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의 문호(門戶)이다.
동쪽으로는 서구ㆍ 북구, 서쪽으로는 함평군, 남쪽으로는 나주시와 남구, 북쪽으로는 장성군과 접하고 있어, 항공교통(航空交通), 철도교통(鐵道交通)과 고속도로 및 국도 등의 육상교통(陸上交通)이 발달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광산구(光山區)는 동부(東部)에는 비옥한 평야지를 흐르는 극락강을 경계로 광주시의 서구, 북구와 인접하고 남부(南部)는 황룡강(黃龍江), 극락강(極
樂江) 유역의 광활한 평야가 나주평야(羅州平野)에 이어지면서 나주시 및 남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부(北部)는 소백산맥(小白山脈)과 노령산맥(蘆嶺山脈)이 뻗어있어 산악 및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장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부(西部)는 비교적 완만한 산악지대나 구릉지와 함께 함평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인근의 3구(區) 1시(市) 2군(郡)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송정시, 광산군이 광주직할시 광산구로 편입, 광산구 신설 자치구 승격 3개 행정동명 개칭(원동-송정1동, 중앙동-송정2동, 호남동-송정3동) 2개 법정동명 개칭(도촌동-도천동, 도촌동-도금동) 1개 법정동명 개칭(오산동-오선동) 하남출장소를 하남출장소와 월곡동으로 분동 월곡동을 월곡1동, 월곡2동으로 분동 서창출장소, 대촌출장소가 각각 서구와 남구에 편입 비아 출장소를 비아동, 신가동으로 분동, 첨단지소를 설치(10개동, 7개출장소) 출장소를 동으로 전환, 송정 2,3동을 송정2동으로 용운,소촌동을 어룡동으로 통폐합(16개동) 비아동을 비아동, 첨단동으로 분동(17개동) 첨단동을 첨단1동, 첨단2동으로
광산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왕자 김흥광(金興光)이다. 신라 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각 지방 호족들이 자웅을 겨룰 때 신라가 망할 것을 예견한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 서일동에 피란 은거하였다.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그가 신라 왕자였다는 사실만 있을 뿐 신라 어느 왕의 아들이냐 하는 점은 알 수 없다. 헌강왕의 셋째 아들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헌강왕은 아들이 하나뿐이었다는 기록이 나오자 신무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가 지금은 아예 상계(上系)를 빼버리고 다만 신라의 왕자라고만 족보에 적고 있다. 김흥광이 신라 국가 사직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경주를 떠나 지금의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지냈는데 후에 삼한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그에게 광산부원군에 봉하자 후손들이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조에 후손 가운데 8명의 평장사(정2품)가 배출되자 세상 사람들이 그 곳을 평장동이라 하여 자연스럽게 마을 이름이 되었다. 평장동이 비봉포란형, 즉 날던 봉황새가 보금자리에 들어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대명당으로 알려지면서 부터 원근 각처에서 지사들은 물론 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명소가 되고 있다.
광산 김씨 시조 김흥광의 단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있으며 이곳을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장성 인터체인지를 나와 24번 국도를 타고 담양으로 가던가, 88올림픽고속도로 담양에서 나와 24번 도로를 타고 장성으로 가다보면 대전면소재지 사거리 중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여기서 마을 뒤로 우뚝 솟은 병풍산(685.2m)를 바라보고 들어가면 평장리가 나오고 재실이 보인다. 재실 뒤에 단이 있다. 김흥광의 묘가 실전되어 알 수 없기 때문에 처음 자리를 잡고 살았던 이곳에 단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이 보기 드문 명당이고 보면 실제 유골도 이곳에 묻혀있을 거라고 보는 것이 후손들이나 평수연구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내장산과 백양산, 대각산을 지난 호남정맥이 담양 추월산으로 넘어가기 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에서 한 맥을 남으로 뻗어 담양 월산면 광암리와 월평리를 돌아 바심재를 넘고, 용구산(769.5m), 병풍산(822.2m), 그리고 대치를 지나 병풍산(685.2m)을 만들었다. 병풍산에서 출발한 산맥은 진원면 불태산(602.4m)으로 가기 전 중간에 단아한 주산을 세운 다음 이 중출맥으로 내려온 용의 용진처에 시조 김흥광의 단이 있다. 불태산에서 계속 내려간 용은 장성 주산을 만들고, 광주 광산구를 이루는 산맥이다.
1). 고려시대의 광산김씨
고려시대에 많은 현신이 배출하였는데 3세 길(佶)이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되고. 4세 준(峻). 5세 책(策). 6세 정준(廷俊) 7세 양감(良鑑). 8세 약온(若溫)광 의원(義元)등이 대대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워 평장사 벼슬에 올랐다.
특히 7세 문안공(文安公) 양감(良鑑)은 송나라에 가서 태묘와 태학을 본뜨고, 경과 전을 가지고 돌아와 성현의학을 닦고, 공자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니 우리나라에 문묘를 시작한 연원이 되었고, 동방 이학의 종사로서 숭앙을 받고 있으며, 고려시대 광산김씨가 낳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그 벼슬이 지금의 국무총리와 같은 문하시중을 지낸 8세 약온(若溫)과 평장사를 지냈으며 충정공에 추봉된 의원(義元)은 형제간이다.
14세 감찰어사 수(須)는 삼별초의 난때 제주도에서 순절하시고 아우 14세 문숙공 주정(周鼎)은 여원연합군이 편성되었을때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로 부원수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출장입상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하였다. 문숙공의 아들 심(深)은 원종(元宗)때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都僉議) 우정승을 지냈으며, 시호를 충숙공이라 하였다.충숙공의 아우 유(流)는 문하시중이며, 15세 태현(台鉉)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수문관 대제학과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문정공에 추봉되었다.
문정공의 네 아들이 모두 뛰어났으나, 둘째와 세째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효자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둘째 광철(光鐵)은 벼슬이 밀직사사에 이르고 세째인 광재(光載)는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뒷날 형제가 함께 문자 시호를 받으니 삼부자가 시호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14세 양간공은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였으며, 15세 정경공휘사원(貞景公諱士元)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참지정사공(參知政事公) 사형(士亨)도 유명하고, 16세 장영공(章榮公)은 휘가 '진'이시며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16세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석견'은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냈으며, 16세 삼사좌사공(三司左使公) 승사(承嗣)는 병마도원수로 원나라에 들어가 토적 이홍성(李弘成)을 토평하였다.
나. 조선조 시대의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조선조 초에는 불사이군의 정신과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회의로 조정에 들어가는 것을 꺼렸지만 뒤늦게나마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바치는데 명분을 찾아서 관직을 받았다.
사온직장공파의 문경공(文敬公) 예몽(禮蒙)은 세종때 예조판서를 지내고, 자암선생(自菴先生) 문의공(文懿公) 구(絿)는 기묘명현(己卯明賢)으로 유명하고, 세종때 좌의정 국광(國光)과 좌참찬 겸광(謙光),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큰 백겸(伯謙)등은 광산 김문에 빛을 남긴 분들이다.
임진, 정유의 양대왜란에는 만수(萬壽) 4형제와 만수의 아들, 그리고 의병장 덕령 장군이 분전하여 왜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에는 수남(秀男), 득남(得男), 익겸(益兼)이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중기야말로 학행과 절의와 충효등에 뛰어난 현조가 많이 나와서 광김의 문중을 빛내줌으로서 도덕과 예학의 종가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 후기에는 세도정치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던 광김은 정부의 요직에 있던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개호기의 주역이 못되었으나, 매국적 행동을 한 분이 없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광산 김씨하면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가문이다.
지금도 흔히 광김 특히 사계(沙溪) 자손이라면 맞선도 보지 않고 딸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우리 나라 역사상 학문과 도덕이 깊어 온 백성이 나라의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 문묘, 즉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된 인물은 모두 18명이다.
한 가문에 2명이 배향 되기는 은진송씨의 송시열, 송준길 선생과 광산김씨의 김장생, 김집 선생 두 가문이다. 더욱이 부자가 같이 문묘에 배향되기는 광산김씨 뿐이다. 광산김씨는 조선조에 대제학 7명을 배출했는데 이들 모두가 사계 후손들이다.
대제학 7명을 낳은 가문은 전주이씨와 연안이씨가 있으나 한 사람의 자손에서 7명이 나온 예는 광산 김씨가 유일하다.광김은 조선조에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제19대 숙종의 비 인경왕후,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을 배출했으며, 문과 급제자는 253명에 이른다.
광산 김씨가 명문으로 나기까지는 사계 선생 4대조인 김극뉴(1436-1496) 묘가 말명당, 천마시풍, 용마등공 등으로 불리는 천하명당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88고속도로 순창나들목에서 전주로 가는 27번 국도로 진입하여 10 여km를 가면 21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다. 여기서 조금더 직진하면 좌측에는 인계면사무소가 나오고 우측에는 마흘리로 가는 길이 표지판과 함께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면 우측으로는 용마초등학교가 보이고, 좌측 길로 들어서면 마흘리(馬屹里)다. 이 마을 뒤에는 마치 말머리와 말의 등처럼 생긴 두 개의 금성체의 산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우뚝 솟아 있으며, 두 개의 봉우리 중 뒤의 약간 더 높은 말의 등처럼 생긴 봉우리를 큰 수리봉이라 부르고, 조금 낮은 앞의 말머리처럼 생긴 봉우리를 작은 수리봉이라 부르는 용마산으로 호남정맥의 강천산(583.7m)에서 동쪽으로 분맥한 한 지맥이 무리산(557.5m)과 순창에서 임실 가는 27번 도로 갈재를 지나 장덕산(368.4m)을 일으키고, 장덕산에서 다시 분맥한 한 지맥이 크게 과협한 다음 일으킨 산이다.
용마산 아래에 있는 김극뉴의 묘 아래쪽으로 구릉이 형성되어 왼쪽에서 마을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리고 있는데, 이 구릉에는 김희(金僖)묘, 선생의 둘째 아들인 김소윤(金昭胤)묘, 증손 김개(金鎧)묘, 맨 아래에는 선생의 사위와 딸의 합장묘인 동래정씨 정광좌(鄭光佐) 묘 등이 위로부터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김극뉴(金克忸,1436-1496)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간원의 대사간을 역임. 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의 장남이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가 좌의정 시절 8개월간 혼자 의정부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아들이 태어나자 ‘너라도 자라서는 이런 부끄러움을 꼭 이겨내라’는 뜻에서 극뉴(克忸)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그런데 선생의 아버지가 좌의정을 한 것은 성종대인 1570년대로 이 때 선생은 이미 30세가 넘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다. 아마 초명은 다른 이름이었다가 이 이름으로 개명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