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읽는 역사이야기 19
1851년 왕실전례王室典禮에 개입됐다 하여 유배 산 조희룡
조해훈(고전평론가)
만 겹의 구름산, 만 겹의 물결 속에 萬疊雲山萬疊水·만첩운산문첩수
사또가 술을 실은 돛배 한 척 보냈네. 使君送酒一帆迴·사군송주일범회
개펄의 독한 기운 서린 천년 궁벽지에 瘴煙湫僻千年地·장연추벽천년지
누가 매화 심부름꾼이 올 줄 알았으랴? 誰識梅花使者來·수식매화사자래
위 시는 조선후기인 19세기에 주로 활동하고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시로, 『우해악암고又海嶽庵稿』에 들어있다. 『우해악암고』는 조희룡이 유배지 전남 신안군 임자면 임자도荏子島에서 유배살이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의 행로를 기록한 시집이다.
먼저 조희룡이 누구인지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그는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의 15대 손으로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 600번지 각심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814년에 어머니 전주 최씨가 세상을 떴고 다음해 6월에는 아버지 조상연趙相淵마저 잃었다. 조희룡은 아버지가 세상을 버린 27세에 가장이 되어 할아버지 조덕인趙德仁과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리하여 젊어서부터 생계현장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시회에 참여하고 서화 골동을 수집하는 등의 예술 활동 및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다.
1847년 봄에 조희룡은 유최진 등과 함께 여항문사들의 동인인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하여,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나누었다. 조희룡의 나이가 59세로서 가장 많았고, 유최진과 이기복은 동갑으로 57세, 전기는 23세, 유숙은 21세, 나기는 20세, 유재소는 19세의 나이였다. 조희룡은 이처럼 19세기 대표적 여항시사인 벽오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58세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렸다.
조희룡은 서화 골동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특히 벼루 수집에 일가견이 있었다. 좋은 벼루를 보면 무슨 수를 쓰든지 손에 넣고야 말았다. 그가 수집한 벼루에는 ‘선화난정연宣和蘭亭硯’ ‘기효람옥정연紀曉嵐玉井硯’ ‘임길인풍자연林吉人風字硯’ 등의 이름이 붙은 수십 개의 명품이 있었다.
조희룡은 먼저 시 공부를 한 다음 서른 살 무렵인 1818년께부터 그림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 중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가 대표작 중의 하나다. ‘매화가 흩날리는 숲속에 있는 책이 가득한 집’이란 뜻의 이 그림은 봄날 산속에 매화가 핀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홍매대련紅梅對聯」도 유명하다. 조희룡의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화벽梅花畵癖을 자신의 저서인 『석우망년록』에 상세히 적었다.
위 시에서 사또가 그림을 요청한 때는 임자도에 유배돼 있던 1852년 가을이었다. 영광사또가 술과 함께 사람을 보내 매화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것이다. 비록 그가 궁벽한 섬에서 유배를 살고 있었지만 매화 그림을 독창적이고 개성적으로 잘 그렸던 그의 솜씨가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1851년 예송논쟁인 왕실전례王室典禮에 개입되었다하여 임자도에 유배되었다가 1853년에 해배되었다. 그러면 조희룡이 어떻게 임자도에 유배됐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9세기 조선시대의 상황을 보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번갈아 가며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11세 때 조선의 제23대 왕으로 보위에 오른 순조(재위 1800~1834)는 13세 때 14세인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딸을 비로 맞았다. 그녀가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그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전에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해 경주김씨 김관주와 심환지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중 제24대 왕인 헌종(재위 1834~1849)이 서거하자 안동 김씨들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이원범을 데려와 임금에 앉혔다. 그가 25대 왕 철종(재위 1849∼1863)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이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안동 김씨와 번갈아가면서 세도정치를 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풍양 조씨 가운데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엄趙曮이 있다. 그는 풍양 조씨 회양공파의 분파인 한평군파이다. 이 한평군파는 조선 헌종 때 세도정치를 폈던 집안으로 풍양 조씨의 주축이 되었던 바, 조선 후기에는 안동 김씨와 쌍벽을 이루었다. 즉, 조엄의 손자 조만영이 문조(익종)의 장인이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조만영의 외손)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동 김씨가 풍양 조씨 인맥에 압박을 가했다. 발단은 철종의 친할아버지 ‘진종’의 위패를 어디에 봉안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영의정 권돈인은 “진종은 철종 이원범의 개인적 할아버지에 불과하다. 진종의 위패를 종묘로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그러자 안동김문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권돈인과 그와 가까운 자들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851년 6월 권돈인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연이어 제기되었다. 김정희와 조희룡 등에게까지 비난이 확산되었다. 성균관생들의 상소에 이어 7월 21일에는 사간원과 사헌부까지 나서 처벌을 요구하였다.
상황이 계속 이렇게 이어지자 철종은 권돈인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유배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권돈인은 강원도 화천, 권돈인과 가까운 김정희는 함경도 북청으로, 그의 아우인 김명희와 김상희는 향리로 추방하라고 하였다. 또한 조희룡과 각刻을 하는 오규일은 권돈인과 김정희의 심복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절도에 정배하라는 명이었다. 그리하여 조희룡은 임자도로, 오규일은 전라도 고금도로 각각 흩어졌던 것이다. 당시 김정희는 66세의 노구로 두 번째의 유배였다. 조희룡은 63세였다.
조희룡은 8월 22일 유배길에 나서 절도인 임자도에 도착했다. 조희룡의 그림 중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개인소장)라는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은 자신의 적거지謫居地를 그린 것이다.
1951년 10월 유배 온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권돈인의 유배지가 화천에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대사헌과 홍문관에서 상고하여 권돈인은 나라의 흉적이니 그에 마땅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1852년 8월에 권돈인과 김정희는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조희룡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조희룡은 유배지에서 그림에 있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대나무 그림을 새로이 그리고 매화 그림 세계에 있어서도 예술혼이 더욱 깊어졌다. 당호가 있는 조희룡의 작품 총 19점 중 8점이 이때 나왔는데 모두가 병풍·화첩·대련일 정도였다. 또한 산문집 『화구암난묵』, 시집 『우해악암고又海嶽庵稿』, 편지글을 모은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 예술 이론서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雜存』 4권을 집필하였다. 조선 후기 위항지사 문학의 백미로 불리는 4대 기본서가 절도인 임자도에서 탄생한 것이다.
여하튼 우리 미술계에서는 조희룡과 그 주변의 화가들이 문인화의 조선화를 추구한데 반해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허유는 중국 정통 남종 문인화의 이념에 충실했다는 평을 한다. 즉 조희룡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하나의 세계, ‘조선 문인화’라는 세계를 찾아준 인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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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훈|1960년 대구 출생으로 1987년 《오늘의 문학》,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사십 계단에서』, 『생선장수 수리공』 등 여러 권을 펴냈다. 최게락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지리산에서 고전박물관 「목압서사」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