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붓을 놓지 않을테요
추사 김정희가 가장 사랑한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展
화가로 최고 경지 올랐지만 외로운 말년, 모란 그려 팔아 '그림으로 돈 벌지 않는다' 문인화가 불문율 과감히 깨
1839년, 전남 진도에서 상경한 만 31세의 무명 화가가 지금 서울 통의동에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청년의 이름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 1893). 체계적인 미술 교육도 받은 적 없고, 고향 바깥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필력을 알린 적도 없는 시골뜨기였다. 추사가 실력 하나 보고 소치를 문하에 거두면서, 붓 하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천재 소치의 경력이 시작됐다.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내년 2월 1일까지 《소치 이백 년, 운림 이만 리》전(展)이 열리고 있다. 소치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과 더불어 19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이번 전시에는 소치의 묵화(墨畵) 70여 점이 걸린다. 소치가 세운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어간 허씨 집안 여섯 후손의 작품 40여 점도 함께다. 허형(許瀅)·허백련(許百鍊)·허건(許楗)·허림(許林)·허문(許文)·허진(許鎭) 등이다. 이동국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는 "소치는 추사가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문인화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라고 했다. 추사는 "난을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다"고 했다. 추사는 정치적 부침을 함께 한 엘리트 제자들을 제치고 시골에서 올라온 소치에게 사랑을 쏟았다. 소치 면전에서는 "자네는 천리 길에 ㄴ겨우 세 걸음만 옮겨 놓은 것과 같네" 하고 엄격한 얼굴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압록강 동쪽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극찬했다.
소치는 추사의 후의에 온몸으로 답했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갈 때 따라가서 집중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추사의 귀양살이가 끝난 뒤에는 추사의 날개 밑에 깃들어궁에 출입하며 헌종(재위 1834~1849)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헌종도 죽고, 추사도 죽고, 소치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했던 장남마저 요절했다. 외로운 늙은이가 된 소치는 일흔이 넘도록 전국을 떠돌며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숱하게 그렸다. 별명이 '허모란(許牡丹)'이었다고 한다. '미술은 어디까지나 여기(餘技)이며 그림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는 문인화가들의 불문율을 뒤로 한 셈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소치의 작품 〈산수〉, 〈일속산방도〉, 〈모란〉이 그의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산수〉는 선비들의 관념적인 이상향을 그린 전형적인 문인화이고, 〈일속산방도〉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살던 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실경(實景) 산수화이며, 〈모란〉은 더 설명할 필요 없이, 붓 자국마다 감칠맛이 도는 꽃 그림이다.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태작이 많다"고 소치를 마땅찮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도 관람객 눈앞에 활짝 피어 오른 모란은 탐스럽기 그지없다. 월요일은 휴관, 어른 5000원. (02)580-1284 . [자료출처]http://cafe.daum.net/moghangps/JSck/627
소치 허련의〈모란〉. 그는 외딴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추사에게 발탁돼 왕의 마 음을 사로잡는 화가가 됐다. 스승이 숨지고 스승의 세력마저 스러진 뒤 소치는 전국 을 방랑하며 숱하게 모란을 그렸다. 부유한 중인들이 그의 모란꽃 그림을 다투어 샀다(왼쪽), 소치 허련의〈산수. 조선조 문인화가들의 마음에 깃든 관념적인 이상향을 그린 그림이다(오른쪽). /서울서예박물관 제공
<대폭산수>일제강점기의 대수장가 박창훈이 1941년 경매회에 출품한 '대폭산수' 4점 중 하나로 호방하고 활달한 허련 산수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왼) 북송(北宋) 소식의 해남도 유배 모습을 빌어 표현하였다.(오른)
추사 김정희가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 한 그림이 없다”〔鴨水以東 無此作矣〕고 극찬했던 애제자 허련은 19세기 회화사의 한 주류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화가로는 드물게 <소치 실록> 등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치밀하게 기록한 ‘19세기 조선 화단의 증언자’이다.
허련은 조선 말기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추사의 사의적(寫意的, 외형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뜻을 그리는)인 남종화적 경향을 자신의 고향인 호남지방에 전수한 ‘조선 남종화의 마지막 계승자’로 불린다.
허련은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남종화에 전념, 화맥이 넷째 아들 미산 허형(1862~1938)을 시작으로 손자인 남농 허건(1908~1987), 족손인 의재 허백련(1891~1977) 등 5대에 걸쳐 이어졌으며, 이들이 중심을 이룬 호남화파는 한국 근ㆍ현대 전통회화사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허련은 당대 최고의 학승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역시 당대 최고의 서화가로 불린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시며 이름난 화가로 입신했다.
청년 허련은 초의선사 문하에서 3년여 간 꾸준히 시학(詩學) 불경, 그림과 글씨 등을 연마해 그림에 대한 인식과 기초적인 화법은 물론 세계관을 정립했다. 28세 때 겸재 정선,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三齋)’ 중 한명으로 불렸던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접하고 허련은 “비로소 그림 그리는 데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감탄하며 이를 교과서로 삼았다.
허련이 평생의 스승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은 32세 때인 1839년 봄이었다. 초의선사가 윤두서의 작품을 모사한 허련의 그림을 보여주자, 김정희는 그림 솜씨를 칭찬하며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권유했다. 이것이 허련의 첫 상경길이 되었다.
남종화 '묵모란' (위)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유교적 소양을 닦고 경전을 읽으며 글을 쓰고 짓는 일을 일상사로 여겼던 문인적 사유체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1866년 작.(아래)
허련은 그림으로 쌓은 명성을 토대로 당대 최고의 명망가부터 지방 유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교유했다. 위로는 헌종을 배알해 임금이 건넨 붓과 벼루로 그림을 그렸고, 흥선대원군, 고위 관료 권돈인, 무인 출신 신관호, 윤두서의 후손인 윤종민, 정약용의 아들 정약연ㆍ정학우, 당대 최고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문중의 좌장 김흥근, 난초 그림을 잘 그려 화가로도 유명한 민영익 등과도 묵연을 나누었다. 임금이 지방 출신의 한미한 화가를 가까이 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로 당시 허련의 명성이 얼마나 드높았던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허련이 이처럼 명사들과의 교유에 집착한 것은 문화적 소외 의식과 신분 상승에의 갈망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중앙 문화계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했던 허련은 명사들과의 교유 내역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자서전인 <몽연록-소치실록>과 <속연록-소치실록>은 그러한 기록의 결정체다.
이 책은 유년기에서 노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다사다난했던 내용을 기록한 전통시대 화가의 보기 드문 자서전으로 심지어 임금이 수라상을 드는 장면까지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당시 조선 사회와 문화계의 단면을 생생히 보여준다. 화가이면서도 당대의 문화계 풍경을 치밀하게 기록한 허련은 ‘19세기 조선 화단의 증언자’라 부를 만하다.
추사 김정희에게 전수받은 남종화에 평생을 매진했던 허련은 스승을 극진히 모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정희가 9년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3번이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도합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승을 모셨다. 유배지에서 스승을 모시며 그림과 글씨를 연마한 허련의 실력은 날로 늘었다. 이는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다음의 글에서 확인된다.
「허치(許癡)는 날마다 곁에 있어 고화 명첩(古畵 名帖)을 많이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지난 겨울에 비하면 또 몇 격(格)이 자랐습니다. 스님으로 하여금 참증(參證)하지 못하게 된 것이 한(恨)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실제 모습을 모방하는 형사(形似)에 그치지 않고 가슴 속의 이상과 의지를 반영하는 사의적(寫意的) 회화를 그릴 것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정희가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으로 대변되는 중국 남종화를 모범으로 삼아 18세기 이후 조선에 유행했던 진경산수화를 비판하였다면, 허련은 이러한 김정희의 회화관을 받들어 남종화에 일생을 바쳤고 이를 고향인 호남 지방에 전파했다.
때문에 그가 고향 진도에 건축한 운림산방은 오늘날 호남 남종화의 성지로 불린다. 허련이 거처했던 화실 이름에서 비롯된 운림산방의 화맥은 넷째 아들 미산 허형(1862~1938)을 시작으로 손자인 남농 허건(1908~1987), 족손인 의재 허백련(1891~1977) 등 5대에 걸쳐 이어졌으며, 이들이 중심을 이룬 호남화파는 한국 근ㆍ현대 전통회화사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치 허련이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사뭇 각별하다.
허련 연구 전문가인 김상엽 박사는 허련의 회화활동과 작품을 통해 19세기를 보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우리 역사에서 18세기가 ‘조선시대의 르네상스’, ‘영ㆍ정조 문예부흥기’ 등 화려한 수사로 예찬되어 왔던 시대인 반면 19세기는 화려한 18세기의 퇴화된 시대 정도로 폄하되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허련이 활동한 19세기는 상층문화의 저변화, 서화의 보편화를 이룬 시기로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양상을 허련은 그의 ???서화제작 방식, 작품 경향 등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김 박사는 허련이 말년에 방랑에 가까운 주유를 하며 주변의 요구에 따라 거칠게 대강 그려준 묵모란 등의 그림은 당시 사회가 희구한 회화작품 수집욕구의 반영이고 이에 대한 허련의 대응이야말로 당시 서화제작 방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한다. 허련의 회화활동과 무수한 기록은 시대적 변화상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의 화가 가운데 지방 출신으로서 중앙 화단에 진출하고 또 중앙 화단의 인정을 받은 후 지방 곧 자신의 고향에 영향을 준 화가는 허련이 유일하다. 또한 가장 많은 그림을 남기고 가장 많은 여행과 가장 많은 기록, 가장 폭넓은 인적 교류를 한 화가로 평가할 만하다.
김상엽 박사는 “19세기 회화사는 김정희류의 문인화풍의 흐름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허련의 한 세대 뒤인 장승업 류의 장식적인 화원화풍이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며 “허련은 당시 화단의 주류를 이루면서도 사회의 변화상을 몸으로 보여준 독특한 위상을 가진 화가”라고 평했다.
헌종이 허련에게 직접 하사한 [시법입문]과 헌종의 도장. 임금이 일개 신하에게 이런 책을 준다는 는 사실 자체가 전례가 없다.(위·왼)소치실록(위·오른)
나열하는 방식을 넘어서 그림을 보는 이와 정면으로 응시하는 듯 한 구도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청완도(그릇류 그림) 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허련이 노년기에 비슷비슷한 작품을 양산하기도 했지만 이렇듯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아래·왼)
<채씨효행도> 우리나라 그림 가운데 최초로 표현된'도깨비 그림'이다. 지금까지 도깨비라면 대 개 뿔나고 험악하게 생긴 일본식 도깨비인'오니'로 이해해 왔는데 이것은 우리 전통과는 다른 곡된 이해이다. 우리나라의 도깨비는 괴물의 형상이 아닌'도깨비불'을 의미하였다. <채씨효행도>의'귀화전도'의 도깨비, 도깨비불 그림은 최초로 그려진 도깨비 형상이라는 점에서 미술사 및 민속학적 중요성이 크다.(아래·오른)
■ '소치 허련'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 엮어 허련이 남긴 각종 기록류, 주변 인물과의 일화를 통해 허련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 엮었다.작가의 대표작 감상과 해설에 그치기 쉬운 여타 전통예술서와 달리, 이 책은 오원 장승업(1843~1897)과 더불어 ‘조선 말기 화단의 두 거장’으로 불렸던 허련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되살려낸다.
때문에 명성 높은 화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스승에겐 충실한 제자였으나 가족에겐 무심했고 심지어 중혼重婚도 했으며 능력에 따라 자식을 편애했던 허련의 인간적 일면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따론 한량처럼, 때론 구도자처럼 남종화에 전념했던 19세기 화가 허련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김상엽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예술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술연구소 연구원, 영산대학교 겸임교수, 고려대ㆍ연세대ㆍ이화여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 인천대학교 강사로 있다.
한국미술사학회 정회원, 사단법인 유도회 이사, 소치연구회 간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소치 허련>(2002), <경매된 서화-일제시대 경매도록 수록의 고서화>(공편, 2005), <삼국지를 보다-인문과 그림으로 본 한·중·일 삼국지의 세계>(편저, 2005) 가 있다.
■ '남종화의 거장 소치 200년' 기획 특별전이 있었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소치 허련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예술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기획특별전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200년’을 7월 8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했다.
이번 특별전에는 150여점에 이르는 소치선생의 서화 뿐 아니라 당대 명사들의 유묵(遺墨)이 처음 공개된다. 또 조희룡, 이한철, 전기, 유재소, 박인석 등 동시대를 살며 예술적 교감을 나눈 화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19세기 우리나라 예술계를 거의 온전하게 재현되었다. 전시구성은 제1부 가계와 생애, 제2부 학연, 제3부 묵연, 제4부 연운공양(煙雲供養)으로 나눠 구성했다. 1부는 허련의 가계와 생애, 주요 활동 등을 각종 기록과 자료 등을 살피도록 했다. 2부는 허련의 인생과 작화(作畵)에 절대적인 도움을 준 두 스승 초의선사(1786-1866)와 추사 김정희(1786-1856)와의 각별한 인연을 조명했다. 3부는 헌종(재위 1834-1849)을 비롯 권돈인, 신관호, 민영익 등 허련을 후원한 왕공사대부들의 작품과 함께 조희룡, 이한철, 전기, 유재소, 박인석 등 동시대를 살며 허련과 예술적 교감을 나눈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4부는 허련의 예술세계를 다룬 공간으로, 남종산수화를 비롯하여 사군자, 모란, 글씨 등 다양한 작품을 전시했다.
소치 허련의 작품 세계
소치 허련(小癡 許鍊, 허유라고도 함 )
추사의 초상화
초옥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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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석 같은 친구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