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다방에 앉아
비 오는 날 오후 다방에 앉았다
부르스음악이 커피를 끓였다
커피 향이 음악에 맞춰 스탭을 밟았다
내 코는 파란 하늘 냄새를 맡은데
내 눈은 한사코 마담의 푸짐한 가슴을
커피 잔에 담았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트위스트스텝이 차가운데
커피 잔엔 부르스스텝이 뜨거웠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비가
내 혀 끝을 간질인다
빗빙울이 커피를 마신다
순천만 갈대밭
골골의 강들이
손에 손 잡고 흘러와서
바다와 한 침대를 쓰는 곳
머리에 흰 등을 건 갈대들이
등대처럼 깜박이고 있다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그대들
다 여기 와서 우릴 닮아보라고
속을 텅 비우면 갈 데가 보일 거라고
속을 비우느라 서걱거리고 있다
찾아오는 이들 행여나
헛 발 딛을까 봐
길 없는 어둠의 길을
눈 부시게 밝혀주고 있다
낙엽 지는 가을에
내 사랑하리라
낙엽 지는 가을을
악착 같이 붙들었던 손
미련 없이 놓는 낙엽처럼
나도 언젠가는 지리라
무성하고 화려했던 지난 날
우리 이야기 해서 무엇하리
며칠 째 싸늘한 바람이 불고
옷 훌훌 벗어 던지는 산들
나는 왜 옷 벗는 산만 보면
새벽 자지처럼 발기하는가
오늘은 아침 안개가
알몸이 부끄러운 산을 가려주고있다
나무마다 남은 마지막 잎새들
위태로운 사랑처럼 매달려 있다
마지막 잎새가 내 사랑이다
머지 않아 나도 한 잎 낙엽이 되리라
산 가슴
햇살이 비단결 같은 시월의 아침
산이 어제보다 하도 수상해 바라보는데
먼저 깨어난 산이 먼저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직 산에 오를 생각이 없건만
산이 나를 어서 오라 어서 오라고
수많은 손을 흔들어 대고 있다
산이 무어라 무어라고 말을 하지만
산 말이 절벽인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귀가 어두운 자가 먼저 다가가는 법
산을 오르는 길목마다
반갑게 내미는 손들이 걸려 있고
능선마다 말 없는 말이 웅성거렸다
편백나무 전나무 삼나무 굴참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로쇠나무 기타등등
산은 헤일 수 없이 많은 말을 지니고도
침묵으로 나를 와락 껴안아주었다
산이 된 내 머리 위에다가
단풍 잎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천 년의 미소
천 살 잡순 돌부처 앞에 서있는데
자벌레 한 마리가 세월을 자잘하며
돌부처 얼굴을 향해 기어오면서
어찌 부동의 사세로만 서 계시냐고
이쯤 해서 나를 무등태우고
장군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보시라고
돌부처의 어깨를 흔들어댄다
그 질문에 천 년을 시달렸을 돌부처
어깨에 걸터 앉은 자벌레를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움켜쥐고
장군봉을 향해 날아가는 걸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살생을 지켜보았을 돌부처
코를 베어 간 바람이
아직도 천 년의 미소를 지우고 있다
쟁반 탑
순천의 아랫시장 날 보았다
좁은 골목을 누비며 배달다니는 여인을
그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오층 쟁반 탑을
주춧돌도 없이
아슬아슬 포개어진 탑 속엔 분명
하얀 깔밥이
사리처럼 담겨져 있을 것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의 중생을 향한 보시가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저 밥 받아먹는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뒷물도 향기로울 것이다
늦가을에
불 타던 산이 우수수 무너지고
들판의 황금금고도 텅 비워지고
창공을 누비던 제비도 집을 비웠다
이 계절은 텅 비울 줄 알건만
나는 어찌하여 비울 줄 모르고
내 짐의 무게에 휘어지기만 하는가
텅 비우는 산과 들판처럼
비워야만 다시 채워짐을
내 모르고 살아왔구나
비운 자만이 오를 수 있는 하늘
해 마저 비우고 있는 석양
기러기 몇 마리 허공을 날고 있다
가위 바위 보 놀이
가위와 바위와 보를 합치면
하나의 손이 된다
무엇이든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손
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에
나도 지금 손이 있어 시를 쓴다
가위도 바위도 보도 만들 수 있어
삶을 마음대로 직조할 수 있는 손
음식을 부드럽게 다짐하여
젖가락이 되고 쌈이 되어
맛나게 먹을 수 있다는 것
삶이란 가위 바위 보 놀이로구나
하지만 이 손으로
자를 수도 깰 수도 집을 수도 없는 게 있으니
바로 저 시푸른 호수 같은 하늘이다
강가에 서서
골골의 실개천이 모여 강을 이룬 곳
산도 길도 물과 살 섞어 강이 되 곳
빛도 이 강에 닿아야만 빛 다워진다
순리대로 묵묵히 살라던 아버지의 말씀도
물처럼 살라던 어머니의 말씀도
이곳에 와서야 만날 수 있다
사는 동안 지키지 못했던 언약도
이곳에 와서야 지킬 수 있고
내 젊음의 불 같았던 열정도
시기와 질투와 욕망도
이곳에 와서야 버리게 된다
내 선조도 이웃도
썪어서야 물 되어 얼싸안은 곳
내 육신도 썪어 이곳에 와서야
세상 먹여살리는 강이 될 것이다
소금꽃
염전이라는 것이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바닷물만 소금이 되는 게 아니었다
불덩이 해를 머리에 이고
밭 일 하는 아내
그 이마도 등짝도 염전이었다
세상 그 어느 꽃 보다도
아름답고 귀한 꽃
신성한 노동이 피워 낸 소금꽃이었다
이팝나무(시 낭송 작품)
청보리 읶어가는 오월
가로 변에 이팝나무늘어서서
쌀밥을 고봉으로 푸고 있다
이팝나무가 나를 불러세운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시였다
년년마다 이팝꽃은 피어났건만
길 없는 길을 걸어왔을 뿐
이팝나무의 말씀을 듣지 못했구나
따귀에 밥풀 쳐바른 아이들이
허천해하는 걸 왜 보지 못했을 거나
저 이팝꽃으로 주먹밥 만들어
허기진 이들에게 던져주어야 겠다
온몸으로 피는 것이 왜 쌀밥인가를
보릿고개 적 잊은이들의 가슴에
추억처럼 심어주어야 겠다
카페 게시글
자매결연원고
남 석 우 시(자매결연 원고)
송파
추천 0
조회 21
22.10.02 11:49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