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김해에서 태어난 허인백 야고보는 본래 중류 계급으로 생활이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846년 입교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866년 병인박해 초기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재물에 어두운 그들에게 돈을 주고 간신히 풀려난다. 식솔을 데리고 길을 떠난 그는 언양(彦陽)
산골에 잠시 머물다 울산에 있는 한 교우촌으로 피난해 여기에서 이 베드로, 김 루가를 만나 순교의 길을 예비한다.
충청도 공주
태생인 김종륜 루가는 어려서 입교해 신앙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다. 박해로 충청도 일대가 소란해지자 길을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의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금 울산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 대재 마을의 회장이었던 이양등 베드로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박해를
피해 멀리 경상도로 내려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울산 대재 공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꿀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며 전교에 힘쓰던 그는 다른 두
사람을 만난 후 또다시 박해를 피해 먼 길을 떠났다. 여러 날 끝에 경주 산내면 산주의 소래동 단수골에 있는 석굴을 발견하고 이를 천혜의
피난처로 삼아 세 가족은 모두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라로부터 더욱 혹독한 체포령이 내려져 마침내
1868년 이들은 포졸들의 손에 붙잡히고 만다.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이들은 즉시 영장(營將)의 심문을 받는다. 이들 3인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경주 진영에서 병마 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의 80리 길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큰 칼을 목에 차고 돌과 자갈, 가시밭길을 걸어 이틀 만에 도착한 울산 장대에서 그들은 1868년 목을 떨군다.
복자성당의 세
순교자와 연관이 있는 순교자로 살티성지에 모셔져 있는 김영제(베드로)가 있다. 김영제(베드로)는 박해로 고문을 받다가 온몸의 뼈가 으스러져
불구의 몸이 되어 버렸다. 나라의 경축적인 일로 특사로 풀려나온 김영제는 불구의 몸을 이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열절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결국 고문의 휴유증으로 온몸에 장독이 퍼져 순교한 김영제는 복자성당의 세분과 경주 진영에서 만나 순교를 함께 약속하였지만 세분은 울산장대벌로
보내져 헤어졌다.
18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며,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기 위해서 각 교구별로 기념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복자 성당도 착공 5년 만인 1970년 1월 1일 자로 성전이 준공되어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1970년 7월 5일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을 축성하고 1973년 10월 19일에 울산에서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가, 이양등 베드로 3위의 유해를 감천리
천주교회 묘지에서 복자성당으로 이전하였다. 이렇게 해서 순교자 현양 기념성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촛불
푸른 제단에다 (대구 신천동 복자성당에서) <김영수> ▒
이제는 못 다한
사랑
해야 할 시간입니까
이곳 성당의 낮은 뜰에서
하늘 푸르게 물 들이는
죽음들을 봅니다
수많은 고통의
강나루들을 건너 와
촛불 푸른
제단에다
가슴들 꺼내 바치는
흰 구름들
나는 정녕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선
것입니까
버려야 얻는다는
가혹한 진리
성당 종탑 위로
깨어서 흐르는 바람
종은
흔들리지 않아도
종소리는 맑은
피 가득 흘립니다
나도 이제는
온 몸으로
못 다한 사랑 해야
할 시간입니까
못 다한 노래
해야 할 시간입니까
해는 붉게
붉게 기울고 있습니다
■
순교자◆ 순교자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 허인백(許仁伯)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5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야고보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는 물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 데도 노력하였다. 또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야고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다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허인백 야고보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김종륜(루가)을 만나 함께 신앙 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는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성녀 바르바라의 순교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고 당부하였다.
경주 진영에 이르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내 그의 몸에서는 피가 나고
다리뼈가 드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어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나가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 순교자 김종륜 루가(1819-1868년) 김종륜(金宗倫) 루가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루가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루가는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허인백(야고보)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루가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종륜 루가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루가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나가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 순교자 이양등 베드로 ( ?
-1868년)이양등(李陽登)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래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베드로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야고보)과 김종륜(루가)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베드로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양등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나가 허인백?김종륜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이었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서로 형제애를 가지고 신앙생활에 매진할 수 있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첫댓글 위의 복자성당은 제가 10년 전에 그 곳에서 입교하여 세례를 받고, 지금도 다니는 성당입니다. 순교자 세분을 모시고 있는데 묘역을 위시하여 성당내 전체가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순교자 세분께서 위의 내용에는 참수형을 받았다고 하나 다른 자료에는 군문효수형을 받았다고 되어있기도 합니다. 회원님께서도 언제 시간이 나시면 들려서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 가셔도 좋을 것입니다
제 집사람도 복자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그 곳에 오래 다녔죠. 결혼하고 크리스마스 이브나 큰 행사 때는 저도 따라 가곤 했답니다. 지금이야 두산성당에 다니지만요. 대구에 성당이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 몇 곳 있지요. 저는 가끔 범어성당에 가 앉아 있고 한답니다. 예전 효성여고 옆의 성모당은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길손님.
지금도 성모당의 벤취나 풀밭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