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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천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문예(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 ·무직 ·방탕 ·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1967년 7월 14일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으로
확대.조작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한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동독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
"그날은-새"라는 시는 "그날"의 고통과 치욕의 경험을 간결하고 단호한 시행 속에 압축해놓고 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뿐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잿빛의 얼굴,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괜찮다,괜찮다,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반복적인 화법 등.
그의 이런 "특징"은 과도한 음주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인 천상병' <中>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천상병<중>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6.25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문예"에 "나는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됐어.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
시집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노래가/
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
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의 초연함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원씩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워하기는 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사랑하는 내 아들 딸 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나의 가난은")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든다면"을 내놓는다.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 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
되신 분이 아니실까 싶다.//
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
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
우리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 시립병원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게 하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세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그곳]서울 인사동‘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질박한 찻잔에 묻어나는 시인의 가난한 노래-
브람스교향곡 4번이 울려퍼지면, 여태 웃고 떠들던 시인은 별안간 슬픈 표정이 되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세상사에 시달려 어지간한 시름은 가슴으로 삭이는 것이 몸에 밴 아내가 “좋은 음악 들으면서 왜 우세요?”
하고 물으면, “문둥아 문둥아…”하며 탄식하다 코가 멍멍해지도록 또 울었다.
“바흐가 천사의 소리라면 브람스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며 감탄했던 시인 천상병.
평생 가난과 질병에 쫓겨 거리를 떠돌던 시인은 이 세상 고단한 소풍을 마친 뒤 하늘로 떠나고,
지상에는 그가 문둥이라 부르며 사랑했던 아내와 그녀가 만든 작은 찻집 ‘귀천(歸天)’이 시(詩)가 되어 남아 있었다.
귀천은 서울 인사동길 중간쯤에 있었다.
달마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이웃집 간판 탓에 부근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는데
팻말을 겨우 찾아 당도한 찻집 또한 허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업중’이라고 써붙인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느 집 궁벽한 부엌같은 속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방에서는 30대 후반의 여자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무표정하게 차를 끓이고 있었다.
진한 모과향이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실려 흐르는데,
삼삼오오 모여앉은 손님들은 배불뚝이 항아리가 터져나가도록 꽂혀있는 들국화 다발에
간혹 눈길을 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귀천이 처음인 사람은 그곳의 희한한 의자배열에 당황스러워 한다더니,
판자때기를 이어붙인 듯한 긴 의자가 3개의 벽면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나무를 투박하게 잘라놓은 다탁과 간이의자들이 불규칙하게 놓여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손님들이 앉게 되는 모양새가 여느 찻집과는 달랐다.
마주보는 대신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고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눈인사를 나눠야 한다.
1985년 처음 문을 열 때부터 귀천의 모습은 이러했다.
황학동에서 고가구점을 하다 빚만 잔뜩 지게 된 목순옥씨는 가게를 처분하고 인사동으로 왔다.
당시만 해도 커피를 배달하는 다방이 대부분이어서 목씨는 자신이 직접 담가 만든 모과차와 유자차,
대추차 등속을 팔기로 했던 것이다.
거칠고 투박한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는 여주인은 어른 밥그릇만한 토기에 차를 담아냈다.
무겁지만 두툼한 찻잔은 차가 식지 않게 해주었고 겨울날 추위에 언 손까지 녹여주어서 사랑을 받았다.
돈이 없으니 내부장식에는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얻은 그림들을 대충 걸어놓고 고가구점에서 팔다 남은 물건 몇개를 다탁 삼아 들여놓았을 뿐이다.
전등도 백열구에 종이갓을 씌웠는데 탈색되면 한지만 바꿀 수 있게 머리를 썼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도록 변한 것은 거의 없다.
있다면 지난해 망가진 석유난로를 가스로 바꿨다는 것과,
털이 하나도 없을 만큼 닳고닳은 카펫을 지난 봄 비닐장판으로 교체한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귀천에는 단골이 끊이지 않았다.
주로 남편 천상병을 보러 오는 문단 지우들과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들이었지만 양희은·양희경 자매,
손숙, 노영심, 고두심 등 남편의 시를 사랑하는 유명인들도 곧잘 귀천을 찾아왔다.
요즘은 인사동 분위기가 예전같지 않아 발길이 뜸하지만
대신 뒤늦게 시인을 알게 된 젊은 대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특히 그림을 사랑하는 목씨는 가난한 미술학도들에게 어머니같은 존재다.
첫 전시를 앞두고 심란함을 털어놓으면 목씨는 젊은 화가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제 시작일 뿐인데 뭐” 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천상병의 50년지기 친구인 시인 민영은 귀천을 “변함없이 인정스러운 곳”이라고 추억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눈맞춤하고 말을 걸 수 있는 찻집이지요.
차도 배부를 만큼 많이 주니 한끼 요기가 되고.
구석자리에 늘 앉아있던 천상병에게는 허구헌날 술값 뜯긴 기억밖에는 없는데 그렇다고 속상했던 건 아니에요.
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전기고문받고 반쯤 미쳐서 사라졌다가
어느날 갑자기 살아돌아왔을 땐 내 목숨을 다시 얻은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데요”
아내 목순옥씨가 들려주는 남편과 귀천에 얽힌 추억 또한 애틋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2주 만에 올린 결혼식.
수락산 밑에 초가집 한칸 얻어 살면서 아내는 시밖에 모르는 남편을 먹여살리기 위해
자수를 놓고 고가구를 팔고 찻집을 차렸다.
하지만 일곱살난 어린애같던 남편은 아내의 고단한 삶에 언제고 웃음을 안겨주었다.
“1주일에 두번만 인사동에 나오기로 약속해놓고는 소식도 없이 불쑥 귀천에 나타나곤 했어요.
혼이 날까 무서우면 짐짓 큰소리로 ‘내가 말이다,
나도 모르게 버스를 타고 왔다!’ 하고 외치곤 했지요.
하루는 아랫니 두개가 안보이기에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더 놀라서는 ‘어라, 내 이빨이 어디 갔지?’ 하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거예요”
지독히도 가난해서 제주도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인.
그래서 좋은 음악회를 가거나 여행을 하게 될 때 남편에게 더욱 미안해진다는 아내.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눈발이라도 흩날리면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끊임없이 회자되는 귀천으로 간다.
질박한 찻잔에 흘러넘치는 모과차를 마시며,
‘날개없는 새’가 되어버린 늙은 여인의 구슬픈 목소리에 가슴을 적신다.
인사동 찻집==귀천====== (02)734-2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