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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미명아래 지평이 눈을 떴을 때 서 우희는 이미 곁에 없었다.
의복을 걸치고 새벽 걸음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무리가 있었다.
주인이 나가 물으매 어제 왔던 장사치와 일련의 무리가 몰려든 것이었다.
기어코 당연히 포졸들이리라.
아무리 아니길 바랐어도 결국은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맞닥뜨린 것이었다. 정황을 눈치 챈 주인이 이 핑계 저 핑계로 잠시나마 시간을 끌었다.
지평이 서둘러 작업실 문을 열고나서니, 그 앞에 놀란 표정의 우희가 서 있었다. 이미 무엇인가 굳게 각오한 듯, 서 우희는 지평의 손을 잡아끌어 안 채 뒤란의 감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오라버니. 감나무를 타고 담장을 넘어 가세요. 아직은 새벽 미명이니 사람들 이목을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강나루에 가시면 평소 제 오라비를 따르던 어부 덕쇠 오라비의 고기잡이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마음 놓으시고 어부로 가장하신 후, 벽란도 포구를 떠나세요. 아셨죠? 서두르세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어서가세요.”
눈물로 범벅이 된 우희는 지평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감나무를 잡고 오르려는 지평의 옷깃 사이로 작은 동전꾸러미도 넣어주었다. 감나무를 타고 올라 담장을 넘어 바닥에 내려섰을 때, 더는 참지 못하던 서 우희의 절규가 담장 너머로까지 들려왔다.
“오라버니. 어디를 가시던지 저를...... 이.... 우희를 잊지는 말아주세요. 이제 당장 죽는다 해도 우희는 오라버니만을 가슴에 담고 죽겠습니다. 혹여, 제가 이 운명에서 도망칠 수 있다면 충청 땅 충주로 가겠습니다. 봉계 마을 당산나무 아래 문 씨가 모여 사는데 제 외가가 거기 이옵니다. 여하한 경우라도 혹여 이 고비를 넘길 수만 있다면, 이 우희는 당산나무 아래서 오라버니를 기다리겠습니다. 언제까지고 또 언제까지고 오라버니 오시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라버니. 들으셨습니까? 하시면 이제 됐사옵니다. 어서 서둘러 가세요. 하오나...... 하오나...... 오라버니. 정녕 이년 우희의 당부를 듣기는 하셨는지요?”
“이 오라비가 모두 들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꼭 찾아가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북받쳐 오르듯 터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우희는 감나무 아래 주저앉아 지평의 발소리가 멀리 사라진 한참 후까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평의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되돌아보니 벌써 십 삼년이 지난 일이었다.
우희가 말한 대로 덕쇠의 고깃배를 얻어 타고 사지에서 겨우 빠져나와 김포 자락의 한적한 수풀 속에 내려 덕쇠를 돌려보낸 후에야 지평은 자신의 봇짐 속에 단소가 하나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유난히 까만빛을 띤 고풍스런 단소였다.
바로 하루 전까지 그녀의 아비가 온 정성을 들여 딸을 위해 만들었던 바로 그 단소였다.
그런데 하필, 열세 살 사내가 지평의 아들이라며 아비를 찾는다?
실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연이 있겠는가?
‘무엇인가 착오가 있다는 것인데, 우연 치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우희는 죽었다.
지평이 벽란도를 다시 찾았을 때, 우희의 아비는 지평을 데리고 벽란도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의 딸의 무덤 앞에서 서럽게 울지 않았던가?
우희를 버려두고 담장을 넘은지 두 해가 더 지나고, 새로운 운명에 맡겨진 대로 살던 지평이었건만. 말할 수 없는 끌림의 그 무엇인가에 견디다 못한 지평은 지난날 우희가 살았던 그 벽란도 포구의 집을 찾아갔다.
집은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만치 심하게 훼손된 채 쓰러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희의 아비 서 씨 주인은 다행히 아직 거기에 살고 있었다. 나이 들고 병마마저 찾아 들어 옛날의 당당했던 선비의 기질마저 모두 내던진, 차마 의연한 기개를 갖춘 선비집안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몰골 이었다.
허나 그는 지평이 꼭 다시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집에 돌아왔던 아들은 우희의 일이 채 결말도 나기 전에 재차 징집되어 이제까지 북삼도와는 전혀 다른, 끔에도 예견치 못했던 남해의 어느 외딴섬에서 하급군관으로 있다고 했다.
실로, 가장 궁금했던 우희는 결국 정씨 집안으로 원치 않는 강제 시집을 가게 되었으나, 채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남들이 알까 두려운 몹쓸 병을 얻어 다시 친정집으로 쫓겨 왔다. 그리고 얼마 오래지 않아 아까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서 우희의 아비인, 서 씨 노인은 지평을 벽란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제대로 봉분이랄 것도 없는 작은 무덤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다름 아닌 서 우희의 무덤 이었다.
한동안 넋을 놓고 통곡하던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앞서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덕을 다 내려오자 돌아선 노인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바라 건데 자네는 예서 이대로 떠나시게.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마시게. 다만 간절히 바라기는 어느 하늘 아래서건 자네에게 걸린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굳건하게 사시게나. 자네가 애초 뜻한 바를 모두 이루는 것을 내 딸도 지켜보고 있을게야. 아시겠는가?”
지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봇짐 속에서 까만 단소를 꺼내 노인에게 드렸다.
노인은 단소를 받아 들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 참을 보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 단소를 다시 지평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애당초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네. 딸에 대한 마음으로 내가 이것을 만들었지만, 만들어 가면서 어쩌면 이것은 자네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일세. 결국, 이것은 애초부터 자네의 것이었든 게야.”
노인은 묵묵히 돌아서서 자기 집으로 갔던 것이다.
다음날 지평은 덕쇠를 찾아 적지 않은 은자를 내밀며 노인의 뒷바라지를 당부 하였다.
신묘 년의 변란(1231년 몽골의 1차 침략) 후에 지평이 다시 찾았을 때, 노인은 벽란도의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위 딸 옆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그러나. 충주고을의 금례가 전하여준 그 어설픈 이야기로 하여 지금 지평은 이곳 남도의 바닷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 그는 장흥부(전라남도 완도군 고금산도 고금면)의 수군 수채 초막에서 한 사내를 만났었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서 우희의 한 살 아래 남동생 서 윤달(徐贇達) 이었다.
우희 보다 한 살 아래였던 남동생.
누이인 우희의 삶 때문에 압록강변의 진지에서 추운 겨울을 온종일 번을 서는 고초도 당해 보았고, 누이의 결혼 소식과 함께 징집 해제되어 벽란도의 집에 돌아왔던 일, 채 한 달이 안 되어 다시 강제 징집되어, 이번엔 남도 끝자락 외딴 섬에서 청춘을 다 보내어야만 했던 사내였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전라도 장흥부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파락호는 바로 서 윤달이 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멸시하는 서 윤달을 처음 찾아온 외지인은 지평이 처음 이었다.
당시 서 윤달은 술독에 빠지고 노름에 쪄들어 가히 사람이라 형용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눈앞에 마주한 지평을 당장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뻔히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이내 윤달은 지평을 알아보고는 몹시 놀라워했다. 그리곤 자신의 결코 타당치 못한 처지에 대해 깊이 사죄했다.
서 윤달이 머물고 있는 곳은 전라도 땅 장흥부(전라남도 완도군의 고금도)였다.
지리적으로야 남도 중 중요한 해상 요충지였으나, 실은 조정의 알력 싸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위한 절해고도의 유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반면, 지평은 또 나름으로 몹시 괴로웠다.
어찌되었건 이 모든 것 또한 모두가 자신과 연계된 삶의 업보가 아니던가?
“형님. 우희 누나가 집에 돌아온 이유는 아기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누나는 아버님과 저에게 말하였지요. 그 아이가 정씨 집안의 자식은 아니라고요. 아시겠습니까? 며칠 지나서 저는 곧바로 다시 징집이 되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 남해의 고도였지요. 그 이유야 뻔히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참 시간이 지나 제가 처음으로 말미를 얻어 집에 벽란도 집에 돌아갔을 때 누나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벽란도의 언덕에 묻힌 다음이었지요. 하지만....... 진실로 누이가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아버님의 생각이셨습니다. 원치 않는 생을 살아야 하는 딸을 걱정한 아버님의 결단이었던 것이지요. 아버님은 누나를 아주 멀리 내치셨습니다. 그리고 거짓 장례를 태연하게 치루셨지요. 아시겠습니까? 형님. 그러고 나서 그 아비는 그 사실을 세상에 숨겼을 뿐만 아니라....... 태연하게 당사자인 형님이 찾아왔을 때에도 자신의 딸년이 이미 죽었노라고 벽란도 언덕까지 태연스레 안내를 하셨겠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형님과 돌아가신 제 아버지.... 두 분 당사자만은 아실 것 아닙니까?”
한참을 지평은 두 눈을 감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그 이유만은 알 수가 없었다.
“형님. 아버님의 피리는 지금도 형님이 간직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아버님께서 손수 형님께 피리를 건넸다지요? 그럼 그것이 이유겠지요......... 아시겠습니까? 크크크 큭. 이 세상에 유일한 인연의 끝자락이네요. 형님과 저. 크크크크 큭. 굳게 입 다물고 가도 무방하나...... 형님과의 부득이 한 인연으로 한 말씀만 드리고 가야겠네요. 하하하하. 지평 형님. 제 누이는 이미 임신을 한 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말하길.......... 아이를 낳으면 끝내 충주 땅 봉계마을 당산나무아래 외갓집으로 꼭 보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에 태어날 아이의 아비가 꼭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하였더랍니다. 태어날 아이의 아비가 꼭 찾아오기로 약속을 하였더랍니다. 저는 그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태어난 아기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것 이라곤 그 부정한 딸년의 앞날을 걱정한 아비가 가짜로 딸년의 장례를 후하게 치렀다는 사실뿐이랍니다.”
지평은 자리를 털고 두련산 정상에서 일어서며 생각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온밤을 새워 금례에게 아주 긴 사연의 편지를 써야만 할 것 같다고.
일곱
경자 년(更子年,1240) 6월 22일 신시(申時, 오후 4시).
송악산 자락 개경 도성의 오정문(午正門)을 지나 오리정(五里亭)에서 잠시 쉴 요량으로 말에서 내릴 때였다.
“교위(校尉)나리. 큰일 났습니다. 지금 막 또 파발이 도착했습니다. 금천(金川) 흥의(興義)역에서 또 도적떼가 나타났다 합니다.”
“뭣이라고? 이번엔 금천이라고? 허면 도적의 숫자가 몇이나 되며 인근의 군사는 얼마나 모병 되었느냐?”
“소인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냥 교위나리를 쫒아가 명을 전하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면, 중랑장(中郎將)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명을 전하라 하시면서 서둘러 금천으로 떠나셨습니다.”
“허면 군사를 얼마나 이끌고 가셨느냐?”
“아이고. 나리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지금 군사가 어디 있습니까? 밤새 번을 서고 교대하던 장졸 스물 남짓 이끌고 가셨습니다.”
“별 수 없겠구나. 일단 알겠다. 내 이 길로 곧장 달려갈 것이니, 너는 앞서 달려 중랑장께 명을 받들겠다고 전하여라.”
교위 남 홍유(南弘喩)는 다시 말에 올라 지친 몸을 이끌고 뒤따르는 병사들을 격려해 왔던 길을 되돌아 떠났다.
참 혼자 속으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통탄하고도 남을 일이었음이요. 실소를 자아내는 상황 이었다.
금일 새벽 인시(새벽 3시)에 파발을 통해 급보를 받은 것이다. 다수의 도적 무리가 돈포(錢浦) 건너 배천(白川)땅에 나타났다는 통보였다. 그는 숙소에서 쉬고 있을 중랑장에게 사람을 보내고 서둘러 출동할 군사를 소집 하였다.
실로 막중하리만치 중대사안인 도적을 토포하러 나서려고 징집한 군사의 수가 겨우 서른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아직 예속부대에 복귀하지 못한 귀휴병 아홉에 노병과 병이 난 군사 까지 동원한 인원이었던 것이다. 기타의 예비병력 마저도 확보되지 못한 것이다. 일국의 도성을 지키고 있는 부대에서 겨우 성문마다 지키고 있는 최소의 군사를 빼고 동원된 군사의 수가 서른을 넘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식 무술 교육을 받은 군사는 하나도 빼지 않고 천도를 감행한 강화도로 배치되어 섬 하나를 지키는데 주력 하였다. 그나마 일부 나머지 장정들도 빠짐없이 쓸어 모아 북삼도의 진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남은 것은 예비병력 으로도 쓰기에 부적합한 자들로, 겨우 도성의 성문을 지키는데 만족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남 홍유가 이나마 군사라고 이끌어 배천에 다 달은 것은 날이 밝고 해가 떠오른 진시(오전 7시)였다. 전날 들이닥친 한 무리의 도적들은 도성 귀족의 사전(仕田)을 관리하던 향리의 집을 습격하여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과 재물을 약탈 하였다. 배포가 이만저만이 아닌 듯 이 도적들은, 여타의 도적들처럼 약탈을 한 후에 서둘러 도망치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토포군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머물렀던 것이다. 창고를 헐어 꺼낸 곡식들을 마차에 실어 마을을 돌면서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날이 샐 때까지 머물면서 귀족의 살림살이를 모두 거덜을 낸 후에야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모두 검은 복장에 두건을 썼든 탓에, 정작 남겨진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해물품을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하고, 인근의 마을과 야산까지 조사하였으나 도적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남 홍유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돈포를 건너서야 허겁지겁 허기진 배들을 요기 시키고, 방금에야 개경 성문 안을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시 금천 이라는 것이었다.
예서 금천이 또 몇 리 인가?
한걸음씩 떼어놓기도 힘에 겨운 토벌군이 출격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씩씩하게 토벌대의 위용을 갖춘 군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심지어는 말 위에 앉은 남 홍유 자신조차도 피로에 쫓겨 졸음이 몰려들고 있었다.
송악산의 지맥이 남서로 뻗어 내려가다 보면 나직한 능선 아래로 상수리골이 있다.
짙은 송림 사이로 십여 채의 초가가 숨어있는 듯 보였다. 그 송림을 헤집고 앞으로 조금만 나아가면 제법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들판을 가로질러 건넌 후 솔밭을 거슬러 올라 야산을 넘으면, 오솔길 아래로는 송악산 북편의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데 민가도 없고, 벌써 골짜기 옆 깎아지른 봉우리 위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걸리니 그늘 속에 잠긴 골짜기는 우중충하니 음습했다. 골짜기 깊은 곳 인적마저 완전히 끊긴 후미진 곳에 사내 서넛이 모여들어 있다.
“배천 일은 모두 마친 것인가?”
말을 꺼낸 것은 깡마른 검은 피부의 노스님 이었다. 승복마저 때가 더덕더덕 했으며, 누더기처럼 사방 기워 입었다.
“모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지금 근처에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획물도 안전한 곳에 감추어두었습니다.”
젊은 무복 차림의 사내가 대답했다. 대여섯 온통 검은 복장 차림의 사내 중에 우두머리 인 듯 보였다.
“금천 일도 잘 준비 시켜 놓았겠지?”
“차질 없이 해 놓았습니다. 금천엔 날랜 자로 다섯을 보냈으니, 지금쯤 한참 난동을 부리고 있을 것입니다. 난동이래야 소리만 요란할 뿐 정작 절간의 창고 하나만 불태우라 했습니다. 시간을 끌다가 군사들이 물러날 때를 같이해 숨어서 뒤따라오라 했습니다.”
“지치고 병든 군사들이라 아마도 새벽 전에는 돌아오지 못할게야. 각 요소에 인원 배치는 끝냈는가?”
“때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신속하게 일처리를 끝내도록 하게. 지시한대로 시행하면 될 것이고, 사람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부득이한 경우 가렴주구나 탐관오리는 엄히 징벌하여도 무방할 것이야. 도성을 지키는 군사도 턱없이 부족하고, 사방 군데군데 도성이 몽골군 말발굽에 무너져 내렸는데도 감히 보수할 엄두조차 못내는 판이니, 빠져나오기도 수월할 것이야. 이제 나는 서둘러 길을 떠나야겠네. 자네들 각자 맡은 바를 능히 해낼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네. 다시 기별할 때 까지는 자신의 본연의 생활로 돌아가 은연자중들 하시게. 아시겠는가?”
“네. 큰스님.”
무리의 사내들이 일제히 엎드려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맞아 죽고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난세에, 먹고 살길 없어 마누라와 자식까지 팔아먹는다 하니 말세가 아니겠는가? 허수아비 왕은 섬에 갇혀 신하의 눈치나 보면서 생명을 연명하고, 신하는 제 하나의 영달을 위해 온 나라를 쑥대밭 아비규환 속으로 내미니, 오호라 장차 이를 어찌할꼬? 귀족과 벼슬아치는 백성을 착취하여 비단옷을 입고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저마다 절(寺) 하나씩 끼고 앉아, 백성의 눈을 현혹하며 끌어 모은 재산을 은닉하는 창고로나 쓰게 되니, 휘늘어진 팔작집 금박단청이 눈부신 법당 안에서 금물 돈물을 홀라당 뒤집어쓰고 앉아 홀로 미소 짓고 있는 부처는 이미 부처가 아닌 것이야. 그것은 죽은 부처야. 가짜 부처인 것이야. 굶주리고 두둘겨 맞고, 이 마을 저 마을 쫓겨 다니며 바둥바둥 살려 몸부림치는 저네들이 부처인 게야. 저잣거리의 절규하는 몸짓의 중생들이 바로 부처인 게야.”
노스님은 천천히 계곡을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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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