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만대장경판 과 부처님가피
대장경이란 부처님께서 중생제도를 위하여 교설하신 경 율 론 經律論 삼장三藏을 말한다.
부처님 입멸 후 경전을 처음 결집할 때는 경 율 經律 양부만 결집하였으나
훗날 보살과 역대조사들의 저술과 논장을 더하여 삼장이 된 것이다. 불교가 널리 전해지면서 경장도 세계적으로 전파 번역되어 붓으로 쓴 사본과 나무에 새긴 판본 등이
보존되어 오늘날 세계에서 여덟 종류가 전해오고 있는데, 여섯 종은 한문으로 되어 우리나라 해인사에
안치된 대장경이 그중 하나이다. 대장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역사는 신라 진흥왕 때 진나라 사신 유사劉思가 명관 明觀화상과 함께
천칠7백여 권의 경전을 모셔 왔고.그 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경전 4백여 함을 모셔와 통도사에 봉안하였으며 흥덕왕 때 구덕화상이 불경약간을 가져 와 흥륜사興輪寺에 모시는 등 여러 차례 걸쳐
대장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목판 팔만대장경이 1차 조성된 것은 고려 묵종 7년에 모셔온 대장경과 그 전에 있던 장경을
대조 교정하여 현종 때 장경 판각이 이루어졌다. 글안의 40만 보병이 고려를 침략하여 서울로 들어와 궁궐과 민가를 불태우고 중흥사까지 불태워버렸다. 패악 무도한 글안병이 좀처럼 물러가지 않자,대왕은 부처님 가피로 글안 병을 물리 치리치기 위하여
임금과 백성이 함께 서원을 세워 대장경을 조성하자, 그 위 신력으로 글안 병이 물러가게 되었다.
왕은 장경판각의 역사를 마친 뒤에 경판을 송도 서울부근 부인사에 봉안하니 이것이 1차의 고려장경 판각불사이다. 그러나 글안이 물러가자,다시 원나라가 침략하여 고종 19년 할 수없이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으나
고려 경판은 몽고 병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가 현종2년 장경판이 완성되고 난 215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고종왕은 여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란 중에도 다시 장경 판각 역사를 시작하여 본사는
강화도에 두고, 분사는 나주에 두어 이규보[李奎報]로 하여금 군신기원문[君臣祈願文]을 지어 불보살님께 오렸다.
군신기원문 (1)국왕인 모는 내각과 문무백관으로 더불어 목욕재개하고 불법승삼보와 제천선신에게 간절히 기원하나이다. (2)적도의 잔인무도함이 오히려 금수보다 지나쳐 가는 곳마다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고 생명을 앗아가서
도처에 피비린내를 내는 죄상이 천인공노케 하고 있나이다. (3) 그들은 무지 목매 한 오랑캐로서 도처에 문화재인 사원과 불상과 경전을 불 지르고 당과 탑을 파괴하고 다년간 공을 쌓아서 조각하여 부인사에 모신 대장경 판각을 불 질러 없앤 것은 슬프고 애통하여
치가 떨릴 뿐이오이다. (4)삼보를 잘 보호하지 못하고 적의침해를 받은 것은 군신이 무능하여 당하였으나 신념만은
절대로 퇴하지 않고 군신이 합심하여 다시 큰 서원을 세워서 장경 판각을 조성하겠나이다. 현종 왕 때도 글안의 난을 만나서 대장경판각을 조성하여 적이 물러간 일이 있으니 이번에도
이 대장경판각 조성의 공덕으로 몽고와 글안이 합한 원병이 물러가게 하여주소서. (5)그리하여 속히 천하가 태평해서 모후와 제군이 만수무강하고 삼한국조가 만세에 빛나게 하여
불법이 천추에 홍포되게 하소서. (6)그렇게 하여 주시면 저희들 군신이 노력하여 불은의 만분지일이라도 갚겠나이다. “라는 간절하고
애절한 발원문을 지어 부처님께 올렸다.
이러한 서원아래 대장경판본 조성은 전후 16년을 소비하여 고종 38년에 더디어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해인사에 모셔진 팔만대장경이다. 왕은 그해 9월에 백관을 거느리고 서문의 대장경판당에 행차하여 향을 피우고 그 순성을 축복하였다.
사기에 의하면 처음에는 강화도 용장사에 모셨다가 풍덕 민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의 해인사로 봉안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일생동안 설하신 경전을 우리나라에서“팔만대장경”이라 이름 붙인 것은
조성된 경판이 81.258매이기 때문에 1.258개의 수는 떼어버리고 팔만대장경이라 부르게 되었고
경전의 내용이 8만 사천 가지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불교에서 팔만사천이란 용어는 숫자의 계념을 떠나 한량없이 많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팔만대장경의 조성목적은 끝없는 적의 침약 앞에서 국가와 민족이 누란에 처하자, 창과 칼로서 대적하여 막을 수 없는 약소국의 통분을 삼키며, 부처님의 신력과 영험에 의 지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군신과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 부처님가호에 호소하며 팔만대장경을 조성한 공덕으로 근 30년간 원나라 군이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간 것은 이 대장경 판각의 공덕이며
결국 부처님께서 이 민족을 수호하여 주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교설인 동시, 경판은 호국의 염원이 담긴 경전이자, 우리민족이 남긴
찬란한 국가보물 제32호이며, 1995년 12월8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팔만대경판각은 세계의 으뜸가는 우리민족의 인쇄술을 보여주고 있고, 81,258매의 경판 양면에
새겨진 양각은 한 사람이 처리한 것과 같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조경판각 되었다. 팔만대장 경판이 어디서 판각되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아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대장경 연구학자들에 의해 관판각지가 남해였음이 밝혀졌다.
도 선 사 주 지 이 혜 민 합 장 |
첫댓글 이런 노력으로 팔만 대장경의 위대한 보존을 믿습니다,,나무 석가모니불..._()_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