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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중심 JESUS CENTERED 원문보기 글쓴이: 임마누엘
구약성서학자 박동현의 설교론 1
이사야 50:4-9
1. 설교 준비 방법론
2. 방법론의 실제 적용(1) - 본문 연구
3. 방법론의 실제 적용(1) - 설교문
※ 히브리어 구현의 어려움으로 히브리어 본문이 누락되었음을 양해 바랍니다.
□ 웍샵 진행에 대한 안내
존경하는 말씀의 동역자 여러분!
이런 귀한 기회에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매우 반갑습니다.
설교는 우리 말씀의 일꾼들이 한 평생 씨름하지 않을 수 없는 일거리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질는지
몰라도 아직까지는 우리 개혁 교회의 전통에서 모든 신학의 표현은 주로 설교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런
만큼 성서신학을 전공한다는 저같은 사람들도 늘 현장에서 설교하시는 분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이번 모임을 마련하신 한국성경연구원에서 부탁한 바에 따르면, 먼저 제가 홀로 한 시간이 넘도록 본문
설정으로부터 설교 작성에 이르기까지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또 주석을 어떻게 하며 주석한 다음
그것을 설교에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다음 함께 잠시 쉬고, 뒤이어 여러분들과 같이
제가 말씀드린 방법론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한 본문을 주석하고 그로부터 한 편의 설교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고 싶습니다. 먼저 한 다섯 사람씩 한 조를 이루어 조별로 한 25분
정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실제로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여 어떻게 하시는지를 서로 이야기하고 그렇게
이야기 나눈 바를 한 25분에 걸쳐서 각 조에서 한 분씩 간단히 정리하여 발표해 주신 다음, 제가 설교
준비하여 하는 방식을 한 25분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15분 동안 쉬시고, 마지막으로 함께 한
본문을 중심으로 50분동안 설교 개요를 역시 조별로 만들어 보고, 25분 동안 전체에 보고한 다음, 제가 10분
동안 정리하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배정
1. 2시-2시5분: 인사, 안내
2. 2시5분-3시20분: 나는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여 하는가?
조별 모임 (한 사람 5분씩)
조별 모임 보고 (한 조 3분씩), 종합 정리
3. 3시20분-35분: 쉼
4. 3시35분-5시: 실제 공동 작업
조별 모임 - 본문을 가지고 설교 개요 작성
전체 모임 - 조별 모임 보고와 종합 정리
I. 설교 준비 방법론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칠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여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늘 저를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제가 설교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본문을 정하여 설교 원고를 만들어
설교할 때까지 제가 어떻게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준비해서 설교할 그 시간과
설교한 뒤에 제게 떠오르는 생각과 제가 하게 되는 경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사람 앞에서, 특히 예배 시간에 전달할 때 이를 보통
설교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한글학회에서 1992년에 펴낸 우리말 큰 사전에서 설교(設敎)라는 낱말의
뜻을 그냥 "종교의 교의를 설명함"이라고만 풀이한 것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설교는 분명히 내 뜻을 전하는 연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오늘 우리 시대에 맞게 풀어서 쉽게 알려주는
연설 형식의 말이기에, 설교자는 늘 먼저 설교자를 통하여 교우들(과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는 구약성경의 예언자와
비슷합니다. 예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預言]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말하는 사람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설교의 전 과정을 통해서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원칙입니다.
또한 설교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넓은 지식을 얻고 기독교에 대해 깊이
이해하도록 하려는데 있다기보다는 청중들의 삶이 달라지도록 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온 누리를 움직이시고
살리시는데 쓰시는 인격적인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통로라 함은 설교자 개인이 지닌 품성이나
재질과 여러 가지 상황이 최대로 고려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본문 정하기
설교 본문을 정할 때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 설교를 들을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의
나이, 성별, 가정 환경, 교우 관계, 직업, 사회 경력과 신앙의 경력, 학력, 사회적 신분과 지위 같은 일반적인
상황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요즈음 그들이 겪고 있는 특수한 상황도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또한 최근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문제가 되고 있는 바들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면서, 이러저러한 상황에 있는 청중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런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가운데 설교 본문을 정합니다. 물론 설교자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과 그것을 뒷받침하기에 좋은 성경
구절들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만, 그런 본문들이 있더라도 일단은 덮어놓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이 설교 본문으로 좋겠다고 일단 결정하게 되면, 될 수 있는 대로 그 범위가 너무 넓어지지
않도록,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지 않도록 앞뒤 글의 흐름을 잘 살펴 본문의 범위를 정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설교자의 마음대로 성경 어느 부분 가운데서 본문을 몇 절로 정하지 말고, 본문 자체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본문의 분량이 열 절을 넘어가면, 설교의 초점이 흐려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본문 읽기
적당한 범위와 분량으로 설교 본문을 정했으면, 그 다음에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서 직접 설교자에게
말씀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 드리는 마음으로 본문을 열심히, 간절한 마음으로 읽습니다. 이미 그 전에 그
본문을 여러 번 보았기에 그 본문의 뜻을 잘 알 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부분이든
읽으면 읽을 때마다 그 뜻 이 새롭고 전에 깨닫지 못한 바를 깨닫게 되는 책이 아닙니까? 그런 만큼, 칼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을 쓸 때 고백했던 바처럼 "마치 그 본문을 처음 읽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
가면서 또박또박 정성스레 읽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본문을 한글 성경으로라도 열 번 이상 - 많이 읽을수록 좋습니다 - 읽어서 굳이 내가 본문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데도 본문이 스스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무리 시간에 쫓긴다
하더라도 본문은 너댓 번은 읽습니다.
이렇게 읽는 가운데 느낀 점, 깨달은 점, 머리에 떠오른 점을 종이에 적어 봅니다.
본문의 뜻 이해하기
아래 각 단계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적으로 겹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에 편의상 나누어 본 것이지, 엄격히
서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 전 과정을 통하여 설교자는 한글 개역 성경뿐만 아니라,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른 한글
성경들(공동번역 성경, 표준새번역 성경, 현대어 성경, 신약만 있는 경우로는 새번역 성경)과 외국어
성경들과 원어 성경들을 함께 볼수록 더 좋습니다.
(1) 다시 본문을 찬찬히 읽으면서, 본문의 짜임새와 흐름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이 단계에서는 본문 한 문장 한 문장을 정확히 관찰합니다. 문장이 서술문인지, 명령문인지, 의문문인지,
인칭대명사("나," "너," "그" 등)가 앞의 어떤 명사를 가리키는 것인지 등을 낱낱이 살펴봅니다.
명령문이라면 명령의 주체는 누구이며 명령을 받는 대상은 누구이며 명령의 내용은 무엇인지, 의문문이라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의문문인지, 그
의문문에 대한 답이 있는지도 알아 봅니다.
또 문장의 주어가 누구이며 술어가 어떠하며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그 이음새가 어떠한지,
주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문장 종류가 달라졌는지도 살펴봅니다.
본문의 흐름에 막힘이 없는지, 글의 흐름을 쉽게 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본문의 짜임새는 될 수 있는 대로 표로 만들어 보면 좋습니다.
(2) 본문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낱말이 어떤 것인지, 낱말은 다르더라도 같은 개념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는지도 알아봅니다.
그런 낱말들이나 개념들이 본문이 들어 있는 책, 구약성경, 신약성경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관주
성경이나 성구 사전이나 성서어휘사전이나 성서백과사전에서 찾아봅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본문에서 어떤 특별한 뜻을 지니는지 생각해 봅니다.
(3) 본문을 통틀어 보았을 때, 본문의 문학 형식이 어떠한지, 곧 산문인지, 시문인지, 산문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산문이며, 시문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시문인지도 살펴봅니다. 본문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왜
그런 표현 형식을 취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4) 본문에서 본문의 시대적인 배경, 지리적인 상황, 본문의 저자에 대해서 직접 말하거나 암시하는 바가
있는지 찾아봅니다. 그러려면 본문에 사람 이름이나 곳 이름이 때에 관한 말이 있으면, 그에 대한 내용을
관주 성경이나, 성구사전이나, 성서백과사전 같은 참고서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5) 본문이 앞뒤 단락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알아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이 들어 있는 책, 더 나아가서는
구약 또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본문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봅니다.
(6) 구약성경에서 본문을 정했을 경우는 그 본문이 인용되었거나 관련되는 내용의 신약 본문이 있는지,
신약성경에서 본문을 정했을 경우는 그 본문과 관련되는 내용의 구약 본문이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7) 앞에서 알아본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전체적으로 정리해 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중요한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뽑아 내어 간추려 봅니다.
(8) 그렇게 한 다음 이제까지 본문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한 작업의 열매로 나온 것과 "본문 읽기"에서 적어
두었던 바를 견주어 보아서, 그 둘이 얼마나 서로 맞아 들어가며 어 떤 점에서 다른지를 확인합니다.
이 단계에서 본디 설교자가 본문에서 뽑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뜻을 본문에서 이해하게
되는 수가 더러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는 아예 다른 본문을 다시 정해야 하기도 합니다. 달리는 본디 기대했던 바보다 훨씬 더
귀중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어, 우선 설교자 자신이 큰 감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청중의 상황에 적용하기
앞에서 한 작업의 결과를 밑바탕으로 설교 원고를 만들자면, 다시 한번 청중의 상황을 자세히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면서, 앞서 밝혀진 본문의 내용 가운데서 청중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 만한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찾아 봅니다. 그렇게 찾은 것을 모두 설교 원고에 담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그 가운데서 몇 가지를 뽑습니다.
청중의 상황을 잘 알기 위해서는 평소에 청중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 과 여러 가지로
접촉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 드리는 일이 끊임없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 원고 쓰기
(1) 설교는 글말[文語]이 아니라 입말[口語]이기에 설교 원고는 될 수 있는 대로 글말투[文語體]가 아닌
입말투[口語體]로 씁니다. 그러니까 남이 하는 말을 받아 적듯이 내가 할 말을 적습니다.
입말투로 글을 쓴다 함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뜻합니다.
- 한 문장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 귀로 들어서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들이나 설교자가 뜻하는 바와는 다른 식으로 들릴 염려가 있는
낱말들은 피합니다.
- 우리 나날의 삶에서 보통 쓰이는 낱말들을 써서 문장을 만듭니다.
- 서술문, 명령문, 수사의문문 등을 골고루 섞어서 말이 메마르고 건조하지 않도록 합니다.
- 무엇을 거듭 말하면서 그것을 강조하고 싶다면, 꼭 필요한 경우를 빼고는, 똑같은 낱말을 자꾸 쓰기보다는
비슷한 뜻을 지닌 낱말들을 나란히 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교회에서 너무 자주 오래 써 왔기 때문에 사실 그것이 지니는 귀중한 뜻이 아무런
영향을 끼침이 없이 듣는 사람들의 귀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낱말이나 개념을 오늘에 맞도록 새롭게
표현하도록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2) 전하려는 바가 듣는 이들의 마음에 쉽게 와 닿도록 하려고 어떤 보기를 들 경우에, 될 수 있으면 내가 직접
보거나 듣거나 읽거나 겪은 바를 중심으로 하면 좋습니다. 예화집이나 남한테 들은 말 가운데서 뽑아 쓰는
보기는 그 효과가 이미 상당히 떨어집니다.
또, 서양 문화를 배경으로 한 예화보다는 우리 문화 전통에서 찾은 예화가 더 낫습니다.
(3) 설교 원고의 짜임새는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하는 방식인 서론, 본론, 결론의 틀을
따른다면 다음과 같이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 서론: 듣는 이들의 삶에 아주 절실한 문제를 첫머리에 꺼내면, 쉽게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설교
본문을 택한 까닭이나 과정을 간단히 밝힙니다. 설교 제목을 어떻게 뽑았는지, 설교의 짜임새가
어떠할는지를 알립니다.
설교 제목은 될 수 있는 대로 본문 가운데 알맹이가 되는 낱말 몇을 뽑아 그것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아, 그 몇
마디 낱말이 계속해서 청중의 귀에 남아 있도록 하면 좋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설교의 내용을 쉽게 기억하게 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제목으로 삼은 성경의
표현을 두고두고 되새겨 볼 수도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 본론: 설교 본문의 내용을 간략히 풀어서 말한 다음, 본문에서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두서너
가지 찾아 하나씩 청중에게 적용하여 말합니다.
- 결론: 설교 제목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본론에서 몇 가지로 자세히 말한 바를 몇 문장으로 간추립니다.
흔히들 본론에서 설교 본문의 내용 소개는 청중들이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설교자가
본문에서 뽑은 가르침만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오늘 교인들은 설교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우선 본문의 뜻을
풀이하기에 앞서서 본문에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적혀 있는가 하는 것부터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설교자가 본문을 밑바탕으로 하여 말하고 싶은 바만 말하다 보면, 본문 스스로 청중들에게 말할 기회를
잃게 되기 쉽습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열심히 잘 준비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청중들에게 말씀하시려는 바와 반드시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말하는 가운데, 청중은 나중에 설교자가 말하는 않은 다른 가르침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본문이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가 혹시 놓친 귀중한 가르침도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알려주는 가운데 하나님 몸소
청중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그런 틈을,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본문 내용 소개를 너무 길게 하면, 도대체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기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본론에서 설교자가 주장할 몇 가지도 보통은 매우 원칙적인 내용이 됩니다만, 그럴 경우 반드시 그러한
원칙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보기를 하나씩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하면, 교인들도 실제
살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설교 원고를 쓴 다음 강단에 오를 때까지
설교 원고를 다 썼다고 해서 설교 준비가 다 끝난 것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강단에 오르는 순간까지 자신이 정말 본문을 제대로 잘 이해했는지 따져 봅니다. 본문을 거듭 거듭
묵상하면서 그 뜻을 새겨 봅니다. 혹시라도 본문에서 중요하게 다룬 것은 제쳐놓고, 그렇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본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원고대로 설교를 했을 경우 청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통해 말씀하실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교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우에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 원고를 가족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읽어 들려주거나 스스로 읽도록 하여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정할 때부터 그러했지만 설교자는 원고를 다 쓴 다음에도 이 설교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교인들에게 제대로 전해 주는 올바른 설교가 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강단에 선 설교자
먼저 설교자는 힘들여 원고를 썼지만, 그렇게 작성한 원고를 너무 믿지 않습니다. 또 그 원고에 지나치게
매이지도 않습니다. 설교는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설교자는 그냥 입을 비롯하여 그의 몸을 빌려
드리는 것뿐이므로, 성령을 굳게 의지하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를 각오를 합니다. 이리하여 설교자는
때때로 준비할 때는 전혀 깨닫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입에서 술술 나오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가 강단에 서서 자기 입으로 설교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강단에 선 설교자는 이처럼 두렵고 떨리나 안온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서 있도록 자신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흐트러트리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강단을 마치 자기 소견 발표 연설장 정도로 보고, 자기 이야기, 자기 가정 이야기, 자기 교회
이야기를 길게 늘어 넣으며, 온갖 잡된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으며 교우들을 웃고 울리는 설교자들을
모습은 매우 염려스럽다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강단은 자기 말재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책임을 맡았다면, 어찌 강단에서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몸과 마음을 삼감이 없고 진지함도 없고, 그저 자신만만하게 강단에 서는 설교자들은 결코
바람직한 설교자들일 수 없습니다.
아울러, 설교자는 강단에 선 순간 듣는 이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차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세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설교합니다.
흔히 듣는대로 설교자는 이번에 하는 설교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설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설교합니다. 또한, 내 설교를 듣는 이들 가운데서도 설교를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도 생각합니다.
설교하는 동안 설교자는 설교하는 것이 잘 되는지, 아니면 힘든지를 스스로 느낍니다.
자신이 하는 설교에 스스로가 몰입하여 자신과 자신의 설교가 하나가 되는 수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쩐지 자신과 맞지 않고 자신에게 낯설다고 느끼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느낌에 지나치게 좌우됨이 없이 설교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설교합니다.
또, 성실하게 준비를 하여 정성스럽게 설교하는 설교자는 이미 설교하는 순간부터 자기가 하는 설교에 대해
교우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민감합니다. 듣는 이들이 열심히 들으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반짝이는 분들이 있거나 "아멘"으로 응답하는 교우들이 있으면 신이 납니다. 거꾸로 여기 저기 조는 얼굴들이
보인다든지, 냉담한 기운을 느끼게 되면 설교를 하면서도 불안해집니다. 낭패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 어느 경우든, 설교자는 이러한 청중의 반응에 너무 마음 쓰지 않고 끝까지 성실히 설교합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서
설교를 제대로 준비해서 열심히 했다면, 불과 반 시간 밖에 안 걸리는 설교지만, 설교자는 온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간 듯한 피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청중의 반응이 좋으면 그러한 피곤함을 기쁨과 보람으로 이겨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음까지 지치게
됩니다.
설교자는 자신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합시다 라고 크게 부르짖은데 대해서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자신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리라고 다짐합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이 한 설교가 그 설교 시간에 잠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데 그치지 않고,
몇몇 청중들의 마음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그들이 오래 오래 그 가르침을 따라 삶을 고쳐나가는 모습을
보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더러는 십년 이상의 긴 세월이 흐른 다음, "그 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제가 삶의 방향을 바꾸어
오늘의 저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쓰셔서 큰 일을 이루심에 대해 감사한 마음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쪽으로는 그 때
나의 설교를 듣고 울분을 터뜨렸거나 낙심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다시 한번
몸을 떨게 됩니다. 그 분들은 그 후로 설교자에게 연락해 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들이 그 날
설교자가 한 설교를 통해 변화되지 못함으로 영영 잘못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방법론의 실제 적용(1) - 본문 연구
본 문 : 이사야 50장 4절 < 개 역 >
4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전상)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전하)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후상)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후하)
5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전상)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전하)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후)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전상)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전하)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후하)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아니하였느니라 (후상)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전상)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전하)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후상)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을 아노라 (후하)
8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전상)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전하)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 올지어다 (후)
9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전상)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뇨 (전하)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후상)
좀에게 먹히리라 (후하)
개역 성경 난외주와 절 구분에 대하여
우리말 개역 성경은 4절의 학자 를 제자 로 옮길 수 있음을 난외주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의 절 구분에 관한 한 한글 개역 성경과 히브리어 원문은 거의 일치합니다. 다만 6절 후반절을 우리
말투에 어울리게 옮기다 보니 히브리어 원문의 후상반절과 후하반절의 차례가 뒤바뀌었을 뿐입니다.
본문의 문학 형식, 짜임새, 흐름
본문은 49장 1-6절처럼 하나님의 종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된 글입니다. 이리하여, 본문의 나 는 하나님의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본문 가운데서 4절, 5절, 7절, 9절이 한결같이 주 여호와께서 내게 어떻게 하셨다 는 식으로 시작하고 있어서
본문 전체가 아주 정돈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4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5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9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이 네 경우 모두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주어 주 여호와께서 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를 살려 우리말로
옮긴다면 주 여호와야말로 …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 곧, 다른 이 아닌 주 여호와 바로 그분께서 내게 …
하셨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의 대상은 나 인데, 우리말 개역 성경은 이를 5절, 7절,9절에서 나의, 나를, 나를 로 옮깁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모두 4절과 마찬가지로 내게 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본문의 나 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먼저 말한 다음 그에 따른 자신의
상황이나 행동에 대해 말합니다.
4절-5절상반절에서 나 는 하나님께서 자기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고 듣게 하셨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어서
5절전하반절-후반절에서는 자신이 성실하게 순종하였다고 말합니다. 6절은 이 나 가 박해를 꿋꿋이 견뎌
내었음을 알려줍니다. 7절-9절은 하나님에 대한 굳센 믿음을 거듭 거듭 표현하고 있는데 8절-9절에서는
수사의문문이 세 번 쓰입니다. 곧,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실제 무엇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뜻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답하도록 묻는 형식을 거듭 거듭 취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 본 42장 1-4절과 49장 1-6절에서와는 달리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인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또 본문의 주인공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일꾼에 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 풀이
4절-5절 상반절 : 말하게 하시고 듣게 하신 하나님
본문의 나 는 맨 먼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을 혀를 주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일이 혀 로써 하는 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49장2절에서 하나님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할 때 입 이란 낱말을 쓴 것과 통합니다. 곧, 본문의 나 는 말로써 하나님이 시키신
바를 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4절전하반절이 조금 더 자세히 풀이합니다. -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나 가 할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제자의 혀로써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잘 배울 수 있는 혀를 주심은 지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말로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말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입니다. 이리하여 본문과 49장1-6절은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이
예언자의 일임을 알게 합니다.
4절전상반절에서 본문의 주인공이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 셨다 할 때 앞서 이미 말한 바처럼
학자 라는 말보다는 제자 나 학생 이란 말이 히브리어 낱말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이 낱말에서 우리는 본문의 나 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학생과 선생, 제자와 스승의 관계에 빗대어 말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본문의 나 가 하나님 일꾼 된 것과 하나님 일꾼 노릇 하는 것이 나 의 어떤 능력이나
품성에 달려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비롯됨을 똑똑히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이 나를 깨우쳐 주시지
않고 나로 말하게 하지 않으시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절실한 경험이 이
낱말에 두 번 쓰이는 4절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1절후반절은 하나님께서 나 를 날마다 새롭게 깨우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배우도록 해 주심을 말합니다.
하나님 주신 학생의 혀로써 곤핍한 자를 도와주려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라는 말에서 예언자라고 해서 언제나 제 좋을 대로 하나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늘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을 받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란 하나님이 깨우쳐 주실 때마다
그만큼만 듣고 전하는 사람이지 처음부터 무엇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놓고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말하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4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잘 듣고 잘 말하는 것이 나 의 할 일임을 알려 줍니다.
5절 : 순종한 나
5절에서 본문의 나 는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주시자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따라 했음을 말합니다.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 였다 함은 4절에서 말한 대로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 주는 일을 소홀히
하고, 그 일이 쉽지 않지만 잘 해 보려고 성실히 힘썼음을 뜻합니다. 특히 물러서지 않았다 는 말은 박해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 6절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5절하반절 첫머리에 내가 가 강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대로 하려고 애썼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결코 자신의 무엇을 하나님 앞에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바에 대해서 내가
정성스레 응답하려 하였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는 나 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 : 박해를 감수함
이렇게 성실히, 하나님 바라시는 대로 하나님 일꾼 노릇 하려고 애쓰는 나 는 환영을 받기보다 오히려 박해를
받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 이 있었고,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 도 있었으며, 나 를 놀리고 나 에게 침 뱉는
자들이 있었음을 6절이 일러줍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 는 박해받음을 억울하게 생각하거나 박해를 받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떳떳이
박해받았다고 합니다. 박해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뺨을 맡기며,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 다 함이 이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나 로서는 박해를 받는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다가는 하나님 맡기는 바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게 중요한 것은 내 가 괴롭힘을 당하느냐가 아니라 나 야 어찌되든 내 가 맡은
바를 잘 해 내느냐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7-9절 :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함
갖은 박해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하나님 종노릇하려고 힘쓰던 나 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신다는 점이 확실하다는데 있음을 밝힙니다.
7절과 9절의 첫머리에 거듭 나오는 표현,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신다 가 이를 똑똑히 말해 줍니다. 내게
혀를 주시고 내게 귀를 열어 주셔서 깨달아 말하게 하신 그 하나님이야말로 내게 도움이 되시는 분이시므로
그 어떤 박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절전반절에서 나 는 하나님이 나 를 도우시기에 내가 부끄러워 아니 한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여기서 부끄러워하다 라는 동사는 바로 앞절인 6절후반절에 나온 명사 수욕 과 뿌리가 같습니다.
이렇게 같은 뿌리의 말을 씀으로써 나 는 나 를 박해하는 자들이 나 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 를 도우시기에 나 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과 나 의 관계이지 박해자의 평가나 행동이 아님이 다시 한 번 분명해졌습니다.
이리하여 7절후상반절에서 나 는 자기 스스로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 다고 합니다. 박해자가
욕하고 조롱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물러서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그에
대응하였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마음에 거리끼는 바가 없으므로 떳떳한 얼굴로 박해자들을 상대하였다는
것입니다.
7절후하반절은 다시 한 번 자신이 결코 부끄러움을 겪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말로는
전하반절과 다른 낱말이 쓰였지만 뜻은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8절에서 본문의 나 는 먼저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 라고 표현합니다. 그 분이 가까이 계 심을
말하면서 나와 다툴 자 , 나의 대적 이 있으면 나서 보라고 합니다. 이 표현들이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가리킴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 와 하나님과 박해자의 삼각 관계에서 하나님이 내 쪽에
계심이 분명하기에 박해자들이 나 를 이길 수 없음을 밝힙니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8절에서 본문의 주인공은 법률 생활에서 비롯된 낱말들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의롭게
하다 , 아무개와 다투다 , 내 대적 을 뜻하는 표현을 직역하면 내 (소송)사건의 당사자 가 됩니다.
이리하여 본문의 나 는 마치 재판정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고발하려는 쪽에 맞서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고 자신이 이길 것을 확신하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면 그가 받는 박해가 단순한 박해가
아니라 자신을 죄인으로,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행동하는 자로 몰아 부치는 박해인 것으로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박해자들은 그 나름대로 종교적인 동기에서 본문의 주인공과 다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나 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그들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본문의 나 가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그를 때리고 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마지막 9절전하반절의 표현에서도 드러납니다 -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 누가 나를 나쁘다고
하는가?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는가? 는 뜻의 수사의문문 가운데서 박해자들이 자신을 악인으로, 죄인으로
여기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죄인이다 악인이다 함은 8절의 의롭다 하다 와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개념이기 이전에 종교적인
개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흔히 아무개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으면 의롭다 하고 어그러진 관계에
있으면 죄있다, 악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문의 나 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있는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사람이기에 그 누가 뭐래도
문제가 되지 않음을 여러 차례 다른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9절하반절에서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마침내는 망하고 말리라는 확신도 함께 표현합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 기독 청년들에게 주는 가르침
본문은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온갖 박해를 받는 하나님의 일꾼이 그
박해 가운데서도 꿋꿋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맡은 바 임무를 다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의 일꾼이 굳센 믿음 가운데 고난의 삶 가운데서도 본문을 다하려 하는 모습을 본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42장1-4절과 49장1-6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본문에 나타난 종의 모습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곤핍한 자를 말로 위로한다는 본문의 표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쉬게 해 주겠노라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11:28).
또한 이사야50장6절을 읽을 때 사람들이 애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마26:67) 하던 것과 빌라도가
무리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해서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 던 것을 기억합니다 (마27:26). 비슷한 기록을 마가복음15장16-20절과 누가복음22장63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괴로움과 조롱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를 주로 믿고 섬기며 따르는 우리들이 그 분을 본받아 살려고 할 때 본문에서 우리가 가야 할
종의 길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깨달아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귀를 열어 알아듣게
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 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도 남에게 아무런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아니하셨는데도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무엇을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된 일꾼입니다.
이미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도 늘 새롭게 하나님께서 그 뜻을 깨우쳐 주셔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한 번 깨달았다고 해서 마치 우리의 소유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도록 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둘째, 우리는 늘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제 스스로에게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거듭 거듭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 된 우리들이 가장 먼저
힘 쓸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학생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꾼들의 영원한 스승은 하나님이지 그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존경하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분들조차도 엄밀히 생각해 보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학생들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기 시작하여 이런 저런 것을 겪었기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넷째,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들은 것을 말로 삶에 지치고 시달리는 사람들에 알려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요즈음처럼 말많은 시대에 말로써 남을 돕는다는 것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말만 하면 무얼 하느냐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지 - 이런 소리도 높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는 남을 해치는 말들이 넘쳐 나는 때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인 만큼 남을 기쁘게 하고
남에게 득을 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말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바를 전할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섯째, 삶에 지치고 시달린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혀
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말솜씨도 때로는 쓸모가 있겠지만 죽은 말들, 죽이는 말들이 많은 이
시대에 참으로 도움이 되는 말, 산 말, 살리는 말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혀를 움직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말하는 것을 이끌어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섯째,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바를 가지고서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웃들을 도우려고 하지만 우리를 박해할 사람들이 있음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그런
박해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생겨날 수 있다는 점도 미리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일곱째,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말씀의 일꾼으로 삼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맡겨 주신 일자리에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오히려
굳센 모습으로 상대할 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하나님이 아실 것이므로 조금도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므로 사람이 우리를 잘못 되었다, 나쁘다, 엉터리다 하여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무조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므로 그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본문 첫머리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전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이어야 함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 사상, 경험을 가지고서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 안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박해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III. 방법론의 실제 적용(1) - 설교문
제자의 길
존경하는 윤덕수 목사님께서 맡아 섬기시는 수유제일교회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분 한 분 찾아
뵙지 못합니다만 우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들 자신과 섬기시는 가정과 일터와
이 교회와 지역사회에 가득 차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습니다. 아울러 여러 가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사의 책임을 다하려고 피땀 흘려 일하시는 여러 선생님의 노고를 치하 드립니다.
교사 여러분, 본 교단 총회 교육부에서 세운 올해 1995년의 교육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변화하는
세계"이고, 이번 여름 교육 행사 전체의 주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로 연구하시고 공부하신 것으로 생각하여 이 시간에는
우리가 교회에서 교사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조금
전에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 첫머리 4절을 보면 "학자"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 성경은 이를 "제자"로도 옮길
수도 있음을 난외주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사실 이 낱말은 우리말로
학자라고 옮기기보다는 제자로 옮김이 더 낫습니다.
이처럼 본문의 "나"는 자신을 일꾼으로 불러 쓰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종 된 자신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이 시간 설교의 제 목을 "제자의 길"이라고 잡아 본 것입니다.
먼저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경험한 바를 고백하는 형식의 글입니다. 그런 데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셔서 내가 어떻게 했다는 식의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4절-5절 앞부분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들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 하나님께서 주셨고, 알게
하셨고, 깨우치셨고, 알아듣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러 가지를 해 주실 때 "학자 같이" 해 주셨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학자"라는 말보다는 "제자"라는 말이 더 알맞다고 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스승처럼 제자같은 "나"를
일깨워 주시고 바르게 말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제자 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다름 아니라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 주는 것이 "나"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5절에서는 이처럼 하나님이 "나의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스승 하나님께서 알아듣게 하신 대로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나는 꿋꿋이 그
일을 했다고 합니다. 6절이 이를 말해 줍니다.
7-9절도 그 표현 형식에 있어서는 4-6절과 마찬가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신 다는 말이 7절과 9절
첫머리에 나오고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신다는 말이 8절 첫 머리에 나옵니다. 이 말들에 뒤이어 "내"가
당당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으며 적에게 지지 않고 적들은 망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음을 밝힙니다.
교사 여러분, 교우 여러분! 이처럼 본문 말씀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이천 수백년전 당 시 강대국들에게
시달리고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던 약소민족 유다 사람들을 향해 하나 님의 말씀을 전할 책임을 맡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하나님 경험과 하나님에 대한 굳센 믿음을 고백한 바가 들어 있습니다.
이제 본문 처음 두 절인 4,5절을 중심으로 오늘 교회학교 여름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교사 여러분들과 이를
뒷바라지하실 교우 여러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것을 세 가지 정 도로 간추려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남을 가르치기에 앞서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임을 본문에서 깨닫게
됩니다. 제가 교사헌신예배 시간에 "스승의 길"이라 하지 않고 굳이 "제자의 길"이란 설교 제목을 잡은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나 저가 바른 교사가 되려면 먼저 바른 학생이어야 합니다. 제대로 가르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이런 저런 책 보고 강습회 다니고 유명한
강사들한테 배우는 일에 마음이 빼앗겨 우리가 참으로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야 할 분은 우리를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제자임을 똑똑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평신도 교사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과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 리는 모두 하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깨우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사된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늘 새롭게 깨우침을 받는 일에 힘써야 함을 본문이
일러줍니다. 본 문 4절 뒷부분과 5절 앞부분이 이를 말합니다 -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여러분,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을 이런 저런 책에서 잘 이해하고 잘 준비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늘 새롭게 일러주시고 들려주시는 바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나 경험만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께서
알아듣게 하지 아니하시면 한 마디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 드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 아침마다 저를 깨우쳐 주소서.
저의 귀를 깨우치자 제자 같이 알아듣게 하소서. 저의 귀를 열어 주소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두고서
교회 바깥에서 흔히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 "예수쟁이들 말은 잘 한다". 그렇습니다.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치고 말 잘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이 보입니다.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남을 가르치기를 즐겨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입 열었다 하면 훈계요, 성경 말씀이 줄줄 흘러나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제자들에게 말하기에 앞서서 우리의 스승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더욱 더 힘쓰시기 바랍니다. 말하기 좋아하기보다 듣기 좋아하는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을 가르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마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실 것을 간절히 빌면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엉터리 교사가 되기 쉽습니다. 거짓 선생이라는 판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23장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교사이기에 앞서 늘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깨우침을 받아야 할 제자들입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제대로 깨우침을 받았으면 우리는 지친 사람을 도와주는 하나님의 제자이어야
함을 본문이 일러줍니다.
4절 앞부분이 이를 말합니다 -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곤핍한 자라는 함을 히브리 성경으로 보면 지 친 사람을 뜻합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깨우침을 밑바탕으로 하여 지친 사람을 도우는 것 -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일꾼 된 사람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도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봉사에 대해서, 또 무엇 무엇에 대해서 성경 본문들을
중심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만 그 모든 가르침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곤핍한 자들, 지친 자들, 어려움에
빠진 이웃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심은, 그 뜻을 알려 주심은, 일깨워 주심은 그 말씀을, 가르치심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자랑하도록 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나로 하여금 곤핍한 자,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여 그들을 도우려 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곤핍한 자라 함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키며 곤핍한 자를 돕는 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사야 40장27-31절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곤핍한 자",
"곤핍하다"라는 낱말이 이사야서에는 바로 이 구절들에 여러 번 나오기 때문입니다. 함께 읽어보십시다.
27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너는 알 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 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마지막 31절 때문에 널리 알리어지고 사랑 받는 이 말씀에 "피곤하다"라는 말이 네 번 나오는데 이를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본문의 "곤핍한 자"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임 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풀이에 따르면 여기서 피곤하다 함은 오래 전 하나님 백성 유다가 당 시 힘센 나라에 수십
년 동안 시달려 지친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신다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있는 유다 사람들에 게 그것이 그러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늘
새 힘을 얻도록 격려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에 비추어 본문을 읽으면 본문에서 곤핍한 자를 돕는다 함은 오래토록 이어지는 괴로움 가운데 낙심하고
있는 하나님 백성에게 다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새 힘을 얻도록 격려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가르치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본문의 지친 사람에 빗대어 본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기가 좋아졌다는 요즈음 오히려 우리 아이들이
지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힘이 하나님인, 이른바 무한 경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리하여, 중고등학생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까지 이 학원 저 학원 다니며 쉴새없이 무엇인 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 아이들의 형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디는 장년이나 노년층에
어울릴 표현 "피곤하다", "지친다"는 말을 아이들에게도 붙일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수유제일교회 교회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은 지쳐 있지 않습니까? 잘못 된 사회의 흐름과
교육 환경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모습이 이그러지거나 일그러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이웃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배우고 깨우친 하나님 말씀으로 이처럼 지치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도울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말씀으로써 우리 학생들이나 이웃들의 삶의
힘차게 하고 있습니까? 이번 여름 행사 주제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 행사를
통하여 우리 학생들이나 이웃들이 새 힘을 얻고 참으로 독수리 날개 치듯 위로 치솟아 오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지친 사람을 말로 도와주어야 할 하나님의 제자들입니다.
수유제일교회 교회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교육, 기독교교육의 위기에
대해 말하며 우리 교회의 앞날을 걱정합니다. 한 마디로 시골이고 도시고 할 것 없이 교회학교에 나오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학교를 이끌어 나가는 분들이
어찌하든지 이를 막고자 온갖 꾀를 짜내어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펼치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여 년 전 하고는 달리 우리의 다음 세대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교회 바깥에 너무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남한의 교회들도 머지 않아 노인들만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가 되고 말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때 우리가 교사로서 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답 하나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 아니라, 지친 사람을
말로 돕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멋진 프로그램, 아이들 눈에 번쩍 띠는 새로운 행사를 요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을 못하더라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던지는 한 두 마디 따뜻한 말을 통해 우리
아이들의 지친 몸과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큰 말,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즈음 세상에서 남을 돕는, 남을 살리는 말을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달리는 말만 하면 뭘 해, 실천해야지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되기에 말로써 남을 돕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된 사람들은 지친 사람들을 우선 말로써 돕는 일을 힘써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사된 우리 스스로의 말버릇과 말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과연 학생들에게
바른 말, 고운 말, 좋은 말, 힘을 주는 말을 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이웃에게 힘을 주는 말, 이웃을 살리는
말을 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교사된 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울분을 느끼는 학생들이나 이웃은
없는가? 곤핍한 자를 돕는 말을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혀를
주실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리하여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나님,
저희에게 제자의 혀를 주셔서 곤핍한 자를 말로 잘 돕게 하소서!"
이러한 간절한 기도와 아울러 우리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준비한 공과 공부 내용을 다 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주고받는 몇 마디 말을 통해서 살 아 있는 교회교육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난 80년대 대부분을 나라 밖에서 보내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 지도 어언 여섯 해 째 됩니다만 지금도
제게 낯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언어생활이 너무 천박해졌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서로 사이에 주고받는 말들이 거칠 때가 많습니다. 도무지 상대방의 상황이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는 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랫사람이라고 보이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더합니다. 귀국한 다음 처음에는 그런 것 때문에 너무 당황했습니다만 이제는 저도 그렇게 되어
버린 것 같아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 겨레의 큰 스승 가운데 한 분이신 퇴계 선생님은 그 제자들에게 결코 반말 을 쓰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비록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그 분의 교육 태도와 방법이 너무 고상하여 퇴계 선생의 교육 사상과
방법을 연구한 어떤 목사님은 그것을 오늘 우리 교회교육에 적용해서 좋은 열매를 거두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지금부터 우리 모두 학생들에게 높임말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또 억지로 한꺼번에 되는 일도 아닙니다. 반말을 쓰더라도 참으로 우리 아이들의 지친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일으켜 세워 주려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훌륭한 교회 지도자로 데스몬드 투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이 그가 새까만 검둥이
아이로서 백인 선교사 한 분과 사귀면서 느꼈던 바를 대강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적은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 "그 분 앞에 가면 나는 괜히 우쭐해지고 내가 굉장한 사람이나 된 것 같은 느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투투를 대하는 백인 어른의 태도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정중하고 비록 아이의 말이지만 귀 기울여
듣고 많이 말하지 않지만 참으로 그의 가슴에 와 닿는 말을 해 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친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 받은 말씀으로 돕자면 그들을 가르치기에 앞서서
그들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를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집에서 동네에서 학교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 그 아이를 힘들게 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아이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에 맞도록 말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통 때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함을 뜻합니다.
제자의 길 - 오늘 스승 된 책임을 잘 하고자 온 몸과 온 마음을 드리고자 다짐하는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본문은 "제자의 길"을 잘 가라고 가르칩니다. 우선, 우리가 가르치는 자이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것도 늘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런 배움을 밑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삶에 지친 우리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도와야 할 사람들임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또 다른 어린 제자들을 말로써 도와야 할 책임을 지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교회교육은 한 마디로 영감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하겠습니다. 교회 자체도 그러하지만
그 가운데 특히 교회교육은 더더욱 성령의 절대적인 도움으로써 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여 하나님으로부터서만 늘 새롭게 배우고 하나님 주시는 혀로 지친 사람들을 돕는 길 - 이
길이 참 제자의 길이요 교회학교 교사된 우리들이 이번 여름에도 힘써 부지런히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함께 기도 드리십시다.
"저희 스승이신 하나님, 저희를 말씀의 일꾼들로 부르셨으니 저희에게 제자의 귀를 여셔서 하나님 뜻을 늘
새롭게 깨닫게 하소서. 저희에게 제자의 입을 주셔서 지친 사람들을 말로 잘 돕게 하소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굳게 믿고 이겨 나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