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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문회 선교부장 황 인 호 토마스 모어 greatih@naver.com
2008년 10월 17일(금) 출발일 저녁, 인원 점검을 마치고 19시 경에 승선하여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난생 처음 타보는 거대한 여객선 뉴 카멜리온호 갑판으로 나가 국제여객부두와 주변의 야경을 둘러보다가 광안리 해안 쪽 밤하늘에 연달아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불꽃에 시선이 머물렀다. 몇 달간 천신만고 끝에 성사된 우리들의 성지순례를 잘 다녀오라고 축하라도 하는듯..... .
마침내 부산가톨릭대학교신학원 성지순례단 45명을 실은 여객선은 엔진을 시동하고 거대한 몸집을 서서히 돌리면서 몇마디 점잔은 고동소리와 함께 밤바다를 가르면서 후쿠오카 항을 향해 출발했다. 여객선 내의 자판기 및 모든 시설의 이용료는 엔화로만 통용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갑판에 나오니 바람이 거세고 물보라가 날아와 선실로 되돌아왔다. 누워 있으니 미미한 진동과 흔들림이 감지되었다. 준비해온 멀미약이 있었지만 순교지를 찾는 자의 자세로 한번 견디어 보아야겠다. 저녁기도 후 룸메이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11시경 잠이 들었다. 선상의 하룻밤이 지났다.
10월 18일(토) 아침, 여섯시가 지나 잠에서 깨어보니 이미 배는 후쿠오카 항에 입항해 있었다. 간판이나 표지가 일본어일 뿐이지 기후나 항구의 모습 모두가 부산과 별로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내 조식을 마치고 하선하여 전용버스 편으로 구마모토현 가미아마쿠사시 오야노 아일랜드에 있는 메모리얼 홀에 도착하였다. 하얀 뭉개구름이 떠 있는 파아란 가을하늘, 아름다운 꽃들이 핀 정원과 숲속에 쌓여 있는 메모리얼홀은 기품 있는 백조처럼, 옥색 물결이 부서지는 백사장과 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1층 공간 기능은 인포메이션, 엔트런스홀(영국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된 대형 무장범선 카락호의 모습을 그린 "대 항해시대의 개막"을 확대한 모사품이 걸려있음), 웨이팅 홀(시간 여행의 출발지점으로 멀티비전의 대형화면을 통해 천주교가 일본에 전해진 시초부터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전투까지 역사의 흐름을 설명), 타임터널, 남만선(500~1,000톤 규모의 범선인 초기의 소형범선인 "골든 하인드"를 실물의 절반 크기로 복원하여 전시), 테마 공간(오다노부나가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의 실물 크기 모형과 당시 유럽에서 제작된 지구의의 복제품과 세계지도, 23미터 크기로 확대 모사된 남만 병풍, 천주교 신자였던 규슈 지방의 세 영주, 덴쇼시기에 유럽에 파견되었던 소년사절단, 선교사 양성기관이었던 아마쿠사 코레조, 아마쿠사 서적 등 서양과 일본의 만난 모습을 전시), 영상 홀(아마쿠사 시로의 입체 영상관), 디오라마(아마쿠사 시로의 등장에서 순교의 결의 등 중요 고 문서를 소개)로 되어 있고 2층에는 명상 공간(영혼의 오브제, 빛 그리고 음악에 둘러싸여 지금까지 체험한 시간 여행을 조용히 되새기며 심신의 긴장을 푸는 시간)으로 되어있다.
아마쿠사에서는 1566년 폴투갈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가 일본에 들어온 후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열성적인 크리스찬 영주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치하에서 기리시찬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아마쿠사의 인구는 약 이만오천이었고 그 중 신자 수는 이만명에 30여개의 성당이 있었다. 또한 대신학교가 설립되어 서양의 문화와 학문이 이곳에서부터 널리 퍼지게 되었다. 텐쇼 소년 사절단이 가져온 활판인쇄기도 아마쿠사에 설치하여 많은 서적이 발간되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쇄사업이 행해졌다. 애도시대(1603~)가 되자 막부에 의해 금교령이 내려져 기리시탄이 많았던 아마쿠사에도 엄격한 탄압이 행해졌다. 더욱이 영주에 의한 가혹한 세금 징수와 식량난으로 주민생활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 기리시탄들의 봉기에 따라서 아마쿠사에도 봉기가 일어나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난이라고 불리는 큰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약 사만명의 기리시탄군은 불과 15세 밖에 안되는 기리시탄 소년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를 총대장으로 결속을 다져 선전하였으나 막부의 12만 대군에 의해 시마바라 반도의 하라죠에서 전원이 전사하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1627년 2월 21일 바울로 우치보리 사쿠에몬의 아들 3형제(발타살과 안토니오, 다섯살된 이냐시오)와 16인이 아버지 눈 앞에서 손가락을 잘리어 아리아케의 겨울바다 속에 내 던져저 고문을 받아 순교하였다. 다섯살난 이냐시오도 두 손의 손가락 셋이 베어졌을 때, "아름다운 장미꽃을 바라보는 듯이 손을 눈앞에 펴들고 떨어져나간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천천히 지켜보고 있었다."고 페레이라 신부는 보고서에서 담담하게 적고 있다. 차남 안토니오는 바다 속에 잠기는 순간 "아버지, 이런 큰 은혜를 하느님께 감사하십시다."라고 아버지께 외쳤다. 나머지 신자들은 이마에 낙인이 찍히고 '기리시탄이기 때문에 벌 받는다"라는 글이 쓰인 옷을 입고 순교했다.
아이들이 순교한 일주일 후, 16명이 계약의 산에 오르게 되었다. 거기에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그들을 지켜보며 격려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젠다케山은 예수님이 가신 갈바리山의 십자가 광경과도 같았다. "성체는 찬미를 받으소서" 성체에 대한 기도가 그들의 유언이 되었고 이들 19위는 2008. 11월 24일에 시복되었다.
오후에는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26위 미사(2월6일에서 이동)를 드리기 위해 가까운 오오에 성당(20세기에 건립)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나무그늘을 이룬 150 m 계단 길을 올라갔다. 길 왼쪽 언덕에는 유럽의 성당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들처럼 옛날 신자들의 돌무덤들이 있고 성당 앞뜰에는 신부님과 악사들이 가을 햇살 아래서 성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먼곳에서 찾아온 우리들을 환영이라도 하듯... . 연로한 수녀님 한분이 나와서 성전을 안내하였고 미사(김평겸 타대오 원장 신부님 집전)시작 전에 잠시 성당 유래를 소개하셨다. 제단 왼쪽에 모신 성모상의 유래를 설명하셨다. 나가사끼의 우라카미성당(1962년에 오우라 천주당을 대신하여 주교좌 성당 지정)에 있었는데 원폭 투하 시 건물 안에 있던 성작 및 성물들이 녹아버렸고, 성당의 종, 프랑스 예수회 신부가 만든 예수상도 파괴되었고 84개나 되는 천사상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후 새 성당 건립공사 작업 도중, 땅속에 파묻힌 온전한 성모상이 원래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성모상을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한다.
"하느님, 거룩한 성 바오로 미키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을 통하여 십자가의 오묘한 신비를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이 제사로 힘을 얻어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며, 세상 구원을 위하여 형제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미사 후 시마테스 페리에 승선하여 구치노스 항에 도착, 다시 버스 편으로 운젠으로 이동하면서 삼종기도와 저녁기도를 마치니 어두워서야 운젠 스카이 호텔에 도착했다. 일식 만찬 후, 온천욕으로 여독을 풀고 3인 1실 다다미방에서 순례 2일을 마치고 단잠에 들었다.
10월 19일 주일날 아침, 6시에 기상하여 호텔 오른편 길을 건너 신사 옆을 지나 불과 20여 미터 산길을 들어서니 유황냄새가 난다. 산길을 오르니 지면에서 분출하는 열기, 유황연기, 화약 냄새가 진동하면서 열천이 끓어 흘러내리며 황색 적색 또는 녹색으로 얼룩진 토석들의 황량한 광경이 펼쳐진다. 힌색 십자가를 세운 곳은 순교 장소의 표시라고 한다. 운젠은 시마바라 반도 중앙에 위치한 운젠다케 산의 주봉. 후겐다케를 중심으로 한 화산군 일대의 지역으로 운젠 아마쿠사 국립공원에 속한다. 운젠다케의 남서중복 해발 700~800m 높이에 운젠 온천이 있으며 후루유, 신유, 소지옥의 세 가지로 분리되는 온천과 하계의 시원한 기후는 피서지로도 유명하다. 일명 「지옥열탕」으로 알려진 운젠은 30여개의 열탕으로 이루어져 1627~1632년 사이 천주교 금교령과 박해로 인해 수천 명의 신자들이 유황 온천탕에 고문 당하고 생매장을 당해 순교한 성지이다. 시마바라 26위 순교기념관에서 발간한 '순교자의 길을 가다'를 보면 1627년 2월 28일 바울로 등 16명이, 그해 5월 27일에는 조징 미네 등 10명이 순교한 곳이 나온다. 끌려온 신자들은 로프에 매달린 채 지옥열탕에 던져졌다가 건져 올려지기를 반복해서 당하였다. 소리를 지르거나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입에는 재갈을 물렸으나 조징 미네는 아무리 지고쿠세메를 가해도 작은 소리를 지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노한 관리들은 그의 몸을 칼로 찔러 수십 군데나 상처를 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에 열탕을 끼얹으며 배교를 강요했다. 무서운 기세로 끓어오르는 열탕은 보기만 해도 기절할 정도였다. 끓는 물을 뒤집어쓰면서 신자들은 기도했다.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괴로워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고, 지친 자를 안고 가시는 사랑의 하느님, 한시바삐 저의 십자가 위에 순교의 은총을 내려주세요."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상처 입은 새들도 날게 하시는 주님이 곧 구원의 날개를 펴 주시리라 믿으며 고문을 이겨 나갔다(10명. 2008년 11월 24일 시복식).
숙박지가 고산지대라 기온이 다소 낮고 단풍이 빠른 것 같다. 다행히도 일기는 쾌청하고 산골의 맑은 공기 속에서 온천으로 피로를 풀고 나니 발길이 한결 가볍다. 운젠 지옥온천 순교현장을 하산하여 조식한 후 나가사키로 향한다. 차창을 스치는 농촌의 가을 아침 풍경은 고향의 마을처럼 평화로운 전경이다. 성가 5번 찬미의 기도를 합창하고 아침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쳤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의 책상 앞에서
전용버스는 오늘의 첫 순례지인 성 막시밀리안 콜베 기념관(시성을 기념하여 1986년 8월 14일 건립)이 있는 나가사키근교 농촌마을 혼고치의 산기슭에 자리한 本河성당 입구에 도착하여 언덕을 올라가 콜베 신부님이 1929년 동양 선교를 위해 4명의 수사와 함께 이곳에 설립하신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운영 당시에 사용했던 인쇄기, 인쇄물, 잡지, 서적 사무용 비품과 개인 유품 등이 보존된 기념관 내부를 감명 깊게 돌아 보면서 주님 사랑의 모범을 실천하신 성인의 열정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문을 방명록에 기록하였고 성인이 사용하시던 책상 앞 의자에 앉아 기념 촬영도 하였다. 자료실을 나와 성인이 조성하셨고 즐겨 오르셨다는 루르드의 성모동산으로 올라갔다. 동산을 둘러 싼 벽돌 담장도 신부님과 수사님들이 손수 쌓으셨다. 루르드의 성모동굴 앞에 서 계신 성모상을 바라보며 아내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 후 기적수 한 병을 담아왔다. 나가이 박사도 장모님이 떠다주신 이 샘물을 마시고 치유를 받았다 하여 기적수로 알려져 있다. 공동기도를 바치고 기념촬영을 한 후 하산하였다.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에서 출생하여 라이몬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열심한 부모 아래서 엄격한 신앙교육과 훌륭한 성모신심을 몸에 익혔다. 14세 때 라부프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마친 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마치고 1911년 9월 5일 유기서원을 했다. 이듬해 가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 도중인 1914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종신 서원을 했고 다음 해에는 최우수 성적을 인정받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7년 여름엔 과로로 폐결핵에 걸렸으나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학업에 열중했다.
그 해 10월에는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를 창설하였고 10월 17일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새로운 회원들은 나날이 늘어갔다. 성모 기사회의 실천 덕목은 기도, 좋은 표양, 고생, 그리고 노동이었다. 1918년 4월 28일 사제 성품을 받고 이튿날 프라테의 성 안드레아 성당 「기적의 제단」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다음 해 7월 22일 같은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해 9월에는 쇠약한 몸으로 폴란드로 귀국하여 크라코프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0월엔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자코파네의 요양원에서 근 1년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그곳에서도 환자들을 방문하며 대화하고 가르쳤으며 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받게 했다. 병세가 호전되자 크라코프로 돌아와 1922년 1월에 잡지-「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하였고 그로노드로 이동한 후에도 꾸준히 잡지 발간을 계속했다. 무료로 오천부를 발행하였으나 많은 후원자들의 협조로 1925년엔 배로 증가되었다. 지병의 재발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는 4만5천부로 늘어났다. 그로노드로 다시 돌아온 그는 드루츠키 공작으로부터 땅을 기증 받아 출판부 수사들과 함께 판자집으로 된「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건설하였다. 잡지의 발행 부수는 매년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하여 1940년에는 백만 부에 달했다. 이어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와 외국인들을 위한 라틴어 잡지도 발간했다. 이 작은 신문의 출발점은 9일 기도였다. 그는 창간호가 나오기 9일 전부터 327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단식과 많은 희생을 봉헌하며 성체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성모의 마을이 창립된 지 3년이 되어갈 때 동양 선교 사명을 깨닫고 장상의 허락을 받아 4명의 수사와 함께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다음해 4월 24일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도착한지 만 한달 후 고국의 「성모의 마을」에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 『오늘 창간호를 보냅니다. 인쇄소를 설치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 만세! 막시밀리안.』이어서1931년 5월에는 히꼬야마 기슭에 땅을 얻어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였다. 일본에서의 활동 2년 후 인도에 도착하여 새로운 성모의 마을 건설에 착수했고 일차 사명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잡지 발행과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6월 갑자기 폴란드의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해야 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전쟁이 절박해 옴을 예감했으며 수사들이 영적으로 전란에 대비하도록 촉구하면서 자신의 고난에 관하여도 예고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같은 달 19일에는 나치 헌병들이 그와 동료 수사들을 체포 구금했다가 석방하였으나 성모의 마을로 돌아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복간했다. 1941년 2월 17일 나치 비밀경찰이 그를 체포하여 파비악 형무소에 수감했다. 그곳에서 그는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고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 해 5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로 불리던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절망하는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영적 강화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수감자 탈출 사건이 일어나자 그 보복으로 같은 감방에 있던 10명이 아사 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명이 처자를 위해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것을 본 순간, 그를 살려주기 위해 대신 콜베 자신이 아사실을 자원하였다. 절규와 비탄으로 생지옥과 같았던 아사실은 콜베 신부로 인해 기도와 노래가 넘치는 천국의 모습으로 변했고 형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9명의 수감자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었던 마지막 생존자 콜베 신부에게 나치 경찰은 독약을 주사하였다. 47세 되던 해, 1941년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인 8월 14일이었다(1971년 10월 17일에 시복, 1982년 10월 10일에 시성됨).
콜베 성인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으로 향하였다. 나가사키 시내에서는 지하철이 보이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우리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전차가 운행되고 있어 소년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오우라천주당 앞 간선도로 건너편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신호등 건널목을 건너니 돌판이 깔린 보도 양측에 성물, 기념품, 카스텔라 등을 파는 가게가 50m 가량 줄지어 있었다. 1865년에 창건되었으며, 정식 명칭은‘일본 26성인 순교자 천주당’이다. 니시사카(西坂)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해, 두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때문에 정면은 니시사카(西坂) 언덕을 향하고 있다. 건물은 중세 유럽의 건축을 대표하는 고딕양식이며 현존하는 목조 교회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서 193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약 100년 전의 프랑스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되어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원폭에 의해 크게 파손되었다. 성당 안으로 아름다운 빛을 비추어주는 기도 공간이 환상적이며, 금교령 때문에 숨어 지내던 신도들을 발견한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성당으로 사용되지 않고 관광 명소로서만 역할을 하고 있다. 워낙 많은 관광객 때문에 성당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가까운 곳에 새 건물을 지어서 그곳을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당 앞의 부조는 가쿠레 기리시탄들로서 숨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프티잔 신부에게 “이것이 마리아 상입니까?”라고 물어보고 있다. 프티잔 신부는 ‘마리아는 가톨릭에만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그들의 신앙을 마리아 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자신이 자라난 노르망디와 나가사키의 환경과 생각이 비슷하기에 이들이 신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 외방 선교회 본부에 나가사키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200여년 이상 지속된 박해와 순교의 위험에서도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이때부터 바티칸이 일본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신앙의 역사 때문에 추기경이 많이 배출된 것이라 생각되었다. 오우라 천주당 안내판은 프티잔 신부에 의해 1864년 12월 .29일에 건립되었다. 1597년 일본 최초의 순교자인 26성인이 성당 정면 니시사카(西坂) 언덕 뒤쪽에서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1865년 26성인의 이름이 이 성당에 적히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천황(메이지) 시대 이전으로 여전히 금교령이 지속된 시기였다. 1875년 메이지 7년에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고 성당 안의 마리아상을 보고서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성당은 일본과 유럽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일본 유일의 건물이었기에 1933년에 국보로 지정된다. 1945.8.9에 나가사키 원폭 당시 파괴되고 그 이후에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문화재로서 많은 이들이 방문한다. 이는 역사적인 기록을 인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금교령 당시에 많은 이들이 작은 섬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고도 섬이다. 가장 많이 순교한 곳은 히로시마의 쯔와노라는 곳이다. 그리고 마쯔에 역시도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신자들이 있었다.
성당 옆 기념관에는 많은 유물들이 있다. 라틴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기도문, 편태와 일본 성모상(관음상)이 있고 현상(방)이 있다. 현상(방)에는 수도자를 잡을 경우 은 500냥을 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배교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묵주를 밟도록 했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박해를 피해 불교 상 뒤와 밑에 십자가를 새기거나 붙여놓았다. 고딕양식과 플라식 양식의 성당 설계도, 라틴어 사전(16세기 아마쿠사에서 번역 인쇄), 히로시마 교구(후쿠오카, 쯔와노, 히로시마, 후쿠야마, 마쯔에, 오카야마)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유배지 표시도. 문맹자들의 교리 이해를 위한 그림과 판화 등이 있다.
오전 순례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한 뒤 원폭 중심지인 평화공원으로 이동하였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은 1996년 4월에 국제문화회관을 개축한 평화공원내의 지하시설이다. 지하2층 상설 전시실에는 피해 자료의 전시와 피폭한 우라카미 성당 측면을 재현한 조형물 유품과 피폭 자료, 피폭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영상자료 등을 이용하여 당시의 참상을 재현하여 보여준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은 길이 3.25 미터, 직경 1.52 미터, 무게 4.5톤의 원자폭탄으로, 고성능 폭약 21킬로톤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방출되었다. 그 에너지는 폭풍이 50%, 열선이 35%, 방사선 15%로서 나가사키에 막대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입구 정면에는 피폭 전의 우라카미 지구 풍경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피폭 전 나가사키 거리와 시민들의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어서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발생한 버섯구름의 영상과 함께 1945년 8월 9일 파괴의 순간을 말해주는 11시 2분을 가리킨 채 멈춘 벽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당시 나가사키 인구는 약 24만 명에 사망자가 73,884명이고 부상자는 74,909명으로 추정한다. 지하 자료관을 나와 평화공원으로 나오니 밝은 햇살 아래 숲에 싸인 넓은 공원 광장 곳곳에 평화 기념상, 평화의 샘, 평화의 종과 아기를 감싸 안은 어머니의 조각상이 있었다.
이 도시는 왜 Pieta로 가득 차 있는가? 가는 곳마다 부조, 조각들이 온통 모자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시간은 나의 피정이었다. 자리 없는 주님과 운명을 같이한 순교한 모자의 시신, 온통 아픈 자리로 가득 차 있다. 평화, 따스함, 사랑 그 자체. 우리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어머니의 품, 이토록 아픈 자리! 08.3.27.李眞守(Stephen) 신부님의 성사론 강의에서-
조각공원 입구에는 일본인으로서 속죄의 뜻을 담아 나가시키 재일조선인 인권단체가 세운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우라까미성당의 원폭잔해의 일부가 옮겨진 모습을 배경으로하여 기념촬영을 한 후 26인 성인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는 성 필립보 성당으로 향했다.
1962년에 세워진 성 필립보 성당은 26성인이 교토에서부터 걸어서 고생하며 겨우 다달은 토키쯔가도의 종점에 있는 성당으로, 길을 사이에 두고 니시사카 순교지가 있다. 멕시코의 기부로 26성인의 한 사람인 필립보에게 바치면서 건립되었다. 성 필립보는 멕시코 사람으로 첫 성인인데, 필립핀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귀국하던 중에 잠시 일본에 들렀다가 순교한 24세의 젊은이였다. 건물은 이마이겐지에 의해 설계가 되었는데, 그는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 건축에 영향을 받았고, 신앙심이 뛰어났다.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26성인이 걸어온 길에 깔린 도자기가마에서 나온 도자기 조각을 사용했고, 타올라가는 것 같이 위로 뻗은 쌍 탑의 성당은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을 방불케 하며 나가사키의 상징적인 성당이 되었다. 성당 내부는 늑골모양의 배 밑을 천장으로 한 것 같은 6개의 기둥으로 된 성당이다. 제단은 멕시코에서 보낸 대리석으로서 십자를 본 뜬 독일제 스탠드 유리에 둘러싸여 거리의 시끄러움으로부터 격리된 기도의 집으로 누구나 자유로이 기도하려고 찾는 순례지로 지정되어 있다.
가이드-이 요안나 씨의 신속한 배려로 본당 신부님께서 미리 성당 입구에 나오셔서 순례단을 맞이하셨다. 스페인출신으로 일본 오신지가 40년 정도 되신 예수회 신부님은 유창한 일어로 26성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자료실에 보존된 유물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하셨고 요안나씨는 열심히 통역을 해주었다. 이어서 26성인 기념성당인 성 필립보 성당으로 이동하여 김평겸 신부님의 주례로 민족들의 복음화를 지향하는 전교주일 미사를 드렸다.
히라도(hirado)로 가는 도중에는 하우스텐보스(네델란드 마을 조성한 곳)의 이정표도 보였다. 장시간의 이동 도중에도 이순신장군을 존경하였고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여 일본을 승리로 이끈 도-고 제독의 이야기와, 6.25 동란 때는 미군의 전진기지였던 히라도에 관한 가이드의 이야기 꾸러미로 지루한 줄 몰랐다. 규슈 나가사키 현 항구도시로서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히라도 섬의 북부해안에 있는 히라도 시가 핵심부이다. 면적 165㎢인 히라도 섬의 일부가 사이카이[西海] 국립공원에 속한다. 일본 최초의 해외무역항으로 대륙과 일본의 교류거점으로 번영을 누린 히라도는 동서 문화의 이국적인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진정한 역사를 만끽할 수 있는 고장이다. 또한 16세기에 천주교가 이곳에 전해진 이후, 유럽의 문물이 많이 들어왔으며 아시아와 유럽이 혼연일체가 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신분을 감춘 가톨릭신자와 순교자들의 수많은 애환을 안은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1592년부터 일어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이곳 히라도에서 한일 양국의 많은 희생자를 낸 역사적 사실도 남아있다. 영주 마츠우라씨는 귀국 시에 조선의 도공 약 100명을 데리고 와서 히라도야키라는 도자기 문화를 열어 조선 문화를 도입하였다.
히라도의 독특한 문화는 서구제국과의 깊은 관계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550년에 처음으로 포르투갈배가 입항하여 무역항으로서의 히라도가 발전하면서 약 90년에 걸쳐 「서구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사비에르에 의해 전해진 가톨릭은 무역관계가 얽힌 종교분쟁으로 인해 1641년에 네덜란드 무역관의 폐쇄로 대외무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막부의 통치하에 일본의 무역항은 나가사키 항으로 제한받게 되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야 히라도 성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 마을 바닷가에 도착하여 3개의 신사와 인접한 돌판으로 포장된 언덕길을 올라가니 히라도 지역 순교자들의 기념비석이 있고 성당 앞에는 천연수가 솟아 흐르고 그 뒤엔 성모동산이 있다. 1931년에 세워진 이 성당은 독일식 고딕양식으로서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지붕은 겹으로 구성되어 거대한 첨탑을 작은 첨탑으로 둘러싸고 수직으로 높이 솟아있는 날카로움과 저연색으로 마감한 아름다운 건물이다. 다른 교회 건축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질적인 점은 왼쪽을 도는 계단을 둘러싼 팔각탑이 고딕 양식으로서는 희귀한 좌우 조화가 안된 불가사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늦은 시각이라 이미 성당은 불이 꺼졌지만 사제관을 찾아 허락을 득하여 성전 제대 앞에서 성가 16번 '주를 따르리' 를 합창한 후 최초로 동방 선교의 길을 밝히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정신과 선교의 길을 개척하신 열정의 불길을 우리에게 내리주시길 기도한 후 어두운 언덕길을 내려와 골프코스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란푸호텔로 이동하면서 순례단은 삼종기도와 저녁기도를 올렸다. 400석이 넘을 정도의 공연무대가 있는 2층 계단 형의 대 식당에서 일식 만찬을 즐기며 히라도 민속무용과 노래 공연을 감상했다. 온천을 한 후 일행이 별실에 모여 잠시 동안 맥주와 노래로 여흥의 시간을 즐긴 후 4인 1실의 다다미방에서 순례일정의 마지막 잠자리에 들었다.
10월 20일(월) 아침, 드디어 귀국의 날이 밝아왔다. 짧은 일정 속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순교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감동 속에 보낸 아쉬운 시간들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전용버스에 탑승했다. 성가와 아침기도에 이어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다. 이번 성지순례는 그간 2년간의 신학 수업에서 배우고 닦은 가톨릭 신앙을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여 직접 보고 느끼는 체험을 통해 신앙선조들의 순교열정을 내면화하고, 행사의 능동적인 참여로 신심생활에 활력을 재충전하여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작은 공동체로서 연대감을 다지는데 그 의의가 큰 것이다.
순례단 구성원은 신부님과 주야간 신학원생 외에도 동문 선배와 교우들이 참여하여 부산가톨릭대학교신학원 홍보에도 일조했다는 생각이다. 45명의 순례단이 주님의 가호와 성모님 도움의 은총으로 차질 없이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번 순례의 길에 안내 자료를 주신 한건 신부님과 원장 신부님, 특히 안내서 프린트와 사진 촬영에 애쓰신 이진웅 다니엘 내외 분, 이준호 회장을 위시한 임원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순례단 인원 확보와 각종 연락 업무에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허실비아님과 조안나님의 그간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시기적으로 다소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협조해 주신 씨피 여행사 사장님과 사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Come Holy Spirit !
제 26기생 졸업여행 성지순례단 참가자 45명
순번 |
성 명 |
본 당 |
순 번 |
성 명 |
본 당 |
1 |
김평겸 타데오 |
원장신부 |
24 |
김미경 M 도미니카 |
안락 |
2 |
강정길 마티아 |
연산 |
25 |
허선자 실비아 |
민락 |
3 |
배광자 M 고레띠 |
도봉 |
26 |
김정호 헬레나 |
하단 |
4 |
이진웅 다니엘 |
다대 |
27 |
강위선 크리스티나 |
연산 |
5 |
박정열 효임 골롬바 |
다대 |
28 |
김해숙 데례사 |
연산 |
6 |
이준호 다니엘 |
사직 |
29 |
전수자 데례사 |
만덕 |
7 |
김기식 요셉 |
다대 |
30 |
유금숙 루시아 |
연산 |
8 |
서재임 로사 |
다대 |
31 |
정해연 아녜스 |
연산 |
9 |
강영자 세레피나 |
함안 |
32 |
조정님 이사벨라 |
함안 |
10 |
황인호 토마스 모어 |
장산 |
33 |
김은숙 아우렐리아 |
연산 |
11 |
전복희 데례사 |
만덕 |
34 |
김은주 바울리나 |
연산 |
12 |
우정자 바울라 |
연산 |
35 |
정상봉 마르코 |
성지 |
13 |
송정순 막달레나 |
주례 |
36 |
박인순 로사 |
성지 |
14 |
한재호세바스티아노 |
주례 |
37 |
심혜숙 베로니카 |
수영 |
15 |
문영숙 실비아 |
주례 |
38 |
조수인 모니카 |
수영 |
16 |
이언주 까리따스 |
성가정 |
39 |
김태형 파스칼 |
안락 |
17 |
박옥자 요셉피나 |
양산 |
40 |
전선화 미카엘라 |
연산 |
18 |
박점숙 가타리나 |
초량 |
41 |
김인숙 아녜스 |
장산 |
19 |
서선열 아녜스 |
마산완월 |
42 |
조순성 안나 |
서동 |
20 |
정진숙 도미나카 |
연산 |
43 |
공유경 마리아 |
해운대 |
21 |
김판연 바실라 |
연산 |
44 |
황혜정 베로니카 |
마산완월 |
22 |
김정자 글라라 |
연산 |
45 |
손성훈 율리아노 |
수영 |
23 |
손정희 데레사 |
안락 |
46 |
이진희 요안나 |
(주)cp여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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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하신 선배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