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친구가 연명치료거부 신청을 했다며 개인sns에 올렸다. 올해 버킷리스트였단다.
모임을 갔더니 대부분이 건강 이야기다. 한참 먼 나이의 사람조차 70즈음을 말한다. 근교 시골에서 한뼘 땅에 고구마 한고랑, 고추 한 모종, 방울토마토 한그루 심으며 살고 싶단다.
봄에는 친구와 쑥캐고, 씀바귀 뜯고 엄마가 해주던 것처럼 나물도 무쳐먹고 그렇게 딱 십년만 살다가 구급차 안에서 죽었으면 좋겠단다. 병원에 도착하면 분명 살려낼테니…
평균수명이 길어지다보니 노후생활이나 제2, 제3의 인생설계를 다시 꿈꾸나보다. 더 오래 일 하기도 하고 좀더 생산적인 생활과 활동을 하며 새로운 열정을 불태운다. 하지만 대부분 마무리는 죽음 이야기에 닿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가장 공평한 조건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웰빙에 이어 웰다잉에 대한 관심도 높다.
죽음에 가까워진 것도 있겠지만 삶에 대해 새로운 태도나 다르게 살기위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일수도 있겠다. 어떤 프로그럄에는 묘비명이나 유언장을 써보고 자신의 장례식에 누구를 부를지, 어떻게 치를지 직접 계획해 보기도 한다. 분위기를 만들고 진지하게 임하다보면 분명 가상체험에도 눈물을 쏟고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우연히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으로 유먕한 권정생 선생님의 유언장을 읽었다.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특별한 형식이 있다한다. 이건 그런 유언장과 다른 느낌이다.
읽다보니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비가 내리는 사흘동안 민들레를 꼭 껴안고 있다가 마침내 거름이 되어 꽃으로 활짝 핀 강아지똥… 울컥하면서도 베경의 무지개 조각처럼 맑게 빛난다.
<권정생 선생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 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
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 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나에게 유언장이란 어떤 의미일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부탁하며 어떤 말이 하고 싶을까.. 한번쯤 써 볼만한 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