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시즌이 돌아왔다. 행정실의 한 일원으로서 적응하며 군대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엔 연 1~2회 미군과 합동연합훈련을 실시하였다. 일명 ‘팀스프리트’ 훈련이다. 일병 계급을 달고 신병으로 들어오는 졸병들을 골려주는 재미가 이만저만 아닐 때다. 그러나 난 솔직히 사람을 괴롭히는 것엔 재미를 못 느끼는 성미다. 그것보다 오히려 그들의 사회생활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보는 정도다. 가능하면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다. 나를 악랄하게 괴롭히던 고참이 제대를 하였다. 그땐 상황 병이 아니었다. 그러다 상황실에 들어와 사병기록장을 살펴보다가 앞서 제대한 그 악랄한 병장이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것을 알았다. 군대야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 계급이 주어지는 것이니 억울할 것은 없다. 다만 그렇게 하늘 같아 보이던 선임이 나보다 어린 사람이라는 것에 좀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그래서 비록 내 밑으로 들어오는 졸병이라 해도 사회적인 위치로 보자면 형님 벌 되는 사람도 있고 동 연배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공사 계 선임이 일찌감치 제대를 해버리는 바람에 비록 일등병이지만 내게도 조수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내 후임으로 키워서 내가 없더라도 역할분담을 훌륭하게 해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계에게 건의하여 조수를 받았다. 조수는 인하대학교 건축공학과 2년 수업을 마치고 입대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다. 행동은 굼뜨고 사리판단이 느리긴 해도 꽤 똑똑한 친구였다. 머리가 꽤나 명석해서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여긴 사회가 아니다. 엄연한 군대다. 사회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해도 군대에 들어오면 누구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 그것이 군대 생활에 큰 보템이 되지 않는다. 만인이 공평한 곳이 군대다. 그러나 계급으로 치면 만인이 공평하지 못한 곳이 군대이기도 하다.
팀스프리트 훈련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군기가 강화되었다.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할 수가 없다. 전쟁에서 실수는 곧 죽음이다. 그러니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다. 서로 한마음으로 훈련에 임하지 않으면 종종 큰 사고로 이어진다. 공병 부대가 해야 할 훈련은 적진을 향해 보병이 진출하기 전 먼저 앞서 나가 적이 매설해 놓은 지뢰를 해체하거나 아군의 지뢰를 매설하고 뒤로 빠지는 것이다. 필요할 경우 없는 길을 개척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강을 건너가기 위한 부교와 장간교를 개척하는 일이 그것이다. 부교나 장간교 위를 탱크나 군용장비들이 지나가야 하므로 훈련에 사용되는 도구들이 하나 같이 쇳덩이로 만들어져 무겁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걸 여러 명이 합심해서 일사불란하게 이동하고 조립하는 훈련을 반복한다. 상황 병이라고 훈련에서 예외는 없다. 상황실 최고 고참 만 빠지고 모두 훈련에 참가하는 게 보통이다. 일병 주제에 무슨 기대를 하겠나 나도 우리 동기들과 함께 장간조에 배치되었다. 그중에서도 횡간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횡간이란 일종의 장간교량의 하부에 조립되는 H형강이다. 하나의 무게가 200~300kg 가까이 된다. 횡간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있다. 운반을 위한 용도인데 거기에 팔뚝만 한 나무를 끼우고 좌우로 둘씩 팔뚝 위에 운반 봉을 올리고 구령과 함께 지정된 장소까지 운반하는 일이다. 이 외에도 교량의 양쪽에 세워지는 난간용 철골, 상판에 까는 철재판과 각종 조립용 핀 등을 각자 주어진 임무 순서대로 일사천리로 조립해 완성해야 한다.
부교는 강물에 배를 일렬로 붙여 세우고 그 위에 도보교를 걸치는 구조로 장간교량 보다 가볍고 조립이 간단하다. 부교에서도 난 운반 조에 들어갔다. 강물에 띄우는 알루미늄 배를 운반하는 것인데 한 번 강물에 설치한 후 해체하여 꺼내오려면 처음 때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다. 배에 구멍이 뚫려 물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난 태생이 약골이다. 지금도 무거운 것 들면 손목이 아프고 팔꿈치가 후들거리는 데 살이 포동포동 쪄 있던 그땐 누가 봐도 힘깨나 쓸 것이라고 생각된 모양이다. 그러니 훈련기간 내내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도 못한다. 그렇다고 꾀를 부릴 수 없다. 장간을 함께 옮기던 동기 녀석의 팔꿈치가 뻘겋게 물들었다. 처음엔 모래가 묻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선임에게 보고하였다. 선임이 훈련을 잠시 멈추게 하고 동기를 불렀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자신의 풀꿈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장간을 운반하는 동안 구멍에 끼운 팔뚝 목이 미끄러지면서 살이 형강에 씹힌 것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줄도 모르고 훈련에 몰입한 것이다. 그만큼 선임들의 엄한 군기에 자신의 고통까지도 모를 정도였다.
나무위치 발췌-공병단 훈련-장간교 조립훈련
드디어 팀스프리트 훈련이 개최되었다. 운송 병들이 각종 훈련 도구들을 덤프트럭에 가득가득 실고 앞서 한탄강 훈련장소로 출발하였다. 한탄강 인근에 공병부대의 훈련 장비들이 별도로 보관되고 있어서 우리가 가지고 가는 건 훈련에 필요한 것이 아닌 훈련장에서 쓸 각종 생활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연습용은 부대에 그냥 두고 실전에 배치되는 훈련장비는 따로 있다. 그걸 우리가 훈련용으로 빌려 쓰는 것이다. 전쟁 시 그것들은 실전에 사용되는 것들이라서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 보관부대는 훈련 대신 언제든 훈련에 사용할 수 있거나 실전에 배치될 수 있도록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임무와 훈련장소로 이동 및 수거하는 일을 담당한다.
첫날은 나지막한 산기슭에 A형 텐트를 치고 은신하는 훈련이다. 저 아래는 드넓은 광장이다. 그곳엔 포병부대가 진을 치고 위장막 아래에 운집해 있다. A형 텐트는 기껏해야 2~4인이 들어간다. 훈련 시 중대원들은 소대와 분대로 쪼개지고 각각의 팀마다 선임리더가 배치된다. 모든 훈련은 선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매일 군기 잡는다고 밤마다 얼차려를 받지 않으니 훈련기간이 어쩌면 더 편하게 느껴졌다. 밤이 되자 우린 완정무장 한 채 텐트에서 대기하였다. 광장에서 갑자기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불꽃을 날리며 어디론가로 날아가는 포탄의 꼬리가 마치 물속에서 달아나는 물고기 모양으로 꼬리를 흔들며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저 멀리 어디선가 섬광이 번쩍하고 이어서 ‘꽝’ 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땐 일제히 모든 포문에서 포탄이 날아간다. 그러다 한쪽부터 차례대로 포탄을 쏜다. 군대는 각자 자신이 수행하는 임무가 다르다. 보병은 보병대로 포병은 포병대로 기갑부대는 기갑부대대로 각자 맡은 임무 방식이 다르다. 그러니 자신과 다른 군인들의 임무수행 장면을 보는 즐거움은 이만저만 아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저런 부대에 배치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다음날 아침 전투식량으로 아침을 먹고 우리 부댄 차량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이동을 하였다. 훈련이 처음인 신임 부대원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경험 많은 선임들은 코스를 잘 알고 있다. 이동은 주로 이른 아침과 초저녁 시간에 움직였다. 지나가는 동안 길가를 스쳐가는 민간인들의 모습을 본다. 아무런 제약도 없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어디론가 여유롭게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다. 훈련병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위장크림을 발라서 누가 누군 지 알아보기 힘들다. 다만 철모에 표시된 계급장을 보고 하대를 할 것인지 존대를 할 것인지 구분한다. 불규칙한 취침과 야전생활로 병사들은 차만 타면 졸기 일쑤다. 그때마다 선임은 소리를 버럭 지르고 졸지 못하게 했다. 고참이 아무개 상병을 부른다. 선임이 먼저 "노래 한 삽"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퍼어”라고 외친다. 공병대는 삽질에 살다 삽질에 죽는다는 상징적인 말이 있다. 그러니 노래를 할 때도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모 상병은 기다렸다는 듯이 구성진 목소리로 트로트를 불렀다. 굵직하고 구수한 그 목소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가 부르면 무슨 노래도 다 명곡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탄강이 보이는 집결지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우리의 특공훈련이 펼쳐질 장소다. 장간교와 부교를 정해진 시간 안에 놓아야 한다. 그래야 대기하고 있던 기갑 부대와 보병부대가 제시간 안에 교량을 통과해야 한다. 우린 앞서 수없이 반복하여 예비 훈련을 마친 상태다 모두가 긴장하고 명령을 기다렸다. 드디어 임무하달이 떨어졌다. 각자 맡은 위치로 돌아가 순서대로 움직였다. 훈련을 지휘하는 건 최고 선임병이다. 하사관이나 장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훈련을 지켜볼 뿐이다.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차가운 한탄강 물이 더운 몸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규칙적인 함성과 분주히 뛰어다니는 군화 소리가 가득하다. 모두가 상기된 표정이다. 장간이 제 위치에 배치되자 횡간 조가 그 뒤를 이어 세워지고 조립을 위한 핀조가 무거운 해머를 휘두른다. 여기저기서 쇳덩이 부딪히는 소리가 꽝꽝하고 들린다. 온몸이 땀과 기름으로 얼룩진다. 입이 바싹 타들어간다. 목이 마르다. 하루 종일 소변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몸의 모든 진액이 땀으로 빠져나왔다. 드디어 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부대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쌍욕에 온갖 잔인한 말을 쏟아붓던 선임리더가 이빨이 모두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는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에서 이슬이 맺힌다. 이런 게 군인 정신이지 이런 게 사나이들의 몸부림이지..
우린 오랜만에 안도의 숨을 쉬며 전투식량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평상시 원수처럼 뵈던 군기 담당 선임도 곧 제대를 앞둔 왕고참도 오늘만큼은 하나다 한 형제다 한 팀이다 모두가 환하게 웃고 모두가 가슴 먹먹했다.
난 지금도 군인정신이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끔 그때의 제정신이 아닌 그 우월한 정신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미치광이 같고 머저리 같고 바보 같은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정신병자 같은 군인 정신 말이다. 타성에 찌들어버린 생각들을 일시에 몰아내고 그때의 끓어오르던 젊은 패기로 산다면 못할 것이 없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혹자는 말한다. 군대 제대 했다고 가산점수를 주는 것은 차별이라고 난 그 말에 전혀 동의하고 싶지 않다. 죽음을 담보로 나라를 위해 충성한 군인을 홀대하는 건 죄악이다. 그들이 겪었을 정신적 고통과 피나는 노력과 젊음을 불태운 세월은 누가 보상한단 말인가. 그런 걸 알면서도 차별이라고 말하고 심지어 그런 제도를 없애는 골 빈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역시 사회는 불안정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의 청춘이여 나의 젊음이여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으나 그때의 기억은 결코 잊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