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신작시|김미선
회색은 왜 모서리처럼 아플까? 외 1편
당신은 어디에도 없어요 뜨겁지 못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더구나 부풀어 오른 격분은
온갖 거품을 맛보며 늙어 갈 뿐 이여요
젖은 얼굴이 숨소리를 만들고
잿빛 세상으로 물들어 가죠, 아무리 밀어내어도
스미고 또 스며들어
흐르는 것들뿐인 신호등 앞에서 움찔거리는
당신의 그림자가 또 신호를 놓치는 군요
저 만치 멈추어 소외된 우주를 견디는 것처럼
어눌한 표본이 당신의 사랑법이라서
당신의 눈동자엔 늘 안개가 서성여요
생의 긴 이랑을 떠도는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명쾌히 날지 못하는
저 먹구름을 보아요
웅숭깊게 똬리를 튼, 그림자뿐인
모서리에 등줄기를 질끈 묶어 두고
커브 길을 돌아나가는
당신이 웃는 건 웃는 게 아니잖아요
-------------------------------------------------------
여행 증후군
부서져 사라지면 안 되잖아 풍랑이 이는 거친 섬으로 들어갈 거야 떠돌이 바람처럼 검붉은 마음이 굴러떨어질 때가 있어 영감을 얻으면 또 다른 우주를 꿈꾸는 그 덫에 걸리고 싶은 거지 젖은 망각을 어루만지며 결코 부서져 녹아내리지 않는 되돌이표를 끌어안고 싶어 반복되는 아지랑이가 봄날은 아니듯 발자국은 끊임없이 낡은 이젤을 배반하는 것이지 어쩌다 들어선 모래성에 행운이 찾아 들까 머나먼 사막은 바다 끝에 있어 거기까지 가보고 싶은 거야 바다내음에 이끌린 별빛에는 히잡을 걸친 여인의 신발이 쌓이고 있어 샤갈의 꿈꾸는 푸른 연인을 닮고 싶은 거야 느닷없이 깨어난 고백의 심장에 꽂힌 거지 온몸으로 꽃의 뼈를 움켜쥔 저녁을 걷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