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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은 한문漢文으로 소설小說을 썼지만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은 우리나라 문학에 새롭게 유파流波를 형성하며, 한 시대를 빛 낸 걸작傑作들이다. |
마장전馬駔傳
소나 말 같은 짐승을 매매할 때 중간에서 흥정 붙이는 인물을 우리말로 ‘거간꾼’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손바닥을 치며, 손가락으로 어떤 암호를 표시하면, 중국 춘추전국 시대 때 관중管仲이 진晉나라를 패국覇國으로 만든 것이나, 6국의 패왕들을 웃겼다 울렸다 한 유세객遊說客 소진蘇秦이 닭이나 개나 말의 피를 뽑아 맹세하며 한 약속을 모든 제후들이 믿은 것처럼, 사람들은 그 거간꾼의 말을 믿는다.
이는 안 챙겨줄 것 같은 기미만 보여도, 손가락에 낀 반지를 뽑아 던진다든가 수건을 찢는다든가 하면서 자신의 서러운 마음을 내보이면서, 벽을 향해 획 돌아앉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껴 울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애원하는 첩妾과 다를 것 없다. 또 자신의 간과 쓸개까지 꺼내 보여주겠다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붙잡고 맹세를 거듭하여,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드러내 보이려는 행동과도 같다.
그러나 그 거간꾼들이 콧마루를 경계로 부채를 세워서, 한 쪽 눈으로는 이쪽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또 다른 쪽 눈으로는 저쪽 사람에게 다른 신호를 보내면서 자신의 생각을 믿게 하려는 치졸한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곧 달콤하게 말하는 한편 협박의 말도 섞어가며 자신의 말이 진정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강한 자를 포섭하여 약한 자를 제압하고, 합쳐진 세력은 이간질하여 흩어 버리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관중 같은 패권주의자覇權主義者나 소진 같은 유세객이 벌이는 권모술수와 다를 바 없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옛날에 병을 앓는 사람이 의원에게 약을 지어 와서 아내에게 그 약을 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달여 온 약의 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성의가 부족함을 나무란 뒤에 약 달이는 일을 첩에게 맡겼다. 그랬더니 첩이 달여 온 약은 늘 그 양이 같았다. 그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면서, 첩이 약을 어떻게 달이는지 눈여겨보았더니, 첩은 약을 달인 뒤에 약의 양을 살펴보고, 양이 많을 때에는 쏟아 내고 모자라면 물을 더 보태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일 경우가 많다. 더욱이 비밀이라고 하면서 당부하며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깊이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정이 깊으니 얕으니 하고 떠드는 것 또한 믿을 수 있는 친구끼리 할 말이 아니다.
송욱宋旭과 조탑타趙闒拖 그리고 장덕홍張德弘, 이 세 사람의 거지가 서울의 광통교廣通橋 위에서 세상 사람들의 교제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조탑타가 말하였다. “어느 날 아침 쪽박을 두들기며 밥을 빌러 서울 거리로 들어가서 포전布廛(옷감 가게)에 들어갔더니, 어떤 손님이 그 가게에 들어와서 옷감을 골라 들고 혓바닥으로 핥아 보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비춰 보기도 하더니, 그 값에 대하여서는 주인과 손님이 서로 먼저 불러 보라고 미루지 뭔가. 조금 뒤에 두 사람은 옷감은 팽개쳐 버리고, 가게 주인은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아침 해에 비쳐 있는 구름을 향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손님은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지 않겠나?”
“그게 바로 요즈음 사람들이 교제하는 모습일세. 요즈음 사람들 교제하는 도리를 통 모르겠다니까”
송욱이 자신을 뽐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곁에 있던 장덕홍이 말을 거들었다.
“꼭두각시가 휘장을 내리는 것은 뒤에서 줄을 잡아당기기 때문일세”
“그게 요즘 사람들의 교제하는 실체라니까. 교제하는 도리는 그것이 아니라고!”
송욱이 또 단호히 대답하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훌륭한 사람은 교제하는 도리가 세 가지가 있고, 그 교제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다네. 사실 나는 그 중에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도록 친구 하나도 사귀지 못하였지만 말이야. 그러나 그 도리만은 내 일찍이 들어서 잘 안다네. 그것은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에 술잔을 잡고 마실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거야”
장덕홍이 말하였다.
“옛날 경서에 씌어 있지 않은가? ‘학 한 마리가 깊숙한 곳에서 울면 멀리 있던 새끼가 그 소리에 화답한다’고. 그리고 ‘내가 좋은 벼슬자리에 앉으면 나와 너는 서로 얽혀서 산다’고 말이야. 바로 이것을 두고 ‘교제하는 도리’라고 하는 모양이야”
송욱이 기쁜 표정으로 말하였다.
“너야말로 벗과 교제하는 도리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네. 내가 조금 전에 진실한 교제에 대해 말하였더니, 너는 거기에서 두 가지의 면을 이해하였단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따라가려고 하는 형세이고, 계획한 것은 명분과 이익이야. 술잔이 입술과 함께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팔이 안으로 굽어서 입으로 가게 하는 것은 서로가 따라가려고 하는 형세이고, 새끼가 어미 학의 울음에 화답하는 것은 형식적인 명분 때문에서가 아닐세. 그리고 좋은 벼슬을 가진다는 것은 이익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을 따르는 자가 많으면 그 형세는 분할되고, 그것을 계획하는 자가 많으면 명분과 이익에 있어서 좋은 결과가 없다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형세와 명분과 이익, 이 세 가지 교제 도리에 대하여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여기에 대하여 은유법을 써서 자네에게 말하였는데, 자네는 그것을 이미 깨달았네 그려. 자네가 세상 사람들과 사귀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칭찬하지 않고, 그 착한 일을 한 결과에 대해서만 칭찬한다면, 그 사람이 일을 하는 데 쏟은 성의가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일세. 또 그 사람의 모자라는 점을 미연에 깨우쳐 주지 않고 실행 과정에서 깨우쳐 주면, 그를 무색하게 하여 그와는 교제가 끊어지고 말 것일세.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가서 어떤 사람을 제일이라고 추켜올리지 말게. 제일이라고 추켜올리면, 그 자리에서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되므로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네. 그러므로 교제를 하는 데 있어서도 처신하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지. 곧 어떤 사람을 칭찬하려거든 모자라는 점을 나타내어 꾸짖을 것이고, 그에게 기쁜 마음을 보이려거든 성난 얼굴로 그 사실을 밝히게나.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거든 뜻을 확고하게 가지고 그것을 관찰할 것이고, 몸가짐은 수줍은 듯이 하게. 또 그 사람에게 나를 믿게 하려거든 어떤 의문점을 만들어 놓았다가 그것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게나. 대체로 열사라고 하는 이들은 비분강개하기를 잘하고, 미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눈물이 많다네. 그리하여 영웅이라고 일컫는 열사나, 눈물을 잘 흘리는 미인은 사람을 잘 감동시키지. 이 다섯 가지 술책은 출세한 사람들의 숨겨 놓은 비방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도리라는 게야”
조탑타가 장덕홍에게 말하였다.
“저 송군의 말은 고리타분하고 난해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
장덕홍이 대답하였다.
“자네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어떤 사람이 잘한 것을 추켜올리려고 반대로 꾸짖는다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칭찬이 되는 것일세. 대개 노여움은 사랑 속에서 나오고, 인정은 꾸중 속에서 싹트는 것일세. 그리하여 자기 집안 식구가 밉지 않지만 때때로 나무라는 것이야. 곧 이미 친해진 사람은 멀리해도 더욱 친해지고, 이미 신용하는 사람은 의심을 해도 더욱 믿게 되는 것이야. 술이 취해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지만, 둘이서 말없이 서로 바라보며 눈으로 슬픈 생각을 주고받는다면, 이 역시 감동스러운 장면이 아닌가? 이것으로 볼 때에 사람과의 교제는 서로를 알아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기쁨을 주는 것은 서로를 감동시키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지. 그런데 편협한 자의 노여움을 푼다든지 사나운 자의 원한을 풀어 주는 데 있어서는 눈물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사귈 때에 가끔씩 울고 싶기는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단 말이야. 그래서 31년 동안 온 나라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아직까지 친구 하나 얻지 못하였네”
조탑타가 말하였다.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의리로써 벗을 사귀었다면 가능하지 않았겠나?”
장덕홍이 조탑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욕하였다.
“에이, 시원찮은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자네, 내 말을 들어 보게나. 가난한 자는 공연히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의리만 가지면 무엇이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저 높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곡식이 비처럼 쏟아지기를 기다리고, 사람들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공연히 목을 석 자나 빼고 누가 무엇을 가져다주지나 않나 하고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반대로 재물을 많이 가진 자는 인색하다는 소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네. 이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을 단념하도록 하기 위함일세. 결국 신분이 낮은 사람은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감내한다네. 왜 그런가 하면, 물을 건널 때에 다 낡은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쯤은 달게 감내하는 것과 같은 거야. 그러나 귀한 자는 수레를 타고도 가죽신에 덧버선을 씌워 진흙이 묻을까 조심한다네. 이와 같이 신발 바닥까지 아끼는데 자신의 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나? 그래서 충성이니 의리니 하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자나 지키는 일이지 부자와 귀한 신분의 사람에게는 논의의 대상도 못된다네”
조탑타는 그 말을 듣자 서글픈 얼굴빛을 하고 말하였다.
“이봐, 나는 차라리 이 세상에 친구를 못 사귈지언정 그 따위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는 하지 않겠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쓰고 잇던 갓을 부수고 옷을 찢은 뒤에, 얼굴에 흙을 바르고 머리를 풀어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새끼줄을 허리에 메고는 노래를 부르며 저잣거리로 나갔다.(위 글은 ‘조면희, 《우리 옛글 백가지》, 1977, 현암사刊’에서 발췌, 참고, 인용, 윤문했음을 밝힙니다.)
▲ 〈마장전馬駔傳〉은 《연암집燕巖集》에 실린 박지원의 한문소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사람,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은 광통교廣通橋 인근에서 걸식하고 시장바닥에서 노래하며 돌아다니는 광인狂人으로 설정되어있다. 이들 세 사람은 서로 간에 참된 우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군자, 양반들의 대인관계를 깊게 논란한 끝에, 작위적인 술수와 출세를 위한 고단수의 사교술임을 간파하고 ‘군자의 사귐’이란 것이 ‘말 거간꾼의 술수(馬駔之術)’와 다름없다는 의미로 〈마장전〉이란 제목을 붙여 풍자소설로 내놓았다.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옛사람이 이르기를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시경》에 죽은 남편을 위하여 한평생 시집가지 않겠다고 노래한 〈백주栢舟〉도 바로 이러한 내용이다.
그런데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을 높은 벼슬에 임명하지 않겠다고 한 우리나라 국법이, 벼슬 자리에 오를 자격도 없는 하찮은 서민들까지 규제하기 위한 규정이겠는가? 그렇건만 조선이 개국한 지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 동안 그 교육에 깊이 교화된 우리나라 여자들은 신분이나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남편이 죽으면 한평생 과부로 늙는 것이 풍속으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옛사람들이 열녀라고 칭찬하였지만, 오늘날은 과부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저 시골구석의 젊은 과부들은 그 부모들이 수절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자손이 벼슬길에 오를 만한 신분도 아닌데 절개를 지키며 홀어미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기도 하며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을 그들은 마치 좋은 세상에라도 가는 듯이 잘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사람을 진정한 열녀라고 하겠지만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옛날 높은 벼슬에 오른 형제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의 벼슬자리의 승진을 막자고 의논하였다. 그들의 어머니가 이야기를 듣고 말을 거들었다.
“얘들아!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의 승진을 막으려고 하느냐?”
“그 어머니가 과부인데 그 행실에 대한 소문이 좋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놀란 듯이 말하였다.
“아니, 안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고 떠든다더냐?”
“풍문이 그러합니다”
“풍문이란 글자 그대로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이다. 바람이라는 것은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모양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바람은 공중에서 일어나 만물을 흔든다. 마찬가지로 풍문도 아무 근거도 없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흔들어 움직이게 한다. 그렇거늘 너희는 왜 근거도 없는 풍문을 가지고 그 사람의 앞길을 막으려고 하느냐? 게다가 너희는 과부인 나의 자식들이 아니냐? 과부의 자식이 과부의 처지를 왜 그렇게 몰라주느냐?”
그리고 그 여자는 품속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어 놓았다.
“이 동전의 테두리 무늬가 보이느냐?”
“안 보입니다”
“거기 새겨진 문자는 보이느냐?”
“안 보입니다”
어머니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 무늬는 내가 지난 10년 동안 하도 만져서 닳아 없어진 것이다. 이것은 너희 어미를 죽음의 충동으로부터 지켜 준 물건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혈기는 음양의 이치에 의하여 타고난 것이며, 감정과 욕망은 그 혈기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은 홀로 있을 때 많아지고 고민은 그러한 생각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혈기가 왕성할 때면 과부라고 어찌 감정이 없겠느냐? 등불의 그림자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길고 긴 밤을 지새울 때, 처마 끝에서 처량하게 들려오는 낙수물 소리나, 달 밝은 창가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들어 보아라. 게다가 저 멀리 하늘가에 외로운 기러기가 끼룩끼룩 울고 지나가기라도 할 때면, 처량한 이 신세를 누구한테 하소연하겠느냐? 곁에 누워 자는 어린 계집종은 속도 모르고 코 골며 잠에 곯아떨어져 있을 때,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동전을 꺼내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린단다. 그러면 그 동전은 평평한 방바닥을 잘도 굴러가다가 구석진 곳을 만나면 쓰러지지. 그러면 나는 그 동전을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아서 다시 굴린단다. 하룻밤 사이에 대여섯 번을 굴리고 나면 날이 새지. 이렇게 10년을 보내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동전 굴리는 횟수가 점점 적어지더구나. 나중에는 5일에 한 번 또는 10일에 한 번 정도 굴렸는데, 이제 나이 먹고 노쇠하여지니 동전 굴리는 일이 더 이상 없어졌단다. 그러나 나는 이 동전을 싸고 또 싸서 수십 년 동안을 깊이 갈무리해 두었다. 그것은 이 동전의 공로를 잊지 않고 때때로 반성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 말을 들은 아들들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그 여자가 열녀라고 하였다. 그러나 애달픈 것은 그 여자의 깨끗한 절개가 이와 같은데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그 이름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절하는 과부가 나라 전체를 놓고 볼 때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자기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켰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고는 수절했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내가 안의安義 현감縣監으로 있던 다음 해, 어느 날 밤에 청사에서 잠을 자는데 청사 밖에서 사람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한탄하는 소리도 들렸다. 아마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인데 내가 놀라 깰까봐 저희끼리 속삭이는 듯하였다. 나는 기침을 하고는 큰 소리로 물었다.
“지금 닭이 울었느냐?”
“서너 번 울었습니다”
“그런데 밖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예! 저, 통인通引으로 있는 박상효朴相孝의 질녀가 함양으로 시집갔는데, 그 남편의 삼년상三年喪인 오늘 자살을 하려고 약을 먹었다는 급보가 왔습니다. 마침 박상효가 숙직 당번이므로 영감님께 보고하지 않고 갈 수가 없어서 영감님께서 잠이 깨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가 보아라!”
나는 서둘러 그 통인을 가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 날 늦게 그 과부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길게 한숨 쉬며 한탄하였다.
“참으로 그 여자가 열녀로구나!”
나는 여러 아전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함양에서 죽은 열녀는 본래 우리 집안사람이다. 너희 중에는 그 열녀의 나이와 또 몇 살에 어느 집으로 시집갔으며 어릴 때의 행실은 어떠했는지 아는 자가 있느냐?”
아전들 중에 누군가가 말하였다.
“여자의 집안은 대대로 이 지방 출신으로 그 아비 상일相一과 어미도 일찍 죽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열아홉 살에 함양의 아전 집안인 임술증林述曾의 처가 되었는데, 술증은 본래부터 쇠약한 체질이어서 그 여인과 결혼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죽었답니다. 그러자 박씨 여인은 예절을 다하여 남편의 상을 치르고 효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셔 인근 마을사람들이 모두 그 여인의 훌륭함을 칭송하였더니 마침내 자살을 하였답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늙은 아전 한 사람이 덧붙였다.
“그 여인이 시집가기 두어 달 전에 남편 될 사람의 병이 골수에 깊이 박혀서 오래 살 가망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조부모가 결혼을 물리자고 했지만 그 여인이 응낙하지 않았답니다. 그 뒤 결혼날짜가 임박하여 사람들이 와서 신랑감이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하자, 그 조부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였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소녀가 마른 옷은 누구의 몸에 입히기 위한 옷이었겠습니까. 소녀는 처음 결정한 사람의 몸에 맞는 옷을 그대로 만들겠습니다”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집안에서도 할 수 없이 그 신랑을 맞이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신랑 구실도 못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은 그 여인에 대하여 이상한 꿈을 꾸고는〈열부전烈婦傳〉을 지었고, 산청 현감 이면재李勉齋는 그 여인에 대한 전기문傳記文을 썼으며, 거창의 선비 신돈항愼敦恒도 그 여인의 절의와 행적을 칭송하였다.
내 지금 그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살아가면서 늘 그 주변 친척들의 동정은 얼마나 많이 들었겠으며, 또 속도 모르는 이웃 사람들의 근거 없는 입방아는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차라리 빨리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죽어서 성복成服(염하는 것)할 때에 죽지 않은 것은 장례가 남아서이고, 장례 때 죽지 않은 것은 소상과 대상이 남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로소 대상을 끝내자 남편에게 봉사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그 남편의 대상 날 유명을 달리하여 그의 처음 먹었던 마음을 이루었으니 이 어찌 열녀가 아닌가?(위 글은 ‘조면희, 《우리 옛글 백가지》, 1977, 현암사刊’에서 발췌, 참고, 인용, 윤문했음을 밝힙니다.)
▲ 연암燕巖이 안의현감安義縣監으로 가 있을 때인 만년의 작품이다. 아전 집안 출신으로 남편을 따라 자결한 가련한 여성의 죽음을 두고 전傳의 형식으로 지은 것이다. 열녀의 죽음을 보고 그 수절한 의지에 감탄하는 한편, 조선 400년 동안 수절을 권장한 나머지, 여염집 아낙네들마저도 수절을 철칙으로 삼아 청상과부로 한평생을 마친 사람이 많았음을 비판한 글.
광문자전廣文者傳
광문은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鐘樓(종로) 거리에서 빌어먹고 살았는데, 여러 거지들이 그를 두목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거지들이 밥을 빌러 나갈 때 그는 거지소굴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다른 거지는 모두 밥을 빌러 나갔으나 거지아이 하나가 몸이 몹시 아파서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 아이는 자리에 누워서 고통을 참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그를 간호하던 광문은 가까운 거리로 나가서 우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빌어다가 병든 거지아이를 먹이려고 했는데, 광문이 음식을 빌어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중에 밥을 빌어 온 거지들은 그 거지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광문이 죽였다고 생각하고는 광문을 둘러싸고 몰매를 때렸다. 광문은 매를 견뎌 내지 못하고 밤중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가 어느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의 개가 몹시 짖었다. 그는 그 집 주인에게 붙잡혀 도둑으로 몰려 새끼줄에 꽁꽁 묶였다. 광문은 애걸하였다.
“저는 도둑이 아니에요. 거지들한테 몰매를 맞고 도망 온 겁니다. 제 말을 못 믿겠거든 내일 아침에 저를 따라와 보세요”
주인은 그의 말이 순박한 것에 감동하여 그를 헛간에 재운 뒤에 새벽에 놓아 보내었다. 광문은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에 떨어진 돗자리를 하나 달라고 부탁하였다. 주인은 그에게 돗자리를 내주고는 그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 때 여러 거지들이 죽은 거지의 시체를 끌고 와서 청계천의 수표교水標橋 다리 밑에 던지고 갔다. 그것을 본 광문은 그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그 시체를 자리에 말아서 싸 가지고 둘러업더니 그것을 서교西郊(지금의 서교동)의 공동묘지로 가져가 묻어 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울면서 한편으로는 넋두리를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주인은 그를 불러 놓고 사연을 물어 보았다. 광문은 그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광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주어 갈아입게 한 뒤에 다시 그를 부잣집인 약방에 심부름꾼으로 취직을 시켜 주고, 그의 신원 보증도 서 주었다.
얼마쯤 지난 뒤에 약방 주인은 외출을 할 때쯤에는 늘 약방 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또 귀중품을 넣어 놓은 궤짝의 열쇠를 확인하곤 하였다. 그러고는 광문을 보고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곤 하였다. 광문은 주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냥 말없이 일만 부지런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약방 주인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돌아와 주인에게 말하였다.
“며칠 전에 제가 돈을 꾸러 왔었는데 마침 이숙姨叔께서 출타 중이므로 급한 김에 방에 들어가서 그냥 돈을 가져갔었습니다. 이숙께서는 혹시 그 사실을 알았습니까?”
주인은 그제야 자신이 광문을 의심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광문에게 사과하였다.
“얘야! 내가 참으로 졸장부다. 공연히 너같이 착한 사람을 의심했단다.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친지들에게 이야기하고 그 친지들은 그 말에 살을 붙여 더욱 광문의 훌륭한 점을 칭찬하니, 소문은 금세 서울의 큰 부호들이나 상인들에게까지 퍼지고, 이어서 조정에 출입하는 높은 벼슬아치들에게까지도 전해졌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일화는 양반 귀족들의 잠자리에서까지 오르내리곤 하였다.
이렇게 광문이 옛날 훌륭한 사람들보다 더 과장되게 알려지자 이제는 그를 약방에 추천해 준 주인까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음을 칭찬받게 되고, 다음으로는 그 약방 주인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 명성이 온 서울에 알려졌다.
당시에 서울에서 돈놀이를 하는 자들은 주로 머리 장식품인 옥이나 비취 또는 의복이나 그릇 종류 아니면 종이나 땅 문서를 저당 잡고 돈을 빌려 주었는데, 광문이 보증을 서 준다고 하면 채권 유무를 따지지 않고 단번에 천금을 내어 주기도 하였다.
광문의 사람됨을 따져 보면 얼굴도 매우 볼썽사납게 생겼고, 사람을 사로잡을 만한 말재주도 없었다. 게다가 입은 커서 주먹이 두 개씩은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그는 특히 마당놀이인 만석曼碩놀이(가면극 같은 놀이의 일종)나 철괴鐵拐춤을 잘 추었다. 당시 아이들이 서로 헐뜯고 욕할 때 “얘, 네 형이 달문達文이지” 하곤 했는데, 달문이는 곧 광문의 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은 길을 가다가 싸움하는 이를 만나면, 자기도 옷을 벗어부치고 함께 달려들어 싸울 듯 하다가는 갑자기 벙어리처럼 뭐라고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땅에 엎드려 금을 그어 놓고 무엇인가 시비곡절을 판단하려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게 되고 싸우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어 자신도 몰래 분한 마음이 풀어져 버려 싸움이 끝난다. 또 광문은 나이 사십이 넘도록 머리를 땋고 다녔다. 사람들이 장가를 가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나같이 못생긴 사람이 어찌 장가를 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집을 마련하여 살림을 하라고 하면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부모 형제나 처, 자식도 없어요. 게다가 아침에 노래를 부르고 나갔다가 저녁이면 부잣집 문간에서 잠을 잡니다. 우리 서울에 집이 8만 채인데 내가 매일 한 집씩 옮겨 다니며 자도 내 한 평생에 그 많은 집을 다 돌아다니며 잘 수 없을 거예요”
이 때 한양에 있는 이름난 기생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광문이 소문을 내주지 않으면 유명해지지 않았다. 언젠가 서울에서도 유명한 한량들인 우림羽林의 무관들 그리고 여러 궁전의 별감別監들과 임금의 사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들이 종을 거느리고 옷소매를 휘저으며 이름난 기생 운심雲心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마루 위에 앉아 술을 따라 놓고 비파를 뜯으며 운심에게 춤을 추라고 하였다. 그러나 운심은 짐짓 사양하면서 춤을 추지 않았다.
이 때 광문이 마루 밑에서 서성거리다가 마루에 성큼 올라와 상좌에 앉았다. 광문은 옷은 남루하고 행동은 거칠었지만 그는 당당했다. 눈 꼬리에는 눈곱이 끼고 술 취한 듯한 목에서는 딸꾹질이 났다. 머리카락은 염소 털 같은데 등 쪽에 틀어 돌린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당장에 두들겨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광문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앉아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추어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운심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추었다. 드디어 온 좌석은 기쁨으로 가득 찼고 그들은 광문과 벗을 삼기로 한 뒤에 헤어졌다.(위 글은 ‘조면희, 《우리 옛글 백가지》, 1977, 현암사刊’에서 발췌, 참고, 인용, 윤문했음을 밝힙니다.)
▲ 광문이라는 거지가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자 사람들이 지나치게 그를 미화하여 마침내는 신격화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심리가 객관적인 평가보다 부화뇌동하는 경향이 있음을 풍자한 글이다.
연암燕巖의 문명의식文明意識
조선은 동양적 관념, 즉 유교儒敎, 도교道敎 등에 침잠하여 물질생활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다. 특히 노자老子의 사상은 원시촌락元始村落 공동체共同體 생활을 이상화理想化한 것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문명을 부정하고 있다. 공자孔子도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이라 하여 양量의 적음이 걱정이 아니고, 고르게 나눠먹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이같은 사상의 흐름은 농업생산력의 침체와 아울러 경제발전에 저해요소로 작용했다. 위정자들은 농본주의를 고집하며 상업, 수공업을 천시한 결과, 손바닥만 한 국토임에도 경제권역이 통일되지 못하고 고립적, 봉쇄적 자연경제체제로 지속되고 있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에 비해 생산력의 현저히 뒤처지게 된다.
허생許生이 변승업卞承業과의 대화에서 “조선은 배가 외국에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나라 안에 두루 다니지 못하여 온갖 물건이 그곳에서 생산되어 그곳에서 소비될 뿐이다.”(朝鮮 舟不通 外國 車不行城中 百物 生于其中 消于其中)라고 〈허생전許生傳〉에서 지적하고, 조선 경제의 앞날의 위기危機를 암시하고 하루속히 상업의 발전에 의한 자연경제의 타파를 강구할 것을 함축있게 이야기 한다.(이우성, 1982, 〈국문학과 실학〉, 서울대출판부 《한국의 전통사상과 문학》에서 일부 인용)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1737년(영조 13년)~1805년(순조 5년), 본관은 반남潘南, 호 연암燕巖, 실학자 홍대용에게 수학, 1777년(정조 1년)에 삼종 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에 갈 때에 그를 따라 중국에 다녀오면서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이며, 저서로 《열하일기》, 《연암집》이 있다. 정조 즉위 후 여러 차례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
1780년(정조 4) 44세 때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궁이 있는 열하熱河로 갔다. 이 과정에서 발달된 중국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것이며, 베이징, 열하, 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과 현지 주민의 생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사대부 계층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홍대용, 박제가朴劑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 내에서도 북학파를 형성하였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연암燕巖은 한문漢文으로 소설小說을 썼지만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은 우리나라 문학에 새롭게 유파流波를 형성하며, 한 시대를 빛 낸 걸작傑作들이다. |
한류漢流를 한류韓流로
연암은 기존의 시와 부, 문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썼다.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당대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키며 새로운 유파를 형성하였다.
정조正祖는 문체를 올바르게 되돌린다는 뜻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 행해지면서, 모범적인 문체는 철두철미하게 경서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의현감 부임 직후 정조는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 순정문醇正文으로 지을 것을 명하기도 했다.
연암 사후,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그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개화사상을 열어준 인물이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 김만식金晩植 등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초록한 형태로 간행하였지만,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한 때는 1910년 이후부터였다. 그의 사상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야 비로소 평가받고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최남선崔南善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간행하였고, 1916년 김택영金澤榮이 중국 에서 ‘열하일기’를 7권 3책으로 엮어 간행하기도 했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
연암은 조선의 셰익스피어
연암燕巖의 한문소설漢文小說에 등장하는 인물은 종로 거지, 떠돌이, 상점고용인, 시정잡배, 노무자 등등 당대의 서민庶民, 천민賤民 들이다. 그 외에 중인中人, 역관譯官, 거부巨富, 무변武弁출신, 불평기인不平畸人 등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연암은 소설을 통해 사대부士大夫와는 전혀 다른 의식세계意識世界를 선명하게 그려놓았다.
이 점에서 서포西浦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서포는 “한문작품漢文作品에 비하여 우리나라 말로 쓰인 글이 가치가 우월하다”고 말을 하였지만, 그의 의식세계는 그의 소설 《구운몽九雲夢》에서, 귀족적貴族的이며 고답적高踏的인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작중 인물들도 당대의 민중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이며 자기도취적인 인물들이다.
연암은 국문國文을 해독조차 못했다지만 -작품을 한문으로 썼지만- 오늘날, 연암의 문학적 가치가 더욱 우월하게 평가받는 까닭을 직시直視해야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당대에 집권층이던 학문권력자 계층에게 찍히고, 정조正祖에게 문체반정이라고 찍히고, 사후死後에도 국문학자들에 의해, 한글이 아닌 ‘한문소설漢文小說’이라고 또 내리 깎인다.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천민계급이던 농農, 공工, 상商이 알아줬고, 벼슬길에서 밀려난 실학파들과 세상을 향해 울분에 차있던 서얼庶孼이 알아줬고, 근세에 들어와 선각자들이 알아줬고, 21세기에 와서는 ‘문학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진취적 사고방식의 문학인들이 그 가치를 새삼 알아봐(?)주면서,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다. |
셰익스피어는 영어를 ‘문화언어로 정착’시킨 신조어의 달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생으로 52세의 짧은 삶을 살았다. 16세기 후반 영국은 런던을 중심으로 생활권의 변동, 사회계층의 변화, 가족관계 재편 등 산업혁명으로 인한 격변의 시기였다. 그 당시 영국의 국력은 팽창을 거듭하였는데 그 지배력의 바탕이 된 군사적 통치력과 무역을 통한 상업발달로 런던을 중심으로 도시민이 급증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로마 시대부터 서구사회에 착근되어 있던 ‘연극演劇’이 도시민의 공허한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문화적 Contents로 최적의 기능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셰익스피어의 활동무대가 늘어나고 작품활동 하기에 매우 유리한 토양이 조성되었다.
그의 천부적인 희극과 비극의 극본은 르네상스 바로 직전, 격동기의 요동치는 상황을 과감하면서도 극단적으로, 때로는 절제된 모습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작품에서 배제하는 신비주의를 지향하였다. 뿐만 아니라, 개별 캐릭터를 명확하게 탄생시켜 그들의 치열한 관계성과 인간성을 부여하였고 영국인들을 웃고 울리는 위안의 예술과 오락작품을 탄생시켰다.(《君子夢》,정동하,2016, 일부 인용 및 윤문)
라틴어와 헬레니즘 문화세력이 천 년이 넘도록 지배해 온 것을 고려해 볼 때, 사실 영국은 자신들의 언어에 대한 태생적 미천함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셰익스피어가 20대 중반부터 18년간 적절하게 영어 대본을 쏟아 낸 것을 놓치지 않고 활용하였다. 그리고 라틴어나 그리스어 계열에 더 가까웠던 경쟁국이나 지배국의 언어보다 상대적으로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신 상류층의 언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의 자존심의 실체는 ‘영어를 문화언어로 정착시킨’,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인이 세계의 문화를 이끄는 나라로 인식’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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