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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현대시 읽기
시와 환유·2
-수평적 세계관과 탈은유의 정치학
박대현(문학평론가)
1. 환유와 수평적 세계관
언어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은 인류의 문화 속에서 오랜 기원을 지닌다. 우주의 이성과 질서를 의미하는 로고스의 뿌리가 곧 말, 즉 언어라는 사실은 인간 스스로 언어에 절대적인 특권을 부여했음을 말해준다. 기독교 전통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은유가 지닌 절대적 위엄은, 인간의 사유 체계를 지배하는 은유의 역동적인 힘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좌다. 동양에서도 이와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는데, 불교의 산스크리트어(梵語)를 번역하지 않고 발음대로 그대로 외는 진언眞言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언어가 우주의 보편적인 진리를 ‘대체’한다는 믿음이 인류의 문화 깊숙이 새겨진 결과다. 이처럼 은유는 삶의 근원과 본질을 지향하고자 하는 수직적 세계관에 적합한 수사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환유는 수평적 세계관을 지향한다. 환유의 수평적 세계관은 세계의 궁극적 진리, 혹은 신성성을 탈각한다. 환유적 주체는 수직적인 세계를 추구하기보다 부조리한 문제로 가득한 현실 세계에 집중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은유적 주체가 언어의 수직적인 계열체(언어 선택)를 통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상위 개념을 향해 뻗어나가려 한다면, 환유적 주체는 언어의 수평적인 통합체(언어 배열)를 통해서 현실의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환유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시원始原의 대상을 추구하는 수직적인 수사학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평범한 일상적인 방식의 일부”로서의 수평적인 수사학이다. 환유의 수사학적 일상성은 대체로 ‘죽은 은유’처럼 시적 긴장을 지니지 않는 평범성을 지닌다.
야콥슨이 환유를 의미론적 환유를 벗어나 구조론적 환유로 바라보았던 것도 환유의 일상적 평범성에서 비롯된다. 야콥슨의 관점에서 환유는 수사학적 의미의 관점에서 다른 단어를 대체하는 비유로서의 전통적인 기능을 잃게 된다.구조론적 환유로서의 문법적 환유는 의미의 인접성이 아니라 문법적 인접성을 지시하는 말이다. 구조론적 환유는 환유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장을 구사하는 시, 소설, 희곡 등의 문학 텍스트뿐만 아니라 문학 이외의 모든 텍스트에도 존재한다. 문법적 배열을 통해서 구현되는 모든 통사체는 구조론적 환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시 텍스트에는 당연히 구조론적 환유가 기본값으로 존재한다.
시 텍스트에서 구조론적 환유가 부각된다는 말은 달리 말해 시적 긴장을 유발하는 은유(시적 은유)가 최소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구조론적 환유는 시에서 시적 은유를 제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 환유의 충동과 리얼리즘
은유가 대상의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수직적 세계관에 경도되는 경향성이 있다면, 환유는 이 세계를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배열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이것이 현실의 재현이나 폭로라는 문학적 사조와 만나게 될 때, 환유는 리얼리즘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간주된다. 즉, 환유는 리얼리즘 예술에 적합한 수사학이 된다.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 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드(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짜고짜 그의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시영, 「봄날」 전문,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창비, 2007)
이시영의 위 시에는 은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구조론적 환유만이 존재한다. 야콥슨의 용어를 빌리자면, 문법적 환유다. 이 시를 지배하는 것은 비유의 언어가 아닌 사실의 언어다. 수직적 세계관을 버리고 수평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통합체로서의 언어는 불법 체류 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노동자 ‘푸아드’가 추락사에 이르는 장면은 근원과 본질 따위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은유도 필요치 않다. 노동자의 추락 그 자체가 우리 현실의 실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구조론적 환유(문법적 환유)만으로 불법 체류 노동자가 죽음에 이르는 리얼리티를 구성한다. 은유가 개입하는 순간 노동자 ‘푸아드’는 평등, 정의, 인권 등의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상위 개념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가 계열체의 언어를 관통하여 위계화의 층위에 놓이는 순간 현실의 리얼리티는 수직적 세계관의 하위 요소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철저하게 구조론적 환유(문법적 환유)의 층위에서만 서술된다. 이로써 노동자 ‘푸아드’가 죽음에 이르게 된 봄날의 일상과 비극 그 자체가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이다. 구조론적 환유는 비극이 강화될수록 극단화된다.
경찰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였다. 2009년 1월 20일 오전 5시 30분, 한강로 일대 5차선 도로의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명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대테러 담당 경찰특공대 49명, 그리고 살수차 4대가 배치되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강로2가 재개발지역의 철거 예정 5층 상가 건물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중인 세입자 철거민 50여 명도 경찰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최후의 자위책으로 화염병과 염산병 그리고 시너 60여 통을 옥상에 확보했다. 6시 5분 경찰이 건물 1층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곧바로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6시 10분 살수차가 건물 옥상을 향해 거센 물대포를 쏘았다. 경찰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은 시민을 중요 범죄자나 테러범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6시 45분, 경찰특공대원 13명이 기중기로 끌어올려진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에 투입되었다. 이때 컨테이너가 망루에 세게 부딪쳤고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 물대포를 갈랐다. 7시 10분, 망루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7시 20분 특공대원 10명이 추가로 옥상에 투입되었다. 7시 26분, 특공대원들이 망루 1단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 격렬히 저항했고 이때 내부에서 벌건 불길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으며 큰 폭발음과 함께 망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물대포로 인해 옥상 바닥엔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물이 흥건했고 그 위를 가벼운 시너가 떠다니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농성자 3, 4명이 연기를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날의 투입작전은 경찰 한 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이시영,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밑줄; 인용자)
위 시는 30명의 사상자를 낳은 용산 참사를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관용적 표현에 가까운 직유가 쓰이고 있을 뿐, 다른 비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구조론적 환유가 지배한다. 그래서 밑줄 친 부분을 제외하면 용산 참사 현장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에 가깝다. 경찰과 철거민의 대치가 어떻게 참사로 이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실적 진술이 시의 주된 내용이다. 은유를 제거한 구조론적 환유는 현장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다. 시인이 구조론적 환유 체계를 엄밀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분노의 표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지배하는 수직적 세계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공권력의 무도함과 타락상이 어떤 참사를 빚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철거민들이 망루 속에서 불에 타죽는 참사가 구조론적 환유를 통해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론적 환유 체계의 시학은 억압과 피억압의 질서 체계를 붕괴시키는 힘을 지닌다. 수직적 세계관의 밑바닥에 위치한 현장을 사실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지배 세력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법적, 규범적, 제도적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수사학적 장치들을 무력화하는 시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시영의 시는 이후 뉴스 보도를 인용하는 것으로 진화하는데, 이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환유적인 충동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저도 바닷가에서 자라 잘 아는데 바다엔 밀물 썰물이 있잖아요? 그리고 파도가 좀 세면 어때요? 저 바다가 반드시 우리 애를 엄마 곁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우리의 소원이 이렇게 간절한데 바다가 왜 그걸 모르겠어요? 우리 애가 돌아오면 내 곁에 하룻밤 푹 재워서 하늘로 돌려보낼 거예요. 그거밖에 없어요. 지금 제 희망은······.”
-이시영, 「5월 3일, 뉴스타파」 전문,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실천문학사, 2014)
이 시는 2014년 5월 3일 뉴스타파 보도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 부모의 육성을 인용 부호 처리하여 그대로 차용하는 시적 전략을 쓰고 있다. 이 전략은 문학의 리얼리티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미학적 가상을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근원적 한계를 넘어선다. 이 시는 미학적 가상을 벗어나 현실 그 자체를 시 속으로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리얼리티를 실제 현실 속에서 도려내서 실현한 방식이다. 시의 미적 가상이 현실의 참혹함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때, 실제 현실을 텍스트 속으로 가져오고자 하는 리얼리티의 충동이 발생한다. “때론 한 줄의 기사가 그 숱한 ‘가공된 진실’보다 더 시다웠다.”라고 한 시인의 말은, 바로 이러한 리얼리티의 충동에서 비롯된다. “바다가 반드시 우리 애를 엄마 곁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활유법(혹은 의인법)은 시적 긴장을 지니지 않는 일상적 어법에 가깝다. 그리고 “하늘로 돌려보낼 거”라는 진술은 ‘하늘’은 천국과 공간적 인접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일종의 환유(의미론적)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일상의 어법 차원에 속한 표현이다. 이 시는 시적 수사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실제로 발화된 유족의 말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구조론적 환유만이 남아 있다.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구조론적 환유의 시학은 은유를 최대한 배제한다. 다시 말해 환유의 시학은 의미론적·구조론적 환유를 바탕으로 은유의 수사를 최대한 배제한 ‘빼기’의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리얼리즘은 현실의 재현과 폭로에 최대한 집중한다는 점에서 은유와 같은 수사적 장식을 최대한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얼리즘에서는 구조론적 환유로서의 서술(언어 배열)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환유의 수평적 확장과 탈은유의 정치학
환유시는 전통적으로 언어 형식에서 비롯되는 미적 충격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과 폭로가 야기하는 인지적·정서적 충격에 보다 의거하는 시적 양식이다. 그래서 환유시는 현실 고발과 현실 비판의 기능을 자주 지니게 되며, 이를 위해 현실의 재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대시에서 환유시는 리얼리즘의 방법론적 범주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리얼리즘의 세계관을 벗어나 탈중심주의적 세계관을 실현하는 적극적인 방법론으로 채택되고 있다. 환유적 충동을 통해서 새로운 언어 실험을 감행하거나 미적 충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 아이가 거울을 보고 울고 있네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울고 있는 아이가 눈을 뜨는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중천의 해만큼 키가 자라버린 한 아이가 거울 속에서 혹은 거울 밖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울고 있네
- 이민하,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전문(환상수족, 열림원, 2005)(밑줄 및 기호; 인용자)
이 시는 은유적 세계관로부터 벗어나 환유적 충동으로 가득한 수평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에서 ⓑ로 가는 과정은 구조론적 환유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 ⓐ의 문장, 즉 “한 아이가 거울을 보고 있네”라는 문장은 의미의 심층적(수직적) 탐색이 아니라 의미의 수평적 확장으로 나아간다. ⓐ라는 짧은 문장이 추가적인 언어 배열을 통해서 그 의미가 보다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문장을 통해서 세계의 근본적인 의미의 탐색이 아니라 이 세계의 수평적인 확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 충동은 탈중심주의적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보듯, “한 아이”가 존재하는 곳이 “거울 속”인지 “거울 밖”인지 알 수 없고, “거울 속” 아이와 “거울 밖” 아이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세계의 진리, 즉 중심이 사라진 시대에는 의미의 심층적 탐색은 무기력해지고 불가능하며, 그래서 의미의 수평적인 미끄러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중천의 키만큼 키가 커버린 한 아이가 거울 속에서 혹은 거울 밖에서” “울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언어 배열을 통한 수평적 확장은 이른바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한 데리다의 ‘차연’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의미(진리)의 부재 속에 기표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차연은 이 세계 속에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기표들의 무덤을 남긴다. 이제 인간은 진리의 현전이 불가능한 세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진리를 중심으로 위계화된 모든 질서는 와해되기 시작하고 진리의 파편만이 여기저기를 떠돈다. 진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의미의 유기성은 붕괴된다. 그리하여 세계의 실상을 유기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환유시는 마침내 유기적 형식에서 벗어나 ‘비유기적 형식’으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불-무당집, 죽은 할머니가 지저분한 손으로 자꾸만 권하는 약과
꽃-타오르는 이마, 할머니가 준 약과를 먹고 항문에 수북이 난 털
새-싫증난 애인의 입술, 처음 하는 질문의 얼룩
구름-불거진 문장(文章), 한판 굿을 마치고 벗어던진 겹버선
집-색색의 지붕들, 죄다 팔레트에 넣고 섞으면 무슨 색일까, 똥색 혹은 쥐색
자동차-괴물들의 난교, 끝에 참 못 만든 핏덩이
그리고 겨울, 나랑 똑같이 생긴 조카의 책가방 속에는 귀를 찢는 클랙슨 소리가 티격태격 얽혀 있었다
뭐 하니, 무덤 만들어, 무덤은 왜, 삼촌 묻어주려고, 추울 텐데, 그럼 따듯할 줄 알았어!
키스-척척해, 척척해
-황병승, 「똥색 혹은 쥐색」 전문, 여장 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 시는 낱말 사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단어의 배열은 일정한 규칙이나 순서가 발견되지 않는 무작위성을 띤다. ‘불-꽃-새-구름-집-자동차-키스’로 연결되는 단어의 배열과 그에 대한 서술은 의미의 유기적 연결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무작위로 선택한 후 그에 대한 진술을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낱말에 대한 술어적 진술 역시 ‘집’에 대한 진술을 제외하면 의미의 유기적 연결성과 통일성이 발생하지 않는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 시는 새의 시점으로 내려다본 이 세계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와 인접한 ‘구름’,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집’들의 ‘지붕들’과 도로의 ‘자동차’가 그것이다. 하지만 ‘구름’, ‘집’, ‘자동차’의 관계는 유기적이지 않고 파편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키스’라는 낱말은 뜬금없을 뿐만 아니라 제시된 일곱 개의 낱말에 대한 진술 역시 전체적으로 유기성과 통일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배열은 환유적이지만 철저히 비유기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편화되고 단절된 이미지는 유기성과 통일성을 상실한 탈중심주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환유가 지향하는 수평적 세계관을 넘어서서, 수평적 세계관에 내재한 일체의 질서와 규율마저도 파괴하고자 하는 시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는 하나의 ‘시선’이나 ‘진리’로 세계를 조망하는 일점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의 시선과 진리는 수직적으로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수평적으로 무한히 쪼개진 채 분산되어 있어 있다. 탈중심주의 세계관 속에서 시선과 진리는 수직적인 위계화의 질서를 거부한다. 은유의 세계관에서 환유의 세계관으로의 이동은 다분히 일점 원근법적인 진리(시선)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은 위계화된 질서의 첨탑으로서의 진리를 거부한다. 이들은 ‘일자’一者에서 ‘다자’多者의 진리로 나아가는 동역학 속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진리의 잣대로 규정하고 재단하는 행위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그러한 규정이 남긴 현실적인 상황을, 그로부터 비롯되는 내면의 정황을 ‘문법적 환유’로 배열하는 것으로 시적 역능을 발휘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이 은유가 아니라 환유를 통한 시적 구성 방식을 선호하는 주된 이유가 된다.
저는 마음이 없군요 사람도 아니군요
우산을 쓴 사람이 바지를 입은 사람에게
“진심이야?”
묻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빗속을 걷습니다
무심하게 걷습니다
비도 가득 마음도 가득 가로등도 가득 돌도 가득
그런 것이 신도시의 비 오는 저녁 풍경이고
전광판에는 사람이 미래라고 적혀 있습니다
“너도 사람이야? 네가 인간이야?”
사람이 사람에게 자꾸 사람이 맞느냐고 묻는 광경이 하염없이 펼쳐지면 저녁은 깊어지고 비바람은 거세집니다
-황인찬, 「외투는 모직 신발은 피혁」 부분(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2023)
화자는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부정당하고 자신의 ‘사람’됨을 부정당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퀴어의 정체성을 지닌 화자는 이성애 중심주의자(형이든, 아버지든, 그 누구든)로부터 “너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폭력적인 말을 들었을 법하다. 그러한 폭력적 규정은 다자(多者)의 진리가 아니라 일자一者의 진리를 추종할 때 발생한다. 은유는 일자의 진리를 열망하는 정신성에 부합하는 수사학이다. ‘A는 B이다’와 같은 은유적 수사학은 자기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진술의 형식을 지닌다. 진리에 대한 확신은 무모한 것이다. 대상을 화자의 욕망에 종속시킬 때, 그처럼 무모한 진술은 가능해진다. 진술의 무모함은 폭력성을 지닌다. 그래서 황인찬의 다른 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은유’의 세계에서 이들은 “누가 볼까 두려워”(황인찬, 「은유」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너는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은유를 쓰지 않는다”(「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처럼 은유의 세계관에 도발할 수밖에 없다.
은유의 수직적 세계관이 지닌 폭력성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소수자는 은유의 수사학을 본능적으로 멀리하게 된다. 이 시에 환유적 진술만이 배열되고 은유적 진술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화자는 ‘마음이 없는 것’, 혹은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규정에 노출되지만, 자신의 내면을 다른 무엇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 어떤 중심에서 비롯된 위계에 종속시키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정황을 배열하면서 환유적으로 펼쳐 보일 뿐이다. 이를 두고 ‘구조론적 환유’(야콥슨의 용어로는 ‘문법적 환유’)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은유의 수사학을 벗어나 자신의 억압된 정황(상황)을 서술하는 행위로서의 환유는 권력의 위계를 벗어나 비유기적인 형식의 수평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일자의 진리를 향한 은유가 과거의 수사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다면, 일자의 진리에서 비롯된 피억압의 피로가 누적된 오늘날엔 환유가 오히려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환유는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확장하며 지금 여기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맨얼굴’이 지닌 의미는 은유적 세계관 속에서 잘 읽힐 리가 없다. 환유의 시는 은유의 실패와 부정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적인 욕망의 때를 벗고 사물의 본래적 침묵과 세계의 공백에 가닿으려 하기 때문이다. 환유는 유기적 형식에서 비유기적 형식으로, 그리고 은유가 닿지 않는 세계를 생성하는 시의 문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환유는 은유를 넘어서는 세계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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