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걸린 두 손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고강영
1990년 5월 어느 토요일, 우리들은 신기교회 관할 구역인 진안읍 가막리에서 전도지원차 가정을 방문하며 전도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장수교회 남 선교회 회장으로서 회원들을 이끌고 전도 활동을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오후 5시경, 어느 회원이 달려와 아주 어려운 가정을 발견 했다는 것이었다. 젊었을 때는 교회도 다니고 세례도 받았는데 지금은 완전 폐인이 되어 있더란다.
나는 그 회원들과 같이 그 집을 찾아 갔다. 집은 쓰러질 듯이 옆으로 15°정도 기울었고, 부엌에는 그릇 몇 점, 양은 솥 2개정도가 고작이었다. 방을 들여다보니 살림은 아이들 책가방과 교복이 고작이었다.
박oo(당시 44세)씨. 두 팔과 두 다리는 몸 쪽에 올라붙어 있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묻는 말에나 대답할 정도로 정신에도 이상이 있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딸이 중학교 1년생과 초등학교 5학년생 두 명이 있었다. 그곳 신자들에게서 비정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슬픈 사연의 내막은 이러했다. 한 여인이 남편의 오랜 지병으로 가정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지난 1981년 한 살과 세살짜리인 두 딸과 병든 남편을 버리고 가출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불치의 병으로 살길이 막막했던 남편 박씨는 부인을 찾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 했으나 부인을 찾지 못하고 술과 구걸로 연명하다 결국 1989년에 고향인 완주 이서로 내려 왔고, 다시 진안 가막리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다리 마비로 활동을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했기에 이 가정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날은 집안 청소만 해주고 돌아 왔다. 그 다음주 토요일 몇몇 회원들과 같이 그 곳을 다시 찾아갔다. 쌀, 채소와 약간의 용돈도 준비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들렀을 때 보지 못했던 두 딸이 있었다. 진안 여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언니(15세)와 가막초등학교 5학년인 동생(13세)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위해 방에 불을 때려고 나무를 하러 갔다 왔다고 했다. 허름한 옷차림에 키도 여느 아이들보다 작아 보이는 두 소녀, 손을 붙잡고 인사를 하는데 손이 부어 있었다. 물어보니 동상이 걸려 무척이나 아프다고 했다. 지난 겨울에 걸린 동상이 5월인데도 낫지 않고 손이 부어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너무너무 가슴이 아파 두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같이 동행했던 아내도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다.
우린 결심하고 이들을 장수로 옮겨 보살피기로 하였다. 장수읍 장수교회 옆에 작은 셋집을 얻어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세간을 마련하여 세 부녀가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아이들은 장수중학교 1학년과 장수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을 시켰다.
큰 아이를 전학시키기 위해 진안여중에 들러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해 진안여중에 초임으로 부임하시어 담임을 맡았으나 아직 아이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치 못하고 있던 선생님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왜 전학을 가야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아이의 사정을 얘기하였다. 만나게 된 사연, 그들의 생활상, 특히 그 아이가 살고 있는 가막리에서는 진안읍으로 나오는 버스가 새벽에 한 번, 진안읍에서 가막리로 들어가는 버스가 저녁 해질 무렵 한 번이다 보니 새벽에 학교에 오면 밤에 들어가야 했고, 그러다 보니 물론 식량도 없었지만 아침을 먹지 못하고 도시락 준비도 없이 학교에 오면 밤에 들어가 동생이 지어놓은 밥을 먹는 게 고작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그들을 장수로 데려가 돌보기 위해 전학을 시키려 한다 했더니 그 선생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번은 그 아이가 점심시간인데 운동장 철봉 밑에 있더란다. 그래서 "너 점심 먹었니?" 하고 물으니 먹었다고 대답하더란다. 담임으로서 그런 학생들의 가정 형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본인이 너무 원망스럽고 그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들은 그 세 부녀를 잘 보살폈고 아이들도 학교에 잘 다녔다. 장수교회 교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영양을 제대로 공급하니 아버지는 두 다리와 팔이 펴지면서 걷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간질까지 겹친 지병 때문에 병원 신세를 많이 지곤 하였는데 어느 해 섣달그믐 날이었다.
나는 설날 차례는 전주에서 지내고 추석은 장수에서 모시기 때문에 추석에는 아이들과 같이 우리 집에서, 설에는 우리만 전주로 가게 된다. 아내와 같이 설 차례를 지낼 음식과 고기 등을 준비해 아이들 집엘 가는데 큰 아이가 울면서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아빠가 이상해요." 달려 들어가 보니 지병이 다시 도진 것 같았다.
택시를 불러 동산병원으로, 진안 동부병원으로, 전주예수병원 응급실로 들어가 응급 처치를 하고 CT 촬영 등을 통해 병명을 확인해야 하는데 촬영비용이 현찰로 입금이 되어야 촬영할 수가 있었다. 마침 수술을 끝내고 나오는 의사선생님(당시 외과과장 유봉옥 박사)의 보증으로 촬영이 이루어졌고, 아내의 연락으로 큰집 식구들이 비용을 챙겨 병원 응급실로 밤 11시가 넘어 찾아와 밤을 같이 새우고 이발도 못한 모습으로 설 차례를 지냈던 기억이 난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학교에서 알선하는 곳에 취업을 하겠다고 하였다.
난 화를 내면서 대학가기를 권했지만 성적이 미치지 못해 그해 대학은 포기해야만 했다. 두 아이를 불러놓고 아버지가 아파 누워계시니 아버지를 돌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나 아버지를 동생이 돌보기로 했단다. 언니는 지금까지 도시에 한 번도 못 나가 보았으니 이번 기회에 도시에도 갈 수 있어 자기가 고생이 되더라도 언니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단다. 눈물겨운 사연이었다. 우리 부부는 할 말을 잊고 보내기로 하였다.
취업된 직장에 가기 위해 집으로 인사를 왔을 때 우리 부부는 그 아이를 부등켜안고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 아이는 취업하여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 왔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우리는 그를 장수교회 공동묘원에 장사지내 주었다,
그 후 큰 아이는 우석대학교 부설 보육교사 양성소에서 1년간의 교육을 받고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얻어 어린이 집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 동생은 성모간호학원에서 1년간 교육을 받고 간호조무사로 장수 이순형 내과의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 어렵고 힘든 가정 형편이었지만 아이들이 어찌나 착하게 자랐는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할 정도다. 여자 아이들이지만 곁길로 나간 일이 없다. 그것도 나에게는 큰 복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1남 1녀가 있다. 그런데 딸 둘을 더 얻게 되어 딸 셋에 아들 하나 1남 3녀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애들과 형제처럼 잘 지내고, 그 애들이 우리 부부를 친부모처럼 따르는 것도 고맙다. 큰아이에게는 대전에 사는 좋은 청년이 청혼을 해 왔다. 키가 크고 잘 생긴 미남이다. 사실 큰아이는 키도 작고 훤한 미인은 아니지만 마음이 착해서 좋단다.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큰아이가 시집가기 전에 진안여중에서 만났던 선생님을 찾아주고 싶어 물어 보았더니 지연이가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전라북도 교육청에 문의하여 현재 중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을 찾게 되었고, 선생님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하니 그 선생님도 그 일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래서 지연이가 대전에서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자 결혼식에 꼭 참석하겠노라고 대답해 주었다.
드디어 지난 2004년 2월 28일, 큰아이는 시집을 갔다. 결혼준비 하느라 전주로, 대전으로 동분서주하던 아내에게 무척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대전 예식장에서 나는 신부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음속에 갇혀 있던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적셨다. 내가 이럴 때 이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우리가 아무리 잘 해주었다 해도 제 부모만은 못했을 텐데, 하는 안쓰러운 마음에 우리 부부는 눈물을 흘렸다. 그날 결혼식은 신부도 하객도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오늘까지 지켜 주시고 제가 큰아이의 손을 잡고
신랑에게 인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신랑의 인사를 받았다. 또 그날 결혼식장에서는 기쁨이 하나 더 있었다. 신부의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참석하셔서 15년 전에 맺은 짧은 사제의 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
결혼식 중에 신부가 가르치던 어린이집 원아들이 축하의 노래를 불렀다. 신부 부모님에 대한 인사 때 우리 부부와 신부는 또 울었다. 나는 착한 사위를 보아서 무척 기쁘다.
아버님! 아버님! 하며 전화를 걸어 올 때는 기분이 꽤 좋다. 그뿐이 아니다. 작년 10월 4일 13시 35분에 귀여운 딸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가을이라 하였는데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우리 부부에게도 외손녀가 생긴 것이다. 그 외손녀가 자주 보고 싶어 눈에 밟힌다. 그럴 땐 사진을 꺼내 보기도 하고, 이메일로 최근의 사진을 받아 보기도 한다.
우리 가을이에 대한 그리움, 그것이 사랑인 것 같다. 나는 사위에게 몇 번이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내에게 흠뻑 많은 사랑을 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