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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2018)
기록물(Documentary), 74분, 역사문제연구소, 2018.
- 감독: 김미례(KIM Mirye, 1964-) 한국 충청북도 출생. 대표작 <외박>(2009)을 포함해 장편 5편을 연출했다. <노동자다 아니다>(2003)는 프리부르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 시놉시스: 1974년 8월 30일 도쿄 중심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빌딩에서 시한폭탄이 폭발했다. 연달아서 ‘일제 침략 기업’에 대한 폭파 공격이 이어졌고, 이 ‘범인’은 성명서를 통해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고 밝혔다. 1975년 5월, 이들은 일제히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났고, 나는 이들의 흔적을 쫓아 일본으로 갔다. ‘운해 속으로 사라지는 낙오병’을 쫓아...
** 근 5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로 여행과 같은 기록물이다. 긴 시간의 과정을 짧은 영상시간 안에 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분명한 의식으로 한 시대의 짧게 등장했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전쟁기계로서 도시 게릴라의 흔적과 그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의 삶을 추적하고, 아직도 깊이(심층)에서 흐르는 흐름이 있음을 감지하였다. 일본이라는 풍토 안에서 그 사건은 탈영토화의 한 사건으로서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는지...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기록영화는 일본 안에서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무력항쟁 세력에 대한 탐사물이다. 기록상으로 1972년부터 이지만, 실행자 집단의 명칭이 알려진 사건으로서 1974년 8월에서 1975년 4월 말까지 8건의 폭파사건이고, 그해 5월에 실행자들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알려진 행동대원은 <늑대> 4명, <대지의 엄니> 3명, <전갈>2명인데 그들과 연대 또는 연계된 인원은 상당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무장전선은 반일을 넘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거이다. 이들에 따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반성과 참회 없이, 또다시 천황주의를 앞세우고 전범기업을 군수산업으로 확장하여 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응징의 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일본내의 좌파 세력인 공산당이나 사회당과 관계없으며, 또한 일본 공산주의 무장단체인 적군파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좌파는 1955년 비폭력 투쟁 노선을 채택하였고, 한국과 베트남 전쟁 물자 수요로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이었고, 적군파의 1972년 사건이래로 순화되어 가고 있었는데, 왜 1974년에 일어났던가? 그리고 이 사건의 잠정적 종말이 베트남 전쟁이 끝나는 1975년 4월 30일과 비슷하게 1975년 5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제히 체포되었는가 이다. <아래 권혁태 글 참조>
들뢰즈의 드라마화 방법으로 물어본다면,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들 대원들은 홋가이도 출신이라 한다. 또한 홋가이도(북해도)는 일본 내에서 인종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2차 대전 전쟁 시, 일제는 홋가이도를 제국의 피식민로 취급했었다고 하고, 홋가이도의 자치(자주)와 고유한 역사를 말살했다는 사실이 깊이 내재해 있다고 한다. 이들이 보기에 징용과 강제 동원된 중국인, 조선인, 일본 안에서 피식민지인 등은 같은 일제에 의해 수탈과 억압을 당하여, 이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칭에도<반일무장전선>이 아니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다. 그럼에도 일본 내에서 지역적 인종적 차별만이 아닌 다른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말하자면 군수 산업의 재벌이 노동자를 착취한다든지, 제국주의가 새로운 지배를 위해 인민들 사이에 불평등을 심화한다든지, 또 다른 방식으로 소수자를 만들고 이지매(왕따) 하는 방식을 암묵적으로 사용하여 계급적 천민을 만들고 있다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 왜 일본의 좌파들이 변질하고 분화하고 또한 1972년 적군파들의 활동이 거의 소진하는 시기 이후에 등장하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관들을 탐구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국가가 동원하는 전쟁기구와 인민의 저항과 항거의 전쟁기계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역사상 20세기에는 국가 간의 전쟁 사이에서 인민의 흐름이 새로운 노마드의 정치체(政體)를 만들었다고 본다.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그러하고, 중화민국의 중국 공산당이 그러하고, 베트남도 그러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기구에 복속되지 않은 거대한 흐름도 있고, 지엽적으로 작은 흐름도 있다.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행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전쟁기구들의 대립 사이에서 중동에서는 아직도 전쟁기계들의 흐르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국제 경찰이나 되는 것처럼 통제와 정리를 한다고 겉으로는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무력을 통해 이속만은 챙기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전쟁의 폭력에 의해 경계가 설정되고 있는 것은, 고대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래로 로마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미국 제국도 곳곳에 경계선을 긋고 있다. 요즘은 멕시코와도 경계선을 긋고 있다고 한다. 그 선을 접선으로 빗겨가는 힘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 빗겨가는 접선의 각도가 크면 클수록 제국은 경계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일본은 이차대전 이후에 미제의 마름으로 성장하다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수요가 없는 시점에서, 일본은 미국의 지배에 벗어나지 못하여 침체의 국면을 걸었다고 한다. 일본은 경계선을 밖으로 접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말려들어가고 있는지 모른다(들뢰즈 표현으로 제국에 포획되엇다). 말하자면 일본의 상층과 심층이 별개라는 점인데, 상층은 미제의 하수인 같고 인민은 세계와 연관이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분화에는 언어와 환경(산업)이 관여하고 있을 것 같다. 일본이 삶에서 토지와 연관은 심층으로, 대외적으로 산업은 상층으로 이분화는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분화가 아니라, 하나의 이중화로서 자체 내에서 정화와 조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전쟁기구는 국가가 식민지지배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경우이고, 전쟁기계는 인민이 상층에 대해 투쟁과 전투를 한다. 그런데 제국의 전쟁기구에 복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가 10여년 전에 이라크 전쟁에서도, 사드배치와 미군주둔에서도, 이번처럼 페르샤만에 파견에서도, 제국의 전쟁기구에 복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쟁기계는 투쟁과 전투를 덕목으로 하고 있다. 들뢰즈의 사유에 따르면, 경계선에서 이탈이든 경계선을 허무는 것이든 전쟁기계들에서 여러 방식들이 나올 수 있다. 경계의 이탈이 꼭 전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문적 투쟁에서부터 광장에서 전투에까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내부에서 별동대와 같은 조직들이 있을 수 있고, 외부의 노마드들과 연계하여 전선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이론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이 전쟁기계들의 활동(pragma)은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또한 그 활동의 내재성이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후자에서는 니체 말대로 “땅에 충실하라”는 점에서 자급자족과 자치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자에서는 대상에 대하여 여럿을 열거 할 수 있겠지만, 윤구병의 말대로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것이 좋다면’, 없을 것의 백가지 대상을 또는 열 가지 대상을 제거 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딱 한 가지부터 제거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를 없어질 때, 다른 삶이 오고, 다른 말이 나온다. 혁명은 어느 틈엔가 닥친다. 많은 것을 제거하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제거하면 심층이 표면 위로 솟아난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 두 가지를 제거하면서 시작하여 인민을 표면에 올렸지만, 반동들에 의해 뒤집어 지고, 전쟁기계로서 표면에 다시 솟아나는 과정을 두 번(1830과 1848) 더 겪으면서 혁명을 거쳤고, 그리고 파리꼬문까지(1871) 세 번을 거쳐서야 인민이 전쟁기계임을 보여주었다. 혁명은 갑자기 닥치지만, 혁명을 완수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인습으로 뿌리깊이 박힌 포섭기구들을 무화시키는 과정은 길고 우여곡절을 겪는다. 자칫 국가에 포섭된 기구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 종이 자연에 대해 자치, 자주, 주체를 이루려는 노력은 구석기로부터 쳐도 70만년을 걸렸지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자각의 노력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귀동냥으로 눈살미로 인민의 덕목들을 만들어가고 있고, 우리말과 우리들로 인민이 솟아나고 있다. 말과 글이 인민들 귀와 눈에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혁명은 갑자기 도래할 것이다. 설명과 추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정상으로 학문의 투쟁은 광장의 전투보다 느리게 느껴진다. 말과 글, 즉 소리와 문자가 같은 수준에 이르면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 이루어질 것이며, 마찬가지로 투쟁과 전투가 같은 수준으로 이어지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전쟁기계들은 다발을 형성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3:18, 53LMGI)
*참조: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개요와 제작에 둘러싼 이야기> .
1948 홋카이도(北海道, ほっかいどう)는 일본내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취급되었다.
1960년 안보투쟁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운동조직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이 조직만큼 일본 제국주의를 ‘살아 있는 실체’로 받아들인 조직은 없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1970 동아시아 항일 무장 전선은 마사히 다이도지에 의해 1970년 봄 결성되었다
1971년 12월11일, 시즈오카에 있는 ‘관음상 흥아관상(興亞觀音) 순국7사비’에 폭탄을 설치해 비석을 파괴한다. 흥아관상이란 말 그대로 아시아를 흥하게 했던 관음상을 말하는 것이고, 순국7사란 도쿄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한 7명을 말한다. 순국7사비는 전범의 유골 등을 모아 1959년에 건립된 비석이다. / 이 사건은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결성 이전이라 한다.
1972년 4월6일, ‘노지지’라는 절에 있는 납골당을 폭파한다. 이 납골당에는 일제강점 시대에 조선에 있던 이른바 ‘재조일본인’ 약 5천 명의 유골이 안치돼 있었다.
1972년 10월23일에는 홋카이도 개척 100년 사업의 일환으로 홋카이도에 설치돼 있던 ‘풍설의 군상’이라는 조각상을 파괴한다. 홋카이도 선주민 아이누에 대한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 10월23일은 아이누 민족의 지도자인 샤크샤인이 1669년 일본인에 의해 살해된 날이다.
[1972 10월 유신: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게엄을 통해 헌정을 중단시키고, 1972년 12월 27일 유신 헌법(維新憲法)을 만들었다. 학자 한태연, 갈봉근 등과 검사 김기춘의 합작품]
1974년 8월14일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의 도쿄 본사 건물을 폭파했다.
1974년 8월15일에는 당시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시한폭탄 설치 단계에서 미수로 그쳤다. ‘레인보우 작전 (Rainbow Operation)’
1974년 8월 15일 문세광(文世光, 1951-1974[스물셋]) 8월 15일 광복절 경축 행사장인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부인 육영수를 저격하였다
1974년 8월 30일 도쿄 중심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三菱重工) 빌딩에서 시한폭탄이 폭발했다. <늑대>
1974년 10월14일에는 미쓰이물산(三井物産) 본관 시설을, <대지의 엄니 부대>
11월 25일 데이진 중앙 연구소(帝人中央硏究所)를, <늑대>
- 12월10일에는 다이세이건설(大成建設) 본사를 폭파한다. <대지의 엄니 부대>, 12월10일은 1937년에 일본의 황군이 중국 난징 침공을 개시한 날이다. 난징 대학살이 시작된 날인 것이다.
- 12월 23일 가지마 건설(鹿島建設) 자재창고 <전갈부대>
1975년 2월28일에는 하자마 구미 본사/ 대관 공장(間組/大官)을 폭파한다. <늑대> <대지의 엄니 부대> <전갈부대>. 이들은 범행 성명에서 이 테러를 ‘기소다니 테멘코르 작전’이라 했다. 기소다니란 1944년부터 하자마건설이 강제 연행한 2천 명의 중국인을 동원해 건설한 나가노현에 있는 기소다니댐을 말한다.
1975 4월19일에는 도쿄의 한국산업경제연구소(韓國産業經濟硏究所)와 아마가사키의 오리엔탈메탈 회사를 폭탄 공격한다. <대지의 엄니 부대>. 4월19일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한국의 4·19 혁명에 맞춘 날짜다.
1975 4월 28일 하자마구미 에도가와 작업장(間組京成江戶川鐵橋工事現場) <전갈부대>
[1975년 4월 30일: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75년 5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제히 체포되었다.
1975년 5월 19일, 다이도지는 대부분의 행동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중 사이토는 체포된 직후 자살했다. 구속되지 않은 조직원들은 일본 적군파와 연대해 비행기를 납치해서 구속자 석방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다이도지는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2017년 옥중에서 병사했다. 테러 당시 21세였던 기리시마 사토시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모방사건들: 6월25일에는 후나모토라는 청년이 오키나와에서 ‘아키히토 황태자(현 천황) 오키나와 방문 반대, 일제 및 미제의 조선 침략 반대’를 부르짖고 분신자살했다. 나이 29살이었다. 그는 1945년 패전 직후에 만주에서 경찰관을 지낸 아버지 식민자의 아들이었다. 7월19일에는 홋카이도 경찰본부가 폭파돼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 미궁에 빠져 있다.]
1979 반일혁명전선(反日革命戰線): 反日革命宣言―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の戦闘史, 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KF部隊 (著), (1979年) : 287ページ
2001 재일 소설가 양석일씨가 쓴 소설 <죽음은 불꽃처럼>은 문세광과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연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 [재일교포 2세, 양석일(梁石日, 1936-), 『死は炎のごとく』(毎日新聞社 2001,「夏の炎」幻冬舎文庫).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의 주인공 문세광(소설 속의 이름은 송의철)을 모델로 했다.]
2017 한국의 김미례 감독은 늑대 부대를 찾아서라는 영화를 2017년에 제작해서 DMZ 영화제에서 선보였다.
2018 김미례(1964-),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Documentary / 74min, 역사문제연구소, 2018) 2019 다이도지 마사시(大道寺將司) 옥중서간집 새벽별을 올려보며 2019, 07 31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개요와 제작에 둘러싼 이야기>
- 김미래: http://blog.daum.net/eaajaf 참조 – 여기 블로그에 많은 글들이 있다. 펌이 안 된다.
늑대 – 다이도지 마사시(大道寺將司)
대지의 엄니 -에키타 유키코(浴田由紀子)
아라이 마리코(荒井-—子)
이케다 히로시 등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수서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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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文世光, 1951-1974년 12월 20일 [스물셋])은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일본어: 南条 世光)였다. 그가 자칼의 날을 읽었다고 김기춘이 퍼뜨렸다. / 프레더릭 포사이스(Frederick Forsyth, 1938-),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 1971) - 영화화 감독 Fred Zinnemann, 1973 ‧ Drama/Thriller ‧ 2h 25m
홋카이도(北海道, ほっかいどう) 일본의 47개 도도부현 중 하나로, 일본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섬이다. 또한, 같은 섬 및 수반되는 섬을 관할하는 지방 공공 단체(도(道))이다. 면적은 78,515 km²로 일본 전체 면적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면적(남한, 100,363 km²)의 4분의 3 정도 크기이다. 홋카이도의 본섬(77,983.9 km²)은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주요 4섬 중 하나이다. 지방 공공 단체로서의 홋카이도는 47개 도도부현 중 유일한 '도(道)'로, 도청 소재지는 삿포로 시이다. [북쪽에서부터, 홋카이도(北海道, 77,983km²), 혼슈(本州, 227,943km²), 시코쿠(四国, 18,297km²), 규슈(九州, 36,782km²)]
박경식(朴慶植, 1922-1998)의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2008년 번역) - 미래사(未來社)에서 출간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 1965)>. [박경식(朴慶植, 1922-1998) 재일조선인 재야 역사연구자. 전 조선대학교 교원이다. 일본 내에서 '징용'과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일본 신좌파. ***
[1953 스탈린 사망, 한국 전쟁 휴전. ]
[1953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1971),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 / 브레주네프(1906-1982)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서기장이다]
1955 일본 공산당과 일본 사회당 등이 1955년 폭력혁명 노선을 포기하자 그들을 "기성좌파"라고 비판하면서, 더욱 급진적인 노선을 주장하며 직접행동과 실력투쟁을 중시하는 운동을 전개한 세력이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부상했다. 안보투쟁 및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1970년 제2차 안보투쟁 이후 급속히 대중의 지지를 잃고 영향력이 급감했다.
1957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 카쿠메이테키쿄우산슈기샤도메이)은 1957년 결성된 일본의 신좌파, 트로츠키주의 정파다. 약칭은 혁공동(革共同).[트로츠키주의]
1958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쿄산슈기샤도메이)은 1958년 결성된 일본의 신좌파 정파다. 약칭은 공산동(共産盟) 또는 독일어로 "동맹"이라는 뜻의 분트(ブン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복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세계혁명 등을 모토로 삼았다. [레닌주의]
1960 일본 사회주의청년동맹(日本社会主義青年同盟 니혼샤카이슈기세이넨도메이)은 1960년 10월 15일 설립된 청년을 구성원으로 하는 청년정치동맹이다. 이전에는 일본사회당과 협력 관계였다. 약칭은 사청동(社青同). [맑스주의 반레닌주의]
[1966 중국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 문화, 정치상 전환기로, 공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無産階級文化大革命, 우찬제지 원화다거밍)이고 약칭은 문혁(文革, 원거)이다.
[1968 프랑스 5월 봉기, 미국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
1968 경대 빨치산(京大パルチザン 쿄타이파루치잔)은 일본의 신좌파 활동가인 기타 오사무의 혁명이론에 영향을 받은 교토 대학의 급진적 무당파다. "경대"는 교토 대학의 약칭이다. 교토 대학 경제학부 조교 기타 오사무(타케모토 노부히로)는 1968년부터 1969년 사이의 경대 분쟁을 통해, 혁명을 위해서는 기존 정당과 차별화되는 빨치산을 조직하고 게릴라 투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69 일본적군(日本赤軍, 니혼세키군, Japanese Red Army, JRA)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1969년 조직된 일본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였다. / 적군은 1972년 겨울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29중 14명의 적군파 대원을 살해하였다. / 2001년 4월, 시게노부는 검거 상태에서 적군파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레닌주의에 가깝다]
1969 혁명적노동자협회(革命的かくめいてき労働者ろうどうしゃ協会きょうかい 카쿠메이테키로도샤쿄카이[*]), 약칭 혁노협(革労協)은 는 1969년 결성된 일본 신좌파 정파 사청동 해방파의 중심 정치조직이다. 1981년 해방파가 분열, 해체 지경에 이르면서 이후 주로 "해방파" 보다는 "혁노협"을 칭하게 되었다. 1999년에 또다시 분열했다.
1969 아나키스트 혁명연합(アナキスト革命連合 아나키스토카쿠메이렌고[*])은 1969년 오사카에서 조직된 일본의 신좌파 정파다. 이념적으로는 아나키즘 성향이었다. 약칭 아나혁련(アナ革連, ARF). - 1969년 10월 오사카 예술대학 봉쇄투쟁으로 사수대가 궤멸당하고, 10.21 투쟁의 총괄을 둘러싸고 분열했다. 이후 후속 조직으로 아나키스트 사회혁명전선(혁명전선), 또 거기서 분열된 무정부공산주의자동맹(아나키스트 공산동)이 있다.
(6:29, 53LMGI)
# 참조: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 2
- 한겨레21제886호 등록 : 2011-11-16 11:50 수정 : 2011-11-17 13:49
[마지막 부분]
<문제의식을 부정하게 만든 행동
이들은 기업에, 그리고 자신에게 ‘일제 본국인’으로서의 책임을 물었고 대가를 지불하기를 요구했다. 기업은 폭파되었고 ‘무고한 시민’도 희생당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가를 지불’한 것이 될까? 이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최근 감옥에서 출소해 이곳저곳에 쓴 회상기를 접한다. “문제의식은 옳았으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회상이 대부분이다. 아마 솔직한 심정일 것이고 이 회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본인들의 속내와는 관계없이 이들의 회상처럼 문제의식과 행동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살아 있는 과거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게 이들의 과격한 행동이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면죄부는 두 가지 경로였다. 하나는 ‘대가를 지불’하는 행동과 문제의식이 일본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또 하나는 ‘대가를 지불’하려는 문제의식은 결국 폭탄테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즉 행동이 부정됨으로써 문제의식까지도 부정당한 것이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권혁태(權赫泰, 1959-), 고려대 학사, 일교대학 석박사,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교수, <일본 섬유산업의 해외진출과 식민지, 一橋大學, 1998, Masanori Nakamu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