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에세이 12
아흔아홉 명의 사람들
홍일표
기혁 시인
기혁 시인과 시 전문지를 만들던 때가 있었다. 벌써 7년 전 일이다. 한동안 적조했던 그에게서 시집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반가웠다. 시집 제목이 특이했다. 『소설책』. 망가지지 않은 봄날을 희망의 근거로 삼았던 그가 네 번째 시집 속에 무엇을 담았을지 궁금했다. 지난 시집에서 심연이 사라진 표면의 공허를 꿰뚫어 보던 시인. 그의 시집을 첫 페이지부터 꼼꼼하게 읽는 동안 여러 번 멈춰서야 했다.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시편도 있었지만 오래 곱씹어야 할 작품들이 많았다. 「현대시작법」「천렵」「숨은 신」「밝은 방」「연연」「시인은 독사의 머리를 밟고」「문학 연구자」「액자식 구성」「밤의 징조와 유령들」 등이 그러했다. 소설을 능가하는 현실을 ‘비소설’ ‘미소설’로 재구성하여 세계를 다르게 읽게 하는 시인의 독특한 작법이 빛나는 시집이었다. 사흘 동안 붙잡고 있던 시집 속 한마디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죽은 생물의 백과사전을 / 한 글자도 남김없이 잊어야만 해요”
기혁 시인은 2010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하였고,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로 제3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1인 출판사 리메로북스를 운영하고 있다.
김준현 시인
김준현은 문단에서 독보적 존재이다. 시, 소설, 평론, 아동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한 가지만 잘하기도 쉽지가 않은데 여러 장르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다. 처음에 김준현 시인을 알게 된 것은 2017년 나온 첫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민음사)을 통해서였다. “그림자를 면도하는 기분”처럼 새로운 판본으로 다가온 시집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문자의 체중을 가늠할 줄 아는 그가 이번에 동시 평론집 『낮은음자리의 어린이』(창비)를 냈다.
그의 동시 평론집을 읽으면서 동시의 독자는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의 기준과 달리 요즘의 동시를 보면 독자의 범위가 크게 확장된 것을 볼 수 있다. 몇몇 동시 잡지나 주목받는 동시집 서너 권만 읽어봐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어린이는 열 살 내외의 아이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른의 내면에 살아 있는 어릴 적 아이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안 시인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읽을 수 있는 시가 동시”라고 말한다.
동시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몇몇 주요 시인은 기존의 고루한 동시관을 지양하고, 도전적인 작품으로 동시문학의 새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독자의 범위를 협소하게 한정하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 어른을 두루 아우르는 장르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김준현 시인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미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2015년 창비어린이(동시), 2020년 현대시(평론)로 문단에 나와 시, 동시, 문학평론 분야에서 독보적인 개성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2025년 다시 소설로 등단하여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된다. 낯선 음계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시와 동시에 매료되어 열심히 읽어왔던 터라 소설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 차이의 미학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변종의 감각으로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일 김준현 시인이 2020년대 우리 문학의 가장 중요한 포지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건청 시인
이건청 선생은 나와 묘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선생은 지금은 평택이 된 송탄(舊 쑥고개)의 점촌이라는 동네에 살면서 서정국민학교를 다녔고, 나는 그곳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면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이천 양정여고에서 7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의 고향이 이천이었다.
내가 1988년 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심상』이었다. 『심상』은 박목월 시인이 창간한 잡지인데 선생은 그곳에서 5년 동안 편집 실무를 맡아 시 전문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나 역시 원효로 4가에 있는 심상 사무실을 자주 드나들면서 편집 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문학 행사장에서 가끔 뵙다가 2007년 1월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415호, 선생은 416호에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방 안에서, 또는 바깥 음식점에서 여러 차례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은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늘 중용의 자리를 잃지 않았다.
1월 29일 오후, 인터폰으로 선생이 나를 불렀다.
“홍 선생, 현관에서 좀 보지.”
영문을 모르고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나갔다. 선생은 김영석 시인과 함께 있었다. 일행은 만해마을에서 가까운 송어횟집으로 향했다. 선생이 후배를 위해 마련한 퇴소식 자리였다. 모처럼 마음이 따듯했고, 순식간에 소주 몇 병이 동이 났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효림 스님과 김미정 작가도 뒤늦게 동석하였다. 술이 거나해진 이건청, 김영석 시인의 입에서 간단없이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선생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멋들어지게 낭송하여 우리 모두를 시에 젖게 하였다. 조촐한 자리였지만 눈 덮인 내설악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마지막 날, 인근 모 부대에서 전역을 앞두고 있던 이운기 중령의 안내로 필자와 선생은 점심 식사를 같이하였다. 식사 후 한계령 쪽으로 향하던 이 중령의 차 안에서 선생이 ‘생각의 넓이’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때 제 생각의 넓이만큼 타자의 삶을 수용하는 의자(한정된 사고의 틀)를 떠올리며 공감하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한 달 동안 가슴에 담았던 백담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돌아보니 어느새 15년 전 일이 되었다.
이승예 시인
전남 승주에 내려온 지 나흘이 지났다. 온종일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하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이다. 세끼 밥을 해 먹어야 하는 것이 고역이지만 그 외의 불편한 것은 없다. 새소리, 바람 소리가 가까운 벗이다. 막 피기 시작한 동백도 손을 내민다. 밭에는 마늘대가 겨울을 잊은 듯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겨울인데 이곳은 겨울이 아닌 듯하다. 내일은 선암사에라도 다녀와야겠다.
지금 머물고 있는 소헌당(素軒堂)은 전남 순천시 승주읍 평중리에 있다. 이승예 시인이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 준 덕에 부담 없이 머물고 있다. 그동안 가까이하지 못했던 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롯이 혼자 가야 하는 길이라서 외롭고 힘들 때가 많지만 시를 쓰는 일이 좋다고 하는 이승예 시인은 2015년 『발견』으로 등단하여 『나이스데이』『언제 밥이나 한번 먹어요』『코드를 잡는 잠』 등의 시집을 펴냈고, 제5회 김광협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현재 부군이 운영하는 (주)선경산업의 후원을 받아 선경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해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업체에서 문학지나 문학상을 후원하는 경우가 드문데 이승예 시인의 부군 김종석 대표가 2020년 의욕적으로 시작한 선경문학상은 우리 시의 발전과 시인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상으로 작품 위주의 심사 과정부터 공정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오른 무기명 작품들을 엄정하게 심사하여 수상작을 결정한다. 지명도 있는 시인들이 돌아가며 곗돈 타 먹듯 하는 문학상이 아니고, 시를 잘 쓰는 재야의 시인들을 발굴하여 시단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화감독 홍상수
기존의 영화 문법에 반기를 든 남자, 제도화된 기호를 부수고 거짓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비트는 남자, 가상의 환영적 위력을 분쇄하고 타인 지향적 삶에서 도주하는 남자, 영화가 모두 그게 그것 같다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폐된 일상의 공백을 드러내는 남자, 어쭙잖은 메시지나 삶에 대한 해석을 금기시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을 보여주는 남자, 시처럼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남자, 정해진 지도를 따르지 않고 미답의 길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남자, 영화 같지 않은 영화라서 돈 내고 보기 아깝다고 하는 관객들의 기대를 흔쾌히 저버리는 남자, 그리하여 마침내 습속과 통념을 거부하고 한 시대를 횡단하는 남자.
이원석 시인
시 잘 쓰는 시인은 많지만 유일한 시인은 드문 시단에서 남다른 개성의 맷집을 키워가고 있는 시인. 시집에 있는 약력을 보니 단 두 줄이다. “공항에서 수레를 끌고 시 쓰는 사람. 시집 『엔딩과 랜딩』.” 시단에는 스무 줄이 넘는 약력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대단한(?) 분들도 많은데 이원석 시인은 모리스 블랑쇼의 짧은 약력보다 한 수 위다.
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펼쳤다. 노동 이야기를 기존의 방식대로 하고 싶지 않다는 이원석 시인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항로에서 벗어나기 위해/곡예 비행하듯” 살면서 “관으로 된 긴 유리 터널 속을 질주” 중이다. “둥글고 긴 마음들을 모아 교각을 만들”기 위한 그만의 특별한 존재 방식이다.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지난한 삶의 도정에서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시인의 뜨거운 육성이 『밤의 공항』 곳곳에 담겨 있다. 모든 밤의 바깥을 향해 있는 그와,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고 말하며 시 속에 등장하는 로봇의 목소리에 귀를 여는 독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조금 전의 심장』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동시집 『괴물이 될 테야』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