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1. 광복과 6∙25전쟁
(1). 광복 이후
⓵ 광복 직후 안산의 상황
조국의 광복 소식은 안산 지역 전체에 전해졌으며 안산 주민들은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다. 당시 안산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초기에는 좌익과 우익 모두가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안산에서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인민위원회는 1946년 1월 7일 선거를 거쳐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는데, 인민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결성되기 전부터 이미 인민임시자치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실제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945년 미군정의 내부보고서에 의하면 안산은 경기도 내에서 포천, 수원,용인, 평택과 더불어 인민위원회가 청사를 인수하여 실제 행정 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1945년9월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군정(軍政)을 실시하게 되었다. 안산에는 1945년 10월 28일 메이플 대위가 이끄는 총 5명으로 구성된 제60군정중대 소속 파견반이 배치되었다. 당시 제60군정중대는 수원에 본부를 두고 안산을 비롯해 여주, 용인, 안양,안성, 평택, 이천 등을 관할하였는데, 그 중 5명으로 구성된 안양분견대가 안산을 담당하였다. 안산의 군정도 미군정의 한국화 정책에 영향을 받아 미 군정관에는 미군 장교가 임명되고 군수와 경찰서장에는 한국인이 각각 임명되어 안산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남조선과 도입법의원 경기도 대의원 선출은 1946년 10월 29일 경기도청 회의실에서 2부 21군 대표 46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안산이 속한 제5구에서는 평택군수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경기도 대의원으로선출되었다. 이로써 안산군정도 어느정도 광복직 후의 혼란상은 타개하는 듯 하였다. 한편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가 국내에 보도되면서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점차 광복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있던 안산 지역에서도 탁치 문제로 다시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안산 우파 인사들은 반탁 궐기대회에, 좌파 인사들은 찬탁 궐기대회에 각각 참석하여 집회상황과 지지도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하였고, 안산주민들은 탁치 문제를 놓고 다시 대립하였다. 이로써 광복 직후 안산 지역에서는 청년단체와 주민들이 친일 청산문제와 좌우이념, 그리고 탁치 문제를 놓고 나뉘어져 혼란이 초래되었다.
⓶ 정부의 수립과 안산의 상황
남한 정치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단독정부수립 지지 세력과 김구∙김규식을 광복을 맞아 환호하는 국민들 중심으로 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수립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결국 유엔이 의결한 대로 1948년 5월 10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한에서만 실시한 5∙10선거에
서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선거 당시 전국적으로 총선거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수암지역에서도 투표소가 소각되는 등 반대운동이 있었다. 선거 결과 안산 지역이 속해 있는 시흥군에서는 무소속의 이재형이 당선되었다. 제헌국회는 7월 17일에는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공포하고 이 헌법에 의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2) 6∙25전쟁과 수리산전투
북한에 의한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였다.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점령하였고, 안산지역에 처음 출현한 것은 1950년 7월 3일경이었다.「 시흥군내각면 당부 정치정세 보고철」(1950년 8월, 선전선동부)에 의하면, 시흥군의 주요 당간부로는 군당위원장에 채석우, 선전부장에 이규백, 수암면 당위원장에 박성수 등이 있었으며, 각 면 당위원회는 1950년 7월 7일부터 조직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민천, 여맹, 농맹 등의 사회단체들도 뒤이어 조직되었다. 이로서 안산 군민은 약 두 달 간 공산당의 치하에 있게 되었다. 안산 지역에서의 전투는 1951년 공산군의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이 평택-삼척선으로 철수한 후 반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으며 주로 수리산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 이었다 수리산은 영등포로 통하는 국도와 반월리를 거쳐 소사 또는 인천으로 통하는 보조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국군 제15연대, 미군 제25사단 제35연대, 터키여단으로 편성된 공격제대는 1월 31일부터 안산 북동쪽의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하였다. 공격제대는 첫날 수리산 부근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하였으나 의외로 쉽게 무혈점령하였다. 그러나 공격제대는 이때부터 중공 제150사단과 주야로 수리산의 주인이 바뀌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게 되었다. 사단은 적의 계속되는 증원과 야간공격, 수류탄공격은 물론 터키여단과의 언어 소통장애로 인한 협조된 공격이 부진하자 사단예비인 미 제27연대를 터키여단 쪽으로 투입하여 수리산 일대의 일부 진지를 점령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때 국군 제15연대도 31일 미 전차의 지원 하에 2개 대대 병진대형으로 모락산을 공격하였다. 미군 제35연대의 수리산 공격이 지연되어 일시 방어태세로 전환하기도 하였지만 공격개시 5일 만에 치열한 백병전을 치루며 이를 점령하였다. 이후 유엔군은 1951년 2월 4일까지 수리산을 비롯한 주변의 주요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한강선 진출을 목전에 두었다. 안산 지역은 유엔 항공기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공산군의 예상 집결지 일대를 집중적으로 폭격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안산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통계는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 안산이 속해 있던 시흥군 전체의 통계를 통하여 그 피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956년판 《경기도지》에 의하면, 1951년 9월 1일 현재 시흥군(남면, 수암면, 군자면, 안양읍, 서면, 과천면, 동면,신동면)의 인명피해는 사망1,888명, 납치가 165명, 부상이1,022명등총3,165명이었다.
2.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농촌사회의 변화
(1) 새마을운동의 농촌개발 및 농민동원 전략
1972년 정부는 운동의 전개 방향과 추진 방향을 체계화하고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서 전개했다. 현 안산 지역 내에서는 대부도 남2리, 선감리, 시흥군 군자면 원시1리 등의 성공사례담이 확인된다. 1972년 당시 이들 지역의 새마을지도자의 연령은 각각 36세, 35세, 42세였다. 새마을지도자와 더불어 마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이장 역시 젊은 층의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촌 근대화를 열망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선감도의 경우처럼 개별적으로, 또는 4H운동과 같은 집단적인 움직임들로 자라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되고 새마을지도자 및 주민들의 자발성이 극대화된 마을에는 그 중심에 새롭게 성장한 세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3년 정부는 지원 전략을 더욱 체계화했다. 전국의 마을을 발전 정도에 따라 기초, 자조, 자립마을로 구분해 차별적인 지원을 통해 보다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유도했다. 1972년 경기도는 총 2,312개 마을에서 285개 마을을 완성마을로 선정해 150만 원씩의 시상금을 주었다. 이 완성마을은 대체로 자립마을과 일치한다. 1972년 당시 안산 지역에서는 7개 자립마을과 다수의 기초마을, 자조마을이 있었다. 그 후 1979년 반월출장소에 수용된 41개 마을은 모두 자립마을로 분류되었다. 1980년 정부는 새마을 구분을 자조, 자립, 자영마을로 변경했다. 당시 총 41개 마을 중 자립마을은 39개, 자영마을은 2개로 분류되었다. 자영마을은 모두 수암에서 나왔다. 대부면의 경향도 유사했다. 옹진군의 《통계연보》에 따르면 1980년 현재 대부면 18개 마을중 자립마을은17개, 자영마을은1개로나타난다.
(2) 새마을가꾸기사업과 생활∙주거환경의 변화
시흥군 사례를 살펴보면, 1971년166개행정동리중110개 마을에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 화성군과 시흥군에서 새마을가꾸기사업은 1977~1978년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7년 당시 수암면과 군자면은 새마을가꾸기사업의 실적, 참여인원, 지원내역 등에서 시흥군 내에서 두드러진 실적을 보여주었다. 1977년 시흥군 새마을가꾸기사업에서 가장 높은 실적은 보인 군자면은 정부지원 1,084만 원과 주민부담 2억 5,384만 원을 투입해 4,088건의 사업실적을 올렸다. 수암면에서도 정부지원 1,084만 원과 주민부담 8,415만원을들여3,076건의 사업실적을 올렸다. 반월면의 경우에는 다른 해에 비해 1978년에 많은 사업이 시도되었다. 새마을가꾸기사업은 공동이용시설, 도로 등을 정비하는 환경개선사업과 농로, 하수구, 농업용수 등을 정비하는 생산기반사업을 포괄했다. 환경개선사업에서는 마을회관, 경로당, 공동변소, 공동작업장 등 마을의 공동이용시설을 확충하고, 마을 안길 및 진입로 포장, 소교량 설치 등 도로정비사업이 행해졌다. 또한 생산기반사업의 일환으로 농로를 포장∙확충하고,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소하천 정비, 도수로∙양수장 설치, 보 설치 등이 실시되었다. 마을의 공동시설 확충이나 도로의 확∙포장 등의 생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주거환경 역시 크게 변했다. 초기에는 주로 초가지붕을 개량하는 데 집중했으나, 1977년부터 마을 전체의 구조 개선과 함께 표준주택을 보급하는 취락구조개선사업이 추진되었다. 1978년의 경우, 반월면, 수암면, 군자면의 주택개량 실적은 각각 48동, 83동, 230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의 결과 농촌의 외형은 크게 변했다. 마을길 넓히기, 농로 조성, 공동시설 확충, 소하천 정비, 마을조림 등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였고, 지붕개량, 주택개량, 취락구조개선사업 등을 통해 농촌의 주거환경은 크게 개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