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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100리길의 반은 99리
3명은 수용할 수 있는 침상을 독점했으므로 편안한 밤.
그러나 "말 타면 견마(牽馬)잡히고 싶다"?
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바람막이가 부실한 코야에 불만을 품는가.
통비닐을 꺼내어 펴고 그 안에 침낭을 넣으면서.
9월 하순에 접어드는데다 비가 내리는 밤이라 여름용 침낭 만으로는 밤 한기(寒氣)의
차단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짧으나마 야간까지 차용해 걸은 거리가 35km정도에 불과한 것은 비정상이며
불명예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은 쇼류지에서 꾸물대고 양자택일에 망설이는 등 1시간 이상 낭비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보통인의 시코쿠헨로1.200km 일정에 따르면 1번 료젠지~스사키시가(市街)
400km를 17일에 소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17일째에 그 코압에 와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일체의 불안은 내려놓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전기점을 무난히
통과한 날로 기억될 오늘이다.
객지의 빗소리는 수심의 전령.
가감 없이 귓전을 파고드는 빗소리에 뒤적대기 십상인 밤인데도 많이 먹고 잘 잤다.
벗어나기 쉽지 않으리라 여겼던 무거운 짐을 예상보다 빨리 벗어버림으로서 홀가분
해진 기분이라 그랬을까.
참으로 무모한 짓인데 어김 없이 맞아떨어지니까 그 무모를 계속하는 것이다.
워낙 든든한 뒷배라 믿고.
6시 이전에 기상했으면서도 1시간반이나 꾸물댔다.
밤에 폰의 충전을 깜박 잊었기 때문에 충전하느라 그랬지만 뒤쳐진 거리를 따라잡는
일에만 일념으로 매진하고 있던(어제까지) 때도 그같은 이유로 늑장을 부렸을까.
일본청년 니시오와 함께 한 8일동안에 뒤쳐진 거리를 나홀로 8일만인 어제 원상으로
돌려 놓으므로서 여유가 생긴 것이 늑장의 이유일 것이다.
아니다.
계속 내리고 있는 아침 비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이 코야에 붙들린 더 큰 이유가 있다.
코야의 판자 벽에 붙어있는 "100리의 길도 99리를 반으로 친다"(100里の道も 99里を半
ばとする)는 한 줄 일본 격언에 붙들린 것이다.
100리 길의 반은 50리가 아니고 1리 모자라는 99리라는 일본인.
걸어야 할 남은 1리(100분의1)를 이미 걸어온 99리(100분의99)와 동등하게 반(2분의
1)으로 보는 그들과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는 어떻게 다른가.
"시작이 반이다"를 숫자로 바꾸면 100분의 1이 2분의 1이 되며, 그러므로 한국의 100
분의 1과 일본의 100분의 99가 동일한 2분의 1이다.
그들은 99%를 성공했다 해도 완벽한 성공인 100% 달성을 위해서는 마무리 1%를 50
%정도로 중요시 한다.
남은 1% 때문에 99%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성도를 높인다.
이에 반해 우리는 "시작이 반이다".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일을 끝마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그래서,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를 합성해 최초의 성공, 1%를 50%로 부풀린다.
50%는 당연히 100%로 업(up)한다.
그리고 축배부터 듦으로서 진짜 100%의 완성도는 늘 형편 없고 하자 투성이가 된다.
다른 수치로 바꿔보자.
100원을 목표로 일을 한다.
99원을 벌었지만 1원을 채우지 못하면 100원은 없다.
그래서 1원은 99원 만큼이나 중요하므로 남은 1원을 위해 올인한다.
이와 달리 1원을 50원으로 착각, 50원만 벌면 100원 목표를 달성한다고 믿는다면?
서구인들은 동양3국인(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실토한다.
까미노에서 그들은 한국인에게도 하포네스(일본인), 치노(중국인)냐고 묻는다.
그들에게 생소한 한국보다 일본과 중국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헷갈리는데 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본질적 상이점은 외모와 달리 이 격언에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대조되는 일본인의 신사신앙과 한국인의 단군신앙
폰 배터리의 충전이 끝났는데도 떠나지 못하게 붙들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
남아있는 800여km에서 두고두고 생각하기로 하고 37.8km 이와모토지를 향해 일어선
시각은 아침 7시 20분.
시코쿠헨로 1.200km의 3분의 1을 넘기는 지점에서 내 헨로상 50일의 본전은 충분히
되겠다 생각되는 주제(격언)의 등장이야 말로 예상도 기대도 전혀 하지 못한 일이다.
야숙 리스트에 따르면 당분간은 츠야도가 없다.
휴게소 또는 코야, 비 가릴 지붕 밑 등 노숙이 불가피하므로 특정한 목표지도 없다.
그럼에도 이와모토지를 목표로 한 것은 느슨해지려는 기분을 다잡기 위해서 였다.
어제의 거리 이상인데 도중에 탐방할 영장이 없으므로 해 안의 당도가 용이할 것이다.
비내리는 이른 아침에 눈 앞의 오시오카(押岡) 마을에서 한 영감이 도로로 나왔다.
한 쪽 살이 부러진 우산을 받고 마주오더니 도로 우편의 야산으로 올라가는 영감.
금줄이 달린 토리이(鳥居/日本神社의 기둥문) 아래 자그마한 바위에 절을 하며 어떤
주문을 읊는 듯 하더니 내려와 마을로 돌아갔다.
허술한 나무 토리이 외에는 아무 시설도 없는 것으로 보아 개인의 진자(神社)인 듯.
아무 시설도 없고 엉성하게 세운 크고 작은 토리이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를 맞으면서도 이같은 행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 일본인의 생활이라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신도(神道)신앙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식민통치하던 한반도에도 진자를 무수히 짓고 참배를 강요했을 정도로.
불교가 진자와 타협하고 나라시대 이후 신불습합(習合)이 시작되었으며 시코쿠88절
중에도 진자의 별당사로 출발한 사찰들도 있지 않은가.
일본 인구의 95%가 불교도라 하지만 그들에게 불교와 토착종교인 신도는 구분되지
않는 습합신앙이기 때문에 그들이 곧 신도신자도 된다.
수입종교가 토착종교를 배격하는 우리 민족의 미약한 단군신앙과 대조된다.
참배하고 내려오는 영감을 다카에 담으려다 21번 타이류지 길에서 벌어진 소동(메뉴
<시코쿠헨로>9번글 참조)이 생각나 포기했다.
헨로미치(23번도로)는 시코쿠에서는 큰 공해공장으로 분류될 시멘트공장(住友大阪
시멘트 高知공장)을 왼쪽에 두고 전진한다.
곧 오시오카교와 스사키항으로 흐르는 사쿠라강(櫻川)의 다이보교(大峰橋)를 건너서
마루나카, K's덴키, 쿠로시오시장 등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인 대형 매장들도 지난다.
고가자동차도로를 비롯하여 몇개의 도로와 JR도산선(土讚線) 철도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길처럼 헨로미치도 혼란스러운 지역.
보행자 통행금지를 반칙하며 국도56번의 미타라이가와대교(御手洗川)를 건넌데 이어
터널(城山tunnel)을 통과했다.(高架로 大間津波水門을 지난다)
스사키시 다운타운에서는 카와우소(川獺/수달) 터널을 통과해 노변의 미치노에키(道
の驛/須崎市下分甲)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카와우소노里(川獺の里/수달의 마을)라는 국민마트(?)다.
이 지역이 수달의 집단 서식지인가.
그렇다면 스사키시는 청정지역이다.
수달은 청정1급수 지역에서 서식하는 동물이니까.
미치노에키 맞은편의 소란한 스사키중학교 운동장.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 훈련중인 야구팀이 지르는 고함이다.
운동경기 중에서 야구가 유난히 시크럽다.
객관적 전력에서 일본야구가 아직은 우리보다 위라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현실인데
이 꿈나무들이 숫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다는 것이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하기모리의 권고를 따르다
점심용 도시락을 산 후 신죠강(新莊川橋)을 건넜다.
아와(安和)까지는 카도야(角谷)터널을 비롯해 거푸 3개(?)의 터널을 지나며 나카무라
카이도(中村街道)로 명명된 56번국도를 타고 간다.
왼쪽에 스사키만(灣)을 끼고.
헨로미치는 아와 ~ 쿠례(久禮) 구간도 둘로 나뉜다.
행정구역도 스사키시에서 타카오카군 나카토사초(高岡郡中佐町)로 바뀐다.
야키자카고개(燒坂峠)를 넘어가는 험한 도보로와 1km의 긴 야키자카터널을 통과하는
56번국도로 나뉘는데 이 구간에서도 하기모리의 압력(?)이 통했나.
후자를 택했으니까.
쿠레항(港)이 있는 토사쿠레에서 또 두 길로 나누어진다.
해발409m를 넘는 산길로 지렁이가 지나간 자국처럼 구불구불하다 하여 소에미미즈
헨로미치(添蚯蚓遍路道)와 해발287m 산길 오사카 헨로미치(大坂遍路道)로.
이 택일의 길에서도 후자를 택하라는 하기모리의 권고는 더욱 강력하게 작용했으며
결국 그의 권고대로 했으니까.
오사카타니강(大坂谷川)을 따라 조성된(昭和29년) 벚나무 가로수길을 따라가 산록의
오사카헨로휴게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스사키 미치노에키에서 사가지고 온 도시락인데 조금 전에 마루나카 쿠레점에서 산
맥주 1캔이 도시락 맛을 배가시켜주는 듯 했다.
나나코고개(七子峠)로 오르는 오사카헨로미치 산길에 너른 포장 차도가 있고 영업용
중형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는데 산속에 마을이 있을 줄이야.
이 지역이 에도시대부터 죽피리를 만드는 쿠로치쿠(黑竹/烏竹) 산지로 유명했단다.
관상, 꽃바구니, 건축장식, 정원 조성 등 일상생활에 많이 활용되고 있는 흑죽 마을로.
마을을 지나서 임도를 따르면 얼마 가지 않아 헨로휴게소가 있다.
나나코고개로 오르는 헨로미치의 마지막 휴게소다.
이후 1km 남짓 되는 고갯마루까지는 된비알이며 이조시대의 10대로 중 1인 봉화대로
(奉化大路)의 옛길 죽령고개 마지막 부분과 흡사하다.
비가오면 폭포처럼 물이 흘러 통행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단다.
그보다 단애에 다름 아닌 이 길 자체의 안전도가 더 큰 문제다
이미 언급했거니와 유비무환에 철저한 일본인들이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기를 열망하면서도 왜 방치하고 있는지.
두 길 중에서는 부드러운 편이라 하나 늙은이에게는 많이 까다로운 길로 오르는 힘은
체력이 아니라 노회(老獪)다.
거침 없이 잘 오르는 69세의 한 남(男/재회했을 때 확인)이 나를 추월해 나갔다.
오늘 만난 유일한 도보헨로상인데 부럽다기 보다 내가 늙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그 나이 때는 30kg 배낭을 메고 백두대간과 9정맥을 누볐음을 상기하면.
지칠 줄 모르는 토끼에서 거북으로 절로 전환되었으니까.
(카게노에서 쉬고있는 그와 재회한 후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하다가 오늘 마감한 이와
모토지에는 내가 먼저 당도했으니까)
이것이 순리인데 무얼 탓하겠는가.
1
두 산길이 합류하고 56번국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는 작은 암자(海月庵)가 있다.
쿠카이(空海/코보대사)가 수행중 쿠레만(灣) 위에 떠있는 달을 감상했다는 암자로 잘
보이는 고갯마루로 이전했단다.
시야는 좋은 편이 아니지만 전망대도 있고 드라이브인 나나코차야(七子茶屋)가 있는
정상을 넘으면 행정구역은 나카토사초(中土佐町)에서 시만토초(四万十町)로 바뀐다.
잊혀지지 않을 젊은 오셋타이 여인
이와모토지 13.8km 안내판을 지난 시각은 13시 59분.
37.8km를 가리킨 스사키헨로코야에서 24km를 왔다.
시속4km가 되지 못하는 이 기록은 해 안에 37번 이와모토지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더
분발해야 함을 말해준다.
목표지는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막 길에 들었다.
산자락 풀숲길이며 농로, 마을길이기도 한 포장길을 1시간쯤 걸어 도착한 휴게소.
옆에 시만토 타운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높이 10m, 나이 350년의 야부쯔바키(雪椿/
동백)가 있다 해서 야부쯔바키 정자(四阿雪椿)라 했나.
이 이름(雪椿)에 유래가 따로 있단다.
이 곳은 에도시대인 간에이 때(寬永/1624~1644/) 카게노신덴(影野新田)의 개척자로
지토(地頭)인 이케우치(池內嘉左衛門)의 집터(館屋敷)였다.
딸 유키(雪)가 이곳 절(影野西木寺)의 젊은 승려(順安)와 연인 사이임을 알게 된 이케
우치는 승려를 환속, 부부가 되게 하고 지토직(職)을 물려줘 가문을 이어가게 했다.
마을인들을 사랑한 부부가 후사 없이 세상을 뜬 후 마을인들은 유키가 생전에 좋아한
동백나무(椿)를 묘소에 심고 해마다 부부를 공양해 왔다.
이 동백나무가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두 사람의 영혼을
달래 주고 있단다.
이와모토지를 10km 남겨둔 지점의 이 휴게소에 잠시 머문 뒤 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헨로미치는 이와모토지 한하고 JR토산선과 거의 짝하는 56번국도가 되어 있다.
미치노에키 아구리쿠보카와(道の驛 あぐり窪川)의 휴게소가 눈에 들었으나 아직 이른
시각이라는 이유로 걷기를 이어갔다.
이와모토지까지 약 4km를 남겨놓고 멈출 수 있는가.
이제부터는 잠자리가 될 만한 곳을 모두 눈에 담고 걷는데 쿠보카와역도 그 중 하나.
여의치 않을 때는 되돌아 가도 될 거리(1km미만)니까.
이와모토지에 당도한 시각은 17시 30분쯤.
의외로 빨리, 그리고 쉽게 도착했다.
해발210m지대라 다시 올라야 할 것으로 각오했는데 착각이었다.
해발287m나나코고개에서 조금 내려왔을 뿐 16km 이상, 헨로미치에서 유일한 장거리
고지대인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무리 중인 납경소의 노녀(老女)에게 츠야도를 물었다.
야숙리스트에 없기 때문에 단지 습관적 물음이었을 것인데 백지를 내미는 노녀.
츠야도가 있음을 의미하며 내 기록을 들여다 보던 그녀는 납경소는 물론 사찰 밖으로
나와 도로변의 한 작은 건물까지 한참을 걸었다.
셔터문을 열고 나를 안내한 곳은 32번 젠지부지처럼 공양물품들의 창고를 헨로상에게
츠야도로 제공하는 듯.
저녁식사는 빵이라는 내 대답에 늙은이는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며 식당 위치를 알려
주고 가는 것은 연배의식에 기인한 관심인가.
까미노의 알베르게처럼 2층 벙크(bunk)를 놓으면 여럿을 수용할 수 있겠는데 누구든,
선착자 1인만이 주인이 되는 곳
하긴, 어쩌다 활용될 뿐인데 벙크가 왜 필요하겠는가.
아무튼 2014년 9월 20일의 주인이 된 내가 당장 해야할 유일한 일은 모기향의 구입.
잠자리를 정비한 후 코일형 모기향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
서민층 밀집지역인 듯한 주택가 차로를 걷다가 미닫이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착한 소녀 이미지인 젊은 여인에게 마트의 위치를 물었다.
알려준 대로 가고 있는 나를 뒤에서 달려오며 불러세우려는 앳된 여인의 목소리.
다가온 작고 예쁘장하며 수줍어 하는 여인은 조금 전에 내게 길을 알려준 바로 그녀.
"何を買いに行きますか"(나니오 카이니 이키마스까/뭘 사러 가세요?)
돌발적인 질문에 당황한 내 대답'카토리센코'(蚊取り線香/모기향)에 그녀는 자기에게
있다며, 그럼 가지 않아도 되느냐고 다시 물어왔다.
자기 것을 사면 상거가 꽤 되는 "마트까지 갈 필요 없지 않으냐"로 이해한 나는 그녀를
따라갔는데 일본 최고품 10코일 들이 2박스를 주면서도 돈 받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오셋타이(お接待)라는 것.
낮에도 국도변의 한 집에서 한 노파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와 100엔동전을
반 강제로 받게 하고 들어갔는데.
오셋타이는 주로 연만한 이들의 정서다.
오랜 세월 전통으로 정착되었고 신앙행위에 다름 아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오셋타이
정서는 커녕 개념도 희박한 것이 현실이건만 애티 나는 20대 젊은 여인이?
헨로상 장구가 전혀 없는 맨몸 늙은이가 헨로상인 것을 어떻게 알아봤을까.
손녀뻘 나이 여인의 갸륵한 마음씨라 생각되어 하나만 가지고 와서 피웠다.
그 향에 취해 흐뭇한 기분으로 저녁식사 중일 때 누군가 내리닫힌 셔터문을 두드렸다.
소녀 같은 예쁘장한 그녀를 보고 또 놀랐다.
여관과 민숙집들이 있는데 내가 츠야도에 묵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미행이라도 했나.
모기향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고 성이 차지 않았는가.
3끼분이 넘는 3종의 식빵, 초와 라이터를 들고 와서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내 주식이 빵이라 짧은 시일에도 시코쿠의 빵 맛을 대충 알게 되었는데 시코쿠 최고의
식빵이며 전기 없는 곳과 모기향 피울 때 필요할 것 같아 초와 라이터를 가져왔단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수줍어하며 신상을 물을 기회도 주지 않고 가버린 여인.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오셋타이인가.
빵은 이틀에 걸쳐 먹었지만 모기향은 아끼다가 딴 것을 사서 쓰고 가지고 귀국했다.
집에서 모기 퇴치용으로 태우는 것이 아니고 방향제로 사용중이며 그녀의 향기로운
마음씨를 상기하고 있다.
이 향이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에서 코일 모기향을 태울
때마다 착하고도 고운, 그러나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향기를 음미할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