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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구원의 서정’과 ‘중생’ 부분
lamad (2011.12.12. 23:25)
벌콥에 대한 글을 답글을 썼으니까, 내일은 제가 공부하는 것 마감해야 하기 때문에 바빠서 후크마의 글을 오늘 대강 올립니다. 쓰다가 말 것입니다. 그 이후에 쓰겠습니다.
제2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벌콥은 구원의 순서를 시간상의 순서라기 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로 기술하고 있으며, 구원과정 속에서 역사하기는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 사이의 상호연관관계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계속해서 구원의 순서란 문제점에 대한 최근의 세 가지의 접근 방식을 주목하기로 하자. 한 극단의 경우가 존 머레이의 겨우다. 그는 성경으로 부터 구원의 명확한 순서가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다.
...(중략)...
3. 우리가 꼭 구원의 순서에 대하여 말해야 하는가?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 교의학 초판에서 구원이 수반하는 모든 축복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동시에 부여된다고 말했다. 심판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축복들은 구별될 수 있으되 분리될 수는 없다. 믿음, 소망, 사랑처럼 그것들은 깨어질 없는 세 가지 줄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속적 단계로 나누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하여,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
를 정하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을 버려야한다.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길에, 혹은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 구원의 과정은 이런한 국면들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록 중생이 다른 국면들에 대해서 원인적인 우선 순위를 갖고 있으나 그것은 시간적인 우선순위가 결코 아니다.
제7장 중생
1. 세 가지 의미의 중생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하는 의미에서 중생이다(요3:3,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1:18: 벧번1:23; KJV,ASV, NASV 참조).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19:28). 마지막으로 언급된 구절에는 ‘팔링게네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위에서언급된 영어 번역본에는 중생 혹은 거듭남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는 디도서 3:5에만 사용되고 있는데 온 우주가 새롭게 갱신되는 것을 칭하고 있다. 즉 벧후3:13과 계21:1~4에서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본 장에서 나는 위에 언급된 의미들 중 첫 두 가지 의미만을 다룰 것이다.
초기 개혁신학에 있어서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서 사용됐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 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하여- 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1561년의 벨직 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이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conversion: 회심)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겨지는 것과 돌이킴을 통하여 새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의 구별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때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라 정의를 할 수 있으며 ....
...(중략)...
중생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성경은 요 3장이라고 할 수 있다. ‘ 태어나다.’라는 동사는 부정시제 수동형이다. 부정시제는 이러한 새로운 출생이 단회적임을 보여준다. 또한 동사의 수동형 형태가 가리키는 것은 이러한 사건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임을 알리는 것이다.
댓글 16
lamad 11.12.12. 23:38
나머지 글들을 내일은 못 올릴 것입니다. 후크마의 글을 읽고 차후에 올리겠습니다. 중생과 관련한 후크마의 글을 과거에 읽은 적은 있습니다.^^
holyjoy 11.12.13. 06:57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ㅎㅎ 벌콥과 후크마의 글을 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올리신 것입니까? ^^ 그냥 단순히 참고자료로 올리신 것입니까?
오히려 벌콥과 후크마의 글을 한꺼번에 한 글로 정리해 두시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자료 제공에 감사를 드립니다.
강요된 은총 11.12.13. 07:03
좋은 글, 내용 감사합니다,^^ 한 번 만나요,,ㅋ
바보새 11.12.13. 09:23
그렇죠. 심기워지는 것, 맞습니다. 근데 씨가 심기웠을 때, 곧 중생 그 자체를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지요 거기엔 가시밭도 돌짝밭도 있고 이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생자에게 나타나는 영적싸움도 이들에게 있지요. 일락과 재리와 기타 욕심이 기운을 막는 현상은 당사자에게서 영적싸움으로 비췰 수 있습니다.
믿음이 심기우고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로는 중생을 말하기 어렵지 않겠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게다가 단회적이다는 것과 연속적이다는 것은 서로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단회라도 연속적 과정이 있을 수 있고 공정을 어디까지 개념적으로 정해 구분하느냐에 따라 단회라는 말도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 바보새 11.12.13. 09:00
예컨대, 자동차 엔진이 <흡기 - 압축 - 폭발 - 팽창 - 배기>라는 한 공정을 단회라고 하기도 하죠 그러나 이 단회에는 여러 연속적 과정을 포함하듯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연속적 중생이 단회적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개념적 정돈이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본문을 읽을 때 이런 개념 이해가 해석적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저 심긴 것을 개념적으로 혹은 원리나 원론적으로 중생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경험적으로 이해하긴 힘들겠지요.
┗ 바보새 11.12.13. 09:04
오히려 우리의 경험적 이해 속에서는 중생을 연속적 과정으로 보고 이해하는 것이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더 유익하리라 봅니다.
중생을 경험적으로 분류해내는 것은 결국 말씀을 들음에 대한 변별로부터 시작하리라고 봅니다. 로마서가 증거하는 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지요. 이 때 좁은 의미의 중생 곧 유효적 소명 혹은 초기 중생이 일어날텐데, 이 시기만 해도 사실상 구분이 힘듭니다.
심지어 율법이 복음으로 인도하는 기능 즉, 몽학선생의 역할을 해서 정죄를 하게 되는데, 중생자 곧 알곡과 가라지 역시 이 시기에서조차 구분이 힘듭니다. 농촌에서 벼와 피가 초기에 구별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겠지요.
┗ 바보새 11.12.13. 09:07
무슨 말이냐면, 율법의 정죄를 받으면 일반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도 회개를 하게 됩니다. 율법이 자신을 정죄하니 자기 연민과 자신에 잘못된 행동과 감정들에 대한 죄책감이 불러 일으켜지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은혜라 흔히 말하는 경험도 합니다. 흔히 카타르시스라고 하죠. 회개기도를 장시간 하면 일종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죄의식이 가벼워지는 경험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유사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이 회개하고 믿는 자 곧 중생자로 얼마든지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하는 회개의 내용을 보면 금세 구분이 되리라 봅니다. 예컨대, 간음이나 살인 혹은 도적질은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 반면, 4계명에 대해선 이렇다할 감흥이 없다면 우리의 회개의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 바보새 11.12.13. 09:10
다른 실례를 들자면, 한국 사회는 성적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 한국 남성의 외도는 세계 5위 안에 들기도 하더군요. 오히려 더 개방적이고 그래서 문란할 것 같은 미국 사회는 오히려 성적 죄에 대해 실수로 관대하게 용서해주기도 합니다. 도리어 부정직과 거짓은 이혼이나 정치적 매장의 이유가 되는데 오히려 우리 문화는 이에 대해 관대하죠. 이런 문화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과 자의식에 근거한 회개와 그에 따른 심리적 변화를 중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없으리라 봅니다.
┗ 바보새 11.12.13. 09:16
그런 점에서 사실 단회적 중생 출발점인 믿음, 곧 심기워진 습관(Infusa habitus)은 그 열매로 그 성질을 알게 됩니다.
참된 회개는 율법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 복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준에 의한 자기 내적인 혹은 자기 연민적인 정죄가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받는 정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너무나 자명한데, 우리의 회개는 참 이상한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회개가 진정이라면, 그것은 단회적일수 없고 율법이 우리에게 지적할 때마다. 자신의 정죄받음의 근간이 율법에 있음으로 율법으로부터 당하는 심리적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대체로 유사은혜들은 어떤 경험들 즉, 자신의 심리적 이유 때문에 만나는 경험들로부터 신앙이 출발합니다.
┗ 바보새 11.12.13. 09:20
영화 {밀양}의 신애가 아이가 유괴 살해 된 이후로 겪는 심적 고통과 통곡 그리고 그때 때마침 경험한 안수와 여러 종교적 경험들이 그를 신앙의 세계로 이끌지만 그의 신앙은 가짜였습니다. 그것이 가짜임을 자신의 거울과 같은 유괴범을 만나는 장면에서 드러나고 맙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것을 마치 신애가 거울을 보는 마지막 장면처럼 앵글을 연출합니다. 마지막 장면에 거울을 보던 신애의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의 앵글을 시궁창으로 가는 것처럼 용서의 환희를 말하는 유괴범의 신앙적 경험은 가짜신앙임을 비추는 신애의 거울이었습니다.
┗ 바보새 11.12.13. 09:26
아무튼 회개란 그런 점에서 율법의 정죄를 받고 절망하며 율법이 증거하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애씀을 포함하리라고 봅니다. 동시에 자신의 현재의 상태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임을 보고 갖게 되는 슬픔으로 인해 영광에 이르기를 열망하는 애씀으로 드러나리라 봅니다. 영광에 관한 이해는 따로 설명하긴 너무 길기에 약합니다.
┗ 바보새 11.12.13. 09:33
진짜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잘못한 상대방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다. 하나님께 용서 받고 은혜를 경험한 자가 자기 때문에 고통당한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 회개는 가짜이다.-존 스토트
...(댓글 중략)...
┗ holyjoy 11.12.13. 12:44
바보새 님께/ 왜 바보새님과 같은 입장을 개혁주의를 주장한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이해를 못할까요? 그 이해를 못하는 것을 좀 이해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제대로 자료를 찾아 보기만 하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을 말입니다.
정야베스 님께/ 혹시 <예수를 만난 사건과 경험>이 있으면서, 그리고 <회개>를 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런 연속적 중생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런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그것이 참 궁금합니다.^^
...(댓글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