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의 명저 <에밀>을 아시죠?
아니, <에밀>의 장 자크 루소를 아시죠?
<에밀>이란 기념비적인 교육서는 그런데 루소의 불우한 처지를 밑거름으로 탄생했답니다.
1726년 오늘, 장 자크 루소의 방황이 시작되는데,
그 방황의 직접적인 원인인 아버지의 재혼이 이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이버캐스트의 루소에 대한 소개 감상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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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가 활동했던 시기는 인간의 이성이 꽃을 피우는 계몽의 시대였다. 루소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도 계몽주의조차 비판한 사상가였다. 이러한 루소에게는 ‘모순적’이라는 형용사가 항상 따라 붙는다. 그의 저작들은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서로 상반된 진술들을 남겼다. | |
그의 생애와 그가 말하는 것 사이에도 모순은 어김없이 발견된다. 모순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등장하며, 이로 인해 루소는 끝없는 방황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방황 속에서도 루소는 진실과 행복을 찾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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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어머니 쉬잔느 베르나르는 출산 후 9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루소는 아버지와 고모 쉬잔느 루소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백록>에서 루소는 이 시기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잊지 못하고 나에게서 그분의 모습을 다시 본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나를 껴안을 때마다 당신의 깊은 탄식과 발작적인 포옹에서 애정의 표시와 뒤섞인 사무치는 아쉬움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어린 루소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루소를 붙잡아 준 것은 독서였다. 루소는 시계수리공이었던 아버지가 일을 할 때마다 책을 읽었고, 책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722년에 퇴역한 프랑스 대위와 싸움을 하게 된 후 처벌을 피해 제네바를 떠나게 된 것이다. 어린 루소는 외삼촌에게 맡겨졌고, 아버지는 니옹(Lyon, Switzerland)에 정착한다. 외삼촌은 루소를 랑베르시에(Lambercier) 목사의 집에 맡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길지는 않았다. 목사의 여동생이 아끼던 빗이 부러진 채 발견 되었는데 랑베르시에 가족은 루소를 범인으로 몰았다. 루소는 자신의 결백함을 아무리 주장해도 믿어주지 않게 되는 억울한 일을 경험한 것이다. 이후 루소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재판소 서기 밑에서 필사 견습공을 하거나 조각가 아벨 뒤코맹의 집에 들어가 도제 일을 한다. 그 사이 니옹으로 도피한 아버지는 1726년 3월 5일 53세의 나이로 재혼을 한다. 14살의 루소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후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루소가 <에밀>이라는 교육론을 쓴 것은 이 시기에 자신이 겪었던 방황의 경험이 토대가 된 셈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본인 또한 그러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기이한 유전은 루소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원천이었다. 2년 뒤 루소는 본격적인 방랑을 결심한다. 1728년 3월 14일 성문 밖으로 봄나들이를 나갔던 루소가 시간이 늦어 성문이 닫혀 버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루소는 제때 안 들어왔다고 주인에게 매를 맞을까 두려워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그 길로 방황의 삶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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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마치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귀부인들, 사기꾼들, 친절한 성직자와 한심한 귀족들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이 과정에서 루소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인물은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Françoise-Louise de Warens) 부인이었다. <고백록>에서 바랑 부인과의 경험은 여러 번 상세하게 진술되어 있는데, 어머니라 부르던 바랑 부인과 시간이 흘러 갖게 된 육체관계는 루소에게 근친상간과 같은 충격을 준다.
방황하던 루소가 파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음악 악보의 필경사(筆耕士)일을 하면서부터이다. 근래 개봉된 음악 영화 중 <카핑 베토벤>과 같은 영화에서도 묘사되고 있듯이 악보를 베끼는 일은 신중함과 신속함을 요하는 직업이었다. 한편으로 루소는 당대의 계몽주의자들인 디드로, 달랑베르, 콩디야크 등과 교류를 하였다. 디드로는 달랑베르와 함께 <백과전서>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고, 루소는 음악 관련 항목을 집필하는 필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루소에 대한 연구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루소가 음악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라는 사실은 덜 지적되는 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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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젊은 세탁부였던 테레즈 라바쇠르였다. 루소는 테레즈와 관계를 맺으며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고아원에 맡겨 버렸다. 근대적 교육론인 <에밀>의 저자가 어떻게 해서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맡겨 버렸는지는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주요한 전기적 사항이다. 그 시대를 들여다보면, 파리에서 공립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라 할 수 있다. 파리 시의 통계를 보면 1740년에서 1749년 사이에 파리에서 버려진 아이들의 숫자는 3만 2917명이었고, 1750년에서 1759년 사이에 숫자는 6만 7033명에 이른다. 신생아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달랑베르와 같은 인물도 사생아로 버려진 아이였다. 하지만, <에밀>이라는 저작을 쓴 이에게 이러한 관행은 변명이 되지를 않는다. 당시 귀족들은 아들은 콜레주로, 딸은 수녀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자격미달의 가정교사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루소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이러한 관행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에밀>을 펴내자 어머니들은 육아의 바이블로 삼았다. 상류 계급의 부인들은 유모에게 수유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영향력 있는 저자가 행한 일치고는 너무나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훗날 루소는 이에 대한 죄책감과 변명을 곳곳에 남긴다. <에밀>을 통해서도 루소의 죄책감을 엿볼 수 있다. “가난한 일도 체면도 자식을 키우고 직접 교육시키는 일로부터 그를 면제 시켜줄 수 없다. 독자들이여, 그 점에 대해서는 나를 믿어도 좋다. 누구든 인간으로서의 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토록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는 자에게 예언하건대,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잘못에 대해 통한의 눈물을 쏟게 될 것이며 결코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루소의 속죄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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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루소의 일생에 대해 이처럼 상세하게 알게 된 것은 <고백록>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 같은 루소의 저작을 통해서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모순에 대해 폭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날 여전히 루소를 중요한 작가이자 사상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죄책감과 모순을 과감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삶의 모순에 대한 성찰은 루소의 전 저작을 관통하는 중요한 태도였다.
<사회계약론>을 통해 루소는 인간 존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인데, 지금은 어디에서나 사슬에 얽매여 있다.”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직접적으로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자연과 사회의 대비를 통해 이분법적인 잣대로 들이댄 것은 사실이다. 루소에게 인간의 자연적 충동은 건전하고 선량하다. 사회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장소이다. 인간은 한 때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지만 이제는 겉 꾸밈과 경쟁, 과시적 소비 속에서 살고 있다. 각종 제도는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 이러한 방식의 자연과 사회의 이해는 ‘황금시대’ 혹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의 모습을 따른다는 점에서 당대 계몽 사상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제도와 개혁을 통해 인간을 계몽시키려고 했던 볼테르를 비롯한 당대 사상가들이 보기에 루소는 낡은 가치를 부활시키는 인물처럼 보였다. | |
한편, <사회계약론>이 출간되고 두 달 뒤에 나온 <에밀> 또한 논란이 되었다. 4부에 들어있는 ‘사부아 신부의 신앙고백’이 종교계를 건드렸다. 당대의 신관을 부정하는 서술은 큰 논란을 일으키며 <에밀>에 대한 판매금지가 내려진다. 유죄 선고와 함께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루소는 스위스로 도피를 한다. 하지만, 루소의 고향 제네바에서도 <에밀>과 <사회계약론>의 판매 금지가 이뤄지면서 그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1770년에 탈고되었지만 사후에 출간된 <고백록>은 루소를 둘러싼 다양한 추문과 음모에 대한 스스로의 항변이자 자신의 삶 전체를 폭로함으로써 진실성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물론, 이 저작의 목적이 자신의 비방자에 대항해 자신의 인생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음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애정을 기울여 보면 벌거벗은 자신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작품은 더욱 진실하게 된다는 루소의 태도야말로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루소는 끝없이 질문한다. “인간의 일반적 운명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행복해지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그들 내부에서 느낀다. 그런 욕구 때문에 그들은 매 순간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들은 왜 행복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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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출신의 인문학자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루소에 관한 소책자인 <덧없는 행복>에서 루소의 세계를 세 가지로 해부한다. 루소는 사회와 개인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갈림길을 가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한 관심사이다. 시민의 길과 개인의 길은 동시에 가기 힘든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토도로프는 개인의 길을 좀 더 세분화하여 루소에게는 인간에게 열린 제 3의 길에 대한 탐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루소 스스로 항상 그 길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그가 전적으로 권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 길은 ‘도덕적 개인’의 삶이다. “도덕적 개인은 사회 속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에 완전히 종속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도덕적 개인이 자신의 보편적 정신, 즉 자신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이로부터 루소 특유의 태도가 등장한다. 인간들이 이루는 관계의 어려움과 끝없는 인정 욕구는 인간이라는 모순된 존재와 나약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에밀>을 통해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바로 그 비참함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처럼 우리 자신의 나약함으로부터 우리의 덧없는 행복은 생겨난다.” 루소의 생애만큼, 루소의 저작만큼 인간의 덧없는 행복에 대한 통찰과 상념을 보여주는 경우가 또 있을까. 우리는 루소의 생애가 모순됐다고 단순히 비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온 몸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살다간,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또한, 나약함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지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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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분열된 영혼>(이용철 지음, 태학사, 2006)은 <고백록>을 주로 인용하면서 루소의 삶과 사상을 재구성한다. 루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윤곽을 그려보기에 좋은 저작이다.
<에밀>(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한길사)은 국내에 있는 다양한 역본 중에 가독성이 가장 높고 유려한 번역이 돋보인다. 루소가 만든 가상의 아이 ‘에밀’은 루소의 자아와 세계가 투영된 일종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다. 꽤 두툼한 분량의 저작이지만 아이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루소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육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을 웅변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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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행복>(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고봉만 옮김, 문학과 지성사)은 루소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소책자이다. ‘루소 사상의 현대성에 관한 시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으며, 인문학자로서의 루소에 관한 여러 견해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