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핑 베토벤>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영화 이다.
“신께선 어떤 사람 귀엔 속삭이지만 내게는 고함을 치시네. 그래서 귀가 먼 거야”
… 그에게 감정의 지하세계 및 영혼의 중간세계를 꿰뚫어 볼 신비스런 통찰력을 부여하였다. 오히려 질병 덕분에 그는 지고의 예술 경지에 도달한다. (중략)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행복의 그 순간에도 정지하려 들지 않는다. (중략) 이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원하는 어린이인 것 같다.
위대한 예술가의 인생은 대개 그의 작품만큼이나 극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훌륭한 작가일지는 몰라도 그다지‘위대’하지는 않으리라.
여기 천재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 자체야 ‘또 한 편’일 수 있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내용은 결코 ‘또 하나’일 수 없기에 영화는 가치를 지닌다.
영화 <카핑 베토벤>은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라는 위대한 작곡가의 마지막 불꽃을 너무도 매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오늘날의 뉴욕과 같이 당시 모든 문화의 중심이었던 비엔나의 한 좁은 아파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에는 베토벤의 ‘카피스트’(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나눠줄 악보를 옮겨 그리고 교정보는 사람)가 되기 위해 찾아 온 젊은 음악도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가 있다.
그녀가 그 곳에 서 있는 건, 귀가 멀면서 점점 더 괴팍하게 변해갔던 베토벤(에드 해리스)이 곧 그의 9번째 교향곡을 마칠 참이라, 솜씨 있는 카피스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에스트로가 젊은 여성과 작업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베토벤은 그녀를 돌려 세우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가치를 그에게 증명함으로써 그의 곁에 머물 자격을 얻게 된다.
곡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베토벤과 안나 사이에는 고용 관계를 넘어서는 우정이 자라나게 된다. 그녀야말로 천재라 고독할 수밖에 없던 베토벤의 음악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향곡이 초연되는 자리에서도 그녀는 귀가 먼 베토벤을 위해 오케스트라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들을 정성껏 도와줬던 이도 오직 그녀뿐이다.
그리고 그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줬던 것도 그녀다. 영화는 이처럼 한 천재의 삶을 철저히 허구에 입각한 젊은 여성 ‘안나 홀츠’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단지 베토벤의 천재성(혹은 광기)이나 젊은 여성과의 미묘한 감정교류가 아니다. 물론 베토벤을 연기한 에드 해리스의 연기는 진정 ‘천재 전문배우’라 할 만하고, 영화 속 연주가 마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 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라면 천재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관객 역시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 이 영화는 특별하게 다가갈 것이다. 그건 바로 이 영화가 ‘예술’ 그리고 ‘소명’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다
“나는 영혼과 영혼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
… 이 정복자들은 영혼이라는 고향으로부터 미지의 어두운 대서양으로 마음이라는 새로운 구역을 향해, 또 정신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향해 나아간다. (중략) 세상을 넓게 만든 사람은 고향의 지리학자처럼 느긋한 안식가가 아니라 미지의 대서양을 거쳐 새로운 인도로 건너간 무법자들이며, 현대인의 영혼의 심층을 인식한 사람들은 심리학자나 학자들이 아니라 시인들 중 무절제한 자들, 즉 한계초월자들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귀가 멀고, 성격도 괴팍해진 탓에 고독하게 창작활동을 해야 했던 베토벤의 말년은 그다지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천재성이 지나치다 못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경지에 이른 듯 보인다.
그래서 그는 하찮은(?) 이웃들의 불평 따위는 들은 척도 안한다. 도가 지나치다 싶은 그의 행동을 보던 안나 홀츠가 그의 이웃에게 “왜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그 이웃은 “베토벤의 음악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데, 왜 이사를 가느냐”며 “아마 비엔나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부러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오만함(?)이 드러나는 다른 장면을 보자. 건축가인 안나의 애인이 자신의 작품을 출품한 공모전에 나타난 베토벤은 그의 작품을 보자마자 혹평을 가한다.
발끈한 건축가가 “대체 무슨 권리로 함부로 말하느냐”고 하자 베토벤은 “너는 고작 땅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지만, 나는 영혼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든다”라며 그의 작품을 부숴버린다. 건축가의 작품에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말 그대로 온 유럽을 들끓게 한 교향곡을 발표한 후 그의 행보도 심상치 않다. 그가 작곡한 ‘Grosse Fuge in B flat major Op.133’은 당시 음악의 룰을 깨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앞선 작품에서 그를 숭배했던 무리들은 “이제 베토벤도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 본인만큼은 이 작품이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후세들을 위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 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그의 삶 전체, 아니 시대를 앞서 간 천재들의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괴팍하다. 그는 변덕스럽다. 그는 가까이하기 힘들다. 그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천재다.
천재가 무엇인지 아는가. 천재는 하늘나라의 대사인 셈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면책 특권을 가진다. 그러니 무릇 범인(凡人)들은 그에게서 온화한 대접 따위를 바랄 게 아니다. 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천재인 그로서는 이미 참을 만큼 참은 거니까. 어쨌든 나는 천재 따윈 없는 세상보다는 오만한 천재와 함께 하는 세상을 택할 테다.
음악은 신의 언어야, 난 신의 음성을 듣고 그의 입술을 읽지
… 그의 영혼은 마치 움푹한 그릇에 가득 넘쳐흐르는 물처럼, 몸에서 빠져나와 두 나래를 활짝 펴고 신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 영혼은 날개짓하며 천상의 빛을, 다른 세계의 빛과 은총을 감지했다. 그러나 이미 대지는 가라앉고 이 우주공간을 진동시켰다. 바로 이 때 그를 깨우는 천둥소리는 다시 천한 삶으로 그를 내던져 산산조각 냈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 시대 혼을 일깨우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면 ‘인간 실존’은 또 다른 축일 것이다.
끊임없는 고통과 자기 회의에 시달렸을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이 오만하고 고집불통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자신의 실존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베토벤은 “그는 나를 이해하고, 나 역시 그가 원하는 것을 안다. 우리의 관계는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변한다. 이에 대해 여자 주인공은 ‘당신은 정말이지 고독한 종교 속에서 살고 있군요’라고 비꼬지만, 정말 그럴까.
그의 말이 신앙인의 근본인 겸손함을 무시한 것이라거나 외곬수의 삐뚤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의 ‘9번 교향곡’을 들은 사람이라면 감히 그렇게 단정할 수 없을 거다.
비록 스크린 속에서였지만, 교향곡의 제4악장이 울려 퍼질 때, 마치 야곱이 본 바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천사’를 본 것만 같았다. 그 때 든 생각이라고는 ‘베토벤은 진정한 천재야’가 아니라 ‘이것이 진정 하늘의 영광이구나’라는 것이었다. 마치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가 구절처럼 말이다.
그 때 깨달았다. 그가 정말로 신의 영역을 잠시나마 맛 본 자라는 것을. 그렇다. 그는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것처럼, 열려진 하늘의 문을 통해 하늘의 언어를 훔쳐 내 이 땅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그가 들려 준 하늘의 음악은 인간을 압도하는 것이었고, ‘눈에 보이는 세상, 그 이상이 존재함’을 진심으로 인정케 하는 것이었다. 온 천지의 창조주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은, 의외로 ‘세상을 집어 삼킬 것 같은’ 교향곡이 아니라 소박한 소품이었다. 추수감사 예배를 위해 만들었다는 ‘String Quartet No.9 in C major Op.59 No. 3 Rasumovsky’. 이 땅에서 누구보다 영광스럽고 누구보다 고독하게 살았던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이 곡은, 한 천재가 자신의 창조주께 겸손함으로 드리는 마지막 고백인 셈이다.
물론 이 영화는 역사적 기록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진실의 힘’은 감독의 해석 그 이상을 보게 한다. 비록 천상의 문은 당신에게 잠깐의 환희만 허락한 후, 다시 굳게 닫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목마른 자들은 여전히 목마를 테지만 말이다.
주 : 각 단락의 삽입 문구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천재와 광기>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은하기자
첫댓글 종교영화라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베토벤의 말년에 쓴 9번 교향곡의 4악장의 "환희의 송가"의 합창을 들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베토벤도 이 곡을 쓰면서 하늘의 영광을 맛 보았을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