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발문
새로운 길 찾기
오 정 환
성창경 시인은 나의 처 이종사촌 처남이다. 이순의 나이를 지나며 생활도 건강도 어느 정도 원활해지면서 문득 어릴 적부터 소망했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 했었지만, 여러 가지 겪어내야 할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이렇듯 어엿한 시집을 묶어내게 되었다니 정말 잘된 일인 것 같아 고마움과 함께 손뼉을 쳐주고 싶다.
시집 <향유고래의 노래>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한 마디로 ‘길 찾기’를 주된 시적 기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시간적 배경으로는 어둠이 오기 전 저물 무렵의 석양 ‘노을’이 많이 드러나 보이며 ‘별’을 통하여 새로운 소망이나 꿈을 기원하고 있다. 내면적 성찰이나 탐구라기보다 담담하게 외적 대상과 자연을 관조하면서 잃어버린 아득한 옛것들에 대한 추억과 잔잔히 가슴에 물살 지어 오는 애잔한 그리움의 정서를 읽게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회고를 바탕으로 하는 가난한 산동네와 시장바닥의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짙은 연민이 깔려있다. 이러한 연민은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옛 정취와 현실적 괴리감으로 더욱 절실해지며 사라져간 유년의 어두운 기억들과 그 아련함은 저절로 그 시절의 너무나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던 정서로의 회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뚜렷한 정서는 약간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인식과 함께 음울한 시사적 사회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드러나 있는 사실 그대로를 직시하고 있는 점인데, 이는 어쩌면 우울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양심적 동료의식이나 일종의 시대적 사명감으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성창경 시인의 ‘길’은 무거운 새벽을 열고 길을 찾아가지만, 그 비탈길에 안개로 배를 채워야하는 어려운 유년의 기억과 함께 힘들고 가난했던 ‘비탈길’이었고 ‘골목길’이었다. 심지어 고수부지에 버려진 고무신 한 짝에서도(그 고무신마저도) 잃어버린 길을 찾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이 혹은 닫혀있거나, 혹은 쉽게 보이지 않는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숲 속으로 뚫린 청신한 길들이 가슴을 열고 있는 한, 그의 길 찾기는 계속될 것이고, 물결 출렁이는 의자, 푸른 그늘 나누던 편백나무의 나무의자를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이른 봄 눈뜨는 어린잎의 진솔한 마음으로 걷지 않은, 아직 걸어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오래오래 걸어가고 싶어 할 것이다.
창문을 열고 또 다른 별자리로 떠날 채비를 하는 ‘벽화’처럼, 보이지 않는 푸른 길이 어딘지 깊이를 재는 또 다른 길을 걷다가 들판이 붉게 물드는 아침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창에 몸으로 쓰는 말을 손끝으로 읽으며, 마지막 붉은 노을빛으로 별 하나 빚어내는 촉촉하게 비 내리는 가슴이었으면 한다.
(시인. 전 부산작가회의 회장)
☐ 해설
상처의 치유와 존재의 발견
강 영 환
성창경 시인은 늦깎이다. 그렇게 부르는 일은 그가 시를 발견한 것도 늦었고, 문학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늦었고, 등단도 늦었다. 그는 유년기에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들었다. 나이 들어 많은 경험들이 쌓이고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볼 때 그는 갑자기 문학에 빠져 들었고, 헤쳐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에 스스로를 몰입시켰다 했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습작으로 쓴 몇몇 작품이 어느 잡지에 우연히 추천이 되어 갑작스럽게 등단이라는 걸 해버렸다 그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런 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 무거운 중압감을 떨쳐내기 위하여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그 결과로 얻어진 작품들로 결국 시집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을 뜯어보면 두 가지 측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측은지심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에 예속된 존재에 관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많은 굴곡을 넘어 온 시인이 지나온 삶에서 얻어진 당연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 겪은 어렵고 힘든 삶이 가져다 준 선물이 바로 그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닭 훼치는 소리 들리는 꿈길이다
외등에 지워지지 않는 어둠이
골목을 돌아 숨이 넘어 간다
쪽문 거칠게 여닫는 산동네
가난은 늘 굽은 등에 눌러 앉아
비탈길을 따라 오른다
옆집 부엌문 깨어나는 소리
담 넘어 날 세운 날은
노동 찾아 떠나는 달그림자
난장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좌판은 날마다 얼굴을 바꾸었다
떠나지 못한 사람만 남아
뜨는 해 얼룩진 이불로 뒤집어 씌워
늦은 잠이 몸을 묶어
늙은 아침이 허기를 걱정하고 있다
「가난한 아침」 전문
작은 집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는 어느 집에서 기르는 닭이 훼를 친다. 어느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산동네에서는 골목에 사는 외등이 밤새 불을 밝혀 창으로 들어 온 불빛이 늦은 시간까지 노동에 지친 이들을 잠 못 들게 하기도 하고, 담이 낮거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옆집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엿보지 않아도 살림까지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그런 동네다. 아파트 층간 소음이 문제가 되는 요즘에 비하면 담 넘어 이웃 간에 서로 소통하는 소리는 어쩌면 정겨운 것인지 모른다. 부엌문 여닫는 소리, 아이들이 깰까봐 부부가 조심조심 다투는 소리,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고 자갈치 난장 일터로 나가야하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직장이 없어 늦게까지 이불을 둘러쓰고 남아있는 이들에게는 땟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아픈 아침인 것이다. 이런 풍경을 찾아내는 일은 따뜻한 마음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성 시인의 작품에는 소외 받고 중심부에서 밀려난 이들의 삶이 재생되고 있는 따뜻함을 견지한다.
이처럼 성시인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한다. 그는 부산에 산다. 부산의 거주지는 거의가 산록에 자리한 동네다. 이름하여 산동네라고 불린다. 그 동네를 가로 지르는 도로가 산복도로이며 그 주변에는 삶이 팍팍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가 들추어내는 이웃들의 모습은 현재적 삶이라기보다는 과거 공간, 즉 유년의 공간 속에서 함께 했던 이웃의 모습이다. 그런데 아직도 친숙한 것은 이들의 모습이 과거 공간에만 존재하는 모습이 아닌 현재 공간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단을 오르며
비탈진 난간에 기대어
아버지 발을 생각하네
노을 안고 실루엣 속으로 걸어가던
굽은 등이 눈에 들고
하루 노동을 어깨에 걸치고
까꼬막을 오르던 눈물에 잠기어
내 지나온 행적에
디딤돌 되었던 아버지 등
얼룩진 발자국으로 다가오네
포장마차에 모이는 불빛들
눈가에 맺힌 그늘을 달래는
기울고 굽은 등이 술잔을 드네
그림자로 굳어 가는 돌멩이가
밑돌이 되고
널빤지가 발판이 되는 한 칸을 만들어
계단이 되었네
…중략…
막노동에 메워지던 식솔 허기는
“별이 참 좋다”
담배 연기 검은 허공에 묻혀가고
산동네 판자 집 마당위로
별빛 모아 고향을 보았다
「아버지의 등」 일부
외국과는 달리 우리네 산동네는 도시의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서 산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 늦게 한 잔 술로 달랜 피로를 안고 돌아오곤 하는 집이 있는 곳이다. 그들의 집은 죽어서도 결코 높은 곳에 위치하지 못한다. 그가 이해하는 가난은 대물림 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술과 굽은 등으로 기억되는 아버지가 있다. 시적화자는 아버지의 굽은 등을 담담하게 바라보면서 아픔과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그것은 아버지가 떠나온 고향에 대한 버릴 수 없는 향수다. 가난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에게 가난은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지만 가난했어도 정직했던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그의 시를 탄생하게 해준 배경이어서 아름답다고 느낀다.
일평생 주머니가 비워 있어도
낯선 돈이 문턱을 넘지 못했고
그늘진 사람 눈물을 알아
납골당 아랫칸에 집을 잡았다
「아버지의 흔적」 부분
시적 화자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도 가장 낮은 곳에 집을 장만한 모습으로 ‘낯선 돈이 문턱을 넘지 못’하는 정직한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있어 세상의 비리와 불합리에 의연히 맞설 수 있었다. 그의 산동네 경험과 가난한 삶이지만 정직하게 평생을 사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사회적 발언을 쏟아낼 수 있었다. 세 모녀 사건이나 노숙자에 대한 애정이나 세월호 사건으로 숨진 학생들에 대한 사회의 모순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그런 아픔들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그가 내세우는 것은 화해와 용서다.
아침 햇살에도 그림자 보기 힘든
검정 고무신 즐겨 신는 사내
산동네 성당 침묵으로 왔다 사라지는
베드로 이름 속에 생각나는 그
수도자 같으면서 그렇지 않는 풍모
걸어가는 길 끝이 궁금하다
그늘 짙은 사람 함께 사는 빛이 나는 그늘
눈물 깊은 사람 곁에 사는 단맛 나는 눈물
흠 난 상처 어루만져 지우는 햇살
덧셈은 잊고 뺄셈에 능숙하여
등 굽히고 약칠하는 구두닦이
백 명 허기 가슴에 새기며
노동에 할킨 자국 지우는 왼손
빛을 모우는 오른손이 분주하다
「상처를 닦는 사내」 전문
위 시는 구두닦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구두에 난 상처를 치유하는 구두닦이의 모습에서 우리네 삶을 헤쳐 나가는, 또는 상처 받은 가슴을 치유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아침 햇살에도 그림자 보기 힘든 사내라는 건 일찍부터 일에 빠져 앉아서 구두를 닦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성당에 들러 닦을 구두가 있는지 살펴보고, 구두를 수거해 가서 구두에 묻은 얼룩을 지우고 상처를 메우곤 한다. 그는 그늘이지만 그늘을 닦아주는 빛이 나는 그늘이며, 눈물 곁에 있는 눈물이지만 단맛 나는 눈물이다. 자신보다는 남을 이해하는 자신의 삶에 덧셈을 잊고 뺄셈에 익숙한 사내다. 그는 노동에 할킨 왼손 상처를 지우고 오른손으로 빛을 모아 덧붙이는 분주한 사내다. 이 사내만큼 따뜻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는 실제 인물로서 아미동 산동네에서 구두를 닦아 번 돈으로 노숙인들을 보살피는 숨은 천사였다. 이를 바라보는 그것은 아버지의 정직한 가난이 물려 준 따뜻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발견해 낼 수 없는 사내다.
2.
성창경 시인이 드러내는 가난이라는 삶의 굴레는 흘러간 과거 시간 속에 살아있는 풍경이며 현실이다. 현재의 시간을 만들어 낸 과거 시간은 연속성을 가지고 시인의 내면에 머무르면서 현재의 삶에 작용한다. 그가 집착하는 다른 하나가 바로 시간이라는 철학적 명제다. 그는 존재를 시간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의 시간들은 버려지거나 소외된 사물들 속에서 발견해내는 지나간 시간들이다. 그렇게 발견해 내는 시간들이 현재 시간을 받쳐주는 근간이 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발견해내는 사물들이 던져 주는 의미는 인간의 존재에 닿아있다.
구덕산 요양병원 가는 비탈길
부서진 시계가 누워있다
따뜻한 거실 벽에서 하루를 지키다
어디를 돌아 흘러 왔는지
짧고 긴 팔 손잡기 어렵다
가슴에 새겨진 숫자
몇몇은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고
빛바랜 얼굴색이 어둡다
한 때 빈틈없는 손짓으로
창가에 햇살 불러오던 작은바늘과
단호한 음성으로 시선을 묶고
발걸음 움직였던 큰 바늘이
산에 누워있는 말뚝이 되었다
눈 맞추어 보아도
알 수 없는 손끝 방향이고
들리지 않는 발소리였다
요양병원 다녀 돌아오는 길
비탈에 버려진 시계가
치매병동 침상을 벗어나질 못했다
등 뒤에 따라 오는 초침소리
눈에 들어 핏발이 선다
「낡은 시계」 전문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은 인간만이 시간을 갖고 시간이 사회적으로 조직된다고 하면서 이를 ‘사회적 시간’이라 불렀다. 사회적 시간은 자연이 스스로 갖는 시간과 달리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시간이다. 근대사회는 시간으로부터 그 본래의 의미를 없애고 추상적으로 분할 가능한 시간 계산을 발달시켜 왔다. 근대 기계문명의 첫 번째 특징은 시계를 통해 만들어내는 시간의 규칙성이다. 규격화된 사회에서 시간은 사람들에게 어떤 통제를 가하는 수단이 되고 있으며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시간은 곧 인간 뿐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생물에게 씌워진 굴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다. 시간을 받아들이거나 시간을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에 시간은 여러 의미로 나타난다. (1)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머무름이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무한히 연속되는 흐름. (2) 한 시점에서 다른 시점까지의 사이. (3) 특정한 일을 위해 따로 지정해 놓은 때. (4) 연속성 속에서의 특정한 시점. (5) 사람이 자기의 일과결부해서 주관적으로 정하여놓은 동안. (6) [철학] 모든 존재의 비가역적非可逆的 변화와 현상의 지속성이 근거를 두는, 물질의 기본적인 존재형식. (7) [물리] 현상의 변화과정. 또는 서로관련을 가지는 여러 현상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데 쓰이는 변량變量. (8) 수 관형사 뒤에서 의존적 용법으로 쓰여, 하루의 24분의1이 되는 동안을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 등으로 어떤다른 언어보다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만큼 시간은 우리와 친숙하면서 풀지 못할 많은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할 것이다.
가슴을 열어 보면
소리는 떠나지 않고 발이 묶였다
검은 눈에 시선을 맞추니
날개를 단 길이 달려 온다
색깔이 난무하다
푸른 길이 어딘지
깊이를 재는 그릇이 좁다
미로 속으로 불빛을 불러오지만
벽이 된 문 입을 닫았다
차가운 낭하에서
신생대가 웃고 있다
터널은 길고 어둡고
길이 묻힌 난수표다
「열리지 않는 책」 전문
책은 시간이 숨어 있는 곳이다. 책을 여는 순간 과거의 시간들과 미래의 시간들이 쏟아져 내게로 온다. 성 시인은 시간을 받아들인다. 사물들 속에 존재하거나 주변에서 지나가는 시간을 포착하여 담담하게 서술하여 그것을 드러내어 현실화 시킨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꿈꾼다.
하늬바람 개옻나무를 스쳐 지나가고
소낙비 온 산 헤매며 함께 한 손짓
한 겹씩 벗겨져 가는 흑백사진
흐린 창 뒤 표정을 감추고
뒷걸음질 치며 혼자 늙어 가는 시간이다
「앨범 속에는」 끝 연
결국 시간은 존재를 밝히는 가장 핵심적 요소다. 하늬바람, 개옻나무, 소낙비, 산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한 장의 흑백 사진 속에 머문다. 과거 시간이 존재하는 흑백 사진과 그것을 보고 있는 현실 즉 현재 시간이 만들어 내는 존재의 의미, 그것은 곧 뒷걸음질 치며 늙어가는 시간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갔음을 느끼는 건 바로 사진일 것이다. 사진은 과거 지나간 시간이 정지해 있는 화면이다. 그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현재를 느끼는 것이 바로 존재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에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물에 대한 인식에 출발점을 둔다. 그는 사물이나 대상 속에서 시간과 존재를 발견해 내려고 한다.
눈물은 마두금 현을 타고 흘렀다
어미젖을 찾는 새끼가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밀어
젖꼭지를 찾지만
네 발이 품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래를 삼킨 바람이 길을 만들어
차가운 별이 흐르는 사막에
탄생은 또 하나 아픔이 되었다
가슴 적신 선율이 가닿은 눈물샘에
뜨거운 눈물방울이 생겨나
어미와 새끼 사이
모래 언덕을 넘어 젖이 흘렀다
유목이 숨 쉬는 초원
마두금 현을 떠난 푸른 음이
어미 두 눈에 빛을 만들어
그늘진 사막을 먹이고 있다
「낙타의 눈물」 전문
몽골 고비 사막에서 낙타를 키우는 방법이다. 어미 낙타가 새끼를 낳고 기력이 쇠약해져 죽었다면 그 새끼는 어미젖을 먹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된다. 낙타의 다른 어미는 자신의 젖을 어미 잃은 새끼 낙타에게 전혀 나눠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타 주인은 다른 어미를 슬픔에 빠뜨리고 동정심을 일으켜 다른 새끼에게도 젖을 나눠 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새끼의 어미 곁에서 마두금이라는 현악기를 타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 노래를 들은 낙타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때를 타서 어미 잃은 새끼 낙타를 끌어다 슬픔에 빠진 어미 낙타의 젖을 물리게 한다. 그때는 그 어미도 젖을 먹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의 배경이다. 배경을 알면 시가 쉽게 이해된다. 이 시에는 그저 낙타와 인간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제재 자체가 시가 되는 경우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도 시인의 능력이다. 무엇이 시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아는 능력이 곧 좋은 시를 만날 수 있게 한다.
성창경 시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할지는 모른다. 늦게 시작했기에 조급하게 이루려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세상을 바라볼 일이다. 그리고 이제 철학적 명제를 놓고 깊이 있게 탐색해 보아야 할 때다. 그 자리에 「낙타의 눈물」이 놓여 있다. 시는 결국 우리 인간의 삶에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