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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의 창
바로 보며, 말해야 할 것이 있다면 ― 팬데믹 시대의 시(詩)를 위한 단상
조기현(시인, 문학평론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을 되뇌며, 문학인으로서 명복을 빈다. 지구촌으로 확산된 ‘코로나19’로 인해 불행히도 유명을 달리하게 된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지금도 병증을 앓거나 가족을 여의게 된 분들과 그리고 이들을 위해 의료 활동에 헌신해온 분들께, 위로와, 감사와 존경심을 표한다.
부음(訃音)들
‘사회적 거리두기’로 생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이전보다 더 슬픔에 민감해진 것인지, 최근 ‘유(類)다른’ 부음들을 접한다. * 멸종위기 '붉은바다거북' 포항 앞바다서 사체로 발견 (‘매일신문’, 2020. 07. 05 기사 제목) * 10년째 말라죽는 ‘울진 금강송’ 병명도 몰라 (‘서울신문’, 2020.06.23. 기사 제목)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하던 「구지가」의 노랫말은 사라지고 오늘의 바다에서는 거북들이 뱃속에 문명의 쓰레기를 가득 품고서 뭍으로, 뭍으로 머리를 밀고 올라와 죽고 있다. 또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궁궐을 짓는 소나무’라며 백두대간 위에 우뚝 섰던 소나무들이 “봄날의 고온과 가뭄에 땅 속 곰팡이들(菌根, mycorrhiza)이 사멸하자 함께 죽어”서 백골(白骨)로 섰다는 소식이다. 오늘의 생명 현실이 이러하다. 눈을 넓히면 지금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부음들이, ‘멸종이 멸종의 부르는, 도미노 행렬’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다음은 생태학자 폴 에를리히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 등이 최근 미 국립학술원 회보(PNAS)에 실은 논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인류에 의해 제6의 대멸종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최신의 자료로 재평가한 결과 멸종 속도는 당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며, 사람에게 생존에 필요한 핵심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연의 능력이 무너지고 있다. 한 종(種)이 멸종위기에 놓이면 거기에 기대 살던 다른 종도 함께 사라지는 ‘도미노 효과’, 이른 바 멸종이 멸종을 낳는다.” (‘한겨레신문’, 2020. 06. 02. 기사에서 발췌, 개술)
코로나19로 병들고 죽어가는 인명의 숫자는 매일 매 시각 보고되고 있지만, 인간 문명에 의해 지구촌의 생태환경이 훼손된 결과로 진행되는 이 같은 멸종 도미노는 간과되고 있다. 더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와 세균, 바이러스 들이 겪는 생멸 위기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사스, 에볼라, 메르스에 이어 ‘코로나19’가 생겨나고 변형을 겪어온 이야기가 밝혀지고, 그것이 생태적으로 인간 문명에 귀책(歸責) 되는 문제임을 우리가 인식하게 된다면, 그리고 이런 치명적인 바이러스들의 출현 주기가 더욱 짧아지게 된다면, “사람은 자신이 앉아 있는 나뭇가지에 톱질해, 스스로를 자신의 생명 지탱 시스템으로부터 분리하려 한다.”고 꼬집은 말을 아프게 곱씹게 될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거대 도시들의 위기
‘마스크 쓰고 카메라 앞에 선 트럼프, 하루 확진자 7만 명에 결국 백기’라는 기사(중앙일보, 2020. 07. 12)와 ‘조지 플로이드 피살'에 항의하는 시위 소식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의 흔들림이 감지된다. 미국은 ‘사회적 불평등’ 위에 세워진 국가였던 탓으로 위기 때마다 더 많은 ‘비용’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속살’이 다 드러난 것이다. 20세기의 위기와 달리 코로나19 사태는 문명세계 자체의 기저에서 발생하는 위기로서 진영과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백신 개발이 지체되고 있는 현실에서 21세기의 강대국들도 속수무책, 부득이 '사회적 거리두기'나 ‘마스크 쓰기’같은 기본적인 수단에 의지할 뿐이다. 지금과 같이 사태가 지속되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위기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더불어 코로나19의 창궐 앞에서 뉴욕·런던·파리·로마·우한 등 거대 도시들도 위태롭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신화를 빛내며 ‘마천루(摩天樓)’로 커온 이들, 그러나 그 뒤편에는 언제나 불평등과 폭력, 착취와 억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주변부와 약소국으로부터 재부를 약취하며 성장해왔으나, 이제 코로나19의 위기 속에 중심이 흔들리는 형국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사태가 심각해질 때 이들 거대 도시들이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하지 못하고 도리어 내부의 이주노동자와 난민들, 그리고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을 ‘골칫거리’로 내몰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 같은 문제에 참고할 전거(典據)가 있다.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이른바 ‘불량구역’이 도시들을 때때로 엄습하는 모든 전염병의 발원지를 이루고 있음을 증명했다. (중략) 죽음의 천사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무자비하게 맹위를 떨친다. 이런 것이 일단 과학적으로 확인되자마자, 인도주의적 부르주아들은 자기 노동자들의 위생을 위한 고상한 경쟁심으로 불타오르게 되었다. (중략) 노동자계급의 위생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정부위원회가 임명되었다. - 『칼맑스 드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4』, 데이비드 하비의 『세계를 보는 눈』 p59. 재인용.
오늘의 국가들이라 해서 다르겠는가. 재해와 전염병이 국경을 지워버릴 만큼 강력하다 해서, 인류사회가 공동체로 되돌아가리라 보는 것은 낭만적인 낙관이다. 어느 국가든 잠시간 사회안전망을 보완하겠지만, 종국엔 자본시장의 매커니즘을 추동하며 경쟁적으로 패권을 다투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런 위기 국면을 통해서 새로운 이득을 보는 쪽은 IT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계층이나, 여전히 자본과 생산수단을 더 많이 쥔 쪽이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위기는, 장차 ‘경제대공황’, ‘기후환경대이변’, ‘생물대멸종’으로 이어지는 전조일 수도 있다. 위기가 복합적으로 누적되어 임계점으로 비등하게 된다면 필연코 ‘문명대전환’을 위한 혁명의 에너지도 비례하여 팽창할 것이다. 이런 도정에서 문학은 어떤 소명을 찾아야 하는가.
‘바로 봄’과 ‘시언지(詩言志)’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여러 지역 시단에서 <기획 시집>들을 출간했다. 마치 융천사가 「혜성가(彗星歌)」를 지어 변괴(變怪)를 물리쳤다는 설화적 사건을 다시 보는 듯 반가웠다. 인간사의 위기 때마다 시는, 위기의 본질을 바로 인식하고 초극할 수 있는 마음과 지혜를 밝혀 주었다. 위기의 사태를 ‘바로 보며 말하는 역할’에서 시인이 중요한 사명을 지녔던 것이다. 흔히 변괴를 물리친 주술가(呪術歌)로 인식되어 왔던 「혜성가」를 다시 읽으면서 그런 모습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옛날 동쪽 물가 건달바(乾達婆)의 / 논 성(城)을랑 바라보고 / 왜군이 왔다 / 횃불 올린 변방이 있어라. / 세 화랑이 산에 오르심을 보고 / 달도 부지런히 불을 밝히려 하는데 / 길을 쓸어줄 별을 바라보고 / 혜성이라 아뢴 사람이 있다. / 아아, 달 아래 떠갔더라. / 이 무슨 혜성 기운이 있을꼬. - 융천사, 「혜성가」 전문. 최철, 현대어 번역. 『한민족대백과사전』 참고.
노래의 내용은 ‘옛날 건달바가 노는 성을 보고 혜성이 나타났다며 왜군의 침략으로 오인하여 변방에서 봉화를 올린 적인 있었다. 지금은 다만 세 화랑이 산을 오르고 있는데 그것을 본 달이 불빛을 밝히려 떠오르고 있고 그 앞에서 혜성이 길을 쓸어 주고 있는 것이니, 이는 길조(吉兆)일 뿐 변괴는 없다.’ 라는 것이다.(신재홍, 『향가 서정 여행』 등 참조) 다시 말해, “본래가 청정무애(淸淨無碍)한 현상인 혜성을 중생이 스스로 미망(迷妄)을 내어 현혹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이니, 사리(事理)를 ‘바로 봄’(통찰함)으로써 당대인들로 하여금 ‘혜성’에 대한 편견(또는 속신俗信)을 지양하고 ‘화평(和平)’ 혹은 ‘화엄(華嚴)’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찍이 시는 ‘바로 봄’으로써 당대의 위기(‘변괴’)를 극복할 인식론을 제공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봄’이 중요하다는 선례를 김수영의 시에서도 얻는다. 그 역시 일생토록 일제강점기와 냉전체제 속 분단의 갈등과 독재정치와 신식민주의(新植民主義 Neocolonialism)로 이어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대를 살았다. 그가 시인의 소명을 받아들이면서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보마 (중략)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孔子의 生活亂」)라고 천명했던 것은 ‘바로 봄’이 구난(救難)의 첩경이요 일종의 ‘정언명령’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기를 오로지 시 쓰기(詩作)로 대처해야 했던 그는 ‘시’를 ‘온몸으로 (삼아 그 온몸을) 밀고나가’고자 하였지만 끝내 비명에 요절하고 말았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폭포」)라고 노래했던 김수영. 그가 추구했던 시적 모더니티(현대성, Modernity)란 뜻밖에도 이전의 모더니스트들과 사뭇 달랐다. 그는 미감(美感)이나 정서(情緖)를 언어로 표현하는 쪽보다, 사물과 현상을 ‘바로 보고’ 새로운 뜻을 밝혀내는 쪽에 더 중심을 두고 있었다. 시인 이상(李箱)이 남긴 자산,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Surrealisme)를 계승하고자 했지만, 그 기법보다 정신(혁명성)을 계승하겠다는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박인환의 시를 ‘코스튬’이라 비판한 것이나, ‘형식’보다 ‘사상’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라고 규정했던 그는 ‘시’와 ‘반시(反詩)’를 변증법적 대극의 관계로 인식하면서, 그 속에서 진정한 시, 세계의 개진을 모색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 안다”(「서시」)라고 서술하듯 시를 썼다. 당대 현실이 ‘시(형식, 노래, 서정)보다 ‘반시’(내용, 산문, 서사·극·교술/비평)를 더 요청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사회비평 서적을 탐독하고 평론을 병행하면서 당대 문학과 문단에 대해 준열한 비판을 가했던 것도, 4.19 혁명을 선구적으로 인식하고 ‘참여(參與)’할 수 있었던 것도, 이후로 “고독한 영구혁명(永久革命 Permanent revolution)의 길”(김명인,「혁명과 반동, 그리고 김수영」)을 우리 시의 자산으로 남겨놓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다. 이러한 김수영의 시적 모더니티는 193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미학보다 오히려 한시(漢詩)의 ‘시언지(詩言志)’라는 개념과 더 잘 상통한다. ‘시언지(詩言志)’란 곧 ‘뜻을 밝혀 말하는 것, 보이지 않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시이다’라는 말(‘시로써 정을 말한다’라는 시연정(詩緣情)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결국 시는 어느 시대든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진실’이며 ‘그 표현’을 가리킨다. 시적 모더니티가 모더니스트로 지목된 이상의 「거울」이나 김수영의 「풀」과 같은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그 외의 시인의 시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윤동주의 “슬픈 사람의 뒷모양”(「참회록」), 이육사의 “강철무지개”(「절정」)와 같은 이미지들, 그리고 앞서 살핀 바 「혜성가」 또한 당대의 진실을 함축하는 시적 언술로서, 곧 그 시대의 시적 모더니티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리떼는 없다, 다만 그것은 흰 구름일 뿐”(이강백, 「파수꾼」의 대사),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자리”(박지원, 「호곡장기」)와 같은 언술에서도, 뿐만 아니라 “그래도 지구는 돈다!”(갈릴레오 갈릴레이)에서도 ‘시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밥 딜런(Bob Dylan)의 노랫말에 노벨문학상이, 영화 『기생충』에 아카데미상이 수여된 사례를 보면서도 이 시대가 다시금 간절히 ‘언지(言志)’를 요청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득세·만연한 이래 우리 시단을 돌이켜보면, 다수의 시인들은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통념을 수용하여 ‘언지’를 도외시하며 ‘연정’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대체적인 형세가 아닌가 싶다. 감정의 개별화와 표현 감각의 사적(私的) 갱신을 위해 경쟁적으로 진력하였던 까닭에 대체로 시들이 ‘미문(美文)·기교주의’, ‘언어세공·유희’에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뜻을 찾고 소통하며 시대를 파수하는 지성적인 노력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해 온 편이 아닌지 반성해 보게 된다. 이를 테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시단에서 부각되었던 시적 경향, 1930년대 초현실주의에서 ‘혁명성’은 제거해버리고 그 기법들(자동기술법Automatism, 전위Déformation, 오브제Objet 등)만을 취하여서 언어도단에 가까운 듯이 만들어낸 시, 극히 사적(私的)인 언술로 짜낸 듯이 보이는 유희(遊戲)에 가까운 시, 이런 경향이 득세하는 국면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그런 시들은 인공지능(AI)의 몫으로 넘겨주어야 할 때가 이제 머지않아 닥칠 것이다. 사물을 바로보고 참된 뜻을 말하는, ‘시언지’의 정언명령이 팬데믹 시대에 착근되어 시 창작이 활기를 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탈근대’를 향한 발원(發願)
우리가 살아온 근대(近代)는 ‘돈(資本)’의 물신성(物神性)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는 전염병과 공해와 생태적 멸종 위기와 정신적 황폐 속에 이르러서 대다수는 돈이 있어도 행복할 수 없는, ‘새로운 노예 시대’에 귀착해 있다. 앞으로 우리가 열어야 할 시대는 어떤 모습인가. 돈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으며 정신적 풍요를 가져오는 새로운 지혜의 시대, ‘나에 의한, 나만의 행복을 위한 세계’가 아니라, ‘생태적이며, 공동체적인, 화엄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발원이 절실할수록 시인의 존재 가치는 높다. 그 진실, 그 혁명성은 시에서부터 피어나게 될 것이다. 먼저 예감하고 궁리하고 노래해야 하며, 더 진실하고 더 절실하게, 바로 보며 말해야 할 것이 있으니 시인은 행복하다. 아직은 우리가 더 접해야 할 ‘부음들’이 있을 것이나, 시와 함께 이 세상이 거듭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2020년 <사이펀> 가을호
조기현 1986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길들의 여행』 외. 〈시와 해방〉동인(1983), 《시와 반시》 등에 평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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