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그렛 사람의 남방 - '그렛 사람'(the Cherethite)은 그레데(Crete) 섬 출신의 가나안 이주 민족이다. 이와 같이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그렛'과 '그레데'라는 단어는 상호 매우 유사하며, (2) 호머(Homer) 시대에는 그레데에서 '그렛'이라는말이 사용되었으며, (3) 그리고 또 다른 그레데 출신의 민족들인 블레셋(4:1)과 매우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겔 25:16;습 2:5). 그러므로 우리는 '그렛 사람'들이 블레셋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하여, 이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용병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Klein). 그런데 이들의 일부는 후일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그의 친위대가 되어서, 다윗에 대한 여러 번의 모반이 있을 때마다 항상 다윗의 편에 서서 온갖 충성을 다하기도 하였다(삼하 15:18;20:7;왕상 1:38). 한편 이 민족의 거주지는 가나안 땅의 남서쪽 해안(海岸)지대였다(습 2:5). 그렇다면 '그렛 사람의 남방'은 어디를 가리킬까 ? 이곳은 대체적으로 블레셋 사람의 영토 중 남부 즉 시글락 주변 지역으로 추측된다.
유다에 속한 지방 - 이곳은 유다 땅의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1절).
갈멜 남방 - 개역 성경의 '갈멜'은 '갈렙'(*, M.T;*, LXX;Caleb,KJV)으로 번역해야 한다<25:3>. 이 '갈렙'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기에 그나스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분배되었던, 헤브론을 중심으로 한 유다 남부 지역에 해당된다(수 21:12). 결국 아말렉 족속이 침범했던 지역으로서 애굽 소년에 의하여 언급된 세 지역 즉,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은 팔레스틴의 모든 남쪽 지역을 망라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침노하고 - 1절;27:10 주석 참조.
성 경: [삼상30:15]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네가...그 군대에게로 인도하겠느냐 - 이같은 다윗의 요구는 아말렉 족속이 일정한 거처를 갖지 않는 유랑(流浪) 민족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그들도 목적상 일정기간 동안 잠정적인 거처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를 형성하고 살지 않는 유랑 민족으로서, 언제든지 이동할 가능성이 있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어떤 정보 없이 그들의 발자취를 추정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따라서 병든 애굽 소년의 정보는 다윗에게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가 여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만일 이 부족이 다른 부족처럼 도시를 형성해 살아갔다면, 다윗은 안내자 없이도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 애굽 소년의 이 말은, 적군의 패잔병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그 효용 가치가 없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미련없이 죽여버렸던 고대의 전쟁 풍습에 기인한다(Thenius, Smith). 즉 그 애굽 소년은, 다윗도 자신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목적이 달성되면 자신을 죽일 것으로 염려한 것이다.
주인의 수중에 붙이지도 아니하겠다고...맹세하소서 - 만일 다윗이 종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준다면, 그 종은 이적(利敵) 행위를 한 혐의로 인하여 분명히 무참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그 애굽 소년은 다윗에게 맹세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으로 - 여기 '하나님'(*, 엘로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는 창조주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지만, 이방인들에 의해서는 자신들의 이방 신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왕하 17:31, 33;대하 33:15). 따라서 여기 애굽 소년에 의해 언급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다만 자기가 섬기던 신(神)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30:16]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 비록 애굽 소년은 병들어 버림당했지만 삼일 전까지만 해도 아말렉 족속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행 방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더욱이 다윗 일행은 맹추격을 한 반면, 아말렉 족속에게는 여자, 어린이, 가축 등 많은 약탈물이 딸려 있었기 때문에 진행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윗 일행은 애굽 소년의 안내로 쉽사리 아말렉 족속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편 애굽 소년의 이같은 인도 장면은, 이스라엘의 미래 왕 다윗에게는 장차 국내외적으로 많은 협력자들이 있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Klein). 그러나 사울에게로부터는 국내의 협력자들까지 떠나가지 않았던가(22:2) !
그들이...편만하여 - 여기의 '편만하여'(*, 나타쉬)는 무질서하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편만하여'란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방심한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 - 14절에서 애굽 소년에 의하여 언급된 여러 지역들을 말한다.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유랑 민족(베드윈)에게서 흔히 볼수 있듯이, 성공적인 약탈 행위 이후 방탕하게 베푸는 주연(酒宴)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경계심을 푼 상태에서 모두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취하기 때문에, 기습 공격은 그대로 주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소수의 병력을 지닌 다윗의 공격 작전이 주효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삿 8:11).
성 경: [삼상30:17]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치매 - 여기서 '새벽'(*, 네쉐프)은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황혼' 혹은 '밤'을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분명히 '새벽'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욥 7:4;시 119:147). 만일 이것을 성경의 다른 문맥에서 처럼(사 5:11;렘 13:16) '밤'으로 이해하게 되면, (1) 본절의 '저물 때까지'라는 말과 잘 조화되지 아니하며, (2) 간밤의 만취로 인해 완전히 저항 불능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새벽 무렵에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치 않다. 한편 '이튿날 저물 때'(*, 하에렙 레마하라탐)는 문자적으로는 '다음 날 저녁'이란 뜻이다. 그런데 만일 이 말을 문자적으로 취한다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이틀간 아말렉과 싸웠다는 곤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는, 저녁 시간부터 하루를 계산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날짜 계산 방식을 이해한다면 능히 해소될 수 있다. 따라서 다윗과 아말렉 간의 접전은 새벽 무렵부터 그날저녁 무렵까지 하루동안 진행된 것이다(F.R. Fay). 아무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저녁까지...치매'라는 말은 다윗이 저항하는 아말렉 족속을 얼마나 철저하게 진멸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언급이라 할 수 있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 '약대'는 팔레스틴 남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많이 사용한 동물이었다(삿 6:5). 한편 여기 소년들은 가축 관리의 임무를 맡은 자들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약탈한 가축들에게 먹이와 물을 주기 위하여 연회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 다윗의 기습 공격을 당하여 자신들의 약대를 타고 도망침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30:18]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도로 찾고(*, 나찰) - '건지다', '구원하다'란 의미로서, (1) 처음처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삿 11:26), (2)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하는 것(출 2:19;민35:25;삼하 12:7)을 가리킨다.
구원하였고(*, 나찰) - 앞의 '도로 찾고'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는 다윗의'완전한 회복'과 '더욱 풍성한 회복'을 강조한다. 즉 다윗의 아말렉 공격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과 교훈이 깃들어 있다. (1) 이전에 탈취당했던 모든 것을 되찾았다(18, 19절). 이와 같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는 과거에 죄악으로 상실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된다(요 8:32;14:27;15:11). (2) 전리품을 노획했다(20절). 말하자면 다윗 군대는 시글락 사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한 소유를 누리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신앙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화 위복(轉禍爲福)의 은총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위하여 풍성한 은총을 예비해놓고 계신다(요 10:10;엡 3:20).
성 경: [삼상30:19]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도로 찾아왔고(*, 하쉬브) - '돌아오다', '보답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슈브'(*)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히 말해 '돌아오게 하였고'란 뜻이다.
성 경: [삼상30:2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 이 가축떼들은 전에 다윗이 빼앗겼던 가축들이 아니다. 그 원래의 소유자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아말렉이 다른 부족들에게서 빼앗아 자신들의 소유로 삼은 가축떼가 분명하다. 만일 다윗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았다면 18,19절에서 나오는 '나찰'(*)이나 '슈브'(*)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사실은, 다윗이 이 가축들을 전리품으로서 유다 사람에게 나눠주었다는 사실(26-30절)로써도 분명해진다.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 이것은 '그 가축을 앞에서 몰고 가며'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을 잘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스럽다(AV).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 이는 다윗의 업적과 무공(武功)을 환호하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도 다윗을 쳐죽이려 했던 그들의 행동과는 매우 대조적이다(6절). 그러므로 후일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 이처럼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보다는, 바위나 산처럼 늘 변치 않는 하나님만을 전적 의뢰하였다.
성 경: [삼상30:21]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이왕에...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 - 이들은 먼 거리를 급히 행군한 까닭에(9, 10절) 낙오된 자들이었다. 대신 이들은 짐을 지키고 있었다(24절).
다윗이...문안하매 - 여기서 '문안하매'(*, 솨알 솰롬)는 '평강의 여부를 물어보다'란 뜻이다(삿 18:15). 이것은 다윗이 전투에 참여했던 자들에게처럼, 낙오한 자들에 대해서도 매우 호의적 입장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25:5).
성 경: [삼상30:22]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악한 자와 비류들 - 직역하면 '악하고 무익한 남자들'이란 뜻이다. 여기의 '비류'(*, 벧리야알)는 본서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2:12), 사울의 왕권을 부정하려 들었던 자들(10:27). 그리고 다윗의 요구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던 나발(25:17,25) 등에게 적용됐던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마땅히 행할 바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전에(6절) '다윗을 돌로 치자'라고 선동했던 자들도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주지 말고 - 이같은 비류들의 제안은 (1) 전투에 참여치 아니한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례와 상충되며(민31:27) (2)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에 따른 것이었으며(8, 23절) (3) 후방에서 소유물을 지키는 일도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25:13) 등으로 볼 때, 뒤에서 소유물을 지키던 자들에게 돌려져야 할 그들의 분깃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 곧 그것을 자신들만 나누어 갖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성 경: [삼상30:23]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나의 형제들아 - 이처럼 부름으로써 다윗은, 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이나 뒤에 남아있던 자들이나 다 한 아버지로부터 나온 같은 형제들이라는 공동체(共同體) 사상을 불러 일으켰다(F.R. Fay).
여호와께서...보호하시고...그 군대를...붙이셨은즉 - 이것은, 다윗이 비류들의 제안(22절)을 부당하다고 판단했던 논리적 근거이다. 즉 탈취물을 얻을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탈취물의 처분에 대해서 왈가 왈부(曰可曰否)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다윗의 생각과 행위는 (1) 전쟁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2) 전리품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23절) (3) 따라서 전쟁에 불참했던 용사들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형제라는 연대 의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모인 공동체는 '나눔'과'사랑'의 실천장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행 2:44-47). 한편, 여기서 '보호하시고...붙이셨은즉'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군대에게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통틀어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30:24]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이 일에...너희를 듣겠느냐 - 이것은 비류들의 제안(22절)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시사해 주는, 다윗의 거부적 반문(反問)이다.
성 경: [삼상30:25]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다윗이...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 전리품 분배의 규례는 이미 광야 시절 모세 때로부터 있었다. 즉 당시 모세는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여호와의 명을 좇아 노획한 전리품 중 절반은 싸움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그리고 절반은 진(陳)에 머물러 있던 '백성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규례를 세운 바 있었다(민 31:27). 그런데 본절에서와 같은 다윗의 규례 제정은 그러한 광야 생활의 규례에 근거하여, 그 규례의폭을 군인들 중 전투자와 비전투자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등, 확대 제정한 것이다. 한편 이같은 규례 제정은 앞으로도 이같은 경우가 매번 발생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구속력을 지닌 구체적인 규범의 필요성을 느낀 결과였다.
율례와 규례 -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규례와 법도'라는 말로도 번역된 단어로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신적(神的) 명령이나 규범 등을 강조하여 지칭하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다. 신 4:1 주석 참조.
오늘까지 이르니라 - '오늘'(*, 하욤 하제)은 본서의 기록 시기<서론, 3. 기록 연대>까지를 가리키는 관용어구이다. 한편 '이르니라'는 다윗의 규례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속 지켜졌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성 경: [삼상30:26]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1) '친구'와 '유다 장로'를 동격(同格)으로 보고, 그때 다윗은 유다의 많은 장로들 중에서 오직 친구들에게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Keil, Lange, Smith), (2)'친구'와 '유다 장로' 사이에 접속사 '그리고'(*, 웨)가 생략된 것으로 보고, 그때다윗은 모든 유다 장로들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LXX, Klein), (3) '친구'(*, 레레에후, 문자적으로는 '친구에게')를 '성(城)에 따라'(*, 레에레우)의 오기(誤記)로 보고, 그때 다윗이 유다 모든 성의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Hertzberg, McCarter),(4) '유다 장로'는 모두 다윗의 '친구'였던 것으로 보고, 그때 다윗은 모든 유다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NIV)등이 있다. 그러나 26-30절을 보면 첫째, 특별한 성읍들을 언급함으로써 그때 다윗은 모든 유다 성읍의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준것은 아니며 둘째, 또한 다윗과 그의 일행이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의 사람들을 특별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30절)에서, 위의 네 견해 중 (2)의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아무튼 다윗이 이같이 선심(善心)을 베푼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자신이 비록 블레셋 땅에 망명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며, (2)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물심 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준 성읍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며(30절), (3)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앞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닦아 놓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독일의 주석가 크룸마허(F. W. Krummacher)는 이러한 다윗의 행위를 미구(未久)에 이루어질 '왕적 하사(下賜) 행위의 전조'로 보았다.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 - '여호와의 원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1)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계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며 (2)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점에서, 곧 '여호와의 원수'는 이스라엘의 원수였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선물을 바로 이같은 자들로부터 '탈취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1) 적지(適地)에서 망명 생활을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2)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늘 함께 하셔서 자신을 승리로 이끌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다.
선사하노라(*, 베라카) - 원문대로 직역한다면, 다만 '선물이다'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의 이 '베라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리키는 명사로서,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은총)의 선물'(a gift of blessing)이란 의미이다(F.R. Fay).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선물이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임을 분명히 시사하려고 한것이다.
성 경: [삼상30:27]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벧엘에 있는 자 - 여기의 '자'(者)는 복수이다. 즉 이것은 한 성읍에 여러 명의 장로가 있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16:4). 한편 '벧엘'(Bethel)은 그 이름은 같으나, 오늘날 '베이틴'(Beitin)이라 불리우는 유명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10:3)은 아니다(Keil). 이같이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1) 27-30절에 나오는 모든 성읍들이 유다 땅 남부에 위치하는 것들이며, (2) 당시 유다 지파의 선무(宣撫)가 시급한 다윗이 베냐민지파에게까지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벧엘'은 '호라마'와 '시글락' 근처의 '브둘'(수 19:4,5)일 것으로 추정된다(Smith).
남방 라못 - 브엘세바(8:2) 남동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성읍으로 추정된다(수 19:8).
얏딜 - 에스드모(28절;수 15:50)의 남서쪽 약 8km 지점으로, 유다 지파에 속한(수15:48) 제사장의 성읍이다(수 21:14).
성 경: [삼상30:28]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아로엘 - 브엘세바 남동쪽 약 10km, 헤브론 남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대상11:44), 오늘날의 '와디 아라라'(Wady Arara)란 폐허지로 추정된다(Robinson).
십못 - 유다 남방(네게브)에 위치한 한 성읍 정도로만 알려질 뿐이다. 다른 사본들에는 '시브못'으로도 표기 되었다(Keil).
에스드모아 - 오늘날 '세무아'(Semuah)라고 하는 폐허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다의 산악 성읍으로(Schubert, Robinson), 헤브론 남서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다(수15:50;21:14;대상 6:57).
성 경: [삼상30:29]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라갈 - 이 성읍은 헤브론 남동쪽 약 11km, 에스드모아 북동쪽 약 6.5km 지점에 위치한 '갈멜'(25:2)로 추정되기도 하나(Thenius), 확실치는 않다(Keil, Smith, Fay).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 - '여라므엘 사람'(the Jerahmeelites)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대상 2:4,5, 9). 이들은 브엘세바의 남쪽 지역(네게브)에서 살았다<27:10>.
겐 사람의 성읍 - '겐 사람'(the Kenites)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들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안내자들이 되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곳에 정착하였다(15:6;민 10:29-32;삿 1:16). 이들은 유다 남방, 아말렉 사람들의 거주지 북쪽에서 거주했었던 것 같다<15:6;27:10>.
성 경: [삼상30:3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홀마 - 브엘세바 동쪽 약 11km 지점이다(수 15:30). 이곳의 원래 지명은 '스밧'이었으나, 유다 사람들이 이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시킨 후 '진멸을 위하여 헌신된'이라는 의미(Davidson)의 이름인 '홀마'(Hormah)로 바꾸었다(삿 1:17). 오늘날 '라크마'(Rakhma) 고원(高原)의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한 '세바다'(Zepata)로 추정된다(Robinson, Ritter).
고라 산 - 네게브 지방의 변두리에 위치한 세펠라 지역의 한 부분인 '아산'과 동일한 곳이다(수 15:42). 처음 시므온 지파에게 소속된 성읍이었으나(수 19:7), 후일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곳이다(대상 6:59).
아닥 - 이 성읍은 헤브론 북서쪽 약 24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에델'(수15:42;19:7)과 동일 성읍으로 추정되기도 한다(tHERIUS).
헤브론 - 예루살렘 남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한 주요 성읍으로(수 10:3), 일찍이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이다(창 13:18;23:1). 오늘날의 지명은 '엘 칼릴'(el- Khalil)인데, 그 뜻은 '벗' 또는 '친구'이다. 다윗은 나중에 이곳을 자신의 잠정적인 왕도(王都)로 삼았다(삼하 2:1-4;5:3). 삼하 2:1 주석 참조.
왕래하던 모든 곳 -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피 생활을 하던 여러 지역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억울한 도피자 다윗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은밀하게 제공하여 주는 등 분명 다윗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을 것이다(Fay).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본서의 기자는 이들을 다윗의 '친구'라고 기록하였다(26절).
성 경: [삼상31:2]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 미쳐서 - 여기서 '쫓아 미쳐서'(*, 다바크)는'연합하다', '붙다'란 의미로서(창 2:24;신 28:60), 곧 '바짝 달라붙다' 혹은 '바짝추격하다'란 의미이다(삿 20:42;삼하 1:6). 따라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완전히 분산되고,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은 그들의 아무런 경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Klein). 또한 이때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도 각기 흩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의 세 아들의 이름은 역대상 10:2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여기의'아비나답'은 14:49의 '리스위'와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상 8:33;9:39에 언급된 사울의 네 아들 중 네번째의 '에스바알'은 사울 사후(死後) 아브넬에 의해 잠정적으로 사울의 후계자로서 옹립되었던 '이스보셋'이다<삼하 2:8>. 한편,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한(18:1)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요나단은 (1) 사울의 아들이었으나 질투와 시기의 화신이었던 사울과는(18:29) 대조적으로 참 사랑과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자였으며(18:1-4:20:17), (2) 매우 지혜롭고 용감한 군인이었고(14:6-14),(3)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의인이었으며(19:1;20:30-42), (4)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의 인물이었다(18:4;23:17). 그러한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패역한 사울과 운명을 같이한 사실은 다음의 교훈들을 준다. (1)부친의 사악한 죄 때문에 그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된다(겔 18:2). (2) 의인의 소망과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고 오는 세상의 참되고 영원한 삶에 있다(잠 14:32). (3) 사악한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한 효성이 아름답다.
성 경: [삼상31:3]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사울이 패전하매 -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 전쟁이 사울에게 무겁게 되었다'란 뜻이다(왕상 12:10;대하 10:14;애 3:7). 이것은 결국 (1) 전황(戰況)이 지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2) 불리한 전화으로 인하여 극도로 낙심하게 되는 것 등을 말한다(Klein, Lange).
활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 여기서 '따라 미치다'(*, 마차)는 '발견하다','만나다'란 의미이다(창 36:24;신 22:23). 즉 블레셋 군대의 궁수(弓手)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찾아 발견하고는 맹렬히 추격했다는 뜻이다. 한편 '활쏘는 자'는 문자적으로 '활을 가진 자'란 뜻이다.
중상한지라(*, 야헬 메오드)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1) '야헬'을 '고통하다' 혹은 '근심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훌'(*)에서 온 것으로 보고, '매우 떨었다'로 해석하는 견해(Keil, Smith, Klein, Lange, Wigram),(2) '야헬'을 '다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할랄'(*)에서 온 것으로 보고,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매우 많이 다쳤다'로 해석하는 견해(Hertzberg, Davidson) 등이다. 그런데 본 단어 '야헬'은 신명기 2:25에서는 '근심하니라'로 번역되었으며, 또 그렇게 번역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 중 (1)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러나위의 견해 중 (2)의 것이 맞다고 보는 학자들은,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린 아말렉 소년의 증언 때문에 그같은 판단을 하는 듯하다. 즉 그 아말렉 소년은, 사울이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알고'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던 것이다(삼하 1:10). 그러나 그 아말렉 소년의 증언은 본장의 언급 및 대상10:1-6의 언급과는 전반적으로 상층되는 위증(僞證)임이 분명하다(삼하 1:1-10). 한편 여기와 병행 구절인 대상 10:3에서는 그 단어가 위의 (1)의 견해와 유사하게 '군급하여'로 번역되어 있다.
성 경: [삼상31:4]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할례 없는 자들 - 이 말은 할례의 징표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창 17:9-14)이라는 선민(選民) 사상에 근거한 말로, 곧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하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14:6;17:26,36).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 여기서 '모욕할까'(*,히트알렐루)는 '더럽게 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알랄'(*)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더럽게 할까'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말은 사울을 죽인 후에 그 시체를 욕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남에게 가혹한 잔악 행위를 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곧 블레셋이 이전에 삼손을 사로잡아 그를 욕보였던 것처럼(삿 16:21-27), 블레셋 군대가 사울을 사로잡아 학대하고 욕보이는 행위를 가리킨다(삿 19:25). 그러므로 사울은 그들이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을 기피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병기 든 자가 두려워하여 행치 아니하는지라 - 병기 든 자의 이같은 처신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1) 자신은 왕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 기회를 봐서 어떻게 해서는지 그 긴박한 상황(3절)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2)사울에 대하여 다윗이 가졌던 생각처럼(24:6) 기름 부은 바된 왕에게 감히 칼을 댈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 칼 끝을 위로 하여 칼을 세운 후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덮친 행위를 말한다. 한편 생명에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자살은 결코 흔치 않았으나, 여기 사울의 자살 행위는 그의 비극적인 종말을 더욱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성 경: [삼상31:5]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병기 든 자...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함께 죽으니라 - 병기든 자의 이같은 행동은 (1) 자신이 모시던 상전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소박한 충성심, (2) 자신의 주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자살토록 방치한 혐의로 인하여 비록 자신이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처형을 변치 못할 것이라는 염려(삼하 1:14, 15), (3) 사울의 생각처럼 '할례 없는 자'에 의해서는 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히브리적 종교심등의 이유로 이뤄졌을 것이다. 후일 유대 전승은, 여기서 사울의 병기 든 자는 에돔사람 도엑이며, 그가 자살한 칼은 놉 제사장들은 쳐죽인 바로 그 칼이라고 하나(22:18), 그러한 전승의 신빙성은 없다(Smith)
성 경: [삼상31:6]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그의 모든 사람 - 역대상 10:6에서는 '그 온 집'으로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그의 모든 사람'은 이 어구 앞에 '역시' 혹은 '또한'이란 의미를 갖는 '감'(*)이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점에서, 본 어구 앞에 언급된 사울의 병기 든 자와는 다른 무리들 즉 사울의 모든 근위(近衛) 병사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여기의 '모든'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전투에서 사울의 군대가 완전 섬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 아울러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가문이 완전 멸절된 것 또한 아니다. 사울의 사촌이다 군대 장관인 '아브넬'(14:50)이 살아 남았고, 아마도 전투에 참여치 않았을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에스바알, 삼하 2:8;대상 8:33;9:39)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 사후에도 왕가(王家)의 명맥을 잠시 유지해 갔다.
성 경: [삼상31:7]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 - 여기서 '골짜기'는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산의 북동쪽 기슭으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이스르엘(Jezreel) 골짜기'(29:1)를 가리킨다. 그리고 '저편'(*, 에베르)은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지파 등의 주민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분명히 비전투 요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울의 군대와 합류치 못한 까닭은, 바로 이같은 연합을 방지하기 위하여 블레셋의 군대가 이곳 사람들과 사울의 군대 사이인 '수넴'(28:4)에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Aharoni).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 -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요단 건너편'은 '요단 동부 지역'(Transjordan) 전체를 가리킨다(Smith). 그러나 여기서는 전투 장소인 길보아 산의 맞은편 지역인 므낫세 반 지파의 거주 지역만을 가리킨다. 한편 길보아 산의 패배 소식은 이곳까지 급속히 퍼져나간 것 같고, 따라서 이들은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남하(南下)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 -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의 군사들로서, 이들은 주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등에 속한 백성들일 것이다.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 이는 길보아 전투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이 이스라엘 온 땅에 큰 공포의 분위기를 몰고왔음을 말해 준다.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 거하니라 - 여기서 '거기'는 갈릴리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이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마하나임'(Mahanaim)에서 왕위에 올랐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삼하 2:8,9). 또한 다윗이 사울의 사망 직후 유다 지역에서 왕위에 오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유다 지역도 당시 블레셋의 공략으로부터 점령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삼하 2:1-4).
성 경: [삼상31:8]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그 이튿날 -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한 그 다음날을 말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 여기서 '벗기러'(*, 파솨트)는 일반적의미의 약탈 행위를 가리킨다(27:10;30:1;삿 9:33;대하 28:18).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의복을 벗기는 행위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욥 22:6;미 2:8). 아마도 이것은 그 당시 옷이 모든 약탈물 중 가장 귀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수 7:24).
사울과 그 세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 의복, 무기, 식량 등 전리품을 획득하러왔다가, 시체들 중에서 발견된 이스라엘 왕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주검은 블레셋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노획물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31:9]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사울의 머리를 베고 -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큰 승리를 증명키 위한 증거물로 삼기 위한 행동이었다(17:57). 이같은 행위는 고대의 전쟁에서는 일종의 관습이었다(Smith).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 이는 사울의 머리를 벤 중요한 목적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14:47;17:52;18:6), 엄청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그들에게 대단한 기쁨을 안겨줄만한 큰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당 에게 전파한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자신들의 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10절;대상 10:10). 이같이 적으로부터 빼앗은 대단히 중요한 전리품을 자신의 신에게 봉헌하는 행위는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언약궤를 다곤(Dagon) 신당에 바친 경우<5:2>, (2)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여호와의 성소에 보관한 경우(17:54;21:8,9)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신당'(*, 베트 아차베헴)은 문자적으로 '우상들의 집'이란 뜻이다. 그리고 '아차베헴'은 '새기다', '조각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차브'(*)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베트'(*)는 형태는 단수이지만, 복수(複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Lange, 출 6:14). 결국 이것은, 블레셋 땅에는 많은 신당(神堂)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삼상31:10]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 이같은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신(神)에 대한 숭배와 봉헌의 성격을 띤다(9절;5:2). 즉 블레셋 족속은 자신의 신들이 자신들에게 금번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함으로써, 바로 이같은 봉헌 행위를 한 것이다. 한편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 신 7:5), '아낫'(Anath) 등과 더불어 가나안 3개 여신 중 하나로서, 전쟁과 풍요의 여신(女神)이다(삿 2:13주석 참조). 그리고 '아스다롯'이란 복수(plural)형태인데, 성경 용례상 이 '아스다롯'이 복수로 사용되는 것은 이것이 항상 '바알'과 함께 여호와의 신적 저주의 대상으로 선포되어지는 문맥에서이다(7:3, 4;12:10;삿2:13;10:6). 반면에 '아스다롯'의 단수형은 '아스타르테'(Ashtarte)로서, 시돈의 여신인 '아스토레트'(개역 성경에는 '아스다롯'으로 표기되어 있다)와 동일시된다(Klein,왕상 11:5,33;왕하 23:13). 이 사실은 곧 블레셋 족속들이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에 깊이 동화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리고 여기 '아스다롯의 집'은 '아스글론'에 있었던 고대의 유명한 신전(神殿)으로 추정된다(Herodotus).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 여기서 사울의 '시체'는 '그 머리를 다곤의 묘(廟)에 단지라'라는 역대상 10:10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머리가 없는 몸뚱이 뿐의 시체였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12절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이때 사울의 세 아들들의 시체들도 함께 성벽에 못박혔음도 분명하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여기서 본 저자가 오직 사울의 시체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은, 오직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 죽어서까지 수치를 당하는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Hertzberg, Keil). 한편 '벧산'은 요단 골짜기 근처 즉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끝부분으로, 요단 강으로부터 서쪽으로약 6.5km 지점, 그리고 갈릴리(긴네렛, 디베랴)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당시 블레셋에 의해 점령된 성읍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은 행위와, 이전에 골리앗이 다윗의 시체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줄 것이라고 그를 위협했던 일(17:44)과는 어떤 상통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블레셋 정복 후 블레셋의 에그론 관리들의 시체를 그 성읍 주위의 기둥 위에 매달아 놓기도 했었다고 한다(Pritchard). 바로 이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자신들에 의하여 패배된 적장(敵將)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는 등 모욕하고 또한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행위는 (1) 상대국 백성들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안겨주며 (2) 자신들의 승리를 공개적으로 확증하려는 당시의 전쟁 관습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러한 비참한 사건은 개인 사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행한 그의 끈질긴 반역 행위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왕을 원했던 그 반역 행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수모요 치욕이라 할 수 있다(8:4-8,19,20).
성 경: [삼상31:11]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을 장사지내는 야베스 거민들]
길르앗 야베스 거민 - '길르앗 야베스'(Gilead-Jabesh)는 갈릴리 바다 남쪽 약30km 지점에 위치한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이다(수 17:5,6). 이곳은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었다(11:1). 그때 사울이 '베섹'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암몬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구원했었다(11:8-11). 그러므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과거 사울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이 은혜를 기억한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 -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에서 목을 벤 후, 목은 다곤의 신당에 매달고(대상 10:10), 나머지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박아 사울의 시체를 심히 욕되게 한 일을 말한다.
성 경: [삼상31:12]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을 장사지내는 야베스 거민들]
모든 장사 - 여기서 '장사'(*, 이쉬 하일)는 '남자'와 '유력'(有力)이 합성된 말로서, '기드온'(삿 6:12)과 '입다'(삿 11:1)등에게 적용되었다.
일어나(*, 쿰) - 이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을 의미치 않는다. 보다 함축적인 의미로서, 특별한 행위를 실천하기에 앞서 거기에 대한 강한 결단의 태도를 보여주는 관용적인 단어이다. 한편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이같은 결단은, 과거에 자신들이 암몬 족속들로부터 침공당하여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11:1-3), 사울의 군사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암몬 족속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았던 사실을 기억한 연고이다(11:11). 즉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에게 신의(信義)를 지키고 보은(報恩)하기 위하여 블레셋 족속들에게 능욕당하고 있는 사울의 시체를 취하여 오기로 결단을 한 것이었다.
밤새도록 가서 -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시체가 못박혀있던 '벧산'까지는 약21km 정도의 거리이다. 그러나 요단 강 계곡 등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벧산까지의 험한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그때 그 거리를 최소한 약 5시간 정도 이상 행군했을 것이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밤을 택하여 그같은 일을 결행한 까닭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함이었다(28:8).
불사르고(*, 사라프) - 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장사 방식을 택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즉 (1) 목이 잘리는 등 매우 손상된 시체였기 때문에, 매장(埋葬)과 같은 일반 장사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이같이 화장했다느 견해(Lange, Keil), (2) 매장과 같은 일반적인 장사법을 사용할 경우, 블레셋 사람들이 재침공하여 그 시체를 파내고 다시 모욕할까 염려하여 이같이 했다는 견해(Thenius, Smith, Philippson), (3) 죽은 지가 오래되어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어서 이같이 했다는 견해(Hertzberg), (4)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와 인접하여 살던 까닭에, 그들의 영향을 받은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훌륭한 용사들을 화장하는 이교적 장사법에 따라 이같이 했다는 견해(Rainey), (5)'불사르고'(사라프)라는 단어를 '송진을 바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여부스 사람들의 장사 방식에 따라 사울의 시체를 방부 처리했다고 보는 견해(Driver)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 중 (2)의 견해는, 사울의 매장지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밖인 요단 동쪽이라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그리고 (4)의 견해는, 모압 암몬 등의 민족들은 화장(火葬)하는 방식의 장례에 별로 익숙치 않다는 점에서 또한 타당치 않다(Klein). 오히려 그 민족들은 적의 시체를 불살라서 뼈를 가루로 만드는 등의 형벌적 성격으로 시체를 불살랐다(암 2:1). 따라서 존경심의 발로로 화장(火葬)을 했던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5)의 견해는 시체를 불사름으로써 뼈가 남았다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적다. 그렇다면 (1)이나 (3)의 견해를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사건을 병행적(竝行的)으로 다루고 있는 역대상 10장은 사울의 시체를 불사르는 내용은 언급치 않는다. 다만 뼈를 묻은 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대상 10:12). 이는 산 사람 혹은 시체를 불사르는 행위를 악행에 대한 형벌의 관점에서 보는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따라서(레 20:14;21:9),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행위를 바르지 못한 것으로이해하여 화장(火葬)은 생략하였기 때문인 듯하다(Klein). 혹은 화장(火葬)과 매장(埋葬) 사이의 조화에 어려움을 느껴 시체 처리에 대한 결과만을 언급했기 때문일 것이다(Keil).
성 경: [삼상31:13]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을 장사지내는 야베스 거민들]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 여기서 '에셀 나무'(the tamarisk tree, NIV) (대상10:12에는 '상수리 나무'(the oak tree, Living Bible)로 표기되어 있다. 히브리 원문은 위성류(渭城柳) 나무를 가리킨다)는 길르앗 야베스에 많았던 유명한 나무였다(Smith).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 장사한 까닭은, 그들은 사울이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6). 한편 그곳에 묻혔던 사울의 유골은 후에 다윗에 의하여 발굴되어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자신의 아비 기스의 묘에 안장되었다(삼하 21:11-14).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 아론이나 모세가 죽었을 때,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씩 애곡을 했었다(민 20:29;신 34:8). 이같은 애곡은 고인(故人)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키 위함이었다. 여기의 '금식'도 애곡의 일종으로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삼하 1:12). 이처럼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으로부터 걷어다가 장사를 지내고 7일을 금식하였다. 즉 이들은 과거에 사울이 베풀어준 은혜를 기억하고(11:1-11) 그 보답으로 이러한 선행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는 일도 필요하지만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은혜레 대한 감사 행위는 더욱 큰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만을 맹목적으로 간구하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본서를 마무리짓는 사울의 비극적 죽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한(8:5,20)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구속 역사의 섭리 속에 승화시키사, 당신의 뜻에 합당한 한 인물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삼으셨으니(13:14;15:28;16:13), 그가 곧 다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