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생활생물 연구회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한국사 스크랩 한 반도의 삼국의 대립. 당의 멸망과 5대의 혼란(마립간시대부터 ~ 후백제 견훤까지)
임광자 추천 0 조회 80 08.05.24 23: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 반도의 삼국의 대립. 당의 멸망과 5대의 혼란(마립간신라부터 ~ 후백제 견훤까지)

한 반도의 삼국의 대립. 당의 멸망과 5대의 혼란(마립간신라부터 ~ 후백제 견훤까지)                   이길상

가. 한반도의 고대사회

(1) 마립간 시대의 신라

경주의 천마총한반도에 관한 고대의 역사기록은고려 중기(1145)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고려말기에 편찬된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있고,이외에 중국측과 일본측에 사료(史料)가 약간씩 남아 있다.

삼국시대라 하여 삼국사기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건국을 각각 기원전 57년, 37년, 18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그것은 삼국의 건국이그렇다는 것이고, 아직도 한반도에는 삼국 외에도 가야연맹을 비롯한 많은 소국들이병립하고 있었다.

이 소국들이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것을 마지막으로모두 삼국에 흡수되어 이른바 삼국시대로 정립(鼎立)되었다가 660년 백제가 무너지고668년에는 고구려 역시 나, 당 연합군에 의해서 무너졌다.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676년 서쪽으로는대동강 입구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영흥만에 이르기까지를 북방경계선으로 한반도 대부분을차지하여 통일신라가 성립되었다.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약 100년간이 엄격한 의미에서 삼국시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원전 후부터 이 삼국의 정립시기까지600년 가까운 긴 세월이 공백이 되는데 이 시기를 어떻게 시대명칭을 불러야 할지가문제로 대두된다. 이 시기에 있었던 수십개의 국가들 중, 고구려, 백제, 신라를 제외하면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최근의 발굴에 의해서 고고학적인 자료만남기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는 원삼국시대, 혹은 성읍국가시대,또는 부족연맹시대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3국을 중심으로 편년을설정할 수밖에 없는 사료의 한계 때문에 삼국시대에 포함시켜 역사를 서술하고 하고있지만, 억측(臆測)만 무성할 뿐, 실상을 밝히는데는 어려움이 많다.

이시기에 있었던 많은 일들 가운데 마립간 시대의신라, 나주 고분군과 백제,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문과 고구려 이 세가지만 잠시살피고 중국의 송나라로 들어가 보자.

만주와 몽고(滿蒙)계통의 사회에서는 우두머리를 칸(khan)혹은 카한(可干, 可汗, 汗, 干)으로 불렀는데, 신라의 왕호에서 거서간(居西干),마립간(麻立干) 등의 명칭에서 보이는 간(干)과, 부여에서 족장(族長)명인 마가(馬加),우가(牛加) 등에 쓰인 가(加), 그리고 가야에서 아도간 여도간 등의 9간 등에 붙인간(干)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간(干)과 가(加), 그리고 칸은 우두머리를 뜻하는말로서 한자의 음을 빌려 그렇게 기록했을 따름이고 그 자의(字意)와는 관계가 없다는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일반적인 사실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의하면 시조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고불렀고, 삼국유사 왕력표에는 그의 아들 2대 남해차차웅도 역시 그렇게 불렀다고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거서간이란, 진(辰)에서는 왕을 말한다고 하였으며,혹은 귀인을 부를 때 그렇게 칭한다(.... 居西干 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라고 기록하고있다.

居西가 중국식 발음으로는 쥬시에 가깝고, 干의 한자원음은 갼에 가깝기 때문에 거서간은 "쥬시갼"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순 우리말에 그런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3대 유리부터는 니사금(尼師今)이라고불렀고, 니사금은 잇빨 자국(齒理:잇금)을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19대눌지부터 22대 지증까지 4왕을,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17대 내물부터 22대 지증까지6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불렀다.

마립간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주(注)에서는 "김대문이말하기를 마립은 방언으로 말둑을 말하는 것이며, (말을 맬) 말둑을 잡는(정하는)것은, 계급(位)에 따라서 자리를 정하여 두는 것이다. 곧 왕의 말둑이 主(위)가되고,신하의 말둑이 그 아래로 가지런하게 벌려있게 되는 것임으로, 이로 인하여 이름하는 것이다"(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궐(木厥) 也 궐而試操 准位而置 則王 爲主臣궐 列於下 因以名之)

이것은 맨 윗자리에 있는 말둑에 말을 매는 사람을말둑간, 즉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지금 사회라면 어떤 모임에서 각자 타고 온 승용차를주차시킬 때 가장 윗 자리에 차를 주차시키는 사람이 우두머리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마립은 마리(頭) 혹은 마루(宗)를 가르치는 우리말로서 마립간은 곧 우두머리라는뜻을 지녔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말둑 궐=木+厥. 한자가 화면에 나타나지를 않네요

그러다가 지증왕 4년(503)에 "지금 군신들이한 뜻으로, 신라국왕이라 호칭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하니, 왕은 이를 따랐다"(...今群臣一意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라고 하는데, 이 때부터 국호를 신라, 왕호를 왕이라고 불렀다는것이다.

마립간이라고 부르던 이 시기, 즉 내물왕에서부터지증왕 까지(5세기 초~6세기 초) 사이에 특이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조영되었고,최근의 발굴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많은 부장품들이 나왔는데 이것이 이 시기에 한정해서나타났다가 이 후 사라진 후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일단의 의심을가져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장례와 묘제의(葬墓)의 풍속은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다른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지금도 사자(死者)의 시신(屍身)을매장(埋葬)하고, 그 위에 봉분(封墳)을 만드는 것은 우리들만의 풍속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이란평지에 약간의 땅을 파고 그 위에 나무로 방을 만든 다음(木槨), 시신과 부장품을널(木棺)에 넣어 안치하고, 나무 방을 사람의 머리만한 돌로 두껍게 덮은 후, 그위에 흙을 다시 덮어 봉분을 만든 것으로서, 지금 경주 황남동에 있는 고분 등이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우리들이 천마총이라고 부르는 황남동 제155호 분과 황남대총이라고 부르는 제 98호분, 그리고 노서동 고분군의 호우총(壺塚)등이 발굴되어 이미 학계에 보고 된 바 있다.

이것은 돌방(石室)이나 벽돌방(塼室)을 만들고, 기다란통로를 만든 뒤,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하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통로의 입구를막았던(횡혈식 석실분)고구려와 백제의 분묘 양식과는 아주 다른 뿐 아니라 신라에서조차이런 형태는 이 시기에 한정되어 있다.

지금의 입장에서 이들 고분들의 장단점으로 보면,고구려나 백제의 무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횡혈식석실분은 단단한 돌이나 벽돌로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이나 천장에 그림은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쉽게 무덤을뚫고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부장품은 도굴되어 거의 없는 상태다.

반대로 이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나무로 방을 만들었기때문에 세월이 지나면서 나무가 썩어 내려 앉았고, 때문에 벽화는 볼 수 없지만,그 부장품은 도굴을 면할 수가 있어서, 최근의 발굴 기법을 통해 많은 부장품이 고스란히나오고 있어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신라 금관그 부장품 중에서 우리들의 관심을 끌게하는 것은 出자형의 금관을 비롯해서, 귀걸이, 팔지, 요대 등의 금, 은, 옥 세공품과유리제품들인데,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덤의 주인이 왕이라면, 이 무덤 역시 능(陵)이라불러야 되고, 금관도 왕관이라고 해야 되지만, 무덤이 주인을 알릴만한 아무 것도없기 때문에, 그냥 몇 호 분(墳) 혹은 무슨 총(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155호분의 유물 중에는 벽화 아닌 그림이 나와서세상을 더욱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 무덤에서 나온 말의 안장(鞍裝)에는 그 양쪽에흙이 튀어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보호대, 즉 장니(障泥)에는 자작나무 껍질을여러 겹으로 꽤 매고 그 위에 천마(天馬)라고 생각되는 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통일 이전 신라의 것으로는 남아 있는 유일한그림이기 때문에 이름도 천마총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신라가 북방 기마민족(유목민)의후예라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금관과 요대 등의 장식품에 대해서는 부장(副葬)용과의식(儀式)용이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부장용이라고 보는 것은, 이것을 평시에사용하기에는 모양은 너무 크고, 금판(金版)이나 금사(金絲)는 너무 얇고 가늘기때문에 몸이 맞지 않을뿐더러 조금만 흔들어도 떨어지거나 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시에 사용하지 않던 것을 부장용으로 한다는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고, 따라서 특별한 의식이 있을 때 이것을 조심스럽게사용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의식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그리고 그많은 유리제품들인데, 이를 두고 신라에서는 유리제조 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었다고교과서에까지 적고 있지만, 이 후 유리제조 기술의 맥을 잇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이없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을 수입했다고 보고 있는데,그 먼 통상로를 따라 경주까지 왔다면, 유리제품 이외의 다른 것도 있었을 것이고,그것이 어떤 것이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호우총(壺 塚)에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제사(祭祀)때 사용한 청동제 항아리인 호우가 다른 부장품과 함께 출토되었고, 이 호우는 뚜껑이딸린 합(盒)으로, 그릇 밑받침에 "을묘년 강상광개토지 호태왕 호우십"(乙卯年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15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서, 415년(장수왕 3)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나,이 호우가 어떤 경로와 이유로 경주까지 흘러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런 저런 것을 종합해 보면, 마립간 시대의 신라는,다른 문명세계와 접촉하였던, 금을 가진 다른 이주민 집단이 들어와서, 먼저 있던지배집단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계림신화를 만들었고, 박(朴) 석(昔)으로 두 집단으로교체되던 니사금(尼師今)에 김씨가 등장하여, 박, 석 김의 세 집단으로 교체되었고,마립간시대에는 아예 김씨의 세습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마립간 김씨의 세력이다른 두 집단의 세력보다 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신라는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고하는데, 마립간이라고 불렀던 이들의 먼 조상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정체를 지금까지확실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2) 마한 백제와 나주 고분군

나주 대안리 고분마한(馬韓)은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분포한 삼한(三韓) 중에 가장 큰 나라로서, 대체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지방에 54개의 소국(小國)이 등장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戶)가되고, 각 소국에는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臣智)·읍차(邑借)라 불렀던 군장이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한 소국을 형성한 주체에 대한 국내 학계의 의견은마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이주 정착하여 성립시켰다고 보는것과, 선주(先住) 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 삼한이 대두했다고 보는 두 가지설이 있다.

이 두 가지 설 중에서 뒤에 것에 대한 논거는, BC3~2세기 중남부 지역에는 좁은놋단검(細形銅劍) 문화를 배경으로 다수의 정치집단이존재했는데, 더욱 선진적 정치집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충남·전라 지역에 밀도있게분포함으로써 이들이 마한 소국의 상당 부분을 이루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한강 유역의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와 목지국(目支國) 중심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하는 상태였으며,이후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가 점차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형태의편제 질서를 확립해간 것으로 보고 있고, 학계에서도 대체로 이 설을 따라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고조선이 멸망한 BC 1세기 이후,북쪽으로부터 위만조선계와 부여계 이주민집단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철기문화가보급되는 등의 정치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고, 그 변화 속에서, 새로운 세력권이 형성되어,청동기문화 단계의 선주집단을 지배하였고, 그리하여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마한을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이들 여러 개의 세력으로 구성된 많은 소국이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토지의 인구 부양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이지역에, 토착세력이든 이주세력이든 간에 강력한 지배 계급이 있었다는 근거는, 많은고인돌이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그 가운데는 북방식의 양식도 있으며(고창 고인돌)나주일대에는 지금도 주인을 알 수 없는 많은 고분 군이 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그 고분군 중에는 일본의 고분시대에 나타나는전방후원분이 있는데, 이를 두고 양국 학계에서는 논쟁이 분분하다. 그리고 진수의삼국지 동이전 삼한조에는 "사방이 4천리나 되는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동서는 바다로 막혔으며(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하고 있다"(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라는 기사를 두고도 양국간의 논쟁이 만만치를 않다.

일본측의 주장은 그들의 역사에 기록된 임나일본부가한반도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 때부터 한반도를 경영했으므로 일제의 한반도지배는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펴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반도 남쪽에 있던 세력의 일부가일본 열도에 양자(?)로 건너 가서 그곳을 지배하였고, 세력을 넓히면서 2600여 기(基)나되는 전방후원분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일본역사의 한 시기인 고분시대(4세기~ 7세기경)의 주인공은 한반도 남쪽으로부터 이주해간 백제계(부여계 내지는 고구려계)의무리가 그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그 본가인 한반도 남쪽에도 어떤 형태로든교류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南與倭接에서, 왜의 본가(本家)가있었던 곳은 나주일대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형태의 무덤이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고,일본과 우리나라 남부 일부 지역에서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 원형이 어디인가를 두고논쟁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문화의 전파과정을 두고 서로가 먼저라고 생 때를 쓰는것은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3)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삼국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체제를 갖추고 발전한 것은고구려이고, 그 고구려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 광개토대왕으로서, 그의사후 그의 아들 장수왕이 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이른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인데,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묻혀있다가 1884년 한 일본군 장교에의해서 발견되었고, 그 탁본이 세상에 공개됨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많은 업적이 세상에빛을 본 반면, 한일간에는 또다른 논쟁의 불씨를 넘겨주었다.

이 비가 있는 곳은 현재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즙안현(集安縣)통구(通溝)로서, 비신(碑身) 높이 5.34 m. 각 면 너비 1.5 m의 자연석을 약간 손질하여,1면부터 4면까지 총 1,802자가 예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방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마모가심하여 알아 볼 수 없는 글자도 있으나, 앞뒤의 문맥을 잇는데는 큰 지장이 없고,그 내용은 시조의 탄생과 건국과정 등의 조상의 내력과, 광개토대왕의 즉위 후 대외정복사업을 연대순으로 상세하게 나열하였으며,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묘의 관리 문제를 마지막으로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1면 후반부에 있는 것으로써 이에 대한 일본측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백잔과신라는 오래 전부터 (고구려)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고,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라를 파해 (왜/일본)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

百殘은 백제를 낮추어서 쓴 것이 분명하나 마모가심하여 판독할 수 없는 글자는 任那加羅 혹은 加倻 新羅라고 본다면, 백제를 파해임나가라의 신민으로 삼았다. 혹은 백제, 가야,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된다. 어떤 것이든 왜가 이들을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4세기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천관우는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오자 백제와 가야 신라가 이를 파하고신민으로 삼았다"라고 다른 해석을 하였고,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비문 중 왜(倭) 이하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이 네 글자는 다른 글자에 비해서 크기가 맞지 않고, 옆으로 글자가 퍼져 나와 있는데,이것은 석회를 발라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가로 일직선으로선을 내리 그으면 이 네 글자만 선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1972년 일본인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당시일본군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여 이진희의 주장을바쳐주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와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등을 들어,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後以辛卯年不貢因破百殘倭寇新羅以爲臣이본래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고,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그 뒤 신묘년부터 조공을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 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時制)가 없고, 띄어쓰기를하지 않으면서 주어와 술어의 위치에 따라서는 그 해석이 달라지는 한문의 속성이이렇게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것이 또한 한문의 묘미라고도 할 수 있다.

나. 중국대륙 북방의 유목민들

(1) 진(秦)·한(漢)에서부터 위진 남북조시대까지의북방 유목민

아시아대륙의 중앙부를 동서로 길게 관통(貫通)하고있는 건조지대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서습기를 모두 빼앗기고,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매우 건조하여 사막, 고원, 분지등을 형성한 곳이 많으나, 한편으로는 일망(一望)천리 끝 없는 지평선(地平線)이이어지고, 이 지평선에는 강풍과 건조한 기후에 견디기 위해 몸이 작은 일년초들이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짧은 여름동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부지런히자라는데, 이곳을 초원지대(steppe)라고 한다.

이곳에서 선사시대부터 유목생활을 하던 수 많은 종족이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는 그들의 계보(系譜)를 밝히기는 어렵고,기원전 8세기경에 이란계라고 추정되는 스키타이족이 그리스로부터 청동기문화를받아들여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많은 유물을 남김으로써 이후부터는 그 계보가들어 나게 되었다.

이들이 중국의 북변에서 중국을 자주 침범했기 때문에중국 역대왕조는 이들의 침입에 대처해야 했고, 그래서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이들의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름을 따라가 보면, 진 한 시대에 흉노는 중국에게만리장성을 쌓게 하는 수고를 주었고,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아예 중국에 들어와 그들의왕조를 세웠는데, 이때 활약한 것이 흉노계와 티베트계로서 이들이 세운 것을 오호16국이라 한다.

그 후 이들은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의해서 통합되고,중국왕조를 강남지방으로 몰아 내 남북조시대를 만들었다. 이 시기 몽고족 유연은큰 세력을 형성하여 5세기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칸(khan :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북위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자 유목민이 세운 북위가 이들을 막기 위해서 장성을쌓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후 수 당 시대에는 돌궐(투르크)이 우수한 제철기술을가지고, 주변 유목민을 정복하여, 동서 투르크스탄을 차지하고, 동서교역로(실크로드)를장악하여 번성하였는데 이들은 유목민으로서는 처음으로 돌궐문자를 만들고 그 문자로자기들의 역사기록을 남겼다.

돌궐의 뒤를 이어, 같은 투르크계인 위구르가 등장하여돌궐을 복속시키고, 위구르문자를 만들어 문화적으로 자긍심을 높이고, 각지방의기술인, 상업인, 각종 장인(匠人)들을 받아들여 생산을 높였으며, 안사의 난(755-763)때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대가로 당나라로부터많은 물자를 받아 생활을 문화적으로 향상시키는데 유용하게 사용하였고, 당의 수도장안에는 수많은 위구르인들이 살았다.

(2) 5대의 혼란과 거란족

당이 망하고(907) 오대의 혼란기가 되었을 때, 거란(Kitai)이나타나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시라무렌(Siramuren)강 남안(南岸)에살고 있던 남몽고계의 유목민들이 였는데, 여덟 개의 토탬부족 연합체로 이루어졌으며,백마를 탄 신인(神人)이 파란 우차를 타고 온  천녀(天女)를 만나 사랑을 맺고,나라를 세웠다는 설화를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때 파란 우차(牛車)를 타고 온 천녀 계통은 술율(述律)혹은 심밀(審蜜)이라는 집단이 되었고, 백마를 타고 온 청년계통은 야뉼(耶律)의집단이 되었다고 하는데, 심밀은 소(牛), 야뉼은 말(馬)을 가르키는 몽고의 고어(古語)를음역(音譯)한 것이라고 한다.

이 두 개의 집단에서 거란의 8부족이 파생(派生)하였는데,모든 거란의 부족은 크게 야뉼과 심밀의 두 개의 부계(父系) 집단으로 나누어져,왕실의 성은 야뉼, 황후의 성은 심밀로 불렀다. 그리고 해마다 백마와 푸른 소를잡아 천지일월과 종족의 시조에게 제사하고, 8개 부족은 각 부족의 수장(首長)인대인(大人)들이 모여, 의회를 조직하고 교대로 3년 임기의 칸(가한:可汗)을 뽑아부족 연합체를 통치하게 하였다.

10세기 초엽 칸으로 뽑힌 야뉼아보기(耶律阿保機:옐리아보기)는칸의 교체기를 세 번이나 묵살하고, 반대파를 암살하는 등으로 세력을 굳히고, 드디어수도를 임황부에 정하고 대거란국을 건설하고(916) 스스로 제위에 올라 거란의 태조(916-926)가되었으며, 그는 독자적인 거란문자를 만들어 고유문화 육성에 힘쓰고, 한편으로는해동성국이라고 불렀던 발해를 멸망시키고(926) 정복왕조로 등장하였다.

그 후 거란은 후진을 세운 석경당을 도와준 대가로화북지방의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중국의 화북지방 일부를 지배하였으며, 그 후국호를 요(遼)로(947), 요에서 다시 거란으로 고치는 등, 11세기 동아시아의 최 강자로군림하다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망할 때(1126) 까지 약 200년간, 송으로부터는막대한 세폐를 받았고, 고려에도 세 차례나 침입했으며(992-1018), 샤만적인 거란식불교의 융성에도 힘써 대장경을 간행하고 거대한 사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다. 당의 멸망과 5대 10국의 혼란기(907~979)

(1) 중국 다시 5대 10국으로 분열

당(唐)나라가 "개원의 치"라고 일컫는 성당시대를지나, 9세기 말에서 시작된 황소의 난을 계기로 국력의 쇠약을 가져와 절도사 주전충에게멸망하였다(907). 당이 지배한 200 여 년 간 이른바 동아시문화권이 형성되어 하나의큰 획을 긋게 되었는데, 이 시기 한반도는 통일신라시대(676 ~ 935)에 해당한다.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당의 문화가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주어, 통일신라에서도 그 문화의 흔적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거목이자리잡았던 곳에 새 싹이 돋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당이 망하고송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여 안정을 찾기 까지, 약 70년간 중국의 화북지방에는 무려다섯 왕조가 교체되었고, 강남 일대에는 10개의 크고 작은 군벌이 난립하고 있었는데역사에서는 이시기를 5대 10국 시대라고 부른다.

5대는 중국 정치의 중심인 화북(華北)지방을 지배했던단명 왕조들로서, 양(梁:後梁)·당(唐:後唐)·진(晉:後晉)·한(漢:後漢)·주(周:後周)의다섯 왕조를 말하는데,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이름의왕조와 구별하기 위해서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

그리고 10국은 강남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서 흥망한지방 정권을 말하는데, 오(吳)·남당(南唐:江西·安徽·福建)·오월(吳越:浙江)·민(:福建,뒤에 南唐에 병합)·형남(荊南, 또는 南平)·초(楚:湖南)·남한(南漢:廣東·廣西)·전촉(前蜀)·후촉(後蜀:四川)·북한(北漢:山西)등을 말한다. 이 밖에도 단기간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연(燕:河北)·기(岐:鳳州)·주행봉(周行逢:建州)정권 등이 있었다.

이렇게 중국이 다시 분열하게 된 원인은, 당나라 말기에이르러 외침과 반란이 잇따르자, 지방의 절도사(節度使)들에게 군정뿐만 아니라,민정, 재정 등 3권을 주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군벌화(軍閥化)되어 막강한 권한을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875년의 왕선지(王仙芝)·황소(黃巢)의 난에활약한 유적(流賊)이나 이민족 용병(傭兵) 출신자들은 자립해서 절도사를 칭하여이제는 그들간에 싸움을 한 결과 대체로 11개의 큰 세력으로 갈라져, 후량(後梁)이당의 제위(帝位)를 탈취한 것을 계기로 해서 각각 왕호(王號) 또는 제위를 칭하게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군인들의 쿠데타로, 그것도 부하가상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하극상(下剋上)의 양상을 띤 것이 였다.

5대 최초로 등장한 후량(後梁 : 907∼923)의 태조주온은, 황소(黃巢)의 부하로서 각광을 받다가 황소가 쇠잔해 지자 재 바르게 당조(唐朝)에투항하여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가 되어 대운하와황하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인 변주(開封)에 주둔하게 되었다.

절도사가 된 그는 별의 별 수단을 동원하여 변주의부상(富商)들을 자기 수중에 넣고, 실력이 막강해 지자 다시 최대의 정적이 였던이극용을 물리치고, 후량을 세웠다(907). 난세(亂世)를 틈타 일어난 무식한 도적(盜賊)떼의 두목출신인 그가 천자가 되었으나, 그 본성(本性)은 버릴 수가 없어서 패륜(悖倫)적인여성 편력은 골육상잔(骨肉相殘)을 불러왔고 그로 인해서 이 왕조는 단명에 그치고말았다.

주전충의 아들로서 이복 형제간인 주우규와 주우문은권력 장악을 위해서 다투는 사이였는데, 여기에는 그들 부인들이 한 몫을 더해서시아버지인 주전충과 불륜(不倫)의 관계를 이루었고, 시아버지를 두고 총애를 다투었다고한다. 그래서 결국은 주전충도 그의 아들 우규에게 독살되었고, 우규 역시 셋째 아들인주우징에게 피살되었다.

그러나 이 후량은 후당(923∼936)에게 망했는데, 이극용(李克用)의아들 이존욱(李存勖:재위 923∼926)은 후량(後梁:907∼923)의 뒤를 이어 국호(國號)를당(唐)이라 칭하고 뤄양[洛陽]에 도읍하였다. 그러나 이 후당 역시 말제(末帝)에이르러 거란(契丹)과 결탁한 부장(部將)인 하동(河東) 절도사(節度使) 석경당(892∼942)에게4대 13년 만에 망하고 석경당은 후진(後晋)을 세워 고조(高祖)가 되었다.

후진(後晉 : 936∼946)의 고조가 된 석경당(石敬塘)은돌궐 사타부(突厥沙陀部) 출신으로, 후당(後唐)을 섬겨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가되었는데, 화북의 요지인 연운(燕雲) 16주(州)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거란(契丹)의원조를 받아 936년 후당을 멸망시키고 건국하여 변경(京:河南省 開封)에 도읍하여후진을 세웠다.

석경당(고조)시대에는 거란에 신례(臣禮)를 지켰으나,제2대 출제(出帝) 때에는 국수파(國粹派) 무장(武將)이 대두하여 거란에 등을 돌리자,이에 거란의 태종이 국력을 기울여 세 차례나 후진을 침략하여, 드디어 변경을 함락하고,출제가 거란에 붙잡혀 감으로서 2대 10년 만에 멸망하였다(946)

이 때 거란군은, 수도에서 낙양에 이르는 수 백리사이에 있는 촌락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는데, 그 참상이 너무나기가 막혀 후일 이것을 타초곡(打草穀)이라고 불렀다. 타초곡이란 논에 있는 벼를낫으로 베듯이, 이 지역 촌락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살인과 방화로 쓰려버렸다는것인데 5대 사회 전체가 이런 풍조였다.

후진에 비참하게 망하자 그 뒤를 이은 것이 후한(後漢: 947∼950)으로서, 돌궐(突厥)의 사타족(沙陀族) 출신으로 후진(後晉)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였던유지원(劉知遠)이 후진이 거란[契丹]에 망하자 이 틈을 타서 대량(大梁:開封)을 도읍으로하고 후한(後漢)을 세웠다.

유지원의 뒤를 이은 은제(隱帝)는 건국공신인 추밀사(樞密使)곽위(郭威)와 충돌, 난병들에게 피살되어 2대 4년 만에 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곽위가후주(後周)를 세웠다.

후주(後周 : 951∼960)의 태조 곽위(郭威)는 후한(後漢)의추밀사(樞密使)였으나, 은제(隱帝)가 그의 세력이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하자 대량(大梁:開封)에서 군사를 일으켜 후한을 멸하고 951년 제위에 올라 국호를주(周)라고 하였다. 제2대 양자(養子) 세종(世宗:柴榮)은 5대의 난세를 당하여, 담력과지략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후주로 하여금 부국강병을 이룩하게 함으로써, 이 시대의유일한 명군으로 손 꼽히고 있다.

그는 군대를 정병(精兵)화하고 궁성을 지키는 금군(禁軍)을개편하여, 반란의 소지를 없애고, 군비강화에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코자 당시 국내에서무제한 사용을 공인한 정화(正貨)를 주조하였다.

정화(正貨)란 명목가치과 실질가치가 같은 본위화폐의동전으로서, 이의 원료인 동(銅)의 유출을 엄금하고, 국내에 있는 동을 징발하여주전(鑄錢)원료로 쓰도록 하는 한편, 불교사원에 있는 동제 불상과 불구를 전부 공출하게하여 이를 녹여서 동전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민중의 비난이 빗발쳤고, 불교계에서도조직적으로 반항하자, 세종은 오히려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자비라고 하면서 태연자약하였다. 이렇게 해서 많은 불교 사찰을 정리하였는데, 이를 두고 불교도들은 중국사상최후의 법난(法難)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른바 "3무(武) 1종(宗)의 법난"이라고불교도 들이 말하는 그 1종이 후주의 세종을 가르키며,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당의 무종을 3무(武)라 하여 오늘날까지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명군으로 불린 세종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공제(恭帝)가 일곱 살에 즉위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이 빈번하는 등 어려운 이 시기를이겨내기에는 너무나 어렸기 때문에 장군(將軍)들이 근위군 최고사령관인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및 귀덕절도사 조광윤(趙匡胤:宋太祖)을 옹립하고,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케하였는데 이것을 진교의 무혈혁명이라고 한다.

이로써 후주는 3대 9년 만에 멸망하였고 조광윤은개봉에 도읍을 정하고 송 왕조를 열었다(960). 같은 시기 우리들의 조상이 살고 있었던한반도에서는 당의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던 신라가 당의 쇠망과함께 힘없이 무너지고 후삼국의 혼란기가 되었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우리의 삼국시대로다시 들어가 보자.

라. 삼국의 정립과 통일

(1) 장수왕의 평양 천도

신라의 진흥왕을 중심으로 삼국관계를 본다면, 진흥왕의영토확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평가되는 것은 한강하류지역 진출이라고 할 수 있다.이 지역은 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여 일찍부터 이 지역을두고 삼국간에 각축(角逐)의 장이 되었던 곳이다.

이 지역에서 창업의 깃발을 먼저 꽃은 것은 백제였는데,시조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자리잡고 기원전 18년에 백제(건국 초기에는 십제)를 세웠다.이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는 성장하여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16관등의 관제를 마련하고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는 마한을통합하고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고 황해도로 진출하였으며(370) 중국의산둥반도와 요서 일대에 세력을 펼치고 일본의 큐슈 지방까지 진출하여 일대 해상세력을형성하였다.

그 후 고구려의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옮겼는데(427)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15년조에는"이도평양(移都平壤)"이라는단 네 글자의 짤막한 사실만 전하고 있다. 이것은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인데.....천도한이유나 그 경위에 대해서는 단 한자도 적은 것이 없다.

이를 두고 국내 학계에서는 거두절미하고 고구려가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해로(海路)를 통하여 중국과 교류의 길을 열었고... 등등으로부터여러 가지 긍정적인 사실들만 나열하고 있다. 물론 당시의 수도라는 것이 지금과는달라서, 고구려가 수시로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다시 국내성으로 옮긴 기록이 있고,평양성을 수축하여 남진(南進)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은 기록에도 여러 번 나타난다.

그러나 일시적이 아니고 영구적인 수도 이전이라는점에서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과는 무관할지는 모르나, 당시의 국제정세라 할수 있는 중국의 사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 때 중국은 5호 16국의 혼란기가수습의 단계에 있었는데, 이 때 고구려와 직, 간접으로 관계하던 나라는 지금의 만주지방을근거로 모용씨가 세운 연(燕)으로서, 연은 다시 남연, 북연, 서연, 전연, 후연 등으로구분된다.

이 중 전연은 고국원왕 때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함락(342)시키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망하였고(370), 고구려는 이전진의 부견과 화친하여 불교를 받아들이고(372) 율령을 반포(373)하는 등 국력을키웠으나, 이 부견의 전진이 비수의 전투(383)에서 패하고 망하자, 독자적으로 영토를지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는데 이 시기가 광개토대왕 때 였다.

그 후 요하부근에는 모용씨의 북연(409 ~ 438)이 서게되었다. 북연을 세운 풍발이라는 사람은 고구려계의 한족(漢族) 출신으로 모용씨에게양자 가서 모용씨의 성(姓)을 받은 사람이다. 따라서 고구려와는 매우 우호적이였으나, 불행하게도 북위에게 밀리자 고구려의 후원에 의지하고 한편으로는 남조송과 통교하여 북위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력의 한계로 결국 북위의 침공을 받고 나라는무너지고,그 왕 풍발은 고구려에 망명하였으나(436) 2년 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해서살해되었다.

혼란기를 수습하고 중국의 화북지방을 통일(439)한것은 선비족의 탁발부가 세운 위(魏)나라였다. 중국의 역대 왕조 중 위라는 나라가많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 이것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북위, 원위 혹은 후위라고 부르고우리들은 북위라고 많이 쓴다.

몽고계인 북위가 중국의 화북지방에 정권을 수립한것은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어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의로(拓跋盧)가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진데서 시작한다. 그 후탁발 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부견이 382년 비수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가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에 있던 유연(柔然)과 후연(後燕)을 격파하고,하북(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대동(大同)에정하고(398),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기초를 이룩하였다.

명원제 때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하남(河南)지방의땅을 빼앗았고, 태무제(太武帝) 때 하(夏)·북연(北燕)·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5호 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북위는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하게되었다.

북위가 중국의 서쪽에서 일어나 주변을 정복하고,화북지방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친교 내지는 우호관계에 있었던 전진이나북연 등은 모두 북위의 적대국의 위치에서 싸우다가 차례로 망하였고, 고구려의 장수왕은평양으로 천도하고(427),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朝貢)하고 나라의 이름을청하니, 북위(北魏)에서는 이를 가상타 하여 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 이라는 긴 이름을 주었다고(434) 삼국사기에는 적고 있다.

좋든 싫든 고구려는 이 후에도 북위에 조공했다는기록들이 보이고, 이로써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는 평화가 유지된 것 같다. 그러나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위와는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은 좋았다고 하겠으나,그 대가가 한반도 남쪽이 있던 백제와 신라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왜냐 하면 이 때부터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고구려의 집요한 침략을 받게 되었기때문이다.

(2)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나제동맹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고, 흩어진 국력을 수습하여세력 범위를 남으로 돌리자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위례 백제였다. 두 나라간에 공방을거듭하다가 바둑을 좋아 했던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첩자 도림과 바둑을 즐기다가궁성이 함락되고 왕이 피살되었다(475)

그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고(475)국가 체제를 재정비하여,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으나, 고구려는 계속 남진하여남한강 유역까지 이르러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웠고, 죽령을 넘어 신라의 북변(北邊)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두 나라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더욱굳건히 하게 되었는데,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직후, 즉 433년(고구려 장수왕21, 신라 눌지왕 17, 백제 비유왕 7)에 처음으로 나제동맹을 맺었다가, 이 때를 즈음하여다시 신라·백제 두 나라는 493년(고구려 문자왕 2, 신라 소지왕 15, 백제 동성왕15)에 서로 국혼(國婚)을하고, 이를 계기로 고구려에 대한 공수동맹(攻守同盟)을맺어 고구려에 빼앗긴 땅의 회복에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그리하여 433년에 시작된 나·제 두 나라의 동맹관계는493년에 이르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히 하게 되었고, 이렇게 힘을 합친 두 나라는,백제의 성왕(聖王)과 신라의 진흥왕(眞興王) 때에 와서 그 힘을 십분 발휘하여 고구려로부터한강유역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551)

이렇게 해서 백제는 다시 한강 하류지역을 되 찾게되었고, 신라는 죽령을 넘어 남한강 상류에 진출하여 적성을 점령하고 산성(山城)을쌓아 한강 하류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553년(성왕 31)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가 회복한 한강유역의남·북한성 등지를 탈취하여 자국의 주현(州縣)으로 삼아 신주(新州)라 칭하자, 이에격분한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공격하였다. 이때 관산성의군주(郡主) 각간(角干) 우덕(于德)은 전세가 불리하자 신주(新州:경기 광주)의 군주김무력(金武力)의 원조를 얻고, 삼년산군(三年山郡:보은)의 비장(裨將)인 고간(高干)·도도(刀都)가구천(狗川:옥천 부근)에서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이 때 백제의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고(554)이로써 나제동맹이 결성된 후 120년간, 다시 혼인을 치러 공수동맹을 굳건히 한지60여년만에 나·제 동맹은 깨어지고 말았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는 인적·물적자원의 획득과 함께 서해를 거쳐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매우 중요하였다.

반도의 중심부인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약 백년후 삼국을 통일하는데(676), 물론 이것은 신라 단독의 힘은 아니었고, 당이라는 외세(外勢)에의존했다 하여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돌이켜 보면 분열되었던 중국왕조들이힘의 균형이 깨어지고 어느 하나가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그 주변의 국가에도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남북조를 마지하여 남조와 북조에 각각 교류했던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것은, 수와 당이 남북조를 통일한 것과 궤(軌)를 같이 하고있다. 요즘 말로한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잘 나갈때, 신라는 반도의 동남단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을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남북조가 수에 의해서 통일되고(589)그 뒤를 이어 당이 성립되었을 때(618) 강적 고구려에 대비해서 당은 아무런 부담이없는 신라를 파트너로 삼고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그 덕으로 신라가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면 논리의 비약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라는것이 그렇게 이어져 오고 있다.

이 후 신라는 당의 번성과 함께 200 여 년 간의 찬란한통일신라의 문화를 이룩하였으나, 9세기 말부터 당의 쇠퇴(衰退)와 함께 신라도 기울기시작하여 이른바 천년 사직(社稷)을 잃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신라가 사라지는 9세기 말부터 10세기 전반, 중국에서는당(唐)이 망하고 5대의 혼란기가 시작되며, 마치 지구전체가 하나의 동맥에 의하여움직이듯 유럽에서는 프랑크왕국이 노르만의 침략으로 흔미를 거듭하였고, 이슬람세계에서도투르크족이 등장하여 술탄의 칭호를 얻어 실질적인 이슬람세계의 주역으로 등장하여칼리프의 영화는 옛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비잔틴제국도 발칸반도에 국한하여 명맥을 유지할뿐 외부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텐노오 중심의 헤이안(平安)시대말기가 되어 율령체제는 무너지고 외척에 의한 섭관(攝關)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인지(人智)의 발달과인구의 증가, 기술의 진전과 산업의 형태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의 혼란기였던 이른바 5대 10국 시절(907 ~978)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한반도에는 후삼국이성립되어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라. 신라의 쇠망(衰亡)과 후 삼국의 성립

(1) 난세의 영웅들

당의 힘을 빌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그 당이망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쇠망도 별 수 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공식은아니지만 역사는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황소의 난(875~884)으로 당이 어지러울때, 그 여파가 신라에 미쳐 진성여왕의 치세기간(887~897) 신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접어 들게 된다.

이것을 두고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진성여왕의 실정이라고말하고, 연약한 한 여성 군주에게 모든 잘못을 떠 넘기고, 여러 가지 그 증거를 제시하여그 당위성을 찾기 한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 시기에 세종대왕과 같은훌륭한 군주가 있었더라도 그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역사의흐름이라고 한다.

관리들도 살길을 찾아 방황하고, 치안은 엉망이며,누구하나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도둑이 따로 없고 모두가 도둑이 되게 마련이다.이렇게 서로가 도둑이 되는 세상을 사람들은 난세(亂世)라고 한다. 이러한 난세를당하면 이를 극복하는 영웅이 나타나는데 대개는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나, 힘을얻어 지위가 굳어지면 그 출생을 미화(美化)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후 삼국시대의 혼란기라고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등장하는영웅은 수 없이 많으나 역사에 기록되어 이름을 남기고 있는 세 사람, 후백제를 세운견훤과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 그리고 고려를 창업한 왕건으로 요약해서 이야기를풀어 보자.

이들에 관한 전승된 이야기는 많지만 실제로 기록으로남긴 것은 극히 소략하고, 그 진위를 가리는데는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가감없이 요약해서 여기에 소개코자 하니 그 판단은 독자들께서스스로 해 주시길 바란다.

(2)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918)

삼국사기 열전 10 궁예... 궁예(弓裔)는 신라사람으로성은 김씨고 부친은 제 47대 헌안왕 의정이고, 모친은 헌안왕의 빈어(賓御)이나 그성명을 알지 못한다. 또 혹은 제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그는 5월5일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때 지붕 위에 깨끗한 빛이 있어 긴 무지개와도같이 하늘로 맞닿았다.

이 때 일관이 왕에게 고하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5,5)에나고 나면서부터 이가 낫고 또한 이상한 빛이 나타났으므로 장래 국가에  불리한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이를 기르지 않는 것이 옳을 가 하나이다 라고 하자왕은 이 말을 믿고 곧 중사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이를 죽여버리게 하였다.

사자는 이이를 강보 속에서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져버렸는데 그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아이를 얼른 받아들었으나 잘못하여 손 가락이그 눈에 들어가서 한 쪽 눈이 애꾸눈이 되었다.

이 때 유모는 곧 궁예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온갖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를 양육하였으나, 나이 10여세가 되도록 장난이 심하고 이를고치지 않음으로 유모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자마자 나라에서 버림을 당하여,내가 온갖 어려움을 참고 남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는 그를 깨닫지 못하고 이와 같이 미친 듯장난이 심하니 반드시 사람들이 아는 바되면 당장 나와 너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것이다. 하고 꾸짓자 이에 궁예는 울면서 말하기를 만약 그러하오면 제가 어디론지떠남으로서 어머니에게 화를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떠나 갔다.

궁예는 드디어 세달사(世達寺 지금 흥교사가 그 절이다)에들어가 머리를 갂고 중이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그는 불법의 승률(僧律)에구애 받지 않고, 담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일찍 재를 올리기 위해 가는데 까마귀들이무슨 물건을 물어다 그의 바릿대에 떨어뜨리므로 이를 펴 본적 왕(王)이라는 글자의참서(讖書)가 있음으로 곧 이를 감추어 말하지 않고 속으로 왕이 될 것을 스스로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신라는 날로 쇠약하여 져서.......중략...진성여왕즉위 5년(891) 죽주의 도둑괴수 기훤에게 몸을 맡겼는데 기훤은 오만하여 그를 예로서대하지 않음으로.....몰래 기훤의 부하인 원회, 중훤 등과 결탁하여, 진성여왕 6년(692)북원의 도둑 양길에게 몸을 던졌다.

양길은 선종을 잘 대우하여 모든 정사를 위임하고,드디어는 군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 지방을 경락하게 하였다. 이에 궁예는 군사를거느리고 나가, 치악산 석남사에서 자고 그 다음날 드디어 주천, 나성, 울오, 어진,등을 습격하니 모두 이에 항복하였다.

진성여왕 8년(894) 궁예는 명주로 침입하였는데, 그무리 3천 5백명을 14대로 나누어 김대금, 모근, 장귀평, 장일을 사상으로 하여 군사들과즐거움, 괴로움을 같이하여 탈취함에는 공을 위하고 사를 버림으로 이에 모든 사람들이그를 공경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뒤이어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저족(인제) 생천(양구)부약(춘천) 금성(지금 금성) 철원성(철원) 등을 격파하니 군세가 심히 강성하고 패서(浿西)의적구들로서 대항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에 궁예는 개국하여 임금이라 칭하고 내외관직을설정하였다. 이 때 우리 태조(왕건)는 송악군으로부터 궁예에게 내부하여 마침내철원태수의 벼슬을 받았는데, 진성여왕 9년(896)에는 승령 임강의 두 현을 공취하고신라 효공왕 원년(897)에는 인물현(희양)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궁예는 송악군을 한북의 명군으로서 산수가 특히뛰어난다 하여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공암(양주) 금포(김포) 혈구성(강화) 등을 격파하였다.이 때 양길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충주)등 30 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궁예가그 영지를 넓히고 인구가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그런데 양길이 30여성의경병으로 이를 습격하였으나, 궁예는 이를 미리 알고 먼저 군사를 일으켜 이를 크게격파하였다.

효공왕 3년(899) 2월에 궁예는 송악성을 수리하고우리 태조(왕건)를 정기군감으로 삼아 양주, 견주(양주)를 정벌하고, 그 해 11월에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하였고, 효공왕 4년(900)에 또 우리 태조에게 명령하여 광주(지금廣州), 충주, 당성(남양), 청천(온양), 괴양(괴산) 등을 모두 평정하였는데 이 공로로태조(왕건)에게 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효공왕 5년(901) 궁예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말하기를 지난날에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음으로 옛날의평양 구도는 사냥터가 되어 초목이 우거지게 되었으니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그가 날 때부터 왕실로부터 버림받은 원한이 있는 까닭으로이와 같이 말을 하였다.

궁예는 일찍 남으로 순행(巡幸)하여 흥주(풍기)의부석사에 이르렀을 때, 신라 왕의 벽화가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쳐 없앴는데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

효공왕 8년(904)에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무태라 하였다. 이에 비로소 광평성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는데... 중략.... 그해7월에 청주 사람 1천호를 옮기고 철원성으로 들어가 서울을 정하고, 상주등 30여성을 공취하니 공주장군 홍기가 그 무리를 이끌고 내항하였다.

효공왕 9년(905)에 궁예는 송악으로부터 철원에 들어가서관궐누대를 수리하고 사치를 다하고 연호를 무태로 고쳤다가 다시 성책 원년으로하고, 패서를 13 영으로 분정하였는데, 평양장군 금용이 투항하고, 증성(안변)의적의황의적명귀 등이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자 궁예는 신라를 병합할 뜻을 가지고,국인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고 무릇 신라로부터 내부하는 사람을모조리 죽여 버렸다.

효공왕 15년(911) 연호를 수덕만세, 국호를 태봉(泰封)으로고치고, 태조(왕건)를 금성에 파견하여 정벌하고 이를 나주(羅州)라 하고, 그 공으로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이 때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는금적을 쓰고, 몸에는 방포를 입고, 장자를 청광보살, 계자를 신광보살이라 하여,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하며, 동남동녀로하여금 큰 꽃 모양으로 만든 일솔을 받들어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또 비구승 200 여명에게 명령하여 범패염불을 하면서그 뒤를 따르게 하였고, 스스로 경서 20 여권을 지어 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경사가 아니나, 정좌하여 이를 강론 함으로 중 석총은 말하기를 "이는 모두사설괴담으로 가히 가르칠 것이 아니다"라고하니 궁예가 노하여 철퇴로서 때려죽였다.

신덕왕 2년(913)에 궁예는 태조(왕건)를 파진찬 시중으로삼았고, 다음해에 연호를 정개로 개원하고 태조를 (다시)백강장군으로 삼았다. 신덕왕4년(915) 궁예의 부인 강(康)씨는 왕의 모든 정사에 비법이 많음으로 정색하여 이를간하니 궁예는 이를 싫어하며 말하기를 "너는 다른 사람과 어찌 간음하였느냐?"라고하므로 이에 강씨가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하니 궁예가 말하기를 "내신통력으로 이를 보는 것이다"하고 쇠 방망이를 달구어 그 음부를 찔러 죽이고그에게서 난 두 아들까지 죽여 버렸다.

그 뒤부터 궁예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성을 급히 내어위로는 모든 관료 장군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는사람이 빈번히 있었고, 부양과 철원 사람들은 그 혹독한 폭정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이 보다 먼저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당나라로부터 와서철원시전에 살았는데, 신라 경명왕 2년(918) 백발의 노인이 낡은 의관을 하고 왼손에는바리때(자완)를,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왕창근에게 말하기를 "나의이 거울 사겠는가?"하므로 왕창근은 곧 이것을 쌀과 바꾸어 이를 샀는데, 그노인은 이 쌀을 거리에서 얻어먹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집으로 돌아온 왕창근은 거울을 벽에 걸어놓고 햇볕이 거울을 비치니,... 옛 시와같은 글자가 나타나고...그 내용을 살핀 즉 "상제가 진마(진한과 마한)에 내리시니,먼저는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으리라" "사년 사이에 두 용이 나타나서하나는 몸을 푸른 나무 속에 감추고, 하나는 검은 금 동쪽에 나타냈도다"하였다....왕창근은 이를 궁예에게 알리니...궁예의 포악무도함이 날로 심하고, 관료들은 이를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918) 6월에 장군 홍술(홍유), 백왕(배현경),삼용산(신숭겸), 복초기(복지겸) 등 4명이 비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을 방문하여말하기를 지금 주상은...중략...드디어 태조는 결심하고 문을 나섰다. 이에 제장들은앞에서 부르짓기를 "왕공(왕건)이 의기(義旗)를 들었다"하니 이 때 앞뒤로부터 따라서는 사람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먼저 궁성에 이르러서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며 태조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1만 여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되자 궁예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변복하고, 궁중을 빠져 나와 산림 속으로 도망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부양(평강)의백성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궁예는 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일어나서 경명왕 2년(918)에이르기 까지 무릇 28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다가 멸망되었다.

(3) 후백제 견훤(甄萱/?~936)

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로 하였다. 그 부친 아자개는 농사로서 생활하다가뒤에 가세를 이르켜 장군이 되었다. ...중략...진성여왕 6년(892).....견훤은 몰래딴 마음을 품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가지고 서남주,현의 적도들을 토벌하려떠났는데, 그가 이르는 곳 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한 달 사이에 5천명의무리가 모여들었다.

이에 그는 무진주(광주)를 습취한 뒤 스스로 왕이되었으나 아직도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고 칭하지 않고, 진성여왕으로부터 "신라서남면도통지휘병마제치 특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겸 어사중승 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는벼슬과 식읍 2천호를 받고 있었다.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全州)에 입성하여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에도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자주 충돌하며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 뒤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군사적우위(優位)를 유지했다.

926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경주)을 함락하여친려(親麗)정책을 쓰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한 후, 김부(金傅)를 왕(경순왕)으로세워놓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古昌: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웅진(熊津: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이 금산사(金山寺)에유폐했으나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멸망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왕건이 신검 등을 우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이겨 앓다가얼마 뒤 황산(黃山:충남 논산군 연산면) 불사(佛舍)에서 등창이 나서 죽었다.

견훤에 대한 이야기는 궁예보다도 훨씬 많습니다.그리고 삼국유사에도 그의 전기가 한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앞으로 계속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여기에서 줄이고 다음호에서 계속하겠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