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은 말 그대로 보면 ‘景(觀)을 만듦[造]’이다. 매우 간결한 정의이지만 경관이라는 것 자체도, 또 그것을 만든다는 일도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매우 복잡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경관은 보통 생각하듯 눈으로 보아 매우 아름다워서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치’이기도 하지만, 생물이 자리잡고 살아가는 ‘토지’이기도하고, 또 이것을 확장한 ‘환 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 조경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리고 다른 문화를 이루고 살던 그 시절에는 어떤 것들이 조경에 영향을 미쳤을까? 옛 조경에는 어떤 원리들이 작용했을까?
이번 답사 코스 중에서 가장 기대가 됐던 곳이 바로 '선교장'이다. 선교장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가옥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한다. 해서, 이 선교장에 대해 살펴보고 아울러 우리 전통 조경의 사상과 특징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한국 조경에 영향을 끼친 사상
1. 은일(隱逸)사상
우리 전통 사회의 자연관 내지 인생관에 구체적으로 반영된 사상 중의 하나가 도가적(道家的) 은일 사상이다. 은둔 사상이 참여를 거부하는 완전한 현실 도피를 의미하는데 반해 도가적 은일 사상은 초탈과 덕행고사의 초세를 뜻한다.
이와 같은 도가적 은일 사상은 노장사상의 핵심인 도(道)와 무위(無爲)의 개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노장사상에서의 도는 주로 궁극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데 반해서 무위는 인간이 따라야 할 행동에 관한 가장 궁극적인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즉 도(道)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자연법칙(自然法則)이자 우주의 본체이며, 무위(無爲)는 자연대로 살아가는 일을 가리키며 도법자연(道法自然)을 인정할 때 무위는 도를 파악하는 행위며 도를 따라 살아가는 행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자연이라는 모든 존재의 모태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인간의 우환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자연에의 귀의(歸依)를 의미하는 것이다.
은일 사상은 현세에 대한 관심이나 명리에 연연한 욕망을 벗어나 스스로의 고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가적 은일 사상은 은일적 자연관으로 발전되어 전통사회, 특히 조선시대의 시조 등의 문학에서부터 조경문화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은일 사상은 초세속과 초탈을 의미하지만 단지 현실도피를 뜻하지는 않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은일 사상에 의해 특히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조경작품들로는 조선시대에 주로 이루어졌던 별서정원을 들 수 있다. 이들 별서 정원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 생활 중에 이루어졌다.
민간정원들로서 현재까지 유적이 남아 있는 것들만을 살펴본다면 정영방이 병자호란후의 은거 생활 중에 조성한 경정지원, 정약용이 순조 때의 신유교란 에 연루되어 유배 생활 중에 조성한 다산초당 원림 등이다.
2. 신선(神仙)사상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생긴 불로장수(不老長壽)에 관한사상, 불로장생의 신선의 존재를 믿고 그 경지에 달하기를 바라는 사상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도교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종교로서 고대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 도가, 역리, 음양오행, 점성 등의 논법과 무술적인 신앙이보태어 졌으며, 다시 그것에 다소의 불교적 체계와 조직이 영향을 주어 체계화되었는데 불로장생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본래 중국 고대에 있었던 산악신앙과 깊은 기원적인 관계가 있는 신선설은 도가의 지인, 진인, 신인 등을 말하는 장수우언을 사실같이 다루고 있으며, 신선이 산다는 해중의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은 이곳에 불로장생의 선약이 있고, 부귀전능의 생활이 가능한 낙원으로 알려졌다. 결국 신선사상에 나타나는 산악과 해도는 경관으로서의 사색과 감상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려고 하는 환상적인 이상향, 즉 동양의 유토피아를 그려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신선사상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고래(古來)로 여러 명산대천과 이름난 강해(江海)에 많은 신성유적과 신선에 관련된 전설이 있고, 사찰에 산신각(山神閣)이나 주성사(主聖祠)를 만들어놓고 봉사(奉祀)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신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경문화에서 신선사상의 표출은 십장생도와 수목의 사의적(寫意的) 배치에서도 잘 나타난다. 십장생, 즉 해, 산, 물, 돌,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소나무는 정원의 담과 굴뚝에 흔히 그려지는데, 경복궁 자경전의 담장과 굴뚝, 교태전 뒷뜰, 아미산 굴뚝에 그려진 십장생도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굴뚝의 그림에는 십장생과 함께 선비의 지조와 절의를 상징하는 사군자도 보이는데, 이것은 유교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연꽃, 포도, 토끼도 등장하는데, 연꽃은 불교문화의 영향이고, 포도는 많은 열매가 모여 송이를 이루는 식물이므로 자손번성의 기원이 담겨 있다. 토끼는 달나라의 월궁에 살고 있는 신령한 짐승이므로 이 역시 신선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것으로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 문방구류, 베개모, 자수, 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3. 음양오행(陰陽五行)사상
음양오행사상은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역(易)사상에서 기원한다. 역은 동양적 우주관에 관한 이론으로서 기본원리는 원래 우주, 자연의 생성, 변화에는 태극(太極)이 있었으며, 그태극이 양의(兩儀)인 음(陰)과 양(陽)을 낳았고, 그 양의가 사상을 낳았고, 그 사상이 팔괘(八卦)낳았다고 보고 있다.
음양설이 우주, 자연의 일체 현상을 음양이기(陰陽二氣)로서 해석하는 데 대해서 그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오행설이다. 음양오행사상은 음(陰)과 양(陽)의 소멸, 성장, 변화, 그리고 음양에서 파생된 오행(五行), 즉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움직임으로 우주와 인간생활의 모든 현상과 생성소멸을 해석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음양오행사상은 중국의 전국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서로 독립되어 있던 음양설과 오행설이 결합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오행설은 고대 그리스, 인도의 원자론만큼 체계적으로 전개되지 않았고, 실체적으로도 그 성격이 구명되지 않았으므로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과 대비시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오행은 만물을 구성하는 원시적인 질료원소로서 고대 동양의 우주생성론의 중요한 기초를 형성한다. 뒤에 연속적 물질개념이 도입되고, '도(道)'와 '기(氣)'를 기초로 하는 무형적 개념을 받아들임에 따라 이 원자개념은 동양의 자연관 및 자연과학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음양설은 그 뒤에도 동양의 관념체계에 계속 존속하게 된다.
음양설이 우리나라의 조경문화에 끼친 사례는 바로 정원 연못의 형태였다. 고구려의 안학궁 터와 백제의 정림사지에서는 우리나라 연못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방형(方形) 연못, 즉 방지(方池)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연못형태이다. 정원의 다른 구조물들이 모두 곡선을 취하고 있는 반면, 유독 연못의 형태만 직선으로 구성된 것은 음양설로도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형태가 전적으로 음양설로만 설명하는 것은 너무 단선적이지만, 네모난 형태의 연못 윤곽은 땅, 즉 음(陰)을 상징하고, 연못 중앙의 둥근 섬은 하늘, 즉 양(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음과 양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만물의 생성이며 국가의 번영이며 자손의 번창이다. 휴식을 취하고 유유자적하는 정원에서도 이처럼 국가와 자손의 번영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 담겨 있는 것이다.
4. 풍수지리(風水地理)사상
풍수지리설은 우리민족의 기층적 사상체계를 이루어 온 수많은 사상들 중의 하나로 신라이후 우리민족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관념임을 부인할 수 없다. 풍수설은 주역의 체계를 주된 논리구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도선의 풍수도참설, 뿌리 깊은 한민족의 무속신앙, 불교, 유교, 도교 사상까지 합하여 한국 특유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발전해 왔다.
풍수설은 정원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은 물론, 중요한 국가정책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지금까지도 그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이 사상은 우리 민족의 토지 및 지리 관념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
풍수지리설의 목적은 땅속에 흘러다니는 생기(生氣)에 감응(感應)받음으로써 피흉발복(避凶發福)할수 있는 진혈(眞穴)를 찾는 데 있다. 땅속에 생기가 가장 충만한 곳이 진혈이 되고, 이 진혈을 찾는 것이 풍수의 목적이므로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가 풍수원리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오늘날에도 풍수를 단순한 미신이 아닌 하나의 고유 학문으로 이해하고 연구하려는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풍수설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풍수설과 관련된 내용 가운데 오늘날 과학적으로 그 타당성이 증명된 것들이 많으며, 특히 주택에 관련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향인지 결정을 내리기 곤란할 때, 이 풍수설은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경문화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진 풍수는 특히 양택풍수(陽宅風水)로서 그 이론에 의하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택지를 가장 좋은 집터이다. 배산임수의 택지에 주택을 짓고 정원을 조성하게 됨으로서 자연적으로 정원은 전정(前庭), 내정(內庭), 후원(後園), 별정(別庭)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난 후원양식도 풍수지리사상의 영향 때문에 발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배치형태를 풍수개념과 연관시킬 수 있는바, 이 중 정원만을 대응시켜 보면 전정은 외명당(外明堂)에 해당하고, 내정은 내명당(內明堂), 후원은 현무(玄武)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경수목을 심는 데도 수목의 상징성과 풍수지리사상이 결부되어 수목이 심어질 위치나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 왔다. 예를 들면 거수(巨樹)가 되는 수종은 주택 내 특히 내정에 심지 않으며, 집 가까이 좌측에서 흐르는 물이 있으면서 우편에도 장도(長途)가 있거나 집 앞쪽은 오지(汚池)인데 뒤쪽이 구릉일 때는 반드시 동쪽에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고, 남쪽에 매화와 큰 대추나무를, 서쪽에 치자나무와 느릅나무를, 북쪽에 벚나무와 살구나무를 심도록 권장하고 있는 데 이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에 대하는 것으로 여겼다. 대체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완벽한 길지(吉地)란 거의 없기 때문에 부족한 면을 인위적으로 보충하여 그 소응(昭應)을 얻자고 하는 비보(裨補)를 하였는 바 조산(造山), 조림(造林), 풍수탑(風水塔)을 이용하여 허(虛)를 보충하였다.
5. 불교(佛敎)사상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으로서, 그 뒤 백제는 일본의 불교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신라 때에는 법흥왕 14년(527)에 불교가 공인되고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불국사, 석굴암 등 오늘날의 명찰들은 바로 그 시대에 건립된 것들이다. 불교는 사찰의 가람 배치기법에서부터 다원(茶園)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정원양식, 연못과 화단조경 양식, 조경의 중요한 점경물(點景物)로써 석탑, 석불, 석비 등의 사용 등 우리나라 조경양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극락정토사상에 근거해 극락의 세계관을 현세에 조형시키고자 하였는데, 경주 불국사의 9품연지 등의 사찰정원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단지 부의 과시나 주택의 장식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기성찰을 통한 사색의 장으로서 정원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불교문화가 준 가장 큰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6. 유교(儒敎)사상
유교는 공자 (B.C551-479)에 의하여 정립된 인본주의 이다. 유교는 원대에 거쳐, 명대에 이르러 그 학풍이 心學으로 변해, 청대에는 학술 사상의 기반이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중국인의 의식과 윤리의 핵심 사상이 되었다. 유교는 그 사상적 구조에 있어서 윤리, 정치, 문학과 예술에 그 범위를 둔다.
유교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초극적인 것을 배격하고, 오로지 인간성 개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본주의 종교라고 한다. 유교의 핵심 사상은 교화를 위한 호학 정신에 있다. 이 호학 정신은 공자가 인류의 질서를 이륙하기 위하여 마련한 최선의 보루였다. 그 정신의 내용은 사서 삼경, 육경에 있으며, 그 정신의 표현은 효제, 충신을 골자로 한 禮요, 즐거움과 평화를 생활 속에 담기 위하여 樂을 들었다.
Ⅲ. 한국 전통 주택의 특징
한국의 전통주거양식 중에서 특히 조선조의 주택양식은 신분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사회적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가 규제되었다. 한국의 전통주택정원은 일상주거생활공간과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거나 융합되어 있고, 자연환경 및 자연관의 영향을 받아 주택과 정원을 앉히고 짜는 법도가 상당히 분명했으며 가정생활에서도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따라 공간과 정원이 나누어지지만 완전히 폐쇄되거나 분리되는 것은 아니고 닫힘과 열림이 교묘하게 배합되었다.
한국전통사회에서 주택과 마을, 도시가 자리잡는데는 풍수지리설의 원리가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건물, 마당, 울타리, 나무심기, 우물파기 등을 함에 있어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었다. 대개의 주택은 경사지를 단(段)으로 깍고 건물을 앉혔기 때문에 뒤쪽에서 뒤산과 만나는 자리는 화계가 조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원구조는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조상숭배의 표현으로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집안의 다른 건물 보다 높은 위치에 지었으며 남여의 구별이 엄격해 안살림과 바깥살림을 구별하고 공간도 구분하였다.
한국전통주거에서의 특이한 점은 마당이라고 불리는 정원요소가 있다는 점으로 마당은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가사를 처리하는 생활공간으로서뿐 아니라 채소나 약초를 심는 생육 환경으로서 이용되었다. 전통주택의 대문밖에는 평범한 공간인 바깥마당이 자리잡는 데 흔히 방지가 따르며 이는 풍수설에서 말하는 주작의 오지에 해당하고, 바깥마당에서 대문을 거쳐 들어오면 행랑마당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에는 별다른 조경을 하지 않는다. 안마당은 안채의 전면과 사랑채, 고방채, 행랑채 등과 같은 건물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이고 실용적 공간이다. 사랑마당은 가장 및 남성손님의 공간인 사랑채와 인접한 마당으로 가산(假山)을 만든다든지 방지원도의 연못을 파서 꾸몄고, 장대석을 이용한 정원이 꾸며지기도 했다.
후원은 주위의 낮은 구릉이나 계류, 뒷산에 의해 자연스레 영역이 설정되고, 정자와 연못, 샘과 경물이 적절히 포치 되어 풍류공간을 조성하였다.
주택정원에서 경관을 도입하는 방법으로는 자연경관 속으로 들어가 노니는 방법과 자연경관을 주택 안으로 끌어와 즐기는 방법이 이용되었고, 주택정원에서 심어진 식물은 상징성이 중요하게 여겨져 의도적으로 식재 되었으며, 정원에 식물을 심을 때는 수종 뿐 아니라 장소도 제한시켜 금기되는 수종과 권장되는 수종이 있었다. 민간주택의 정원에서는 보고 즐기는 효과를 노리기 위하여 물을 모아두는 지당, 물을 떨어뜨리는 폭포, 물을 흐르게 하는 수로 등이 애용되었으며, 돌로 만든 점경물도 석가산, 괴석, 석지, 석분, 석상, 식석 등의 형태로 활용되었다. 한국주택정원은 정원을 보거나 돌아다니는 차원에서 벗어나 읽고 느끼는 차원으로 끌어올려 상징화, 이름짓기, 글짓기 등의 방법으로 의경(意景)을 추구하였다.
Ⅳ. 한국 전통조경의 구조물
1. 장 승
본래 장승은 선사시대 이전부터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 살면서 주거지역주위에 돌이나 큰 나무를 가져다 놓거나 나무나 돌 주위에 주거지를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장승중 고성의 석마가 가장 오래 됐었다고 볼 수 있다. 장승은 본래 장생, 장성, 장신, 법수, 벅수, 수살, 수구막이 등 여러 이름이 있으나 주로 장승이라는 표준말로 통용되어왔다. 장승은 경계표시나 이정표 또는 수호신으로서 우리 민족의 생활속에 뿌리 깊게 자리해 온 민속신앙의 조형물이다. 그 기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지니며 변화하고 전승되어 온 것이다. 장승의 기원은 솟대 신목등과 함께 신석기 청동기시대의 원시신앙물로서 유목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파악된다. 일종의 수호신상으로써 씨족 부족민의 공통적 염원을 담은 재정일치 시기 지배이념의 표상으로서 기능하다가 삼국시대들어 중앙집권적 국가 기틀이 마련되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의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됨에 따라 불교에 습합되어 전승하게 된다.
장승은 사람의 머리 모양을 새겨 마을 어귀나 절 어귀에 세운 기둥 모양의 형상이다. 돌로 만든 것을 석장승, 나무로 만든 것을 목장승이라 하는데 목장승이 많다. 지역간의 경계 표지 또는 길을 일러 주는 이정표의 구실도 하지만, 마을의 수호신으로서의 구실이 더 크다. 보통 한 쌍의 남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상(男像)은 머리에 관을 조각하고, 앞면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쓰고, 여상(女像)은 관이 없고, 앞면에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는 글이 씌어 있다.
2. 솟 대
옛날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사이에 서로 교감을 나누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다. 이러한 바램의 표현 중 하나로 마을마다 솟대라는 걸 세웠는데, 이것은 새를 상징하는 조각을 나무나 돌로 만들어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 입구에 세운 것으로, 사람과 하늘을 이어주는 요즘의 통신 안테나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솟대야말로 인간의 통신역사 중 가장 원초적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승과 함께 마을 어귀에 세워진 솟대는 사람과 하늘과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마을의 신앙대상물로 부락의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가진것에 더하여 부락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마을 입구에 우뚝 서 마을에 들어오는 모든 액이나 살(煞), 그리고 잡귀를 잡아주고 마을에 사는 이들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부락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다.
솟대는 나무장승과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을 만큼 장승과 같이 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솟대 단독으로 세우는 곳이 없지는 않다. 그렇게 보면 솟대는 장승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속신앙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솟대의 모양은 다양한 형태로 보여지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긴 장대 위에 새가 올라앉은 것이다. 그 외에도 긴 장대만 세워 놓는다거나 하는 것들도 있으나 새와 장대 두 가지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긴 장대는 예로부터 신간(神竿)으로 섬겨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긴 장대를 통해 신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수도 있으려니와 인간들이 신에게 가까이 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장대 위에 올라앉은 새는 거의가 기러기 따위들로 까마귀를 올리는 남부지방이나 제주도를 제외하면 모두가 물새를 사용하고 있다.
솟대는 앞서 이야기한 기능 이외에 물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마을에 불이 나지 않게 세우는 곳도 있다. 이는 한옥에서 가장 높은 곳을 용마루라 하는 것과 같다. 용은 영물이면서 물을 관장하는 동물이니 나무로 지어진 한옥에서 가장 무서운 화마로 부터 집을 보호해 달라는 기원성 명칭이기도 하다. 솟대는 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집에 세우는 경우도 있었고, 장승과 마찬가지로 풍수 지리적으로 지세가 약한 곳에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3. 전통옥외계단
계단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어, 이미 BC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나 BC 2000년경의 개인주택 등에 계단을 사용하였다. 또 이집트에서는 계단의 양쪽에 벽을 쌓은 일종의 계단실이 중왕국(中王國)의 퓨론에 들어 있었다고 생각되며, 같은 무렵의 가옥 모형에는 안뜰의 측벽을 따라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도 있다.
계단의 종류로는 형태에 따라 곧은계단 굴절계단 中空계단 원형계단 나선계단(원형계단의 극단적인 형태) 등이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곧은계단이며, 이것은 최소의 면적으로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형식이다.
사용되는 재료에는 목재 섬유판 합성수지 철 돌 철근 콘크리트 등 다양하다.
통로로서의 기능 외에 건축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계단이라 하지만, 이에는 공공용(公共用)의 큰 것에서부터 일반주택 내부의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구조 형식이 있는데, 공공성이 강한 것은 누구나 안전하고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 주택 내부의 것은 면적이나 경비상의 제약을 받는 경우가 있겠으나, 역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안전하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치할 필요가 있다.
4. 문
문은 보통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시키는 접점에 위치하므로 담 벽 등의 경계요소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문의 종류는 기능, 위치, 재료, 형태, 양식에 따라 성문 대문 현관문 방문 창문 세간문 목재문 철재문 유리문 등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지역적 특성이나 문화적 성격에 따라서도 그 용도, 성격, 양식 등이 상이하게 분류될 수 있다.
집 마을 도시 외곽의 경계에 문을 세우는 것은 방어를 위한 목적 뿐만 아니라 권세를 과시하거나 그 장소를 장엄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특히 사찰이나 궁전의 문은 그 장소를 다른 장소와 구분시키고 성역화하거나 위엄을 부여하려는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기능과 목적에 따라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특수한 형태와 기능을 지닌 다양한 양식의 문이 생겨났다. 현재 건축물에서 사용되는 문들은 개폐방법에 따라 여닫이문, 미닫이문 미서기문, 접문 주름문, 회전문, 셔터문, 행거문 등으로 구분하며, 구조 및 재료에 따라 띠장문 판자문 양판문 플러시문 완자문 유리문 등으로 구분된다.
주택의 경우 외부와 통하는 문은 대문이나,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대문의 위치 및 좌향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은 거주자의 수복강녕(壽福康寧)과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위하여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그 집주인의 계급에 따라 대문의 양식이 달랐는데, 이러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가사규제에서 계층별로, 제한을 두던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민이 사는 농가나 초가에는 사립문을 달았으며, 재료는 대개 문이 달린 울타리의 재료와 같았다.
기와집에서는 몸채나 행랑채와 같은 지붕 밑에 평대문 양식으로 판자문을 달았다. 사대부 주택의 솟을대문은 대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보다 대문채의 지붕을 더 높이고 초헌(舌軒)이 드나들 수 있도록 凹형의 문턱을 설치하거나 혹은 문턱을 아예 설치하지 않았다.
5. 담 장
소유권 표시로서의 대지경계선 확정, 사람이나 동물의 침입방지, 외부의 시선 차단, 방화 방음 등의 목적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경미한 재료로 만든 것 또는 속이 들여다 보이게 한 것을 울타리 또는 책(柵)이라 하는 데, 판장(板墻), 목책, 가시철망울타리, 바자울, 산나무울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보다 튼튼하게 만든 것을 담 또는 담장이라 하며, 담을 축조하는 재료에 따라 구분하면 토담 돌담 벽돌담 블록담 콘크리트담 등이 있다.
【토담】 흙과 지푸라기, 석회 등을 섞어 쌓거나 여기에 돌을 넣어 쌓기도 한 담. 현재는 잘 사용이 되지 않는 담이나, 한국에서는 질이 좋은 흙이 많이 나오므로, 한국전통건축, 특히 일반농가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담장이다.
【돌담】 돌을 쌓아 만든 담. 경비는 많이 드나 그 지방에서 나는 돌을 사용하면 경제적이다. 외관이 미려하고, 마모 및 풍화에 강해서 옛날부터 궁궐이나 상류주택에 많이 사용되었다. 호박돌, 막돌, 잡석 등을 그냥 쌓아 만든 강담, 맞댐벽을 어림따기로 한 막쌓기담, 일정한 크기의 돌을 줄바르게 쌓은 사고석담, 돌면을 다듬어 일정한 줄눈으로 쌓은 다듬돌담 등이 있다. 사고석담은 몸크기 15~30 cm 각 정도의 네모뿔형의 돌을 수평줄눈 바르게 막힌 줄눈으로 쌓고, 치장줄눈을 회사벽(灰沙壁)의 내민줄눈으로 발라 마무리한 것이다. 강담은 막돌을 그대로 쌓아 올리고 틈서리에는 잔돌을 사춤돌로 끼워 쌓은 것이고 돌각담이라고도 한다. 한편, 한국 전통의 담장 쌓기 방식은 크게는 막돌허튼층 쌓기로 된 것과 다듬은 돌 바른층 쌓기로 된 것이 있다. 전자는 지방의 일반농가에서 많이 이용되었으며, 후자는 궁궐 건축, 관아 건축, 상류 건축 등에 주로 쓰였다.
【벽돌담】 일반 벽돌, 과소 벽돌, 변색 벽돌 등의 치장 벽돌을 쌓아 만든 담. 기상의 변화에도 잘 견디므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쌓는 방식이 간단한 장점이 있는 반면에 풍압력, 지진력 등의 수평력에 약한 것이 결점이다. 담의 높이는 3 m가 한도이며 보통 2 m 내외로 한다. 시멘트 벽돌담의 경우에는 외관이 좋지 않으므로 표면마무리를 한다.
6. 장독대
한국 가정의 필수적 설비로서 대체로 햇볕이 잘 드는 동편에 마련하는데, 대지가 넓은 집은 뒷마당에 만들고, 좁은 집에서는 앞마당에 만든다.
돌을 2 3층 쌓아서 1 2평의 높다란 대(臺)를 만들고, 맨 뒷줄에는 큰독, 중간에는 중들이, 앞줄에는 항아리를 늘어놓는다. 가장 큰 독은 장독으로 쓰고, 중들이에는 된장 막장 등을 담아 두며 앞줄의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류 장아찌류를 담는다. 고추장 항아리는 대개 키가 작고 복부(腹部)가 위아래보다 크며, 구경이 넓어서 볕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집안 살림의 규모가 클수록 장독대의 규모도 커서 한 줄에 4 5개씩 놓기도 하는데 주부들의 살림 솜씨를 장독대를 보고 평가하기도 한다.
7. 굴뚝
연소에 필요한 공기를 공급하고 연도(煙道)를 통하여 나온 연기나 가스 등을 하늘 높이 뿜어내게 만든 구조물로서 독립굴뚝과 벽붙이굴뚝이 있다. 구조재에 따라 분류하면 토관류(土管類) 굴뚝 벽돌굴뚝 철재굴뚝 철근콘크리트굴뚝 등이 있다. 굴뚝의 상부는 처마 또는 지붕에서 60 cm 이상 높이고 굴뚝이 지붕을 뚫고 올라갈 때는 비아무림(flashing)을 잘 해야 한다. 또한 상부에는 굴뚝 연가(煙家)라 하여 기와를 지붕 모양으로 차례로 올려얹은 꾸밈새가 있다. 화실에서 연기가 빠져나가는 순서는 화실에서 연기편향선반 연기실 굴뚝 굴뚝상부로 빠져나간다. 화실에서 숨통 부분과 같은 높이에 있는 연기편향선반은 화실의 뒷벽이 기울어짐으로써 형성되며, 화실 노출면의 상단으로부터 약 20cm 위에 위치하는데, 그 나비는 10~20cm이며 향사(向斜)꼴을 취한다. 연기편향선반의 기능은 굴뚝으로부터 떨어지는 그을음을 막는 것이며, 연기실과 함께 찬 공기의 하강(下降)을 막기도 한다.
8. 석조
입체를 수단으로 공간에 표현하는 조형미술. 조각은 3차원의 공간 속에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된 입체로서 강하고 견고한 양감의 구성체이다. 석조는 석을 소재로 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3차원적 입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조각은 입체로 구현된 것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촉각적인 측면 또한 중요하다. 조각작품을 손으로 더듬어 감상한다는 것은 그 형태와 재료의 물질적 특성을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가의 작업과정을 추적하는 데 유효한 방법이다.
한국 조각의 기원은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골각기(骨角器)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골각기가 실용적인 맥락에서 제작된 것이므로 공예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겠으나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된 뼈 조각에 새긴 얼굴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개가면은 조각의 기원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조각의 진정한 출발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불교를 수입한 이래로 줄곧 불상조각이 중심을 이루어왔다. 특히 일본 호류사[法隆寺]에 보존된 《백제관음상》은 백제 조각의 우수성이 반영된 반가사유상이며, 《서산마애삼존불》은 '백제의 미소'라 불릴 만큼 온화한 미소를띤 부처와 관음보살이다.
9. 우물
산기슭지대에서는 산을 향해서 수평으로 판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수평우물이라고 한다. 또한 석유 천연가스의 채취 또는 온천 지열가스의 탐사를 위하여 파는 구멍도 넓은 뜻에서는 우물에 속한다. 샘이나 하천을 이용한 자연우물의 유적은 발견하기 어려우나 굴착우물의 예는 많다.
한국에서도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음료수와 가정 잡용수는 거의 우물물을 사용하였으며, 전답관개에서도 주로 우물물에 의존하였다. 근대화와 함께 공업성장으로 각종 공업용수도 초기에는 거의 지하수에 의존하여 우물파기가 성행하였다. 근래에 와서 도시화에 따라 많은 고층건물이 건설되고 있는데, 그 잡용수 냉방용수도 지하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가지 및 공장지역에서는 지하수가 점차 고갈되고, 나아가서는 지반침하(地盤沈下)가 발생하여 교통이나 환경위생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외국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물에서 천연가스를 대량으로 채취하고 있는 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
10. 화계
화단은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1 2 년생 초화 숙근초화 구근초화, 그 밖의 장식초화 화목류 등을 심어 아름답게 가꾼 것을 가리키고 화계는 화단을 여러층으로 만든 것이다.
화단의 분류는, 그 모양에 따라 立體花壇과 平面花壇으로 나누고, 꾸미는 방식에 따라 기하학적 정형화단(整形花壇)과 자연형 화단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서양화단은 주로 대칭을 중시하고 문장(紋章)을 상징하는 정형화단으로 만들어져 왔다. 식물재료 이외에 강조재료인 조각상 분수 벽천(壁泉) 아치 정자 및 각종 등(燈)에 의해 그 효과를 더하기도 한다.
Ⅴ. 선교장
경포대에서 대관령 쪽으로 향하면 노송 수백 그루가 우거진 골짜기가 있고 그 사이로 날아갈 듯 추녀를 살짝 드러내고 있는 살림집이 있다. 강원도내의 개인 주택으로서는 가장 넓은 집인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 계급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호화 주택이다. 당시 이씨 일가는 '만석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지주였는데, 평야가 적은 이 곳에서 '만석꾼'이란 너른 남도의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부(富)였을 것이다.
경포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는 배를 타고 건너 다닌다하여 '배다리마을[船橋里]'이라고 불렸는데,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은 바로 거기서 유래한다. 전주 이씨 일가가 이 집으로 이사온 것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 때였다. 이내번은 처음에 경포대 주변의 저동에서 살았는데 족제비를 쫓다가 우연히 뒤쪽에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시루봉)가 평온하게 둘려져 있고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는 천하의 명당을 발견하고는 곧 새 집을 짓고 이사했다고 한다. 그 뒤로 가세가 크게 번창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많은 집들이 지어졌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총건평이 318평에 달하며 긴 행랑에 둘러싸여 있는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 있고, 문 밖에 활래정까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1. 조영의 역사적 배경
이 집은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이내번이 1700년대 중엽에 현재의 선교장이 있는 장소에 정거하면서 개기하였으며, 사랑채인 열화당은 순조 15년(1815)에 이후(1773~1832)가, 활래정은 순조 16년 이근우가, 별서인 방해정은 1859년에 이의범이 조영하였다.
2. 입지성
이 주택은 대관령 위쪽 곤신봉에서 나온 산맥이 동북쪽으로 뻗어내려 시루봉을 이루고 있고 이 시루봉에서 뻗어 내려온 나지막한 산줄기가 평온하게 둘러져 있는 남향으로 트인 자리에 입지되어 있다. 이곳의 전체적인 형국은 배가 정박한 모습이라고 한다. 지형적으로 보면, 왼쪽의 청룡지세는 길게 생동하고 오른쪽의 백호지세는 약간 짧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택 앞의 물은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며, 이 물이 남쪽으로 흐르는 외당수와 합류되어 동쪽의 경호로 흘러 들어간다.
3. 배치형식 및 공간구성
완경사지에 서남향하고 있는 선교장은 예전에 있던 배다리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선교장은 조선시대의 지방의 대표적인 상류 민가주택으로 강릉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집의 구성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동별당, 서별당, 사당으로 이루어지며, 전통적인 사대부주택에서 나타나는 배치형식상의 규범성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대문 밖 동남쪽에는 외별당인 활래정과 방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담에 의해서 둘러싸인 폐쇄적인 공간과 대조되는 개방적인 공간성을 볼 수 있다.
긴 행랑채 가운데에 사랑으로 통하는 솟을대문과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을 나란히 두었다. 또 다른 특징은 추운 지방의 폐쇄성과 따뜻한 지방의 개방성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살림집은 대개 지역적인 특성이 있다. 곧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산골짜기 집과 따뜻하고 넓은 들판에 자리 잡은 남쪽 집의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선교장 사랑채의 높은 마루와 넓은 마당은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며 안채의 낮은 마루와 아늑한 분위기는 사랑채와 대조를 이룬다.
한편 상류 계급의 호화로운 주택인 선교장 주변에 하층 계급의 초가들이 모여 있어 조선 시대의 엄격했던 계급 사회상을 짐작하게 한다. 본채인 선교장으로 들어서기 전, 행랑채 바깥마당에 있는 수십 평의 연못에는 온갖 정자의 멋을 살려 만든 호화로운 활래정(活來亭)이 세워져 있는데 반해, 그 주변에는 노비의 집들이 밀집되어 붙어 있다.
4. 구성요소
1). 활래정
활래정은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시원한 계류에 탁족을 하는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장지문을 지르면 두 개가 될 수 있는 온돌방이 물 위에 떠 있는 마루와 합쳐져서 ㄱ자형을 이루고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손님에게 차를 접대할 때 차를 끓이는 다실이 있다. 벽이 없어 문으로만 둘러져 있어 한층 개방성이 강조되었다. 모두 열어 놓으면 정자 속에 앉아서도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연못 가운데에 자그마한 섬 하나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건너다닐 수 있도록 했으며 작은 섬에는 노송을 심어 운치 있게 했다. 못 속에 연을 심어 놓아 연꽃이 한창일 때는 활래정 일대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마루 끝에 앉아 연못을 내다보는 맛이 일품이다. 1816년 이근우가 중건하였다.
1). 열화당
'仙橋幽居'(선교유거)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안채, 왼쪽으로는 '悅話堂'(열화당)이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우선 눈에 띈다. 열화당은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를 철저한 신조로 삼았던 오은처사 이후가 순조 15년(1815)에 지은 건물로, 선교장의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리라"는 시구처럼 형제, 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이야기하는 장소로 쓰였다. 열화당은 돌계단 7, 8개를 딛고 올라설 정도로 높직하며 보기에도 여간 시원하지 않다. 처마가 높아서 전면에 별도의 차양을 달았는데 개화기 때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부가물로 장식 효과도 크게 염두에 둔 장치이다.
작은 대청은 누마루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앞 툇마루는 상당히 넓다. 작은 대청과 대청 사이에 ㄴ자형의 방이 있고, 장지문으로 사이를 막으면 방을 셋으로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여름에 문을 전부 떼어 놓으면 사방으로 통풍이 되며 뒷산의 노송과 대청 뒤뜰에 서 있는 수 백년 된 배롱나무가 사랑채와 하나가 된다. 선교장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는 행랑의 동쪽에 있는 평대문으로 들어가는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된다. 이내번이 터를 잡던 시기(영조)의 건물이라 전해지며, 현재 전주 이씨의 후손이 선교장을 관리하며 안채에 살고 있다.
3). 안방
안방은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부인이 거처하는데, 안방 뒤켠으로 골방이 딸려 있어 무더운 여름철을 시원하게 날 수 있게 하였다. 또 안방이나 건넌방에는 각각 벽장이 있고 골방에는 다락이 있어 한국민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으며, 안방 앞에서 건넌방 앞까지를 연결하는 널찍한 툇마루가 있다. 건넌방은 큰며느리가 거처하는 방이다. 상당히 넓은 부엌이 눈길을 끄는데, 이씨 일가가 대가족을 거느렸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동쪽에 동별당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4). 행랑채
일(一)자 형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행랑채는 일제 때만 하더라도 사랑채의 서쪽을 감싸 안는 ㄴ자형이었다고 한다. 마구간과 곳간, 부엌도 마련돼 있으며, 현재 각 행랑은 민속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선교장은 『용비어천가』,『고려사』같은 귀중본을 비롯한 수 천 권의 고문서와 고서화, 그리고 고서적을 소장하고 있다.
5). 화계
안채와 사랑채인 열화당 후정에는 사괴석으로 축조된 화계를 두어 배롱나무, 단풍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벚나무, 엄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매화, 산철쭉, 박태기 등과 같이 전통적으로 후원에 도입하던 식물재료를 심어 놓았다.
특히 자연지형과의 경계부에는 죽림이 형성되어 있어 주위의 송림과 더불어 좋은 배경이 되고 있다. 사랑채 뒤의 화계는 3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제일 위의 단에는 과거에 팔각정이 있었으나 유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선교장 후원의 화계는 대청마루에서 바라다보았을 때의 시각성을 고려하여 높이와 거리를 결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조영성을 볼 때, 우리는 자연환경과의 연계성까지도 생각하여 조영을 생각하는 작정자의 지혜를 살필 수 있다.
대청마루에서 문틀을 통해서 보여 지는 화계의 경관은 시각적 틀을 만들어 경관을 감상케 하는 경관구성기법으로 우리나라 주택의 후원 조성의 경우에 이러한 기법이 기본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Ⅵ. 결론
살펴본바와 같이 선교장은 기본적인 사대부 집안의 가옥 양식을 잘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멋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관람객이 없어서 고즉넉한 멋을 지닌 한옥을 감상하기 좋았다. 그러나 선교장 앞의 초가집들은 너무 인위적으로 복원되어 음식점으로 사용되면서 선교장을 단지 하나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