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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명약 三七에 대하여
출처: http://blog.naver.com/wun12342005/220540210133
삼칠은 지혈, 산어(散瘀), 소종(消腫), 지통(止痛) 작용이 있는 명약이다.
삼칠을 주요 재료로 하여 만든 상과(傷科)의 성약(聖藥) 운남백약(雲南白藥)을 발명한 뒤부터
삼칠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삼칠은 또 편자황(片仔黃)의 주약(主藥)이기도 하다.
삼칠은 명나라 때부터 사람들한테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보면 ‘삼칠근시출(三七近始出), 남인군중용위금창요약(南人軍中用爲金瘡要藥),
운유기공(云有奇功). 거어약능상정기(去瘀藥能傷正氣), 유전칠불연(惟田七不然).’ 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삼칠을 약으로 쓰기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았다.
남인들의 군대에서 금창의 요약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효과가 신효막측하였다.
대개 어혈을 풀어주는 약들은 정기(正氣)를 상하게 하는데 오직 삼칠만 그렇지 않다.’ 는 뜻이다.
삼칠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최초로 기록된 약초인데 산칠(山漆)
또는 금불환(金不換)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처방용명은 삼삼칠(蔘三七), 전칠(田七) 등 이다.
삼칠은 맛은 달고 약간 쓰며, 성질은 따뜻하다. 간과 위, 대장으로 들어간다.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에 보면 인삼삼칠은 모양이 발제(荸薺 : 올방개의 뿌리)와 비슷하고
거꾸로 세워놓은 원추형이며 겉껍질은 청황색(靑黃色)이며 맛은 달고 쓰다.
인삼과 닮았기 때문에 인삼삼칠(人蔘三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
삼칠은 오갈피나무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인 인삼삼칠의 뿌리다.
인삼과 같은 과에 딸려 있으며 삼삼칠(蔘三七)이라고도 부르고 사포닌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오가사포닌 A(Arasaponin A)와 오가사포닌 B(Arasaponin B)와 포도당 등이 들어 있다.
산칠(山漆)이란 별명도 있는데 출혈이 있는 곳에
찐득찐득하게 칠을 해서 지혈시켜 주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산칠이란 이름을 얻었다.
삼칠(三七)이라는 이름은 3년에서 7년을 재배해야 약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또 전칠(田七)이란 별명도 갖고 있는데 광서성(廣西省) 전양현(田陽縣) 전주진(田州鎭)에서
생산되는 인삼삼칠이 가장 품질이 우수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과거에 전칠의 생산량이 부족하여 가격이 앙등할 때가 많았었다.
근년에 전주(田州)에서 인공 재배에 성공하였다.
신체가 허약하고 발육이 불량한 어린 아이들의 치료에 전칠 1전과 돼지고기나 소고기,
닭고기와 함께 끓여 복용시키면 탁월한 효과가 있다.
대추와 용안육(龍眼肉)을 가미해서 함께 끓이면 쓴 맛이 없어지고 감미로워서 아이들이 먹기에 좋다.
코피가 자주 나오는 아이들은 전칠 1전과 호두 한 개와 돼지의 간을 함께 끓여 먹이면 낫는다.
현재 전칠은 혈압을 내리고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약으로 많이 쓰고 있다.
현대 약리 분석 실험 결과 전칠은 혈액응고 시간을 단축시켜 주고
혈관을 수축하여 피나는 것을 멎게 하며 관절염의 치료에도 탁월한 치료 효과가 있다고 나타났다.
또 심장에 있는 관상동맥의 혈류량을 늘리고 각종 피부 진균(眞菌)을 억제하는 작용도 있다고 나타났다.
광서성(廣西省) 전주(田州 : 남영(南寧)의 서북쪽 160km 지점)는 삼칠의 가장 오래된 원산지이다.
그래서 전삼칠(田三七)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줄여서 전칠(田七)이라고 부른다.
운남성 문산현(文山縣 : 남영의 서쪽 420km 지점)에서 생산되는 삼칠도 품질이 우수하다.
또 사천성에서 생산되는 삼칠은 천칠(川七)이라고 칭한다.
일반적으로 3년 이상 된 삼칠을 골라서 입추(立秋) 전후에 채취한 삼칠을 춘삼칠(春三七)이라고 부르고
입동(立冬) 후에 채취한 삼칠을 동삼칠(冬三七)이라고 부르는데 춘삼칠이 품질이 더 좋다.
삼칠을 고를 때 색깔이 좋아야 하고 광택이 나야 하며 견실해야 되고 무거운 것이 좋다.
삼칠의 뿌리를 캐기 열흘 전에 지상의 줄기를 먼저 모두 잘라버린 다음 캐서 말려서 약으로 쓴다.
삼칠은 품질을 13등급(等級)으로 분류한다.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일수록 품질이 좋다.
삼칠을 저울에 달아 500g을 만든다.
500g에 20개의 삼칠이 들어 있는 것을 제 1등급 삼칠이라고 부른다.
춘삼칠은 운남성 문산현에서 생산되는 것을 최우수품으로 친다.
운남성에서는 약 1,000여 종의 약재가 생산된다.
그래서 운남성을 약재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중국 전체 약재 품종의 70%가 운남성에서 생장하고 있다.
그 중 삼칠과 천마(天麻)와 동충하초(冬蟲夏草)와 당귀는 품질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삼칠은 해발 800m에서 1000m 이상의 고원지대에서 잘 자란다.
운남성은 해발 1,200m에서 1,700m에 이르는 고원지대가 많다.
청나라 때 저서 <귀순주지(歸順州志)>에 보면 ‘삼칠이전주산자위최량(三七以田州産者爲最良).’ 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삼칠은 수전주에서 생산되는 것이 가장 품질이 우수하다.’ 는 뜻이다.
또 청나라 때의 저서 <백색청지(百色廳志)>에 보면
‘인삼칠실출자전주(人蔘七實出自田州), 고속명위전칠(故俗名爲田七).’ 이라고 하였다.
이는 ‘실제로 품질이 우수한 삼칠은 전주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전칠이란 이름을 얻었다.’ 는 뜻이다.
현대의학에서 약리연구 결과 ‘전칠능감소심기양량(田七能減少心肌氧量),
제고동물결양적내수력헌유작용(提高動物缺氧的耐受力很有作用)’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곧 ‘현대 약리 분석 실험 결과 전칠은 심장근육의 산소 소비량을 줄이는 작용이 있고
모든 동물들이 산소가 부족한 환경 속에서 견디는 힘을 강하게 해 준다’ 는 뜻이다.
그러므로 삼칠은 운동선수들의 지구력과 인내력을 증강시켜 주는데 적합한 약재이다.
삼칠에 대한 한 가지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칠에 대한 신화와 전설이 많다.
그 중에서 천목삼칠(天目三七)에 대한 고사를 소개한다.
옛날, 어느 채약꾼 노인이 날마다 천목산(天目山)에 올라가 채약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약초를 한 다발 묶어 등에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오는 목동을 산중턱에서 우연히 만났다.
채약꾼 노인은 “어린 목동아! 너의 등에 짊어진 약초는 무슨 약초인가?
또 어떻게 사용하는 약초인가?” 하고 목동에게 물었다.
목동은 “이 약초는 뼈가 부러진데 쓰는 귀한 약초입니다.
동생이 팔이 부러져서 이 약초를 부러진 팔에 붙여 치료하고 있습니다.”
하고 채약 노인에게 설명해 주었다.
채약 노인은 목동의 말을 듣고 나서 신기하게 여기며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또 너는 어떻게 이와 같은 보배로운 풀을 발견하였느냐?”
하고 목동에게 물었다.
목동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약초 다발을 땅에 내려놓고 이 약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채약 노인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3월 7일생 입니다.
그래서 저의 어머님이 저를 삼칠이라고 부른답니다.
저의 집은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마을 부잣집 소를 먹여주고 품삯을 받아서 어머님과 제가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 나는 원숭이 떼가 큰 나무 밑에 모여서 그네를 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개의 큰 버드나무 사이에 걸쳐 있는 자등(紫藤)을 타고 원숭이들이 그네를 뛰고 있었습니다.
버드나무 옆에 있는 우리 채소밭 농사를 모두 망가뜨리기 때문에
나는 원숭이들을 내좇아 버리기 위하여 도끼를 집어 던졌습니다.
자등의 줄기가 도끼에 맞아 끊어졌습니다.
이삼일 후에 다시 원숭이 떼들이 몰려와서 등나무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있었습니다.
내가 분명히 등나무의 줄기가 끊어진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다시 붙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나는 또 다시 도끼로 등나무의 줄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날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음침한 곳에 숨어서 세밀히 관찰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원숭이 떼가 또 등나무 곁에 몰려왔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늙어 보이는 머리털이 하얀 할머니 원숭이 한 마리가 자세를 낮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본 후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나는 손에 진땀을 쥐고 숨을 죽이고 몰래 원숭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늙은 원숭이는 즉시 일어나 버드나무 주위에 있는 풀 뿌리 몇 개를 캐내었습니다.
그 풀뿌리는 토갈색(土褐色)의 괴근(塊根)이었습니다.
늙은 원숭이는 그 약초의 뿌리를 입속에 넣고 계속 씹었습니다.
입속에서 잘게 부서진 뿌리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더니
그것을 등나무 줄기가 부러진 곳에 붙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원숭이 새끼 한 마리가 한 묶음의 잡초를 가져다 할머니 원숭이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어린 원숭이들은 붕대처럼 생긴 잡초로 등나무의 상처를 묶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원숭이들은 그곳을 떠나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숭이들이 그곳을 떠나버린 후 등나무 곁으로 가서 등나무가 상처 난 곳을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그 곳을 나의 손으로 직접 만져 봤습니다.
붕대처럼 생긴 잡초로 단단히 묶여 있었습니다.
나는 원숭이들이 사용한 그 약초를 뽑아 보았습니다.
매우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약초를 사용하여 사람의 부러진 뼈도 단단하게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그 약초를 한 다발 뽑아서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뿌리를 깨끗이 씻은 후 짓이겨 동생의 부러진 팔에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붕대로 묶어 두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새것으로 갈아 붙여 주었습니다.
몇 주일 후 동생의 부러진 팔이 완치되었습니다.
나는 기뻐서 펄쩍 펄쩍 뛰었습니다.”
채약 노인은 이상과 같은 목동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목동아! 너는 진귀한 보초(寶草)를 발견하였구나! 귀중한 약초이구나!”
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하였다.
후에 채약 노인은 이 약초를 골절(骨折) 환자들에게 실험해 보고 또 반복해서 실험해 보았다.
결국 이 약초가 질타손상(跌打損傷)과 골절 환자에게
신효막측(神效莫測)한 효과가 있는 약초라는 것을 실험을 통하여 확증하였다.
삼칠의 약효를 발견한 목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약초의 이름을
“천목삼칠(天目三七)”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는 “삼칠이라는 목동이 천목산에서 발견했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삼칠의 공효는 지혈(止血), 산어(散瘀), 소종(消腫), 지통(止痛)의 팔자공효(八字功效)가 있다.
이시진은 그의 저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삼칠은 군대들의 금창요약(金瘡要藥)” 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금창이란 전쟁에서 칼이나 창이나 화살이나 총알 따위로 입은 상처를 일컫는다.
또 <본초신편(本草新編)>에 보면 “삼칠근(三七根)은 지혈의 신약(神藥)이다.
삼칠은 단용으로도 효과가 있으며
보혈약(補血藥)이나 보기약(補氣藥)과 배합해도 신기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식약변미(識藥辨微)>에 보면 “치질타손상유기사회생지공(治跌打損傷有起死回生之功),
가여황금등(價與黃金等)” 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삼칠은 질타손상에 기사회생의 공효가 있으며
황금과 똑 같은 가치가 있다.” 는 뜻이다.
운남성(雲南省)의 남부는 월남과 라오스와 미얀마(버마)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으며 북부는 티베트 지방과 연접하고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의 3분의 1이 운남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약 24개의 풍속이 각기 다른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또 중국내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식물과 동물의 절반 이상이 운남성에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고대로 부터 운남에서 품질이 좋은 한약재가 많이 생산된다.
인구는 약 4천만 명이 살고 있으며 중국 내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성이다.
운남성 문산현(文山縣)에 가보면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장족(壯族)과 묘족(苗族)이 자치주를 형성하여 살고 있다.
마치 연변(延邊이 조선족(朝鮮族)의 자치주(自治州)인 것과 마찬가지다.
삼칠은 온난한 기후와 약간 음습(陰濕)한 기후를 좋아하고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물이 많은 토양은 싫어하며 흑색 사질(砂質) 토양이나 부식토지에서 잘 자라는데
문산의 기후 환경이 삼칠생산에 적합하여 이곳에서 생산되는 삼칠은 품질이 우수하며 치료효과가 높다.
삼칠 국내 수요량의 70%가 문산에서 생산되는데 매년 평균 50만 근(斤)이나 생산된다.
그래서 이 지역을 “삼칠의 고향” 이라고 부른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삼칠이라는 아름다운 삼칠선녀(三七仙女)가
인간들로 하여금 곡식을 심어 거두는 법을 가르칠 목적으로 인간 세계로 내려왔다.
어느 날 삼칠선녀는 땅에 내려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사나운 검정색 곰 한 마리가 선녀를 덮치려고 하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잡상(卡相)이라고 부르는 묘족 청년이 흑곰을 겨냥해서 화살을 잡아 당겼다.
그리하여 삼칠선녀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잡상은 빈궁한 집안에서 살고 있었다.
잡상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돈이 없으니 의사를 찾아가 치료할 수도 없었다.
삼칠선녀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잡상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뒷산 기슭에 일종의 초약(草藥)이 자라고 있다.
잎사귀의 모양은 내가 입고 있는 치맛자락 같이 생겼으며 가지는 나의 허리띠처럼 생겼다.
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고 잡상에게 알려 주었다.
잡상은 삼칠선녀의 말대로 뒷산에 올라가 그 약초를 캐어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
늙은 어머니에게 몇 차례 복용시켰다.
어머니의 병은 신기하게 치료되었다.
후에 잡상은 이 약초를 캐어서 마을 친구들의 질병도 치료하여 주었다.
마을 친구들은 잡상의 집에 몰려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우리들의 병을 치료한 그 약초는 무슨 약초인가?”
하고 잡상에게 물었다.
잡상은 “선녀가 나에게 알려준 약초이다.
선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이 약초를 자세히 관찰하여
잎이 몇 개인지 가지가 몇 개인지 알아보라고 나에게 말했다.” 고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총명한 할머니 한 분이 이 약초나무를 자세히 관찰해 보더니
가지는 세 가지, 잎은 한 가지 끝에 일곱 개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삼칠(三七)이다” 고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이때부터 이 약초의 이름을 삼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칠(田七)
전칠(田七)의 성미는 감(甘), 미고(微苦), 온(溫)이고 간(肝)과 위(胃)와 대장으로 들어간다.
지혈화어(止血化瘀) 작용이 있으므로 토혈과 뉵혈과 혈리와 변혈과 혈붕과 산후출혈과 창상출혈 등을 치료해 준다.
소종정통(消腫定痛) 작용이 있으므로
질타손상과 어체동통(瘀滯疼痛)과 옹종창양(擁腫瘡瘍)과 독사교상(毒蛇咬傷) 등을 치료해 준다.
현재 암증의 치료에 관하여 연구를 집중하고 있다.
상과(傷科)의 명약(名藥)이라고 칭하는 운남백약(雲南白藥)의 주약(主藥)은 전칠이다.
전칠은 명(明)나라 때 대단히 인기가 있던 약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보면 “삼칠근시시출(三七近時始出),
남인군중용위금창요약(南人軍中用爲金瘡要藥), 운유기공(云有奇功).”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칠이 처음 나왔을 때 남인 군대 내에서 금창 요약으로 사용했다.
효과가 매우 뛰어났다고 말했다.” 는 뜻이다.
어혈을 풀어주는 한약은 일반적으로 정기(正氣)를 상하는데 유독 전칠은 그렇지 않다.
또 <본초강목습유>에 보면 ”안인삼삼칠(按人蔘三七),절유인삼고명(絶類人蔘故名).”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삼삼칠은 인삼과 꼭 닮았으므로 인삼삼칠이란 이름을 얻었다.” 는 뜻이다.
전칠은 오가과 식물 인삼삼칠의 뿌리를 일컫는다.
인삼과 같은 과(科)에 속하므로 간략해서 삼삼칠(蔘三七)이라고도 부른다.
산칠(山漆)이란 별명이 있는데 그것은 페인트처럼 상구에 찐득찐득 달라붙어
기가 막혀서 말이 않나올 정도로 지혈을 잘 시켜 주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또 삼칠이란 이름은 파종하여 완전히 생장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3년 내지 7년이 걸리므로 삼칠이란 이름을 얻었다.
또 전칠(田七)이란 이름은 운남성 전주(田州)에서 생산되는 인삼삼칠이 품질이 가장 우수하므로 얻은 이름이다.
과거에는 전칠의 수확이 불황일 때 전칠의 값은 엄청나게 뛰었다.
그러나 현재는 인공재배에 성공하여 가격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어린 아이들의 신체가 허약하고 발육이 불량할 때 전칠 1전(錢)과
닭고기나 살코기와 함께 푹 삶아서 복용시키면 괄목할 만한 치료 효과가 있다.
맛이 약간 씁쓸하므로 대추와 용안육을 조미료로 사용하여 복용시키면 아이들이 잘 먹는다.
어린 아이들이 코피를 자주 흘릴 경우 전칠 1전(錢)을 입속에 넣고 질근 질근 씹어 쌀미음과 함께 삼키면 효과가 있다.
또는 전칠 1전(錢)과 호도 한 개와 돼지의 간(肝)을 함께 끓여 복용시키면 치료된다.
현재 전칠은 보익제(補益劑)로 알려져 있음과 동시에 혈압을 내려주고 혈중 콜레스테롤의 양도 경감시켜 준다고 알려져 있다.
현대 약리 실험 결과 전칠은 응혈시간을 단축시켜 주고 혈관을 수축시켜 지혈 작용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실험실 쥐에게 전칠을 투여한 결과 관절염이 치료되었으며 관상동맥내의 혈류량이 증가되었고
동시에 심근(心筋)의 산소 소모량이 감소되었으며 여러 종류의 피부진균의 억제작용도 있다고 발표되었다.
운남백약
전설에 따르면 중국 운남성(雲南省)에 살고 있는 한 농부가 자기 집 근처에 살고 있는
크나큰 구렁이가 슬금슬금 기어서 자기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밭에서 땅을 파고 있던 괭이로 마구 때려서 죽게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이삼일 후에 똑같은 구렁이가 또 마당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똑 같은 방법으로 괭이로 때려눕혔다.
이삼일 후에 또 구렁이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농부는 구렁이를 또 때려 눕히고 나서 피가 철철 흐르는 구렁이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구렁이는 숲속으로 들어가 어떤 풀을 먹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 구렁이의 상처는 다시 멀쩡하게 회복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농부는 삼칠(三七)을 발견하게 되었다.
운남백약이라는 유명한 약의 주성분은 삼칠이다.
운남백약은 하얀색 가루약이며 외출혈과 내출혈을 치료해 준다.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고 찢겨진 근육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삼칠은 오갈피나무과에 딸린 다년생 초본 식물이며 성미는 달고 쓰며 온성이다.
간과 대장과 위경으로 들어간다.
지혈작용이 있으므로 외상출혈, 토혈, 뉵혈(뉵血), 혈리(血痢), 변혈(便血), 혈붕(血崩),
산후혈훈(血暈), 오로불하(惡露不下) 및 산후출혈과다에 사용한다.
또 질타손상, 어체동통(瘀滯疼痛), 용종창양(용腫瘡瘍)에 사용되며 독사에게 물린데 쓰인다.
진통제로도 사용한다.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운남백약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려인삼을 모르면 한국 사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제 일차 세계대전 때와 중일(中日)전쟁 때와 6.25 동란때 운남백약의 명성은 올라갔다.
원래 운남백약은 칼로 벤데, 창으로 찔린데, 상처에서 출혈이 심한데, 총상에, 화살에 찔린데, 타박상 등을 치료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산부인과에서 혈액과 관계된 모든 질병과 인후종통, 위궤양출혈, 12지장 출혈의 치료에 사용한다.
삼칠은 또 유상(癒傷), 활혈, 산어(散瘀), 소종(消腫)작용과 배농거독(排膿去毒)작용이 있기 때문에
전쟁기간에 사용하기 쉽고 약효가 또한 빠르기 때문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이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볼 때 뱀은 수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고대 중국은 전쟁의 도가니였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사들이 삼칠을 사용하여 상처를 치료했으며
그 효과에 감탄한 나머지 ‘금불환(金不換)’ 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 말은 ‘황금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삼칠은 군수품 중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 삼칠은 자보강장(滋補强壯)과 혈중 콜레스테롤의 강하제로 또 관심병의 치료와 협심증의 특효약으로 증명되었다.
삼칠에는 여러가지 종류 즉 죽절삼칠(竹節三七), 아미(峨嵋)삼칠, 우엽(羽葉)삼칠 등이 있는데
효력은 대동소이하다. 삼칠의 별명은 인삼삼칠, 전칠(田七), 산칠(山漆) 이라고 부른다.
운남성 동남부와 광서성 서남부에서 생산되는 삼칠은 품질이 가장 우수하다.
삼칠과 인삼의 지상 부분에 보이는 줄기와 잎은 너무나 흡사하여 어느 것이 인삼이고
어느 것이 삼칠인지 많은 사람들이 잘 구별하지 못한다.
삼칠은 중국의 남쪽 지방의 기후와 토질에 알맞는 식물이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 : 서기1036-1101)는 북송(北宋)의 문인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데
유물주의 철학가 왕안석(王安石)과 대립하다가 혜주(惠州) 태수로 좌천되어 내려가 있을때
사람을 시켜 라부산(羅浮山)에 인삼을 재배하게 하였다.
그런데 기후가 적당하지 못하여 인삼재배에 실패하였다.
그 당시 광동사람들은 삼칠을 “광동인삼(廣東人蔘)”이라고 불렀다.
광동 인삼에 대한 소문이 청나라 궁중에까지 알려져 청나라 황제가 삼칠을 유심히 살펴 보더니
틀림없는 인삼인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광동인삼의 수출금지령을 내렸다.
운남백약(雲南白藥)
삼칠(三七)을 말할 때 반드시 운남백약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중성약(中成藥) 중에 운남백약(雲南白藥)은 인기가 높기 때문이며
운남백약의 주요 성분은 삼칠과 사향(麝香)과 중루(重樓)와 피마초(披麻草)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남백약(雲南白藥)이 발명된 지 109년이 된다.
운남백약의 발명자 곡환장은 중국 근대사상 저명한 약학가였다.
곡환장은 서기 1880년 운남성에서 태어났다.
가정 환경이 빈한하였고 부모가 함께 세상을 떠나 10여 세 되던 해에 천애의 고아가 되었다.
곡환장은 사천성의 어느 도인으로 부터 의술을 터득하여
오랜 세월 행의(行醫)하였으며 곡환장은 고의서(古醫書)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민간초약방(民間草藥方)에 깊은 관심을 두고 민간초약방의 임상 실험과 응용에 관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동시에 민간초약방을 자신에게 실험하여 보고 난 후 단(丹)과 산(散)과 약주(藥酒)와 고약 등을 만들었다.
특히 질타손상약과 지혈약에 관심을 기울여 손수 제약하였는데
그중 1902년에 제작한 만응백보단(萬應白寶丹)은 운남백약의 전신(前身)이다.
원명(原名)은 곡환장백보단((曲煥章百寶丹)이었다.
사람들은 만응백보단의 색깔이 희기 때문에 간단하게 백약(白藥)이라고 불렀다.
운남백약은 내상과 외상을 모두 낫게 하며 그 효과는 신효막측하였다.
그 당시 운남성 지역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도적들이 횡행하였다.
그래서 외상을 입은 병사들이 가장 많았다.
이때 운남백약으로 수 많은 전쟁 부상자들을 고쳐 주었기 때문에 운남백약의 명성은 온 천하에 두루 퍼졌다.
1924년 곡환장은 운남 군벌(軍閥) 당계요(唐繼堯)의 부하의 절단된 다리를 고쳐 주었다.
이로 인하여 운남백약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운남백약으로 치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약재상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운남백약의 모조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곡환장은 자신이 만든 운남백약 속에 빨강색 알약을 한 개 넣어
자신이 만든 운남백약을 다른 상품과 구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운남백약 속에 들어있는 빨간 알약이 약의 효과를 더욱 증강시켜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곡환장이 만든 운남백약을 단중지단(丹中之丹)이라고 불렀다.
산제(散劑)는 특수한 향미(香味)를 지니고 있고 맛은 시고 쓰며 떫다.
혀끝에 대면 시원한 감각과 저린 느낌이 든다.
미황색(米黃色) 또는 황백색(黃白色)이다.
환제(丸劑)는 겉에 주사(朱沙)로 옷을 입혀서 얕은 종색(棕色 : 얕은 갈색)이다.
곡환장의 운남백약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당시 중앙 정부 내에 있는 국가의약관리국 초이당(焦易堂) 국장은 운남백약을 노리고 있었다.
운남백약의 비밀 처방을 곡환장으로부터 강제로 압수하려 하였으나 거절 당하는 바람에 압수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곡환장이 운남백약의 비밀 처방을 국외로 누설시켰다는
터무니 없는 죄상을 덮어 씌워 곡환장을 감옥에 가두었다.
결국 곡환장은 1938년 감옥 에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곡환장이 세상을 떠난 후 곡환장의 두번째 부인 무란영(繆蘭英)은 계속 운남백약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1955년에 운남백약의 비밀 처방과 제약법을 정부에 넘겨 주었다.
1971년 6월 1일 그 당시 중국 총리(總理) 주은래(周恩來)는
국영기업체 운남백약집단주식유한공사를 건설하고 신제형(新製型) 운남백약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주은래는 전쟁시 사용할 운남백약을 만들어 비축하였다.
운남백약의 배방과 제약 기술은 1995년 중국 정부에서 국가급 제일급 비밀로 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약학자들은 운남백약에 들어 있는 성분이 다음과 같다고 발표하였다.
전칠(田七) 200mg, 빙편(氷片), 산어초(散瘀草) 85mg, 백우담(白牛膽) 25mg,
천산룡(穿山龍) 57.5mg, 회산약(淮山藥) 66.5mg, 고량강(高良薑) 30mg, 노관초(老鹳草) 36mg, 주정(酒精).
운남백약은 일종의 중성약인데 질타손상과 창상 출혈의 치료에 쓴다.
지혈(止血) 작용이 있으므로 소화도 출혈과 호흡도 출혈과 출혈성 뇌병과
산부인과와 소아과와 오관과의 출혈성 질병을 치료해 주고 창상출혈의 치료에 쓴다.
항염(抗炎) 작용이 있기 때문에 홍종, 열통, 활혈화어, 종창억제, 항균, 창상감염 방지 등에 쓴다.
또 부신피질 호르몬의 분비를 증진시켜 주기 때문에 면역계통 질병을 치료해 준다.
지통(止痛) 작용이 있기 때문에 창상으로 인한 동통, 통경, 심교통, 각종 염증동통의 치료에 사용한다.
또 혈액순환을 양호하게 해주고 심장 근육내에 혈류량 증가,
감만심율(減慢心率), 혈압조절, 심장근육의 산소 소비량 감소 등 효과가 있다.
성인은 매차 0.25g 내지 0.5g을 하루 세 차례 따뜻한 물로 복용하고 출혈이 없는 사람은 황주(黃酒)로 복용해도 된다.
복약 후 30분 부터 약효가 나타나며 2시간 내지 3시간 후 효과는 극치에 달한다.
그리고 효과의 지속 시간은 4시간이다.
자궁을 흥분시키는 작용이 있으므로 임산부들은 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복약 후 하룻 동안 소고기, 양고기, 콩 종류를 먹지 말아야 한다.
과민반응이 있는 사람은 신용해야 되며 심율실상자(心率失常者)도 먹지 말아야 하고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곡환장(曲煥章)
곡환장(曲煥章 : 서기 1880 년 – 서기 1938 년)의 자(字)는 성제(星際)이고 원명(原名)은 점은(占恩)이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상과(傷科) 전문 의사였다.
운남성 강천현(江川縣) 사람이다.
곡환장은 어려서 조실부모(早失父母)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 까지 할머니와 매형 집에서 자랐다.
곡환장은 1892년 12세 때 매부한테서
외상과(外傷科)에서 사용하는 약들을 가공하는 기술과 한의학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곡환장의 매부 역시 명의였다.
곡환장이 치료하는 사람 마다 치료 효과가 신효막측하여 강천현 일대에 그의 명성은 드높아 갔다.
1902년 곡환장은 운남성 일대에 있는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직접 채약하고 스스로 임상 실험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민간 초약의사(草藥醫師)들을 만나고 물어서 기술을 습득하였다.
곡환장은 각고한 연구 실험 끝에 운남백약의 전신인 백보단(百寶丹)을 창제(創製)하였다.
그후 10여 년 동안 백보단으로 임상 실험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더욱 발전된 백보단을 만들었다.
백보단은 도창상(刀槍傷)과 질타손상(跌打損傷)을 비롯한 모든 외상에 신효막측한 효과를 나타냈다.
심지어 인사불성이 된 환자들도 곡환장은 먼저 백보단 복용시키고 나서 호력산(虎力散)을 복용시키면 소생하였다.
창상으로 인하여 출혈이 심한 환자들도 소독산과 지혈약을 상구에 발라주면
경한 환자는 2주면 치유되었고 중한 환자는 한 달 남짓 치료하면 완치되었다.
모든 창(瘡)과 양(瘍 : 종기)과 저(疽 : 악성종기)와 부인과 질병과
소아과 질병에도 백보단(百寶丹)을 위주로 치료하여 탁월한 치유율을 올렸다.
부인과 질병의 치료에는 백보단을 위주로 하고 보신약주(保身藥酒)와
건혈로약주(乾血勞藥酒)와 홍붕백대산(紅崩白帶散)을 보조제로 사용하여 치료하였으며
소아과 질병의 치료에는 백보단을 위주로 하고 세장산(洗腸散)을 보조제로 사용하여 치료하였다.
그 당시 도적의 수령으로 이름을 날린 오학현(吳學顯)이 흉부에 창상(槍傷)을 입어 생명이 위독했었는데
곡환장이 강제로 붙들려 가서 치료하여 완치되었다.
이로인하여 곡씨백약(曲氏白藥)은 온 천하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1916년 곡환장의 운남백약과 호력산(虎力散)과 탱골산(撑骨散)은
정부의 검사 결과 합격품으로 인정받고 공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운남성 최고 군사령관 당계요(唐繼堯)는 곡환장을 동육병원(東陸病院) 주임 의사로 임명하고
교도단(敎導團)의 일 등 군의관으로 임명하였다.
곡환장은 1917년 통해(通海 : 昆明 남쪽 110km 지점)에서 행의하였다.
기름 종이에 포장되어 있던 백약을 자개 병 속에 집어넣어 포장하여 전국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운남성 당독(唐督)은 도적의 수령 오학현(吳學顯)을 불러 운남성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오학현은 전에 곡환장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곡환장에게 곤명에 의원을 차리도록 허가해 주었다.
그리하여 곡환장은 곤명시(昆明市) 남강가(南强街)에 외상진료소(外傷診療所)를 설치하였다.
1919년 오학현은 군대를 통솔하고 광서(廣西) 지방에서 전투하다가
우퇴골(右腿骨)에 창상을 입고 우퇴골이 골절되었다.
그 당시 곤명에 있던 프랑스 병원과 혜전(惠滇)의원과 육군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치료하였다.
모두 한결 같이 다리를 절단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런데 곡환장이 도맡아서 오학현의 다리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오학현의 우퇴골 골절은 곡환장의 치료로 완전히 치유되었다.
서양 의사들은 곡환장의 치료법에 감탄하였다.
사람들은 곡환장을 “신의(神醫)” 또는 “묘수(妙手)” 등으로 칭했다.
당독(唐督)은 곡환장의 병원 간판 옆에 “약관남전(藥冠南滇)” 이란 간판을 달아 주었고
오학현은 “효험여신(效驗如神)” 이란 간판을 각각 달아 주었다.
“약관남전(藥冠南滇)”이란 “운남성 남부에서 제일의 약방”이라는 뜻이고
“효험여신(效驗如神)”이란 “치료 효과가 신효막측하다”는 뜻이다.
1938년 칠칠사변(七七事變) 후 운남 58사단과 60사단이 항일투쟁을 하였다.
곡환장은 애국심에 불타서 3만 병의 백보단(百寶丹)을 양군 전체 병사들에게 배부해 주었다.
그 결과 대아장항일전투(大兒庄抗日戰鬪)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같은 해에 국민당 중앙 정부에서는 곡환장에게 백보단(百寶丹)의 비밀 처방을 내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곡환장은 극구 거절하였다.
그로 인하여 곡환장은 투옥되었고 감옥 속에서 58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후 곡환장의 부인 무란영(繆蘭英) 여사가 곡환장의 뒤를 이어
곡환장대약방(曲煥章大藥房)에서 백보단을 1949년까지 생산하였다.
무란영 여사는 1949년 곡환장대약방(曲煥章大藥房)의 문을 닫고 백보단의 비밀 처방을 중공 인민 정부에 내놓았다.
그때 부터 중국 정부에서는 백보단을 국가 제일급 한약 보호품으로 정했으며
전칠과 인삼 외에는 백보단의 성분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2002년부터 운남백약(雲南白藥)은 올림픽 운동 선수들의 창상 전문 치료약으로 지정하였다.
현재 운남백약은 뇌중풍 질환과 각종 암병과 신장병 등의 치료에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