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진심으로 관심 갖지 않아 준다는 것, 목표를 달성 할 때까진 다른 일을 기억해낼 여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매일 같이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
겨울의 뒷자락이 신입생들의 헐렁한 교복 소매로 파고드는지 여린 어깨들이 이따금씩 떨리고 있었다.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강당 안이지만 아이들 모두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듯한 표정이다.
"신입생 대표, 윤여희! 위 학생은 입학 성적이 우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 상장을 수여 함."
오늘부터 새로운 학교생활의 시작이다. 교복이 커서 마음에 안 든다고 입학 전날인 어제까지 고민을 하던 언니는 초저녁이 다 되서야 엄마를 이끌고 나가 몸에 맞는 교복을 다시 구입해 왔다. 그리고 오늘 그 옷을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가 상을 받고 있었다.
대표로 상장을 받는 언니와 무리 속에서 박수를 치는 나. 나는 순간 아이들이 언니와 내가 쌍둥이 인 것을 알아 볼까봐 헐렁한 교복만 쭈삣거리며 만진다. 학부형 석에 있는 엄마는 내가 서있는 줄을 살펴보더니 나를 못 찾았는지 이내 언니가 상을 받는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신다.
강당 안의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지 서 동안 발가락 끝이 시려왔다.
반 배정을 받고 아이들은 어떤 사람이 담임이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담임이 궁금하기보다는 복도에 서있는 엄마와 눈을 맞추려고 폴짝이며 복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엄마는 그때야 나를 보았는지 짧은 웃음 을 보내 주신다. 언니는 이미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성 간에도 예쁜 아이에게 끌린다는 것을 나는 그간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가늘고 긴 몸매와 목선이 보이는 짧게 친 머리카락, 총명해 보이는 눈. 그리고 자신 있는 행동. 언니는 모두가 만족할 만한 조건을 타고난 것이다.
언제인가 책에서 읽은 내용 중에 형제자매 간에 열성인자와 우성인자가 비교적 고루 나누어지는 반면에 쌍둥이의 경우는 한 쪽으로 치우칠 확률이 높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다.
어릴 때는 그런 경우가 있나?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커갈수록 내가 그 표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를 닮아 예쁜 언니와 그렇지 않은 나. 아빠는 일찍 돌아 가셔서 어떤지 모르지만 여하튼 나는 엄마를 닮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엄마가 언니를 더 예뻐하는 것인지도……. 혼자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아이들의 환호성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 선생님이 들어오신 것이었다.
"자, 내가 당분간 여러분을 맞게 될 박상진 이다. 사실 여러분의 담임이 되실 선생님은 따로 계셨으나 부득이한 개인 사정으로 내가 맞게 된 것이니 급조된 담임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잘들 해보자. 아! 반장을 뽑았으면 하는데 그건 여러분이 서로의 성격을 파악한 뒤로하는 게 좋을 듯하니 여러분이 뽑아서 나에게 통보하도록. 여러분이 내 새끼가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오늘은 게시판에 붙여놓은 수업 시간표 확인하고 일찍 배정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도록. 내일부터는 야간 자율 학습까지 해야 한다는 것 염두에 두고. 이상."
담임이 나가고 나자 여기 저기 서 말들이 많아 졌다.
"봤어? 선생님 눈에 쌍 커플 없다. 난 저런 눈이 너무 좋아."
"진짜 젊은 것 같아. 몇 살일까? 많이 봐도 30이다. 그치?"
"담임이나 마나……. 우리 언니도 이 학교 나와서 아는데 공부 장난 아니게 시킨다던데……. 그래도 젊은 남자라 좋긴 하다."
젊은 선생님으로 인해서 기숙사 생활이 처음인 학생들에게 학교를 즐겁게 다닐 동기 부여는 분명히 생긴 듯 했다. 언니도 담임이 마음에 드는지 눈을 떼지 않았다.
나 역시 담임의 눈매가 엄마가 가지고 있던 아빠의 고등학교 사진과 닮은 것 같기도 해서 썩 마음에 들었다. 열일곱 소녀들의 환호를 받으며 선생님이 나가시고 언니와 나는 엄마를 찾았다. 당분간은 엄마를 못 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집 떨어져서 잘 다닐 수 있겠어?"
"그럼요."
"저 도요."
"엄마는 괜히 기숙사 있는 학교로 보낸 것 같아."
엄마의 눈시울이 젖어들고 있었다.
"엄마 또 운다."
나는 엄마에 핀잔을 준다. 엄마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사실 눈물이 나는 건 나도 마찬 가지였다.
"이런……. 엄마가 딸보다 먼저 울고 말았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건강 잘 챙겨."
엄마는 언니를 한번 포옹 해준 뒤 빨개진 코를 애써 감추며 발걸음을 돌렸다. 나 역시 엄마를 안아 본다는 게 엄마가 언니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 덮치는 꼴만 되고 말았다. 무안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1막 2장
기숙사는 한방에 2층 침대가 3개로 각각 6명씩 쓰게 되어 있었다. 나는 다행 이도 언니와 한방이 되었고 언니는 많은 친구를 사귄 듯 보였다. 룸메이트는 쉼 없이 말이 많은 지영이, 외모는 예쁘지만 그늘이 있는 윤정이, 윤정이의 외모를 보고 오늘부터 다이어트 시작이라는 통통한 보애, 인터넷에서 심령 상담을 한다는 차분한 건아, 그리고 언니와 나 이렇게 여섯 이었다.
그녀들 모두 언니를 둘러싸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언니와 내가 쌍둥이 인 것을 눈치 못 챘는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고 나는 추운데 있다가 따뜻한 곳으로 들어 와서인지 졸음이 몰려와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커튼을 열어 젖혔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기상 벨소리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커튼을 연 건 다름 아닌 언니 여희였다.
"아, 5분만 더……. 커튼 좀 닫아봐. 눈부셔."
"이래야 너희가 일찍 일어나지. 일어나야 밥 먹고 수업가야지."
언니는 내 말에 얄미운 대답만 던지고 커튼으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창문까지 열고는 나가 버렸다. 열린 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덕에 우린 모두 잠에서 깨고 말았다.
학교의 일정은 빠듯하고도 어려웠다. 이게 고등학교의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아침에 6시에 기상을 해서 30분 동안 아침운동을 하고는 세면 후 교복을 갖춰 입은 다음 다시 1시간 동안 아침 식사에 들어간다. 말이 한 시간이지 세면하고 교복 입는 시간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외모에 신경을 쓰는 아이라면 아침을 먹을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후 기숙사에서 내려가 8시부터 수업으로 들어가는데 그때부터 개인 시간이라고는 쉬는 시간으로 허용된 10분씩이었다.
쉬는 시간에 언니의 자리로 몰려드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자연스레 이어폰을 꼽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런 것은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사실 나는 소극적이라 아이들과 어울리는데는 어려움이 좀 있었다. 다행이 교실에서 창가 쪽의 맨 끝자리라 음악을 들으며 창 박 을 보기에는 적격이었다.
이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그 동안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써클에 들기도 하고 나름대로의 친한 친구를 사귀기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방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는게 전부였고 언니는 늘 그랬듯이 반장이 되었다.
"얘들아 내가 무서운 이야기 해줄게 모여봐."
끝없이 말을 이어가서 이제는 기숙사 댁으로 별명이 붙은 지영이였다. 무서운 이야기라는 말에 아이들은 귀를 기울였고 나도 듣고 있던 이어폰은 슬며시 빼놓았다.
"나 어제 써클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기숙사 방에 침대가 3개씩 여섯 명이 자잖아. 그런데 매해 돌아가면서 그 침대 중에 하나는 꼭 비워 둔다더라. 왜 그런지 알아?"
아이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왜 그러냐면 예전에 매년 2등만 하던 애가 비관해서 교실에서 목을 매 자살을 했는데 학교에서 그 애를 위해서 매해 침대 하나씩 비워 두는 거래."
지영이의 말에 우리는 모두 침을 삼켰다.
"설마……. 유언비어지?"
"진짜야. 선배들도 그 귀신 봤다는데……. 그리고 매해 공부 잘하는 애가 있는 방에서 꼭 사고를 당한데. 그 애가 1등을 시기를 하는 거지."
아이들의 눈빛이 모두 여희에게 쏠렸다.
"그래서? 그 2등 귀신이 1등을 잡아간데?"
"아니. 죽은 그 애가 꼭 자신이 받은 상처만큼 그 방 애들한테 돌려준다는 거지."
그때였다. 쿵 소리가 나서 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른 건.
"뭐야? 몰려서들. 각자 자리에 앉아."
담임이 출석부로 큰소리를 내며 등장을 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반 비명과 야유를 퍼부으며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의 종례가 이어졌지만 나는 혼란스러워 졌다. 정말로 귀신이 있다면…….
나는 머리카락이 쭈삣 서는 것 같아서 이어폰을 귀에 꼽으려다가 FM방송 대신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선택했다.
"반장은 교무실에 들렸다 가라. 이상."
선생님은 언니를 호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교실에서 나갔다. 그러나 아이들은 교실에서부터 기숙사까지 온통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이유는 여희였다. 여희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다른 방 아이들 보다 더욱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야, 윤여희 아까 담임이 뭐래? 우리 방 귀신 조심하래?"
잠자리에 누운 아이들은 언니가 있는 침대 1층과 내가 있는 2층을 번갈아 보며 걱정을 했다.
"하필이면 우리 방이……."
보애는 통통한 볼을 토닥이며 무섭다는 듯 말했다.
"정 그렇게 무서우면 내가 성적 좀 떨어뜨릴까? 그럼 2등이 있는 방으로 귀신이 가겠지?"
여희는 대수롭지 않은 듯 했다. 누워서 책을 뒤적이며 말하는 모습은 유언비어는 유언비어 일뿐이라는 투였다.
"밤중에 귀신이야기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자신들 부르는지 알고 진짜로 몰려들어. 분신 사바 같은 것만이 귀신을 부르는 줄 아니?"
심령에 대해 해박한 건아가 보애에게 쏘아 붙였다.
"그래, 건아 말이 맞는 듯하니 그만 하자. 너희들 내 워크맨 본 사람 없니? 발라드 테잎 하나 선물 받았는데 공부하면서 들으려고 하니까 워크맨이 안보이네."
나는 언니의 말에 '나한테 있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게 없으면 나 역시 허전해 지기 때문이었다.
기숙사로 올 때 낡은 내 워크맨을 챙겨 올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늘 언니의 것만 물려받았던 나였다. 옷도 언니가 입지 않고 장롱 속에 넣어두는 옷을 입고 다녀야 했고 장난감도 언니가 새것을 가져야 예전에 쓰던 것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엄마는 언니가 사달라는 것은 뭐든 다 사줬지만 내가 말을 하면 그냥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뭐든 잘하는 언니이니까 이해하며 지내왔지만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까지 낡은 워크맨을 가지고 오기는 싫었던 것이다.
1막3장
밤이 깊도록 기숙사의 아이들은 제각기 할 일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여희는 공부를, 건아는 새로운 심령 주문을, 그리고 보애는 여전한 살과의 전쟁을, 지영은 수다 대신 핸드폰으로 여기저기에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윤정이는 요즘 부쩍 불안한 표정이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윤정이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저녁에 찾아와 윤정이를 데리고 나가는 일도 많아 졌다.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나 아니라도 아이들이 많이 챙겨 주는 눈치였다. 지영이나 보애는 특히 윤정이에게 친절했다.
늘 입만 열면 윤정이의 외모나 운동화 가방 등을 부러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나도 요즘 윤정이 만큼이나 우울했다. 선생님 때문이었는데 자꾸만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가. 요즘은 하루가 지나는 게 좋다. 학교에 가면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언니가 반장이라는 감투를 쓴 탓도 있지만 담임이 언니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보기에는 둘 관계에 무언가 새로운 감정이 싹튼 것 같지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는 못한 듯 하다.
모두들 유능한 학생에게 선생님의 관심이 부여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거친다면 누구나 깨닫는 진리였다.
그래도 나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언니와 내가 동시에 교무실에 가도 담임이 나를 향해서 주는 건 잔잔한 미소 일뿐 언니에게처럼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이 웃어줄 때는 꼭 아빠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은 나에게 저런 미소를 지어 주셨을 지도 모르는데……. 아빠라면 언니 보다 나를 더 예뻐 해 주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엄마를 안 닮은 나……. 언니가 엄마를 닮았으니 나는 아빠를 닮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 때문일지도 모르지 만은 말이다. 부모는 자신을 닮은 자식이 더 예쁘다던데…….
수업 도중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떤 중년 아줌마가 찾아와서 다짜고짜 반 아이들을 헤집고 다니더니 윤정이를 찾아내었다.
불룩한 뱃살을 흔들며 액세서리로 도배를 하고 온 그녀는 윤정이가 멀쩡한 자신의 남편을 꼬셨다는 것이었다. 윤정이는 아줌마에 손아귀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다가 교실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선생님들이 몰려와서 간신히 아줌마를 붙잡기는 했지만 이미 윤정이의 얼굴은 이곳저곳 피멍이 들고 찢긴 상태였다.
나는 윤정이의 얼굴에 난 상처를 걱정했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윤정이 마음의 상처였다. 아줌마가 낸 상처는 시작에 불과 했을 뿐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아이들은 윤정이만 지나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속칭 논다는 아이들은 대놓고 '걸레 같은 년.'이라고 인간 이하의 수치스러운 모욕을 서슴없이 주었다.
또 서로를 위하는 척 했던 같은 방을 쓰는 지영이는 밤마다 아빠라는 남자가 찾아올 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면 다른 반까지 소문을 과장되게 부풀려서 흘리고 다녔고, 윤정이의 날씬한 몸매를 부러워해서 다이어트를 시작한 보애 까지도 '알고 보니 못 먹어 마른 것이었다, 그간 얼굴값으로 먹고살았다.' 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며칠 뒤 윤정이는 기숙사 욕실 탕 안에서 동맥을 끊고 자살을 한 것을 건아가 발견했다. 없는 살림에 엄마의 병원비와 동생과 자신의 생계와 학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긴 채…….
아이들은 우리 방에 귀신이 씌어서 그렇다며 떠들기 시작했고 교실 안에 일이 생기기 시작 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윤정이를 괴롭혔던 아이들은 급식 때 나오는 먹는 물을 보고도 피라고 놀라 자빠졌고 소문을 냈던 지영이는 기숙사 계단에서 헛것을 보고 굴러 성대를 다치게 되었는데 말은 할 수 있으나 그녀가 내는 소리는 이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구도 듣기 싫어하는 갈라지는 소리를 갖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그녀가 입을 열면 귀를 막게 된 것이다.
건아는 영혼이 되면 자신이 죽은 것을 잊어버리고 평상시 생활하던 방식으로 매일같이 재연한다며 귀신 막는 주문을 외우기도 했고 보애는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이어트 때문인지 점점 야위어 가고 있었다.
흔들림이 없는 것은 언니인 여희뿐이었다. 나는 무서움 때문에 FM방송을 들으려고 워크맨을 찾았으나 이미 언니 손에 들어간 상태였다.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발라드 테잎을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늘 그래왔듯이 모든 게 언니 차지인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심술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워크맨을 빼앗으려고 1층 침대로 손을 뻗는 데 건아가 여희에게 한 마디 던졌다.
"무슨 음악인지는 몰라도 밤에 듣지 마라. 귀신 꼬인다. 귀신이 기계 음 좋아하는 건 알지? 그래서 간혹 가수들이 음반 작업 하다가 귀신보고 그런 다잖아."
나는 가뜩이나 방의 소문과 윤정이 일에 신경이 쓰이던 차에 귀신이라는 말을 듣고 도저히 워크맨을 들을 수 없어 참기로 했다. 그러나 여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 할 뿐이었다.
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 대신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를 생각 하다가 잠이 들었다.
1막4장
중간고사가 다가오자 귀신들린 방이라는 소문이 잠잠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고등학교 들어와서 첫 시험을 잘 보려고 노력 중이었고 가장 열의에 올라 있는 것은 여희였다.
첫날 시험이 지나고 둘째 날 보애가 쓰러졌다. 이미 보애는 눈에 띄게 여윈 상태였으며 입만 열면 배고프다는 이야기를 했다.
양호 선생님은 보애를 보고 극심한 영양실조니 잘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보애는 시험이 끝날 때까지도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중얼거린다는 소리가 윤정이가 음식을 못 먹게 한다는 것이었다.
음식이 앞에 있어도 윤정이가 귀밑까지 찢어진 입으로 그걸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는 보애는 결국 며칠 병원에 입원을 했다.
시험 기간 동안 조금 잠잠해 지는가했던 소문은 바싹 말라 가는 보애로 인해 다시 불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윤정이가 가난해서 못 먹었던 한을 보애에게 푼다고…….
"그간 시험 보느라고 애썼고 보애의 일로 인해 다시 윤정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런 소문은 고인이 된 친구를 또다시 욕되게 하는 일이다. 이제 그만 묻을 건 묻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반을 꾸려 나가 보자. 반장은 교무실 들렸다 가고 .이상."
담임선생님은 또다시 여희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좋지 않은 행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살그머니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교무실에는 자율 학습도 끝난 시간이라 남아 있는 선생님도 없었다.
"그래, 여희야 요즘 공부는 잘되니?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반장인 네가 고생이 많구나."
선생님으로서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여희의 손을 잡고 있는 담임선생님의 손이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요. 뭘……. 아, 선생님 테이프 감사해요. 잘 듣고 있어요."
언니가 요즘 듣고 있는 테잎이 선생님이 준거였다니……. 나는 여지 것 내가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왜 늘 언니만 선택되는 것이지?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언니만 바라보는 것인지. 언니가 미웠다. 나는 왜 하필 쌍둥이로 태어난 것인지 원망스러웠다.
"내가 여희 만할 때 담임선생님이 그렇게 음악을 녹음해 주시더라. 그래서 나도 선생님이 되면 예쁜 제자에게 그런 선물 해줘야지. 생각했었거든. 망나니였던 내가 선생님이 된 건 다 내 고등학교 선생님 덕이니까……."
얘기가 길어지자 내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언니의 표정이 매우 밝아져 있었다. 나는 보다 못해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방안에는 멍한 표정의 보애와 지영, 건아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애는 윤정이가 보인다는 이유로 건아 옆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겨울도 다 지났는데 방안에 왜 이리 냉기가 돌아?"
나는 등골이 오싹해서 건아에게 물었다. 보애도 추운지 입술 색이 퍼렇게 변해 있었다.
"영혼이 머무는 곳은 냉기가 돌기 나름이지."
건아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제법 진지했다.
"뭐야, 무섭게. 이곳에 윤정이라도 와 있다는 이야기야? 아님 그 2등 귀신?"
"영혼의 주인은 윤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건아에게 그게 누구냐고 물으려다가 여희가 들어오는 바람에 대화는 중단되었다.
"여희야 너 요즘 부쩍 담임이 많이 찾는다."
지영이였다.
"반에 일이 많았으니까."
여희는 다시금 책을 피며 대답을 이었다.
"너 혹시 담임이랑 원조하는 거 아냐? 윤정이처럼."
"뭐? 다시 이야기 해봐."
"윤정이는 돈 받고 했으니까, 넌 미리 시험 문제 받고 사귀는 거 아냐?"
지영이의 갈라진 목소리가 오늘 따라 더 듣기 거북스러웠다.
여희는 흥분 한 듯 보였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장지영, 잘 들어. 아무리 학교가 무너지고 교권이 무너지고 사제지간이 무너졌다고 해도 아직 다는 아니야. 아직도 존경 할만한 선생님이 계시고 학생다운 학생이 남아 있으니까."
지영이는 쇳소리 같은 목소리고 화를 버럭 냈다.
"웃긴다. 그럼 네가 학생다운 학생이라는 거야?"
"내가 학생다운 학생인지 아닌지는 장담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너처럼 친구 위하는 척 하다가 뒤통수는 안쳐. 넌 네 목소리 벌 받은 거라고 생각 안 하니? 그 목소리 듣기 싫으니까 이제 그만 잠이나 자지 그래?"
여희 역시 상당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여희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본적이 없었으니까……. 지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제 분에 못 이겨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래층 침대에서 거친 숨소리가 났다. 여희의 몸 위로 누군가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기괴했다. 지영이는 여희의 목을 조르고 그러는 지영이의 등 뒤에는 누군가가 붙어 있었다. 윤정이었다. 기괴한 형상으로 변해 지영이의 목을 양손으로 꼭 잡은 채 매달려 있는 모습. 나는 내려가서 지영이를 밀쳐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뒤에 있는 윤정이도 무서웠으며 또 한편으로는 여희가 없다면 엄마나 담임선생님이 여희와 가장 많이 닮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눈이 나만 바라본다면, 그 목소리가 나만을 위해 열린다면…….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여희의 얼굴은 보라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비명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거친 숨소리에 눈을 뜬 건아가 지영이를 여희에게서 뜯어내었으나 여희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죄책감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순간이나마 여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나는 마치 그때 눈을 뜬것처럼 연기를 했다.
"무슨 일이야? 여희 왜 그래?"
건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 자리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얼른 구급차 불러."
지영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보애는 구급차를 부르고는 선생님을 찾으러 나갔다. 건아에게 어젯밤 싸움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담임이 나와 함께 여희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는데 엄마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연락 받고 얼마나 놀래어서 찾아 왔는지, 헝클어진 머릿결에 눈시울은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몹시도 화가 났는지 아는 척도 해주지 않으셨다.
"여희 어머님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여희와 같은 방 아이에게 들으셨겠지만 담임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르고 현명한 아이라서 예뻐 한 것인데…….이렇게 싸움의 원인까지 될 줄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다 제 죄업인 것 같아서...흑……."
1막 5장
나는 담임과 엄마 곁을 피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 안에는 외할머니도 와 있었는데 여희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할머니 저 왔어요."
"이보게나. 내 잘못 했네.제발 하나 남은 자식새끼는 데려가지 말게나."
나는 할머니가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엄마 그만 일어나세요. 여희 담임선생님 오셨어요."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한다는 이야기가…….
"다 늙은이 욕심 때문이다. 모든 게 다……."
같은 학교 친구이던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하게 되어서 우리를 갖게 된 건 엄마가 졸업을 2개월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단다. 이제 졸업반이니 조금만 눈감고 기다려 달라던 몇날 며칠 빌며 매달리는 엄마와 아빠의 청을 무시한 할머니는 기어코 말도 안 된다며 날이 밝는 대로 엄마를 데리고 애를 띄러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빌어도 소용이 없었던 엄마와 아빠는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빠는 죽고 엄마의 목숨을 건졌는데 문제는 뱃속에 있던 우리였다.
언니는 비교적 건강해서 이상이 없었으나 나는 언니에 비해 체구도 작고 허약했던 데다가 엄마의 과다 약물 복용으로 인해 사산된 아이. 그게 나라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늘 내가 엄마를 안았지, 엄마가 나를 안은 적은 없었고 내가 무엇을 물어봐도 누구 하나 나와 눈을 마주치고 대답 한적 없었다. 여희가 무엇을 사달라고 할 때는 바로 대답을 해주던 엄마였지만 내가 사달라고 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엄마. 옷도 장난감도 무엇이든 여희가 손을 떼야 만질 수 있었던 이유……. 고등학교 교복 역시 장농속에 있던 건 날 위한 것이 아니라 커서 싫다는 여희를 위해 한 벌 더 사러 나간 것이었다. 큰 건 나중에 입히면 되니까……. 늘 남들보다 풍족하게 내 몫까지 두 배로 받던 여희니까 말이다. 그들에겐 애초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서있는 나는 누구며 무엇이지?
병실 문 박으로 나오는데 여희가 깨어났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하나씩 떠오르는 말들…….
여섯 개의 침대 중하나를 비워 두는 방……. 귀신 들린 방이라는 말은 여희가 1등을 해서라기보다 늘 비어 있는 내 침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내가 쓰는 2층을 자주 쳐다보던 이유, 영혼이 머무르는 곳에 냉기가 돈다는 말……. 기계음을 좋아하는 귀신……. 모든 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내 침대를 찾아 올라가 앉았다. 이곳이 2등만 하던 그 아이의 자리였을까? 그렇다면 그 애는 어디로 간 것일까? 건아 말대로 살아생전의 모습처럼 1등을 하기 위해 이 학교 어딘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일지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언니가 들어와 나를 깨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금 것처럼 언니 옆에만 있으면 되겠지. 누군가 나를 봐줄 때까지…….
2막 1장
서걱거리는 연필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선생님의 동의 아래 반 아이들 중 상위 3%안의 몇 명과 그룹을 짜서 부실에서 공부를 시작한지도 벌써 2주 째. 내 동생을 제외한 2명의 아이들은 나와 함께 공부를 하면 내 성적에 대한 비결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 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성적이 오르긴 오를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미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한다면 그 아이들의 공부 요령을 알게 되는 건 나 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내게 그 애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알고 싶은 건 동생 여진이였다. 늘 태연스럽다는 듯 공부하는 아이. 조급해 하는 법이 없는 그 애는 태연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곤 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수업이 끝나고 시작한 공부라 아이들은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럴 때 그 족보만 손에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모두 공부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몇 해 전 죽은 전교 1등 아이가 만들어 놓았다는 족보. 소문이긴 하지만 그 족보 안에서 모든 시험 문제가 출제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 돈지는 오래 전부터였다.
"됐다. 소위 수재 소리 듣는 애들이 그런데 기대를 걸고 있니?"
나 역시 궁금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런 것이 존재 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죽기 직전의 애가 만든 것이라니……. 죽는 판국에 그런 걸 만들 여유가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여희야, 나는 그런 것이 어디쯤 있겠구나 하는 생각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슬며시 아이들을 부추긴 건 여진이었다.
"그치? 있을 것 같지 않니? 만약에 우리 중 누군가가 그걸 찾는다면 꼭 나누어서 보기다. 알았지?"
가방을 싸고 교문을 나서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마치 그걸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여진이 넌 믿어? 그 얘기를?"
"그냥……. 그런게 있으면 좀더 편하지 않을까 싶어. 있거나 없거나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건 변함없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기대를 걸 수 있다는 거 난 조금은 흥분되는데……."
여진이는 그런 애였다. 있거나 없거나 해야 하는 공부라고?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 나온다면 분명 노력을 하는 아이만 바보가 되는 꼴 아니겠는가. 그런 걸로 노력을 한 사람을 이긴다면 나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얼른 가자. 가서 한자라도 더 봐야지."
집에 돌아와서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여진이는 잠자리에 들었다.
늘 나보다 먼저 잠들고 나보다는 태평스러운 아이. 그렇다고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노력한 자가 더 가지고 가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만 그래도 내가 노력하는 거에 반도 안 하는 녀석이 그 정도 점수를 맞는다는 게 얄미웠다. 나는 늘 여진이에게 무언가를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눈을 붙인다.
2막 2장
"여희야 잠깐 얘기 좀 하자."
오전부터 지영이와 윤정이가 호들갑스럽게 다가왔다.
"나 어제 우리 언니한테 들었는데……. 너 정진아 선배 알지?"
나는 약간의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둘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다. 그리고 정진아 라면 내가 중학교를 막 입학했을 때도 우리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라며 선생님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수재였다.
"우리 학교 6층에 예전에 도서관으로 쓰던 교실 하나 있잖아."
"그곳 폐쇄 됐잖아. 지금 창고 같은 걸로 쓰지 않나?"
"어, 근데 그곳 책 중에 그 노트가 있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트는 무엇이고 폐쇄된 교실은 왜 찾는지…….
"무슨 말인지 몰라? 족보 말이야. 우리 언니가 이 학교 졸업했는데 그 이야기가 사실이래. 그거보고 좋은 대학 간 애들도 꽤 있고."
나는 순간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족보가 진짜로 존재한다면…….
"지영아 우리 있다가 스터디 모임 할 때 이야기하자."
아이들이 제자리에 앉고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이 하루 같이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나머지 아이들도 마찬가지 인 듯 했다. 자리가 붙어 있는 지영이랑 윤정은 수업 시간 내내 쪽지를 주고받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나는 태연하다는 얼굴로 부실로 먼저 내려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했던 이야기, 마저 해봐."
"어……. 그게 있잖아. 그 노트가 있기는 한데……."
"한데?"
"소문이 좀 와전 된 게 있기는 하더라. 무슨 불치병으로 죽은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고 개네 집이 워낙 좀 복잡했데. 의붓아버지한테 계속 성폭행을 당하며 살았나봐. 그걸 엄마한테 말했는데도 엄마는 그 애를 위해서라며 쉬쉬했는데 알고 보면 의붓아버지가 사회적으로 좀 유명한 사람 이었나보더라. 엄마는 돈보고 재혼 한 거였고, 그리고 원래 법적으로도 보호자가 고소를 원치 않으면 성립이 안 된다고 하더라구. 말을 해도 해도 방법이 없으니까 그 애가 자살 한 거래. 워낙 공부밖에 모르던 애라 친구도 거의 없었고. 어린 나이에 친구도 하나 없이 죽으려니 억울했겠지. 그래서 자신이 그동안 정리 해 놓은 노트랑 뭐 시험에 나오는 이것저것 정리해서 도서관에 놓아두고 거기서 자살했다더라."
"친구랑 노트랑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왜 하필 6층 도서관이야? 거긴 작고 낡은데다가 1층으로 가면 큰 도서관도 있잖아."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윤정이가 말꼬리를 이어 나갔다.
"그 애야 워낙 수재라는 소문이 있고. 도서관에는 다른 애들도 많고 시선도 받았을 테고 애들이 말도 많으니까 선생님한테 허락 받고 거기를 아예 자기 공부방처럼 이용했데. 외로움도 좀 많이 탔었나봐. 아빠도 유명하겠다 집안 짱짱하겠다 공부 잘하겠다. 그 애 집안 사정 모르는 애들은 좀 욕을 하고 다녔겠어? 학교에 기부도 많이 했다고 하던데. 소극적인 애가 친구도 없고 그런 애가 친구 사귈 수 있는 방법은 공부뿐이지. 유서에다가 그렇게 남겼다나봐. 자기가 죽은 후에 정리한 노트 보는 대신 도서관에 와서 자신이랑 친구 해달라고. 그게 유서 내용의 전부였데."
"많이 외로웠었나 보다. 고등학생이면 한참 예민할 때인데 얼마나 힘들었음 자살을 했을까……."
여희는 눈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뭐야? 그럼 그곳에 들어가서 노트만 가지고 나오면 되는 거야?"
내가 허무하다는 투로 이야기하자 지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랬으면 누가 벌써 가져갔게? 그 노트는 그곳에서만 볼 수 있고 가지고 나오면 귀신 붙는다더라. 예전에도 공부 잘하던 애가 그렇게 했다가 실성했나봐. 그래서 그곳 폐쇄 시켰다지. 거기서만 봐야 하고 대신에 혼자 들어가도 안 된데. 여럿이 가면 귀신이 안 나타나다가도 꼭 혼자 가면 보인다고 하더라. 뭐, 혼자 들어가면 그 애가 붙잡는데. 같이 지내자고……."
나를 포함한 여진이와 지영, 윤정은 모두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꽤 일리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진아라면 공부를 좀 한다는 아이들에게는 신화처럼 입에 오르내리다가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아이였다. 항간에는 유학을 갔다는 소문도 있고 카이스트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 죽었다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 한번 들어 가볼래?"
윤정이는 한참 동안이나 심란스럽게 볼펜 끝을 물어뜯더니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궁금한 건 마친 가지였다.
"어떻게 열고 들어가려고? 잠겼잖아."
지영이는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묻자 뜻밖에도 별로 말이 없는 여진이가 답을 내놓았다.
"그전에도 애들이 들어갔었다면 우리도 들어 갈 수 있어.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다시 모이자. 수위 아저씨 눈 피하려면 어디에 숨어있어야 하고 그러면 학교 문은 잠길 거야. 문 잠기면 우리도 못 나가는 건 알지? 부모님한테는 독서실에서 우리 넷이서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그 이튿날 학교로 바로 간다고 하자. 시험 때문에 그런다고 잘 둘러 대야해. 알지?"
나를 포함한 애들은 전부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진이가 이렇게 말하던 때가 있었던가? 늘 말도 느리게 하고 특별히 관심 있는 것이 없는 아이였다.
"어? 어……. 그...럴께. 그러자."
2막 3장
다음날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평상시처럼 부실에서 공부를 하는 척 했다. 나가는 길에 평소 보다 크게 수위아저씨한테 인사를 한 다음 미리 열어 놓았던 1층 화장실
창으로 들어와 조용히 6층으로 올라갔다. 6층은 폐쇄 된지 오래라 입구에 사용하지 않는 책걸상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부딪히지 않게 조용히 들 올라가."
나는 수위 아저씨에게 들릴세라 소곤거리며 말했다.
10시가 되자 학교 안의 모든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이제 학교 문은 잠긴 것이다.
그때 여진이가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꺼내었다.
"뭐야?"
"아빠 지퍼 라이터랑 테이프 그리고 망치."
"뭐 하려고?"
"손전등은 불빛이 너무 커서 밖에서 보일거야. 그래서 지퍼 라이터를 가져 왔고 문이 잠겨 있다니 창을 깨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깨면 소리가 너무 크잖아. 이렇게 테이프를 붙여서 망치로 치면……."
여희는 어디서 보았는지 사각 창에다가 테이프를 붙이더니 망치로 정 가운데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도 유리가 소리도 안내고 갈라졌다.
"헉!"
아이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게 손뼉을 치는 시늉을 했다. 유리창에 유리를 다 털어 내고는 몸집이 작은 지영이가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폐쇄된 이유도 알만 했다.
그곳은 학교에 잇는 도서관이라기보다 정진아 그 애의 개인 공부방 같았다.
먼지는 쌓였지만 붙박이 책장에 차곡차곡 정리 되어있는 문제집과 교과서 그리고 노트들 쓰지 않는 책상을 이어 붙여서 그곳에 보라색 천을 깔고는 아기자기한 소지품도 진열되어 있었다. 창가에도 어설프지만 책상 위의 천과 같은 색상으로 커튼도 걸려 있었다.
"역시……."
지영이가 예상했다는 듯 말을 뱉었다.
"역시 라니?"
“그 애가 죽은 건 결과적으로 그 애 엄마 탓이잖아. 그렇게 사정을 해도 안 들어 줬다는데……. 죽을 줄은 모르고 그랬겠지만……. 여하튼 우리 언니 말로는 그 애 엄마가 그 애 유서를 읽고는 학교 이사장한테 꽤 거금을 주었다고 하더라. 이방 이대로 보존하고 폐쇄 시켜 달라고. 딸애가 남긴 흔적을 누가 건들이는게 싫어서였겠지. 집안에서 보다 이곳을 편해 했던 애니까……."
우리가 지영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윤정이가 무언가를 발견해서 들었다.
초등학교 때 쓰던 전과 정도의 굵기가 되는 노트 모음집이었는데 그곳에는 깨 알 같은 글씨로 모든 과목이 전부 정리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곳에는 우리가 1학기 때 보았던 시험 문제와 동일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만 있다면 3학년 때도 문제없겠어. 얼른 노트에 옮기자."
우리는 노트에 열심히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 5시가 되었을 때 그곳의 문을 잠그고 창으로 나왔다. 깨진 창이 염려스러워서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윤정이가 어디선가 나무판자를 들고 나와서는 창을 막아 놓았다.
"어차피 이곳은 폐쇄 된 곳이니까 아무도 안 올 거야. 우선 판자로 막아 놓고 다음에 와서는 청소도 하자."
우리는 모두 들떠 있었다. 다음주가 중간고사 인데 이 노트가 얼마나 큰 효력을 발휘할지 기대가 되었든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여진이는 가라앉아 있었다.
문 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는 세 번 인사 한 뒤 계단을 내려 왔다.
"여진이 지금 뭐 한 거야?"
지영이 궁금한 듯 내게 물었다.
"귀신한테 인사 한 거야. 우리 집 불교거든……."
우린 계단을 내려와 다시 책상으로 입구를 막아 놓고는 화장실에서 씻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을 못 자서 인지 모두들 초췌 해 보였다. 그 날 내내 우리는 수업 시간에 졸았고 반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것들끼리 밤새 또 공부했냐며 타박을 했다.
2막 3장
일주일 후 중간고사가 끝나고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원래대로의 성적이라면 내가 반에서 1등이기는 했으나 전교에서는 17등이었다. 지영이 반에서 2등 여진이가 3등 윤정이가 4등이었는데 모두들 반 성적은 그대로였으나 전교 등수가 나는8등이 올랐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 노트 덕분이었다.
우리는 선생님들이 칭찬과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는 성적이 나온 그 날 다시 6층 도서실에 올라갔다. 도서실은 다른 건 변한 게 없는데 전보다 말끔해져 있었다.
"뭐야? 누가 청소 해놨어? 설마 귀신이?"
지영이는 겁을 먹은 듯 말했다. 하지만 청소를 해놓은 건 여희였다. 평일 낮에 점심시간에 잠깐 씩 없어지곤 하더니 이곳에 드나들며 청소를 한 것이었다.
"그냥…….좀 지저분한 거 같아서……."
여진이는 멋쩍은 듯 이야기했으나 나는 내심 걱정이 된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다.
"너 미쳤어? 혼자 들어오면 귀신 붙는다며?"
사실 여진이가 걱정되기보다는 그 애가 나보다 더 많이 적어가서 시험에서 나를 이길까봐 걱정이 되었다. 사실 이번에 전교 등수가 가장 많이 오른 것은 여진이었다.
"아니…….그렇지는 않아. 노트를 혼자 보아야만 귀신이 붙는다고 우리 언니가 그랬었어."
지영이는 여진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진이 너 노트 안 봤구나. 우리 처음에 여기 올라 왔을 때 도 너는 노트에는 별로 관심 없었어. 왜 그런 거야?"
지영이의 말에 여진이는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 그냥 이곳이 어떤지 궁금했어. 노트는 진짜로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정진아 라는 선배 마음이 느껴지더라. 이곳밖에 있을 곳이 없었 다잖아. 친구 사귀려고 이 노트를 만들었다면 그 노트를 봐주는 아이들은 너희들로 족하지 않겠어? 나는 그냥 가끔 와서 청소나 해주고 그 선배처럼 쉬다가 가려고……."
윤정이는 감격스럽다는 듯이 여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야, 너희는 진짜 얼굴은 똑 같은데 마음 씀씀이는 어쩜 그렇게 차이나니?"
나는 웃고 말았지만 사실 여진이의 저런 모습 때문에 늘 짜증이 나는 상태였다. 늘 태평한 척 초월한 척…….
"조건 없는 친구라…….사실 이 노트가 정진아 선배의 계약 조건이잖아. 우리가 노트를 보고 그 선배는 사람 구경하고…….그런데 아무런 조건 없이 이곳에 들려준다면...진짜 감동 받겠다."
여진이는 그 이후로도 노트는 쳐다보지도 않고 커튼을 뜯어다가 빨기도 하고 화분을 가져다 놓기도 하며 그곳을 꾸며 나갔다. 심지어는 향을 피워 놓기도 하였다.
우리는 3학년이 되어 반이 갈린 후에도 몰래 만나 노트를 열심히 보고 적어 나갔고 시간이 갈수록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들 중 누구도 한숨을 쉬며 피곤하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여진이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공부를 하며 지냈다. 그 노트에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게 시험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었고 수능 예상 문제도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3학년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이번 시험만 보면 이제 수능인 것이다.
전교에서 이제 우리 셋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전교 1등은 나 2등은 지영이, 윤정이는 3등이었던 것이다. 여진이는 꾸준히 예전 성적을 지켜 나갔다.
전교 1등…….내가 꿈에도 바라던 성적이었건만 나는 예전 보다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른 누가 아닌 지영이와 윤정이가 걸림돌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둘 중에 한 명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 시험까지 그 애들과 같이 볼 순 없다.
'혼자 이곳을 이용하면 귀신이 잡는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야. 여진이는 1년이 넘게 이곳을 혼자 드나들었지만 아무 일이 없었잖아? 다 지영이가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성적은 올리고 싶지만 혼자 이용하기는 무섭고 그렇다고 다른 아이가 노트를 가져 갈까봐 걱정이 된 것이겠지.'
2막 4장
마지막 시험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지영이와 윤정이에게 쪽지를 보냈다. 밤 9시에 6층 도서관 앞에서 만나자고, 그리고 여진이에게는 10시까지 오라고 시간을 일러 주었다.
그 날 밤 9시 윤정이와 지영이는 먼저 와서 도서관 앞에 서 있었다.
"이제 한번만 보면 수능이네? 시원하다. 그 선배한테 고맙기도 하고……."
윤정이는 이제 한차례 남은 시험이라 들떠 있었다.
"나는 그 선배 보다 너희가 더 고맙다. 늘 변함없이 같이 공부 해주고 혼자만 욕심 내지 않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긴장이 풀렸는지 지영이 역시 평소의 침착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들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계획 한 대로 지영이와 윤정이에게 말을 걸었다.
"지영아 윤정아, 오늘 여진이가 깜짝 이벤트 준비했다고 저기 창고에 들어 가 있으래."
독서실 앞에 있는 창고 문은 쇠로 되어 있어 학교의 비품 같은 것을 넣어 두는 곳이었다. 창문도 없고 오직 쇠문만이 존재하는 그곳……. 하루 동안만 가두어 두면 내가 이기는 거다.
"무슨 이벤트? 오...기대 된다. 고3 전야제 같은 건가?"
지영이와 윤정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좀 음침한데? 여진이는 언제 오는데?"
나는 살며시 뒤로 빠지며 대답을 했다.
"여진이는 오지 않아. 하루만 이곳에서 너희끼리 놀아라. 딱 하루만……."
내가 문을 나와서 걸쇠를 걸었다. 그제야 눈치를 차린 지영이와 윤정이는 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질러댔다.
"여희야, 거기 혼자 들어가면 안 돼. 절대로!"
"후후, 왜 안 되는데? 너희가 일등을 못할까봐서? 그래서 안 돼?"
"여희야, 내말 좀 들어봐…….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그곳 진짜로……."
"시끄러워. 언니, 언니. 너희 언니는 무얼 그렇게 잘 안다고 아는 체야?"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순간 지영이와 윤정이는 잠잠해졌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지영이의 목소리…….
"거기 혼자 들어갔다가 실성 한 애가 우리...언니야...흑……."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귀신은 없어. 그런 건 없다고. 그렇다면 여진이는 왜 멀쩡해? 혼자 그곳을 다니면서 한번도 노트를 안 봤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분명 우리 없을 때 몰래 보고는 안보는 척 한 것이다. 원래 그런 애니까.
"그래? 실성한 언니 두어서 좋겠다. 난 들어가겠어."
나는 창가의 나무판자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달빛이 보랏빛 커튼을 통해 들어와 방안의 분위기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진작 혼자 들어 왔어야해.'
나는 황홀함에 빠져 방안 이곳저곳을 새삼스레 바라보다가 시계를 보았다 9시 50분 이제 조금 있으면 여진이가 올 시간이다. 나는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그 기분이란…….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린 것은…….
"어? 여진이 왔니?"
나는 갑자스러운 인기척에 당황스러워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서있는 것은 여진이가 아니었다.
"누구세요?"
보랏빛 커튼 사이로 움직이는 달빛이 그녀를 비추었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긴 생머리에 반듯한 교복, 창백한 얼굴 아래로 붙어있는 명찰에는 "정 진 아"라고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나 그동안 네가 혼자 내 노트를 봐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너만 노트를 보지 않았잖아."
"그...그건 내가 아니라 여진이야. 난 여희라고."
그때 멀리서 여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지영아, 윤정아 너희 누가 가둬놨어? 그리고 도서관 창문이 없어 졌어. 어떻게 된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