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곡(月谷)리〉박곡/반월
19. 박곡(朴谷)마을
1) 개관
산 따라 능선 따라 아름다운 달빛이 서리는 골짝 월곡리에 예전에 박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오순도순 살던 박실이라는 골이 있었으니 박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골짜기라 하여 박곡이란 이름이 생긴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지만 사실 ‘박곡’이라는 지명의 연원은 파은(波隱) 박수기(朴秀基)선생으로부터 비롯된다.
조선 성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강원감사를 지내던 파은은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내놓고 지금의 계남 땅에 해당하는 임남면 기산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남은 생을 후생들의 훈육에 힘쓰다 세상을 떴다. 후손들이 박곡 산록에 묘를 쓰고 그 옆에 귀후재(歸厚齋)라는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이후 이 마을을 박감사의 묘가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박실(朴谷)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현재 파은의 후손인 충주박씨는 한 가구 뿐이라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얘기다. 한 개인의 삶이 당대의 삶으로 그치지 않고 후손들과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훈육을 통해 후세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이어진다는 것이야말로 봉제사에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며 조상을 섬겼던 조선조 유교의 가장 바람직한 측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파은의 얘기를 들으며, 죽으면 모든 끝이 끝이라는 식으로 대충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타관에서 들어와 장수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박곡은 95세대 223명이 살고 있는 천천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고 월곡승마장과 마사고등학교를 끼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약 450년 전 조선조 중기에 밀양박씨와 청주한씨가 입향해서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며 구체적인 성씨별 분포를 보면 이런 저런 김씨와 이씨가 각각 14가구, 밀양박씨 9가구, 청주한씨 7가구, 정씨 5가구, 수원백씨 4가구, 그 외 길, 노, 문, 민, 신, 엄, 연, 우, 유, 윤, 임, 장, 조, 주, 최씨 등이 있다.
제보자 이기문씨에 의하면 박곡마을은 고소, 고발과 범죄가 없는 마을이며, 또한 빈집이 없는 마을이라고 하며, 장수군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자부한다고 한다. 이 마을의 모정 또한 자랑 중의 하나이다. 이 마을에는 원래 모정이 없었는데 2년 전 정부보조 2600만원과 동재 2000만원을 보태 장수 의암사 누정을 샘플로 해서 지었는데 아마 장수군에서 가장 크고 멋있는 모정일 거라고 하며, 조만간 박곡정이란 편액도 달 예정이라고 한다.
마을 회관도 70년 전 초가집 동청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다른 마을에서 보기 힘들게 슬라브 건물 2층으로 연건평이 50평이나 되게 5년 전 신축했으며, 1층은 회의실과 식당, 할아버지노인당과 할머니 노인당으로 쓰이고 2층은 탁구대, 런닝 머신, 역기 등이 구비되어 있는 체력단련실로 이용한다고 한다. 마을의 재산(동재)도 다른 마을에 비해 비교적 넉넉한 편인데 현금이 약 4000만원 정도 되고, 논이 1200평, 임야가 8000평 정도 된다고 한다.
이 마을의 농사는 주로 벼농사와 담배농사인데, 담배농사는 벼농사에 비해 소득은 높은 반면 그만큼 고되고 힘들다고 한다. 이 마을에 보건진료소는 없지만 그대신 남양리에 있는 보건진료소에서 매주 목요일 출장 진료를 나온다고 한다. 왜정 때부터의 마을의 역대 이장을 살펴보면 박영래, 박준양, 이봉우, 박창선, 조영배, 조은배, 백창선, 방병석, 김명주씨의 순이다.
이 마을에 실제 거주하는 가구수 80호를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40대 4가구, 50대와 60대가 각 10가구이고 나머지 모두 70대 이상이어서 노령화되기는 이 마을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독거노인이 여자가 20가구, 남자가 5가구나 된다고 한다. 마을의 최고령자는 여자는 길만석씨의 모친으로서 94세이며, 남자는 박창선씨가 84세라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종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 통일교 등 다양한데 개신교 신자는 마을에 있는 월곡교회에 나가고 불교신자는 신광사로 천주교와 통일교 신자는 장수읍내로 다닌다고 한다.
마을에 독거노인도 많고 고령자도 많아서 기동력 있는 젊은 사람이 아쉬울 때가 많은데 마침 무진장 소방서 구조대에 나가는 젊은 소방대원이 충주박씨 제각에 살면서 마을 어른들을 잘 보살필 뿐만 아니라, 가물어서 동네 식수가 모자랄 때는 소방차로 식수까지 공급해준다며 서문 철이라는 소방대원을 꼭 소개해달라고 제보자 박병석 개발위원장과 이기문씨가 특별히 부탁을 했다.
2) 산과 골짜기
·가매-바우 : 가매박골에 있는 바위.
·가매박-골 : 지치목 동쪽에 있는 골짜기.
·감사-묘(監司墓) : 박실 남쪽에 있는 조선조 태종때 강원 감사를 지낸 파은 박수기(朴秀基)의 묘.
·강선-골 : 피앗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남너리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당-산 : 박실 남쪽에 있는 산.
·큰-아그밧골 : 아그밧골의 큰 골짜기.
·덜-골 : 성짓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도장-골 : 자근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똥그럼-산 : 당산 남서쪽에 있는 산.
·맷-봉 : 박실 동쪽에 있는 매 모양의 산.
·모디-쏘 : 모래쏘 북쪽에 있는 소.
·모래-쏘 : 박실 남서쪽에 있는 소.
·미꼬리밧-골 : 남너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미영발-골 : 남너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박곡-교 : 박실다리.
·생이-바우 : 박실 북쪽 산 중턱에 생이처럼 생긴 바위.
·생이박-골 : 미영밭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골 : 박실 서쪽, 서당이 있었던 골짜기.
·성짓-골 : 보팟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소자문-쏘 : 모래쏘 북쪽에 있는 소.
·월곡-교 : 박실다리 북서쪽에 있는 다리.
·이도암선친-묘(李陶庵先親墓) : 댓골 기슭에 있는 조선조 선조때 선비 도암(陶菴)이 경광(李絅光)의 아버지 묘.
·자근-골 : 박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아그밧-골 : 자근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자빠진-골 : 가메박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호랭이-바우 : 박실 동쪽 산중턱에 있는 바위. 호랑이굴이 있었다 함.
·흰덜-골 : 박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
·흰덜골-재 : 박실 서쪽 산에 있는 고개.
·큰-까끔 : 박실 북동쪽에 있는 산.
·질뚱-날 : 자근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찬시암-골 : 자근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채독-바우 : 박실 서쪽 산 기슭 지금의 월곡승마장 자리에 있는 바위인데, 옛날 이곳에서 돌을 채취해서 일본에 수출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3) 하천과 들
·정지밋-들 : 박실 북쪽에 있는 들. 정자나무가 있었음.
·밧-들 : 박실 남쪽에 있는 들.
·새-들 : 박실 북서쪽에 있는 들.
·박실-들 : 박실 남쪽에 있는 들.
·남너릿들 : 정지밋들 북쪽에 있는 들.
·남너릿-보 : 박실 옆 서쪽에 있는 보.
·박실-보 : 박실들에 물을 대는 보.
4) 민속과 종교
▶ 서낭당
지금의 모정자리에 서낭당이 있었는데 50년 전쯤 없어졌다고 한다.
▶ 당산제
인근 다른 마을과 유사한 형식의 당산제를 그동안 쭉 지내오다가 약 13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 월곡교회
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의 월곡교회는 이경재 목사가 시무하고 있으며 신자수는 30여명이라고 한다.
5) 전설
▶ 돌쇠와 마당쇠 형제
이 마을에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한 돌쇠와 마당쇠 이야기가 사랑방 할아버지들의 입을 통하여 면면히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박실마을에 돌쇠와 마당쇠 형제가 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 돌쇠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사납고 심술이 많았으며 성질이 괴팍하고 욕심꾸러기였다. 하루는 만삭이 된 이웃집 아주머니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돌쇠는 몰래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아서 살금살금 아주머니 등 뒤로 가서 적삼 속에다 지렁이를 넣고 도망갔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등이 차서 적삼을 흔드니 지렁이가 떨어졌다.
아주머니는 너무도 징그러워 쩔쩔매다 물 속에 자빠졌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본 돌쇠는 좋다고 낄낄 웃어댔다. 빨래하던 아주머니는 그 일로 충격을 받아서 낙태를 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동네 어른들은 돌쇠를 데려다 볼기를 쳤지만 돌쇠의 심술은 더해갔다.
한 부모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아우 마당쇠는 형 돌쇠하고는 딴판이었다. 어려서부터 착하기 이를데 없었다. 형이 잘못을 저지르면 마당쇠가 찾아가서 사죄하고 동네 어름들의 심부름을 맡아서 다해주고 형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나쁜 짓 못하게 만류하는 등 착한 일만 하는 마음씨 고운 아이였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서 돌쇠와 마당쇠 형제도 장성하게 되어 근방의 처녀들과 결혼한 후에 박실 마을에서 함께 살았다. 형 돌쇠는 욕심이 많아서 부자가 됐으나 동생 마당쇠는 자기보다 남을 돕는 착한 마음씨라 가난하기만 했다.
집도 찌그러져 가는 오막살이집에서 살았다. 거기에다 아이들은 주렁주렁 아홉이나 되었다. 풍년이 들면 부부가 남의 품팔이로 연명하고 흉년이 들면 품 팔데 없어 쑥, 물고, 송구 등 초근목피로 배주림을 달랬다. 어느 해는 몹시도 가물어 곡식은 물론 풀과 나무까지 말라비틀어지는 바람에 도저히 연명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마당쇠 내외는 견디다 못해 형의 집을 찾아가서 개떡이라도 해먹게 밀기울이나 보리겨를 조금 주면 가을에 일을 해주겠다고 애원했다.
그러나 형 돌쇠의 말은 냉혹했다. “너에게 보리겨를 주고 나면 우리 집 돼지가 굶으니 그런 말 하려거든 우리 집에 얼씬도 하지 마라. 두 번 다시 오면 천륜을 끊겠다.”하며 쫓아내는 것이었다.
마당쇠는 별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이웃마을 김초시댁으로 옮겼다. 김초시댁은 후덕해서 흉년이 들면 없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등 기민에게 구흉하는 적선가로 불리우고 있었다. 마당쇠의 가족도 김초시네가 준 양식으로 부황을 면했다. 봄이 되면 거르지 않고 마당쇠네 오막집의 처마 밑에 강남갔던 제비가 쌍쌍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고 살았는데 그 해에도 새끼 세 마리를 낳아 며칠 있으면 날 정도가 됐다.
하루는 마당쇠가 들에서 일을 하고 점심 먹으러 집에 오니까 제비 암수 두 마리가 처마 밑을 이리 날고 저리 날면서 요란하게 울어댔다. 무슨 일인가 하고 처마 밑 제비 둥지를 쳐다보니 누런 구렁이가 제비 둥지에 들어가서 제비 새끼를 잡아먹고 있었다. 마당쇠는 빨래 장대로 구렁이를 걷어내어 멀리 버리고 마당을 보니 제비새끼 한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었는데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마당쇠는 새끼를 집어서 얇은 헝겊으로 상처를 동이로 실로 감아서 둥지에 넣어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새끼 제비는 상처가 아물고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 구월 구일이 되니 강남으로 날아갔다. 그 해도 저물고 그 이듬해 봄이 됐다.
마당쇠가 일을 하고 집에 오니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 빨래줄에 앉아 마당쇠 부부를 반기는 듯 지저귀고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난 뒤 마당쇠 부인이 울밑에다 유두콩을 심으려 그 곳을 정리하다 보니 난데없이 박씨가 나서 자라고 있었다. 마당쇠도 그 누구도 박씨를 심은 사람은 없었다. 마당쇠 부부는 신기하게 여기고 열심히 박을 가꾸었다. 박은 잘 자라서 그 넝쿨이 지붕을 꽉 덮으면서 많은 박이 열렸다.
가을이 되어 수 백 덩이의 박을 따서 타봤다. 박 속은 좋은 식량이 됐다. 여늬 박 속과 달라 아이들이 맛있게 먹고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박 속을 말려서 겨울 양식으로까지 삼았다.
그 많은 바가지가 시골에서는 쓸 곳이 없어서 마당쇠는 사람이 많이 산다는 한양으로 바가지를 달구지에다 싣고 집을 떠났다. 며칠이 걸려 한양에 당도하니 한양 사람들이 값을 더 주고도 불티나듯 사갔다. 다른 박보다 크고 야물기 때문이었다. 마당쇠는 바가지로 인해 많은 돈을 벌어서 귀향했다. 집에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밤에 자면서 옆에 있는 부인에게 은밀히 말하는 것이었다. “한양서 다른 바가지보다 비싸도 다 우리 박만 찾는 것을 보면 이 박은 예사 박이 아니라 필시 다리 나은 제비가 강남서 오면서 보은하려고 입에다 물고와서 울 밑에 놓아둔 것 같소”하며 희안해 했다.
마당쇠 가정은 당장에 식량 걱정은 않게 됐다. 그 이듬해에도 더 많은 박을 가지고 한양에 갔는데 한양 사람들은 이 박에다 음식을 담으면 맛도 좋고 재수도 있고 값도 싸다면서 좋아하는 바람에 금시 다 팔렸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내다보니 마당쇠네는 큰 부자가 되었으며 이 소문이 인근에 퍼졌다.
이 사실을 한동네 사는 형 돌쇠가 모를 리 없었다. 돌쇠는 넌지시 마당쇠네 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착한 마당쇠는 과거의 쓰라림도 잊고 형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돌쇠는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제비 집에 있는 제비 새끼 한 마리를 잡아서 다리를 비튼 뒤 실로 아무렇게나 감아서 다시 둥지에 넣었다.
그 제비는 상처가 아물고 가을이 되어 강남으로 날아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다시 날아왔다. 어느 날 돌쇠가 울 밑을 보니 역시 심지도 않은 박이 싹이 터서 자라고 있었다. 돌쇠 부부는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했으며 그 박은 무럭무럭 자라서 많은 박이 열렸다. 가을이 되어 박을 따서 박 속은 온 식구들이 삶아서 먹었다.
그런데 박 속을 먹은 뒤부터 돌쇠는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또한 머슴을 시켜 시장에 가지고 간 박은 사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돌쇠의 배앓이는 백약이 무효였다. 그 좋은 재산 다 팔아서 약을 썼으나 효험은 없고 돌쇠네 집은 거지가 되다시피 되었다.
하루는 스님이 시주하러 돌쇠네 집에 왔다. 돌쇠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마루에 앉았는데 스님이 물었다. 돌쇠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스님은 돌쇠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세상만사가 다 인과응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당신은 평생을 악업을 쌓아서 악의 씨가 몸에 박혀 병이 된 것이나 부처님께 백일 불공하고 작은 일이라도 선한 짓을 하면 악의 씨가 녹으면서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병에 지친 돌쇠는 그 스님이 시키는 대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신광사에 가서 정성을 모아 백일불공을 드리니 마음이 가벼우면서 병이 점차 나았다. 그리고 전의 돌쇠가 아닌 새 사람이 되었으며 동기간에도 우애하고 이웃끼리 화목하는 착한 사람이 됐다.
한편 마당쇠는 형 돌쇠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며 한 마을에서 잘 살았는데 박으로 인해서 형제가 잘 살게 되고 박이 부를 이루어 주었다해서 이 마을을 박실(朴谷)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 온다.
▶ 학문의 명당 흥학당
박실에는 옛날부터 ‘흥학당’이라는 명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 학문적으로 대성하거나 큰 인물이 된다고 하며 폐교되기 전의 월곡초등학교 자리가 바로 그 자리라고 한다.
학교를 세우기 전에는 이곳에 서당이 있었고, 실제로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출연금을 모으고 부역을 해서 월곡초등학교를 세운 뒤 이 학교에서 수 많은 박사, 판사, 변호사와 고위 공무원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학생수 감소로 월곡초등학교가 면소재지에 있는 천천초등학교로 통·폐합되고 개인이 폐교된 학교를 인수해서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다.
6) 기타
▶ 장수 월곡리 고분군(長水 月谷里 古墳群) A
천천면 월곡리 박곡마을 동쪽 경사면 소재
봉화산 서쪽 경사면 말단부에 박곡마을이 있다. 이 마을 동족에 위치한 남쪽 경사면에는 도굴로 그 내부가 드러난 두 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박곡마을 주민의 제보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현지 조사 때 유구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했다.(군산대학교박물관, 2001, 『장수군의 문화고분』)
▶ 장수 월곡리 고분군(長水 月谷里 古墳群) B
천천면 월곡리 박곡마을 남쪽 경사면 소재
월곡마을에서 719번 국도를 따라 장수읍 쪽으로 300m 정도 가면 도로변 우측에 협장한 충적지가 있다. 이 충적지의 북쪽을 감싸고 있는 능선의 남쪽 경사면에 고분의 벽석으로 추정되는 석렬이 드러나 있다. 지금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잡목이 우거져, 고분의 천정석 내지 벽석으로 추정되는 할석만 일부 확인하였다. 여기에 고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도굴로 청정석이 제쳐진 상태로 파괴된 고름장을 보았다.”는 증언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군산대학교박물관, 2001, 『장수군의 문화고분』)
▶ 장수 월곡리 고분군(長水 月谷里 古墳群) C
천천면 월곡리 박곡마을 소재
천천면 농공단지 13번 국도를 따라 장수읍 쪽으로 400m 가량 가면 승마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승마장으로 조성괸 곳은 ‘흰독골’이라 불리는데, 그 입구의 북서쪽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승마장으로 개발되었다. 현지 조사가 여의치 않을 정도로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지고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고분의 벽석으로 추정된 천석이 임야지대의 곳곳에 흩어져 있다. 고분의 도굴 구덩이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확인되어, 아직도 임야지대를 이룬 지역에 고분이 산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장수 월곡리 유물산포지(長水 月谷里 遺物散布地) A
천천면 월골리 박곡마을 북쪽 충적지 소재
월곡리는 북쪽으로 흐르는 장수천을 따라 넓은 충적지가 펼쳐진 곳이다. 1998년 농지정리사업을 진행하던 중 월곡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200m 떨어진 지점에서 빗살문토기편과 석제 방추차가 수습되어 유적의 존재가 드러났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유물이 수습된 지역과 북쪽으로 2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양리 유적을 하나로 묶어 긴급 수습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기서 서쪽으로 600m 떨어진 남쪽 경사면에도 많은 고분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이 일대에 대규모 경마장을 건설하면서 대부분의 고분이 유실되었다.(전북대학교박물관, 2001, 『유적조사보고서-장수월곡리 유적』)
▶ 장수 봉화산 봉수(長水 烽火山 烽燧)
천천면 월곡리 박곡마을 동쪽 봉화산 정상부(786.2m) 소재
봉화산은 장수군 천천면 월곡리와 계남면 화양리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봉화산이 자리하고 있는 능선의 북쪽에는 장수 침곡리 산성 A·B가 있다. 특히 봉화산 봉수는 장수군과 그 주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봉수들 가운데 가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봉화산 봉수의 정상부에는 ‘장수 비봉산 봉수대’라고 표지 말목이 있으며, 정상부의 동쪽과 남족 기슭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3~5단의 석축이 21m 가량 남아있는데 본래 정상부를 석축으로 감싸고 평탄면을 마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봉화산 정상부 민묘 주변에는 격자문이 타날되어 있는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기벽의 두께가 두꺼운 경질 토기편 등이 수습되어 봉수의 조성시기가 삼국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군산대학교박물관, 2001, 『장수군의 문화고분』. 곽장근, 2006, 『장수군의 교통문화』, 장수문화원)
▶ 한국마사고등학교
천천면 월곡리 산 90번지에 위치한 한국마사고등학교는 학생들의 다양한 적성과 소질을 개발시키고, 급변하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21세기형 인재 양성을 위해 2003년 개교한 인문계 특성화 고등학교로 국내 유일의 승마전문 고등학교이다
한국마사고등학교는 인문계 특성화 고등학교로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정규 과정은 물론 승마 전문교과 수업이 하루 2시간씩 이루어지고 있다.
승마과는 대학 진학에 필요한 인문계 정규교과목 공부는 물론 기본적인 승마기술을 배우고 있으며, 기수과는 일반교과, 한자, 독서 교육과 함께 기수가 되기 위한 기초체력과 승마 전문 기술을 익히고 있다.
한국마사고등학교는 전국단위 모집으로 매년 4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으며,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4인 1실로,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 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협동심, 타인에 대한 배려 등 기본적인 덕목들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나간다.
한국마사고등학교는 인문계 교과정에 승마를 특성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교생의 90%가 대학 진학을, 10%가 기수 진출을 희망하고 있다.
전원 기숙사 생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 밤늦게까지 특기적성 교육은 물론 자율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선생님들 또한 학생들의 대학진학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2006학년도 대학진학 및 기수합격 현황을 보면, 4년제 대학에 총 38명이 합격하였고, 원당목장, 승마랜드, 춘천승마장 등에 15명이 취업되었으며, 한국마사회 기수로 4명이 합격하는 등 졸업생 전원이 대학과 직장에 중복해서 합격 또는 취업하고 있다.
▶ 월곡초등학교
1950년 1월 10일 천천초등학교 월곡분교장으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2일 월곡국민학교로 승격되었고, 1965년 2월 9일 와룡분교장 설립인가, 1986년 3월 10일 월곡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인가, 1991년 2월 28일 와룡분교장을 본교에 통·폐합하였고, 1992년 2월 16일 제 38회 졸업생을 포함하여 총 2,326명을 배출하였다. 1996년 3월 1일 월곡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96년 4월 1일 현재 6학급 82명이 재학중이었으나, 2003년 3월 1일 천천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
역대교장으로는 안재훈, 김성후, 전학수, 조용식, 하청일, 박영식, 한대현, 최용성, 임선규, 한봉운, 윤송자, 유재순, 김용수, 장한섭, 서명웅, 이용락, 강철규 등이다.
▶ 일헌공(逸軒公) 이임간(李林幹) 유허비
일헌공은 고려 충선왕 때 조선조의 정승에 해당하는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낸 인물로 장수군 북부지역인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등지의 땅과 임실군 지사면, 둔남면, 남원군 보절면, 덕과면, 장수군 산서면 일대를 봉토로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 위대함을 알 수 있다.
선생의 휘는 임간, 시호는 일헌이며 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선생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나 실전하여 문서로서 사적은 있으나 유적이나 유물은 없는데 후손들의 효심으로 월곡리 대로변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비석건립위원장 21세손 재택, 집행위원장 22세손 득춘, 경주후인 이규진 근서(謹書) 서기 1987년
▶ 귀후재(歸厚齋)
박실 서쪽에 있는 충주 박씨 파은 박수기(朴秀基)선생의 묘재.
▶ 박귀천의 효자비
박실 서쪽 길가에 있는 밀양(密陽)박 귀천(朴歸千)의 효자비이다. 박귀천은 밀성군의 후예이며 박동(朴東)의 아들이다. 고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아버지를 지성껏 간호하여 치료하였으며, 효험이 없어 위독하게 되자 단지수혈로 회생시켰다.
물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에 추운 겨울인데도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았으며, 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해서 사냥을 떠나려 하자 꿩이 집안으로 날아들어 왔다고 한다. 이 지방의 유림들은 이 갸륵한 효심을 나라에 상소하여 명정의 특전을 받았고 후손들은 마을에다 정려를 세웠다.
▶ 박영래 공덕비
박실에 있는 공덕비로 마을 흥학당이라는 명당에 월곡초등학교를 건립할 때 학교부지 1000평을 희사한 공덕을 기리고 있다.
▷제보자 : 이기문(남, 68세), 박병석(개발위원장, 남, 62세)
20. 반월(半月)마을
1) 개관
반월마을에 처음 들어서면 고즈넉한 산촌마을에 양반들이 사는 반촌의 품격이 어우러진 그런 첫 인상을 받게 된다. 그만큼 마을이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마을의 한가운데로 반석이 깔린 계곡이 있어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식수에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을 주변을 완만한 산과 숲이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새 둥지에 들어온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며, 누구나 한번 와보면 터 잡고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외지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살려고 집터를 구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마을을 떠난 출향민들이 고향에 대한 애착이 깊어서 땅을 내놓지 않기 때문에 동네 인구가 늘지 않는다고 한다.
반월마을에 대한 주요 제보는 면소재지에 있는 박현규 장학비 주인공의 4촌 동생이며, 박향선 제보자와 남매간으로서 장수군청에서 36년간 재직하고 정년퇴직한 박완기씨가 해주었다.
월곡초 운영위원장을 지낸 백영남씨는 반달 마을 반월은 가구수가 50가구에서 25가구로 줄었다 다시 50가구로 늘었다 하기를 반복해서 반월마을이라고 한다고 하며 현재는 25가구 58명이 살고 있으니 반달에 해당한다고 하며, 얼마나 더 있어야 이 마을이 보름달이 될지 모르겠다고 농담 삼아 말했지만 박완기씨는 당산에서 마을 주변을 보면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반월리라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마을은 30년 전만 해도 호당 20두락 이상씩 농사를 짓던 부촌이었다고 하며, 이곳 출신으로서 외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도 다 잘산다고 한다. 이 마을은 예전에는 벼농사가 주종이었지만 요즘은 돈이 되는 오미자나 다른 특용작물을 재배한다고 하며, 축산 농가가 없어서 마을이 깨끗하고 냄새도 없다고 한다.
이 마을에 맨 처음 입향했던 성씨는 강씨이고 그 다음이 원씨이며 그 후 밀양박씨와 청주한씨 문정공파 후손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밀양박씨가 일곱 가구로써 가장 많다고 하며, 그 외 김씨 5가구 이씨와 수원백씨가 각 3가구 그 외 배, 서, 소, 전, 추, 하, 한씨 등이 있다.
50년대부터 시작해서 역대 이장을 보면 박병옥, 박명규, 박태곤, 박병룡, 박귀덕, 한종렬, 한종덕, 조우석, 송한성, 안두순, 하상철, 송한구씨로 이어져 왔다고 하며, 마을의 최고령자는 남자는 개발위원장을 맡고 있는 백성균씨로 84세이고, 여자는 박정현씨 조모가 92세라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의 종교는 대부분이 불교인데, 예전에 통일교 신자가 한 사람 살다가 전주로 이사 가는 바람에 지금은 온 동네가 불교신도이며 대부분 신광사 신도라고 한다.
마을회관은 40년 전 브로크 건물에 스레트를 얹어 지어져서 구판장을 겸하던 건물을 헐고 7년 전에 40평 슬라브 건물로 신축했다고 하며, 모정 역시 정부 보조 2000만원과 자부담 600만원을 들여 장수군에서 가장 크고 멋있게 반월정이란 편액까지 달아서 3년 전에 신축했다고 한다.
특히 이 모정이 여름에 시원하고 전망이 좋을 뿐만 아니라 모정 밑에 보가 있어서 어린이들의 몰놀이장으로도 안성맞춤이어서 여름에는 관광 버스까지 대절해서 부산, 광주 등의 외지에서 놀러 온다고 한다.
아울러 이곳 출신으로서 서울에서 궁중국악기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박성길 사장이 마을에 국악전수관을 차려서 운영하고 있기도 해서 마을의 풍취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고 한다.
2) 산과 골짜기
·깐치짓-골 : 남너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꽨매깃-골 : 반월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너른-골 : 반월리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다르밧-골 : 뱃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돌-시앙지 : 반월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뒷-골 : 반월리 뒤에 있는 골짜기.
·뱃-골 : 자근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붓당-골 : 반월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새-까끔 : 신암쟁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신암-쟁이 : 반월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앵기-달래 : 절텃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양수-벼루 : 반월리 서쪽에 있는 벼랑.
·여시-드미 : 도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오릿-골 : 반월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오소리-바우 : 오소리 박골에 있는 골짜기.
·작은-아그밧골 : 아그밧골의 작은 골짜기.
·재공-골 : 새까끔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절텃-골 : 큰까끔 남쪽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조그적-골 : 너른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죽전-동(竹田洞) : 댓골을 이름.
·댓-골<죽전동> : 강선골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진골 : 괭매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추장-골 : 진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통시밧-골 : 오소리박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패묵-골 : 반월리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피앗-골 : 덜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깃대봉 : 보팟재 위에 있는 봉우리. 측량할 때 원 기점을 그곳에 설정했기 때문에 본래는 기점봉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보팟-골 : 아그밧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3) 고개
·지치-목 : 미꼬리밧골 북쪽에 있는 고개.
·작은싸리-재 : 반월리에 있는 고개.
·큰 싸리재 : 반월에서 계남으로 이어지는 큰 고개
·보팟-재 : 계남면 난평으로 이어지는 재인데, 옛날 이 마을에서 장계로 중학교 다닐 때 쓰이던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쇄되어 통행이 없다.
4) 하천과 들
·장막-들 : 새들 북쪽에 있는 들.
·원거릿-들 : 새들보 남쪽에 있는 들.
·원구리 : 새들보 남쪽에 있는 들.
·오릿골-들 : 오릿골 아래에 있는 들.
·뒷골-들 : 뒷골 아래에 있는 들.
·갱변-보 : 반월리 남쪽에 있는 보.
·뒷-방죽 : 반월리 북쪽에 있는 방죽.
·양숫-보 : 반월리 남서쪽에 있는 보.
·장막-보 : 장막들에 물을 대는 보.
5) 민속과 종교
▶ 당산제
이 마을은 동네 오른 쪽 산 전체를 당산이라 하여 아주 신성시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무 하나라도 해가지고 나오면 큰일 난다고 하여 그 곳에 접근조차 못하게 한다고 한다.
당산제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저녁 12시부터 새벽까지 지내는데 제물로는 삼색실과 떡, 돼지머리, 밥을 차려 놓고 한 집에 초 한 자루씩 가지고 나와서 불을 밝힌 다음 각자의 소망을 빈다고 한다.
제관은 동네에서 해마다 두 집씩 묶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제를 지내게 하는데 두 집씩 묶어 심지를 뽑아서 그 순서를 정한다고 한다.
제관은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기록하여 마지막에 소지하며, 당산제의 비용은 전답이 있어서 그것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동네 사람들에게 거출하여 충당하기도 한다.
동네의 평화와 안녕을 목적으로 하는 당산제가 끝나면 반월마을 들어오는 입구 숲쟁이에 모여서 농악을 하면서 거리제를 지내는데 이 때는 팥죽을 끓여서 전 동네 주민이 모두 참석하여 팥죽제를 지내고 한바탕 흥겹게 논다고 한다. 팥죽제를 지내는 이유는 팥죽이 동네 재앙을 방지하고 잡귀출입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7) 기타
▶ 장수 월곡리 도요지(長水 月谷里 陶窯址) A
천천면 월곡리 반월마을 동쪽 계곡 소재
반월마을 남동쪽 계곡에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450m 쯤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싸리재로 연결되는 남동쪽 농로를 따라 다시 150m 쯤 가면 도요지가 나온다. 도요지는 밭을 계단식으로 확장하면서 대대적으로 복토작업이 이루어져 모두 땅 속에 묻혔다. 농로와 그 주변에서 소토와 백자편이 수습되고 주민들의 제보를 통해, 이 일대에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도요지가 싸리재부터 반월마을까지 도로 확·포장공사 구역 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유적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요망된다.(군산대학교박물관, 2001, 『장수군의 문화유적』)
▶ 장수 월곡리 도요지(長水 月谷里 陶窯址) B
천천면 월곡리 반월마을 남쪽 구릉지대 소재
월곡마을에서 719번 지방도를 따라 장수읍 쪽으로 300m 정도 가면 도로변 우측에 남북으로 긴 들판이 나온다. 이 도로에서 서쪽으로 250m 떨어진 동쪽 경사면 말단부에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도요지는 논과 밭에 위치하여 얼마간 훼손되었지만 밭 중앙부가 경사면을 따라 볼록하게 솟아 그 곳에 소성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백자편과 옹기편, 토침 등이 수습되었는데 백자가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분포 범위는 동서 길이 100m, 남북 폭 70m 내외이다.(군산대학교박물관, 2001, 『장수군의 문화유적』)
▶ 장수 월곡리 유물산포지(長水 月谷里 遺物散布地) B
천천면 월곡리 반월마을 178번지 일원 소재
천천면 월곡리 반월마을 178번지 일대의 농겨잊 정리사업 현장으로 반월마을 진입로 부근의 장척 2지구 경지정리사업 공사 현장에서 파헤쳐진 흙무더기와 주변에서 다량의 유물이 수습되어 1999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수습조사 되었다. 유구는 이미 이루어진 공사로 인해 파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다만 흙무더기와 시굴 구덩이에서 신석기 시대에 해당되는 빗살무늬토기편 및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편과 각종 석기(돌보습, 갈판, 석도 등)가 다량 수습되었다.(전북대학교박물관, 2001, 『유적조사보고서-장수월곡리 유적』)
첫댓글 저도 모르는 월곡리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꼭 할머니가 호랑이피던 시절 얘기를 들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와~~
고향의 향기가 자르르르~~
모셔온글 자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