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신라 문무왕 vs 일본 문무왕
지금까지의 이슈, 즉 신라 문무왕과 일본 문무왕은 정말 한 사람인가?
신라 문무왕의 친아버지는 김춘추(태종무열왕)이 아니라 연개소문일까?
연개소문은 일본 천무왕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인가?
작가는 이 이슈에 대해 좀 더 살펴보려고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시 왕자는 왕세자로서 정부 최고위직인 <태정대신> 지위에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지통 여왕과 천무왕 사이에 태어난 아들 초벽 왕자가 있었는데 689년에 28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바로 그 자리에 고시 왕자가 앉았으니 모종의 정변이 있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고시 왕자는 왕위 계승권자인 초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올라 실질적인 왕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43세의 나이로 696년에 죽는데, 이 또한 문무가 요시노에서 읊은 노래를 생각할 때 암살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고 한다.
지통 여왕은 고시가 죽자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왕족, 고관들의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는데, 그 무렵의 상황이 한시집(漢詩集) 「회풍조(懷風藻)」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지통 여왕이 문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자 하자, 궁삭 왕자(천무왕과 천지 왕의 딸 대강 사이에서 난 아들)가 대놓고 반대한다.
하지만 백제계, 고구려계, 가야계를 고루 아우르는 갈야 왕이 “큰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문무가 왕이 된다.
즉 천무왕의 큰아들이 문무라는 것이다.
*갈야 왕: 천지 왕(백제계)의 왕세자 대우와 천무 왕(고구려계)과 액전 왕(가야계) 사이의 딸 십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따라서 백제게, 고구려계, 가야계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는 논리
그러면서 「일본서기」에는 천무와 정비(正妃) 지통 사이에 난 아들은 초벽이라 하고, 또 다른 정사서(正史書)인 「속일본기」에서는 문무가 초벽의 둘째 아들이라고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당시 고관대작들이 읊은 시에 문무가 왕이 된 것은 큰아들이었기때문이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었음에,도 일본 역사책 어디에도 큰아들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일갈한다.
「삼국유사」에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가 실려있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 때에, 동해 앞바다에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왕이 대왕암을 바라보는 곳에 거동하니 용이 나타나 대나무를 주었다.
용은 '이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고 해서 왕은 피리를 만들어 월성에 간직해두었다.
그리고 이것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가뭄이 해소되고, 장마가 그쳤고, 바람이 멎고, 물결도 가라앉았다는 내용이다.
감은사는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창건한 절로 동쪽으로 용혈(龍穴)이 있다.
그리고 절터에는 지금도 삼층 석탑이 동-서 양 탑으로 있다.
이와 같은 동-서 양 탑 식 절간 건축은 7세기 후반에서부터 신라와 일본에 성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람배치 사원은 신라 문무왕 즉 일본 문무왕과 그의 생부 연개소문 즉 일본 천무왕을 기리기 위한 성격의 절들이었다'’는 고바야시 야스코 여사의 주장을 소개한다.
<만파식적>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다가온 산은 어쩌면 일본에 망명한 문무왕의 사신이 타고 온 배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문무왕은 죽어서 호국용이 되어 왜군의 침략을 막겠다고 했으니 왜왕이 되어 왜의 침략을 확실히 막을 수 있는 것이란다.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대중을 현혹했다 하고. 일본 천무왕은 ‘청룡’이라고 자처했다는 여러 기록을 남기고 있으니 서로 용으로 연결지어지는 특별한 관계라고도 말한다.
일본 문무왕은 취임 이후 신라 사절단을 대대적으로 맞이하고, 정초에도 신라 사절을 참례시켰을 뿐 아니라 사절단을 신라에 끊임없이 보냈다.
그리고 신문왕(681-692 재위)의 대를 이은 효소왕(692-702 재위)이 죽었을 때 보낸 친서에는, 애통의 정이 구구절절 넘친다.
‘비록 이역에 있어도, 복육(覆育)에 이르러서는 실로 애자와 같아....’
단순히 이웃 나라 국왕 간의 공식적 서신으로 보기 어려운 애틋하고 구체적인 말마디로 채워져 있다.
「일본서기」 기록상으로는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된 일본 왕이 훨씬 나이가 위인 신라의 효소왕(692-702 재위)을 ‘키웠다’는 것도 이상하고, ‘사랑하는 자식 같다’는 것도 괴이하다.
그러나 일본 문무왕이 신라 문무왕이라면 쉽사리 납득이 된다.
효소왕은 문무왕의 장손이기 때문이다.
「속일본기」에서도 700년 11월에 신라 사절 김소모가 와서 母王이 돌아갔다고 문무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모왕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왕의 어머니가 돌아갔다고 부고를 일본 왕에게 알려오기는 고문헌을 통해 이때뿐이다.
혹시 문무왕의 생모가 이때 돌아갔던 것은 아닐까?
도대체 고대의 한-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소설 이상의 소설 같은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0년 전쯤에
광고: 폐윤활유 정제 및 재처리 기술개발 성공 창업주주 모집
관련 기술로 사업하는 회사는 여전히 존재하나, 같은 이름의 회사는 검색되지 않는다.
아마도 선도기업으로 성공하여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거나, 대기업이 인수하였거나 하지 않았을까?
연말(12월 12일)인데 별다른 광고는 없고, 뒷면에 주식시세표가 게재되는 관계로 이야기거리가 확 줄었다^^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