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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바다 카약 투어링의 백미 성산일출봉 동벽. 해안 절벽 위로 가지런히 솟은 바위들이 왕관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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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바다는 불안함의 상징이다. 배부른 돌담도 마찬가지.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평화는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오히려 약간의 파도가 있는 바다는 긴장감과 함께 사람을 흥분케 하는 재주가 있다. 거울같이 잔잔한 바다의 편안함 보다 너울거리는 파도가 주는 재미가 훨씬 크다.
바다 카약은 강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묘미가 있다. 일관된 방향성을 지닌 강물과 달리 바다는 많은 변수가 상존한다. 특히 조류의 경우, 예측은 물론 대처도 쉽지 않아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해변의 파도 역시 카약의 안정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소다. 게다가 바다 투어링은 강에 비해 장거리 이동인 경우가 많아 체력 소모도 크다. 바다 카약은 이런 모든 변수에 대비할 수 있어야 즐겁고 안전하다.
본격적인 여름을 맞아 제주도 바다 카약 투어링에 도전했다. 이번 제주도 투어링에는 후지타카약의 조구룡 사장과 동호회의 이호석씨가 동행해 도움을 줬다. 제주도에서 사용한 카약은 보관과 이동이 용이한 조립식 제품을 썼다. 분해하면 배낭처럼 지고 다닐 수 있고, 항공편에 위탁수하물로 부칠 수도 있어 원정 투어링에는 안성맞춤이다.
장마전선이 북상한다는 예보를 들으며 제주로 향했다. 혹시 잠시 비구름이 몰려간 사이 바다가 잔잔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가슴이 설렌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는 사이 잠시 내려다본 바다는 잔잔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제주공항의 활주로는 비에 젖어 있었다. 역시 장마철 제주도 날씨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투명한 크리스털처럼 빛난 비양도 앞바다
먼 바다에서 파도가 몰려온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협재 해수욕장 갯바위에서 카약을 조립했다. 목포의 임연택씨까지 합류해 일행은 모두 다섯으로 늘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프레임을 조립하고, 카약의 외피를 씌운 뒤 공기를 주입했다. 1인승 카약 3대와 2인승 한 대를 완성하는 데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진땀을 흘리며 카약 조립에 몰입해 있는 사이 구름 사이로 간간히 햇살이 쏟아진다.
바다 건너 아담하게 솟아 있는 비양도(飛揚島)가 오늘 우리의 목표다. ‘하늘에서 날아온 별’이란 이름의 1,000년 전 화산폭발로 생성된 섬. 신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려 목종 5년(1002년) 6월,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았다. 산에 네 개의 구멍이 터지고 붉은 물이 5일간 솟구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바다에서 솟았다는 산이 바로 지금의 비양도다. 제주도에서 가장 늦게 태어난 막내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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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양도 해안의 등대 옆에서 유유히 투어링 중인 취재팀 현무암에 부딪힌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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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섬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km. 언뜻 보기에는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카약을 앞세우고 곧바로 비양도를 향해 돌진했다. 제법 거친 파도가 카약을 덮치며 위협한다. 물이 얕은 해변에서 카약에 올라 패들링으로 전진해 나아갔다. 날렵한 모습의 카약 넉 대는 순식간에 바다로 빠져나간다.
배를 흔들며 괴롭히던 삼각파도는 너울로 변했다.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호석씨의 배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기를 반복한다. 바로 옆에 있는 카약도 파도의 구릉을 타고 오르내린다. 섬 사이의 해협이라 그런지 동쪽으로 흐르는 희미한 조류가 느껴졌다. 목표한 방향으로 똑바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바다에서 조류를 만나면 거스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타는 것이 쉽습니다. 당황해서 물살을 헤치려고 급하게 패들링을 하면 체력이 금방 바닥납니다. 조금 우회하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여유 있게 루트를 그리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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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협재해수욕장에서 파도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조구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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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구룡 사장의 말대로 약간씩 밀려가는 조류에 배를 맡기고 동쪽으로 향했다. 비양도 부근의 바다는 ‘절대 투명함’ 그 자체다. 햇빛이 쏟아질 때는 바닷속 돌멩이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맑다. 섬 동쪽 해안을 지나갈 때는 해초 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떼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제주도 내에서도 가장 물이 맑다는 곳이다.
비양도 북쪽 해안으로 돌아가니 해녀들의 긴 휘파람 소리가 바람을 타고 있다. 수심도 그리 깊지 않은지 곳곳에 피어나는 물보라가 긴장감을 더해준다. 그래도 배를 흔들 정도로 높은 파도는 치지 않아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섬 뒤로 제주도의 웅장한 모습이 장벽처럼 둘러쳤다. 이제 제주도가 너무 멀어 보인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2인승을 몰던 조 사장이 조금 지친 기색이다. 한 주 사이 벌써 세 번째 투어링이라니 철인이 아니고서야 견딜 수 있겠는가. 비양도에 상륙이다. 바닷가의 날카로운 현무암을 피해 조심스럽게 접안했다. 아예 배에서 내려 카약을 조심스럽게 들어 옮겼다. 이렇게 날카로운 바위에 닿으면 외피가 쉽게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녀 할머니가 유모차에 성게를 담은 망태기를 싣고 지나간다. 해안에 가지런히 놓인 카약을 잠시 쳐다보던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몸을 돌려 갈 길을 재촉했다. 어쩌면 해녀 할머니들과 우리는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사이일지 모른다. 그들에게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지만 우리는 레저를 즐기는 장소다. 같은 곳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곳이 되기도 한다.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바다로 나왔다. 노란 색 등대를 돌아 건너편에 보이는 해수욕장으로 방향을 잡는다. 날씨는 좋아졌지만 너울이 더 심해졌다. 하늘의 날씨와 달리 바다 상황은 짐작하기 어렵다. 파고, 수온, 조류 등 너무도 생소한 변수에 대한 적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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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양도 앞 바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기자와 이호석씨(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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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를 한 바퀴 돌아 협재 해수욕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3시간 남짓. GPS에 찍힌 궤적을 보니 12km가 약간 넘는다. 햇볕이 좋았다면 크리스탈처럼 아름다운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웠다. 그나마 구름이 낀 날은 더위가 덜하다는 것이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