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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넷째 날(5월 25일)
(11)
격포항 유감(有感)
"어르신이 웬일이대요."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후줄근한 늙은이에 깜짝 놀란 찜질방녀의 첫 마디였다.
모텔 겸업인 재래식온돌 황토찜질방의 초로녀(여주인?)는 특별히 배려했다.
바다에 빠진 옷과 몸을 씻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처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까.
국립공원 역내지만 주점(횟집)만 밤 늦도록 불 밝히고 있을 뿐 식당은 일찍 마감하는데
다행히도 한 집이 배고픈 영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마지막 손님으로 맞았다.
한 TV의'먹거리X파일 착한식당'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는데 내게도 착한 식당이었다.
밤에 몸이 적잖이 불편했으나 찜질효과였을까.
염려되었던 증상(사고후유증)이 별스럽지 않은 아침을 맞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른 아침, 부상부위 점검과 워밍업(warming-up) 장소로 채석강 위 닭이봉을 택했다.
해발1028m인 강원도 정선의 닭이봉(鷄峰)에 비하면 언덕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서해의
전망만은 일품이겠는데 안개에 막혀있는데다 디카 배터리까지 바닥나 곧 내려왔다.
어제 어둑발에 쫓겨 허둥댔던 후박나무 군락지, 대명리조트, 격포해수욕장 산책을 통해
신체에 이상 없음을 확인함으로서 여느 때처럼 출발했다.
물이 찼다가 막 빠지는 중인 아침의 채석강은 땅거미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중국 당(唐)의 시선 이백(李白)이 즐겨 찾았다는(선상 음주중 수면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졌다나) 채석강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란다.
황해를 두고 마주보고 있기 때문인가 사대주의의 산물인가.
적벽강과 함께 명승제13호인 채석강도 중국의 시인이 애호했다는 강 이름을 땄다니까.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이 해식(海蝕)에 의해서 수만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한 와층을
이루게 되었다는 신비스런 절벽이 중국의 강 이름을 따고 있다니.
내 나라 바다의 절경(絶景) 절벽이면서도 중국의 강 명패를 달고 있는 적벽강, 채석강에
주체성 있는 새 이름표를 달아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제 강점기에 개명되었다 해서 모조리 바꾸는 민족주의가 중국에 대해서는 관대한가
무기력한가.
미국은 스페인령이었던 중미의 많은 땅을 차지한 후 각 지명의 스펠링(spelling)한자도
바꾸지 않았지만 이 곳이 중국령이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반도 서해수군의 근거지로 조선조에는 전라우수영 관할 격포진이 있었다는 격포항은
국가어항이며 위도, 고군산열도 등 서해안 도서와 연계된 해상교통의 중심지란다.
진행을 멈추고 격포항 방파제와 등대,요트항 등에 두루 다니며 해안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 위도(蝟島)에서 오는 카페리가 불현듯 위도와 얽힌 불행한 일들을 생각하게 했다.
292명의 생령을 일시에 수장한 1993년의 한국판 타이타닉호 참사.
참으로 절통하고 개탄스런 사건이며 애처로운 사연들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2003년(?)의 방폐장(放射性廢棄物處理場) 사건이야 말로 지역이기주의의 표본이다.
부안에서 영광원자력발전소가 뱃길로 얼마나 되는가.
자기네 손으로 뽑은 군수에게 테러(terror)를 가하고 그를 몰아낼 만큼 열혈한 애향군민
여러분은 핵폭탄이 옆집에 있는데도 왜 침묵하는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코미디 아닌 코미디다.
대화와 설득, 소통 부재의 결과라고 포장해 둘까.
격포항에서 모항까지
11시를 넘겨 격포항 해넘이공원을 출발했다.
격포항에서 궁항으로 가려면 해넘이공원에서 해발174m 봉화봉을 넘어가야 한다.
해안산책로 끝에서 봉화봉 퇴적층 절벽에 막혀 해안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봉화봉 정상부 허리를 돌고 드라마 세트장을 지나 해안으로 내려섰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동래현(東萊縣) 세트장이다.
동래현은 부산인데 홍보물들은 왜 하나같이 '전라좌수영'이라 고집할까.
그 때는 동래현이 전라좌수영에 속했다는 건가.
그보다, 세트장이 애물단지로 전락중이며 미구에 유적(遺蹟/ruin)이 되고 말겠다.
문경의 초대형 세트장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각종 드라마 세트장들은 지자체들이 기대
하는 관광상품은 커녕 하나같이 계륵(鷄肋) 또는 돈먹는 하마가 되고 있다.
온 나라 곳곳에 드라마, 영화 촬영 세트장이 있고 지자체는 주인공 또는 테마(thema)를
앞세워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신통한 호응이 있을 리 없다.
지자체의 머리가 방송국의 교활한 경영 전략에 밀린 결과다.
개의 형상이라는 개섬, 바위지역을 돌아가면 궁항(弓亢)마을이다.
지세가 활과 활의 목처럼 되어있다는 작은 바닷가 마을 횟집 주인 차는 에쿠스3500.
중산층의 수입으로는 거저 주어도 유지할 수 없는 고비용 차가 꼭 필요한가.
작은 어촌의 횟집 수입으로는 벅찰 텐데 주인에게는 신통한 수완이 있는가.
염려되는 것은 이 집 사정이 아니라 파급효과다.
경쟁적 관계인들이 자동차 판매 전략의 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두보를 확보한 후 경쟁 심리에 불을 지펴 판매고를 올리는 원숭이 길들이기 전략에.
궁항과 상록해수욕장 사이 해변의 거대한 펜션단지(리조트?)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무창포 비체팰리스 리조트도 그러하거니와 사계 전문가들의 시각을 문외한인 늙은이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마는 정상화 되려면 얼마의 세월이 필요할까.
이유가 어떠하던 도중에 주인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상록해수욕장 이후에도 더디지만 해안 바위지대를 고집함으로서 아마추어 조개잡이들
하고 담소하는 재미가 솔솔했다.
해안로는 언포마을, 광범한 전북 학생해양수련원과 솔섬을 지나 모항해수욕장 한하고
장병들의 피땀으로 닦아놓은 군사로와 백사장과 기괴한 바위지역이다.
변산산림수련원 입구에서 잠시 30번도로를 통해 모항해수욕장으로 내려섰다.
변산반도와 고창군 사이의 내해(內海)로 곰소만(줄포만)의 돌출부인데 모가지 처럼 된
지형에 띠가 많이 자란다 해서 모항(茅項)이라 했다는 마을이다.
해넘이 솔섬길과 모항 갯벌체험길 14km를 왔다.
오늘의 목표인 곰소항은 20여km나 남아 겨우 5분의 2를 소화했을 쁜이지만 배낭 안에
내 집을 지고 다니는데 무슨 걱정인가.
주5일 근무제에서는 금요일이 주말이 되는 탓인가.
5월 하순의 평일(금요일)인데 어느 회사가 단합대회를 열고 있는 듯 남녀 장청의 노래
자랑으로 장내가 소란한 해수욕장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였다.
아침에 격포 하나로마트에서 빵을 먹은 후 첫 식사다.
팀별로 취사를 한 듯 한데 뒷처리를 깔끔히 하지 않아 취사장이 지저분했다.
단합대회도 필요하지만 공동체 의식부터 길러야 할 회사다.
사라진 칠산어장의 미스터리
모항갯벌체험장을 지났다.
모항에서 육지로 파고드는 서해가 포구처럼 길게 형성해 놓은 갯벌이다.
도로까지 밀려나왔다가 다시 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쌍계재 아홉구비길'은 '금강가족
타운'을 지나 쌍계재, 마동 방조제로 이어진다.
이 길이야 말로 우거진 숲과 산죽지대의 군사로다.
철조망과 철책이 출입을 제한하고 짧기는 해도 일부 구간은 군부대의 협조를 받지 못했
는지 군사로를 피해 새로 조성된 길이다.
작은 방조제도 있고 지형에 순응한 옛 어장도 있는 길이다.
칠산어장 전성기의 흔적들이란다.
쌍계재 이후는 긴 해안 변산면을 뒤로 하고 진서면 땅이다.
꽤 긴 마동방조제를 건넜다.
이 방조제는 아마 골망태 공법으로 축조했을 것이다.
무수한 사람이 골망태에 돌을 담아 일시에 붓는 방식이다.
이즘, 덤프트럭이 간단히 처리하는 일을 인력으로 했으니 얼마나 어려운 공사였겠는가.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끔찍한데 오늘 세대는 선대들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니까 현대인의 불만은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서 오는 것이며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은 에스컬레이트 심리 때문일 것이다.
잠시 30번도로 갓길을 따라 당도한 작당마을에서 왕포로 이어지는 간척 둑길에 들었다.
왕포는 경기도 의왕시와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마을이다.
일본 왕을 의미한다 해서 '旺' 자를 '王'으로 바꾼 의왕시와 달리 '王浦'를 되레 '旺浦'로
변경했다는 마을이다.
칠산어장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王浦라 했으나 旺浦가 풍수지리에 합당한 한자라 해서.
어설픈 민족주의보다 풍수를 쫓는 쪽이 오히려 순박해 보인다.
무식한 늙은이가 칠산어장을 알리 있는가.
마동방조제 건너오기 전부터 궁금했는데 아무리 갈길 바빠도 알고 가야 한다.
그냥 갔다가는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니까.
연평도와 흑산도, 여기 칠산 어장을 서해 3대 황금어장으로 꼽는다.
영광 앞바다 칠산도(일산도에서 칠산도까지 있다고)에서 법성포 앞바다를 거쳐 위도와
고군산열도에 이르는 해역을 칠산바다라 부르고 이 곳에 형성된 어장이 칠산어장이다.
왕포항 정자에서 한 유식한 장년으로 부터 들었다.
조기를 비롯해 수많은 어종이 잡혔으며 동해안의 배뿐 아니라 일본의 고기잡이배까지
와서 조업을 했단다.
그 때 칠산어장의 조기잡이배들이 집결하는 포구가 여기 왕포였다는 것.
왕 포구로 불릴 정도로.
서해 어장 형성의 가장 큰 조건은 갯벌이란다.
바다에서 사는 각종 생물의 70%가 갯벌에서 산란하고 부화하며 자라는 과정에서 먹이
사슬의 장이 절로 이루어짐으로서 황금어장을 형성하게 된단다.
칠산어장을 황금어장으로 만든 주인공은 광대한 새만금갯벌인데 방조제로 인해 갯벌이
사라짐으로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개탄하는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갯벌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차마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 원양어선들이 만선의 개가를 올리는 남태평양 일대, 소위 칠레
앞바다는 수많은 새만금갯벌로 되어 있을까.
연근해에서 조금만 나가도 어족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쌍끌이어망으로 치어까지 싹쓸이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는 것 아닐까.
사라진 칠산어장의 미스터리(mystery)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만경평야가 일제 강점기에 단행된 간척사업의 산물임을 상기해 보면 새 새만금
갯벌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오래잖아 올 것이다.
갯벌을 만드는 것은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의 운명이니까.
곰소항 관광기사식당
왕포에 도착하기 전에 해는 서산을 넘어갔다.
여광도 운호마을 방조제를 지나 관선마을 이정표 앞에 도착할 즈음에 사라졌다.
관선헌(觀仙軒) 석비 인근 정자에 집을 지을까 했으나 저녁끼를 해결할 길이 없어 3km
남짓 남은 밤길을 걸었다.
오래전 간척사업으로 양어장과 전답을 이루고 있는 길이다.
전적으로 무비유환(無備有患)의 길이다.
곰소항으로 추정되는 쪽 밝은 불을 등대삼아 가다가 컴퍼스와 플래시(flash)를 꺼냈다.
갈래길들이 나타나는데 밤중에 링반데룽(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리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기 때문에.
가끔 나타나는 차량의 전조등으로 도로를 확인하고 접근해 갔다.
30번도로에 진출함으로서 불안은 털어냈으나 가로등만 외롭게 불 밝히고 있을 뿐 곰소
항은 공동(空洞) 상태라 할까.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유일한 집을 향해 달리듯이 걸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곰소항 관광기사식당'이다.
횟집 메뉴는 물론 각종 바다젓갈을 비롯해 관광객을 상대로한 해산물 판매점이다.
山나그네의 본성은 변할 수 없는가.
낮은 자세로 서있는 '등산객 무료 자리제공' 현수막이 특히 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이 집 역시 격포의 착한식당 처럼 내가 마지막 손님.
식사 후에 가려 한 찜질방이 곰소에는 없고 내소사 입구까지 십리 이상 가야 한단다.
버스 노선이 있으나 밤이기 때문에 택시를 타야 할 것이란다.
배낭 안에 내 집이 없다면 찾아가려 했을 것이며 몇km쯤의 상거가 개의되었겠는가.
하지만, 식당 앞의 텅빈 넓은 주차공간을 두고 그래야 할 까닭이 없다.
등산객에게 특히 후한 마음씨인데 천막치는 것을 시비하겠는가.
앞마당의 평상마저도 허락하지 않은 대미산 밑 어느 집과는 아예 다른 분위기 인데.
식사를 마친 후 식당 젊은이의 양해를 구하는 중일 때 주인녀가 개입했다.
"안됩니다."
당황할 수 밖에 없는 내게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어르신, 이 넓은 식당 방을 두고 밖에 천막을 치다니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요.
전기장판이니께요 스위치만 넣으면 따뜻하니까 방에서 편히 주무셔요."
내 이즘의 편력은 내가 식사하는 중에 화재거리가 되어 이미 알고 있는 후덕한 그녀는
침낭을 꺼내려는 것 마저도 막았다.
"깨끗한 새 이부자리를 내드릴 테니 귀찮게 그러지 마셔요"
감동먹은 나는 "내가 먹거나 도둑맞으면 어쩌려고 통크게 그래요"
농 삼아 말했지만 백두대간 괘방령 자락 S가든 주인의 "도둑을 맞았다, 강도가 들었다"
등 황당하고 인격모독적 거절 이유가 떠으르기도 했다.
"잡수고 싶은 것 있으면 맘대로 잡수셔요. 얼마나 자시겠어요"
주인녀는 정말로 통크게 응수했으며 수도권 A시에서 사업을 하다 여의치 않아 누님을
돕고 있다는 젊은이는 잠시 모임에 다녀오겠다며 나갈 때 영업용 PC를 열어놓고 갔다.
내가 인터넷도 활용하는 늙은이임을 알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 곰소항의 밤.
다시 택리지의 이중환을 생각해 보는 밤이었다.
그의 '택리지'를 들고 8도를 누비고 다녔다.
그가 택리지를 통해 주장한 지리와 인심의 상관관계를 짚어볼 뿐 아니라 그가 논(論)한
팔도 인심의 당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18c의 한국 농경사회에서는 합리적인 관찰로 인정받았을 망정
20c 산업사회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도 유효한가를 확인하려 한 것.
비록 교통사고라는 악재로 인해 중지되었지만 중간보고는 단호한 노(no)다.
지리와 산수로 인심을 논하여 지방색을 조장한 결과가 되는 그의 책이 전국 방방곡곡에
고층 아파트 숲을 이루며 인공호수, 인공강이 흐르는 오늘에 유효할 수 있는가.
전국이 반 하루 생활권이며 공간이 말살 단계인데 지방색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당시에는 예리한 통찰이었을 망정 과거완료형일 뿐이다.
대미산 자락 어느 집의 몰인정이 그 지역 인심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날 밤 그 마을 다른 어느 집에서 몸둘 바를 모를 만큼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괘방령 자락에 S가든이 있는가 하면 그 지역에는 이 집과 다름없는 인심도 있으니까.
저주받아 마땅한 현대의 지방색은 지방 인심과 별개의 현상임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지방(지역) 인심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굳이 오늘의 지역갈등을 논한다면 '얼룩말'로도 통했던 한 사람이 원흉이다.
그가 정치적 이유로 황당한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서 촉발되었으며 원점으로 돌이키기
벅찬 지역이기주의로 악화된 것이니까. <계 속>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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