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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羽仙 조병렬
<대구문학 격월평 2014년 3·4월호>
시대의 흐름과 수필의 기능
조 병 렬
1. 표현의 시대 - ‘나도 작가다’
현대는 표현의 시대이다. 이제 작가만이 글을 쓰는 시대가 아니다. 누구나 제 생각을 글로 표현하며 생활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편리하게 제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고 있다.
‘나도 가수다’처럼 ‘나도 작가다’란 말도 듣기 좋은 말이다. 100세 시대에 삶의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며 행복을 쌓아가듯이, 글쓰기도 고상하고 지적인 취미생활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나의 글쓰기도 취미생활일 뿐이다.”라고 했다가, 작가로서 자부심이 강한 어느 분으로부터 크게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문맹의 할머니가 한글을 깨우치자마자 시집을 냈다고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주변 사람이 책을 펴냈다는 소식에도 많이 놀라지 않는다. 바야흐로 글쓰기의 시대, 특히 수필 쓰기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생활수필’이란 말이 생겨나고, 이 말이 어느덧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 작가의 개념도 글쓰기의 원리도 바뀌어야 할까?
작가는 어떤 문학 갈래이든 원론적인 문학이론을 알아야 함은 당연하다. 수필가는 수필문학의 특성을 알아야 수필이 독자에게 주는 문학적 감동과 미적 즐거움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의 특성은 시나 소설과는 다르다. 시의 기본 요소가 운율과 어조이고 소설이 인물과 사건이라면, 수필은 제재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이 ‘관조의 문학’, ‘자기 성찰의 문학’, ‘지성의 문학’, ‘주제의 문학’이라고 하는 말도 수필의 특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그만큼 다른 장르에 비해 철학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수필은 특히 ‘주제의 문학’이라고 한다. 주제가 드러나지 않고 묘사나 서사만으로 된 수필은 뭔가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 든다. 주제는 표현하는 방법이 암시적일 수도, 명시적일 수도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주제가 단일해야 독자가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고, 한 작품 속의 모든 문장과 단락이 그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 수필이 주제의 문학이라고 해서 지적, 설득적, 교훈적 성격이 지나치면 문학적 감동을 잃기 쉽다. 또 주제만 강조하고 문학적 감동과 미적 즐거움이 없는 글은 <명심보감> 한 구절을 읽는 것만 못한다.
2. 수필은 주제의 문학
이번 호에는 수필이 ‘주제의 문학’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문학 작품에는 읽는 사람에게 감동과 감명을 주는 의미 있고 깊이 있는 주제가 담겨 있어야 한다. 수필의 모든 요소는 주제를 향해 집약되고 통일되고 질서 있게 배열된다. 수필은 다른 갈래보다 특히 주제가 더 필요하다. 시는 주제 이전에 운율과 이미지를 통하여 미적 감동을 주며, 시어가 지닌 음악성, 함축성, 다의성, 환기성 등의 특징을 가지며, 이미지와 어조를 통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 비유, 상징, 반어, 역설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작품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하며, 자신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미적 감동을 준다. 그리고 소설이나 희곡은 꾸며낸 것들이고, 흥미진진한 사건이 있어 거기에서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은 서술 위주의 산문이기 때문에 시적 음악성이 부족하고, 사실성을 중시하는 교술 갈래이기 때문에 소설 같은 흥미진진함은 자연 덜할 수밖에 없다. 수필은 이런 약점을 깊이 있는 주제로 극복해야 한다. 수필이 관조의 문학, 사색의 문학, 예지의 문학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주제는 제재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요, 가치 평가이며, 의미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제재가 다양하므로 주제도 다양한 양상을 띤다. 체험을 통하여 터득한 인생에 대한 예지나 인생관이 주제가 되기도 하고, 인간 사회나 자연에서 느낀 주관적인 정서가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여행에서 느낀 객수나 답사에서 얻은 지식이 주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수필의 주제는 삶을 통하여 느낀 사소한 감상에서부터 인간의 삶과 죽음이 주는 철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 주제의 본령은 역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에 있다. 신변잡기의 수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담고 있는 중후한 수필이야말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삶의 향기와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독자가 ‘아! 인생이란 참으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칠 수 있게 하는 데 수필의 진정한 묘미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예지가 필요하다. 이것들을 통해서 수필은 인생의 깊은 의미와 가치를 천착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진영의 <빨간 글씨>를 읽는다. 이 수필은 콩트 형식의 이야기 전개와 탁월한 문학적 형상화 기법으로 주제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따뜻한 격려와 도움의 말이 얼마나 소중한 위로와 힘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평범한 주제를 공감과 감동으로 이끌어낸 수필이다.
이야기는 40년 전, 작가가 젊은 교사 시절에 가르친 중학교 여자 제자의 전화에서 시작된다. 작품의 서두가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졸업 후 지금까지 하루도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며,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증거물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니, 독자의 관심은 더욱 깊어진다. 음성을 들으니 제자는 지금 초로에 접어든 여인으로 양반집 맏며느리 같은 인상이 떠올라 반가움보다는 도리어 긴장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제자 농사 잘 지었네. 40년 전 묵은 제자라, 거기다 여자라면…….”
“또 무슨 악담 하려고?”
“악담은 무슨… 축하 겸 경고지. 요새 제자 조심하게. 은사 하품하는 동안 금니 뽑아 가는 세상이래. 더구나 여자라면…….”
“그런 제자는 자네 제자이고, 내 제자는 안 그렇다네.”
며칠 후 약속한 장소에 나갔다. 오후 6시, J호텔. 이 호텔에는 처음이라 로비에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달려와서 답삭 팔짱을 낀다.
<중략>
“이걸 어쩌지,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구먼.”
“당연하죠. 세월이 얼만데요.”
식당으로 곧 안내되었다. 전 교수의 비아냥거림이 언뜻 뇌리를 스친다. ‘요새 제자 조심하게.’
- 공진영의 <빨간 글씨> 중에서
작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론 의심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다. 이 수필은 콩트 형식으로,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 방식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계 구성으로 이루어져 독자에게 소설적 긴장감과 흥미를 더해 준다. 독자는 중년 여인과 초로의 필자 관계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끝까지 독자에게 관심과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게 하고 있으니, 일단 성공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회를 마치고 나서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시고는 일기장을 돌려주셨습니다. 저는 잰걸음으로 빈 교실로 가서 일기장을 열어보았더니 마지막 장 여백에 빨간 글씨로 석 줄 반을 쓰시고, 끝에 도장을 찍어 두셨습니다. 그 석 줄 반의 글을 읽고 난 순간 저는 전신이 떨려 왔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혼자 이를 갈며 엉엉 울었습니다. ‘살아야지,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해야지.’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그녀의 두 눈에선 번쩍하고 섬광 같은 것이 지나갔다.
“선생님, 그 일기장이 이것이고, 그 글씨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라며 책갈피를 펼쳤다.
- 공진영의 <빨간 글씨> 중에서
그녀는 중학 시절, 절망으로 자살에의 유혹까지 있었던 힘겨운 삶 속에서 쓴 눈물의 일기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 젊은 담임교사였던 작가가 써준 ‘석 줄 반의 빨간 글씨’가 어린 중학생의 절망을 희망과 용기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극적인 이야기 전개 속에서 따뜻한 격려와 도움의 말이 소중한 위로와 힘이 된다는 평범한 주제가 독자에게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작가의 멋진 결말 처리에 더욱 독자를 감동하게 하는 묘미가 있다.
“김 교수, 여기선 읽지 말게나. 그때는 그 글 내용이 보석같이 빛이 났을지 몰라도, 지금은 어쩌면 푸석한 흙이 되어 있을지 몰라. 옛날 그 보석으로 가지고 있게나.”
나의 만류가 뜻밖에 완강했던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쉬운 듯 일기장을 덮었다.
돌아오는 길에 자그마한 단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꿀입니다. 고향 갔다가 진짜라 해서 샀습니다.”
그날따라 달빛이 밝았다. 꿀단지를 들고 달빛을 밟으며 혼자 걷는 길, 마치 담임선생님한테 칭찬을 받고 돌아오는 아이처럼, 모둠발로 깡충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 공진영의 <빨간 글씨> 끝 부분
독자가 궁금했던 ‘석 줄 반의 빨간 글씨’의 내용은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작가는 왜 이렇게 숨긴 채 마무리했을까? 이렇게 숨길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생각하며 경탄했다.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 대신에 생명의 힘과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짧은 몇 문장이 어찌 쉽고 가능할까? 오히려 밝히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수많은 명문장을 상상하게 하는 여운을 남기지 않았는가. 이것이 성공한 수필의 마무리 기법이다.
그뿐이 아니다. 한 편의 수필에 사용된 모든 낱말과 문장과 단락은 작가가 의도한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것이 완벽한 글의 통일성이다. 작가는 반갑고 고마운 제자를 만난 기쁨과 진짜 꿀까지 선물 받고, 담임선생으로부터 칭찬받은 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한다. 마무리 부분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낱말 두 개가 있다. ‘진짜’와 ‘칭찬’이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사용한 낱말이 아니라고 이해하며 또 한 번 놀랐다.
진짜는 가짜의 반대말이다. 가짜 꿀이 진짜 꿀보다 많다고 한다. 가짜와 거짓이 횡행하는 세상이다. 작가도 한순간 제자라고 전화를 받았지만, 가짜일지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가짜보다 진짜가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가치인지를 독자에게 일깨우고 있다. 현대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서로 믿고 돕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짐작하건대, ‘석 줄 반의 빨간 글씨’는 위로, 격려, 용기, 칭찬 등의 내용으로 된 짧은 글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 대학교수가 된 반가운 진짜 제자가 찾아 주었으니 그보다 뛸 듯이 기쁜 일이 그리 흔할까. 구름 속 희미한 밤일지라도 작가에게는 이 밤의 달빛이 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아이처럼 모둠발로 깡충 뛰고 싶은 기분뿐만 아니라, 만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지르박 리듬을 타며,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콧노래도 불렀으리라.
김경숙의 <여운>은 일상에서 발견한 평범한 제재를 통하여 주제화에 성공한 수필이다. 작가는 제재의 본질에 이르는 방법에 능통하다. 제재의 본질을 깊고 정확하고 개성적 시각으로 보면서 그 본질을 해석하고 가치 평가하고 의미부여 하여 주제화하는 것이 수필 쓰기의 기본 과정임을 잘 알고 있다.
제재를 찾고 그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호기심으로 대상을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호기심은 감정을 젊게 하고 창조하게 한다. 호기심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작가에게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이다. 호기심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글감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호기심도 연습하고 개발해야 한다. 옛글에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모든 사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이 사물이 되어보기도 해야 한다. 시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색실 한 올 한 올로 수놓은 컵 받침 세트였다. 6개의 컵 받침에는 사과, 포도, 복숭아, 먹음직스런 과일을 하나씩 수놓아 색상도 은은하고 독특하였다.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였을까 생각해보니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결코, 빨리할 수 없고 조급해서는 안 되는 게 십자수인데, 천의 올을 따라 한 땀 한 땀 수를 놓을 때마다 사색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으며, 시간을 얼마나 들였을까 가히 짐작할 만했다. 그래서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그 작품을 보며 그의 어여쁜 마음과 수고를 헤아린다.
- 김경숙의 <여운> 중에서
작가는 조용한 아침에 차를 마시면서 찻잔 받침을 유심히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든다. 그러면서 타인과의 관계와 내 마음의 상태를 생각하면서 찻잔 받침을 선물한 사람을 떠올린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에서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따뜻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의 예쁜 마음과 수고를 헤아린다. 찻잔 받침을 의인화하여 작가의 마음을 다스리는 깨달음으로 주제화하였다.
김민숙의 <그녀의 숙제>는 힘든 우리네 삶의 이야기다. 많은 가정에서 겪고 있는 부모 봉양의 문제를 실감 나게 그려 공감과 감동을 준다. 수필은 작가가 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 곧 삶의 모든 체험을 자유롭고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한 산문 문학이다. 따라서 1인칭 시점의 진술 방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며, 내가 서술자이자 주인공이다. 또, 수필은 허구가 아닌 사실의 이야기다. 이것 또한 다른 갈래와는 다른 수필의 특징이다.
해가 한 뼘밖에 남지 않은 느지막한 오후. 모처럼 그녀와 마주 앉았다. 진기라곤 다 빠진 얼굴이다. 남들은 지난여름이 더웠다고 하는데 자기는 병원에서 더위 모른 채 살았으니 피서한 것 아니냐며 겸연쩍게 웃는다.
그녀가 떠나고도 나는 한참 일어서지 못했다. 아들이 대기업에 입사하고 딸이 의사가 되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운차던 그녀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빈두루경의 벽화 ‘안수정등(岸樹井藤)’을 떠올린다. 절벽 위에는 미친 코끼리요 바닥에는 독사의 무리다.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이 등나무 줄기에 매달린 채 한 방울씩 떨어지는 꿀맛에 취해 일희일비하는 사람의 그림,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이다. 그녀의 숙제가 내 어깨로 내려앉은 듯 전신이 뻐근하다.
- 김민숙의 <그녀의 숙제> 처음과 끝 부분
지난여름이 무척 더웠지만, 정작 작가는 어머니 병간호를 하느라 여름 내내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피서를 잘했다고 겸연쩍게 웃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팔순 중반의 암 환자인 친정어머니의 병간호를 3년 동안 하는 중에 아버지마저 폐암 판정을 받았다. 병구완으로 허약해진 자신도 대상포진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고, 지금도 피곤하면 자주 도진다. 밥 한 끼 하자는 친구의 호의도 손사래를 쳐야 하는 팍팍한 삶이다.
그녀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이다. 이것은 ‘그녀의 숙제’만이 아니라, 100세 시대에 우리 모두의 숙제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 이전에 우리의 이야기임으로 공감과 감동이 배가 된다.
이 작품은 수필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특별한 구성 방식으로 전달의 효과를 높였다. 소설에서 드물게 사용하는 액자식 구성과 비슷하다. 첫 부분 프롤로그에서는 1인칭 서술자인 나는 그녀와 모처럼 마주 앉아서 진기라곤 다 빠진 모습을 바라보면서 겸연쩍게 웃는다. 중심 이야기에서는 그녀의 고달픈 삶의 모습을 전지적 작가 시점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그녀가 떠나고도 나는 한참 일어서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그녀와 나는 헤어지지만, “그녀의 숙제가 내 어깨로 내려앉은 듯 전신이 뻐근하다.”라고 하여, 결국 그녀와 내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작품은 1인칭 서술자가 그녀를 만나서 관찰하거나, 3인칭 전지적 서술자인 작가가 그녀의 심리까지 묘사하고 있다. 같은 인물을 두고 서술 시점을 달리하여 표현하였지만, 결국 나와 그녀는 모두 작가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수필에서 자주 볼 수 없는 방법을 찾았다. 이 작품의 내용상 적합한 방법을 사용하여 적절한 효과를 살려낸 셈이다.
이 작품이 일반적인 1인칭 주인공의 서술 방법을 택했다면, 흔히 말하는 신변잡기의 글이라고 홀대받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신변 이야기지만, 결코 신변잡기라고 깎아내릴 수 없는 성공한 작품이다. 작가는 줄곧 남 이야기하듯 서술함으로써 서술자를 나로 했을 때 느껴지는 독자로부터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렇게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녀는 참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는 방식의 객관적 표현 형식을 취함으로써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상황을 공감하게 했다. 나아가 한층 효과적으로 동정과 연민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또, 작가는 자신을 다른 사람을 바라보듯 객관적 위치에 두고 바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실상을 보는 방법임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녀 즉 나 자신을 위로하고, 스스로 위안받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3년 동안 자신을 잃어버린 채로 생활하고 있으니, 어쩌면 나 아닌 또 다른 그녀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정어머니의 3년 동안의 병간호 중에 겹친 아버지의 폐암 판정과 자주 도지는 자신의 대상포진 병 치료와 두 집 살림살이, 거기다가 서른다섯 된 딸의 혼사 걱정 등 해결해야 할 ‘그녀의 숙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작가는 이런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이라고 표현했다. 나만의 삶이 아니라 우리네 삶이라고 일반화하여 체념과 위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오는 고달픔, 어찌 이것이 작가만의 어려움일까. 그래서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얻고 있다. 갑자기 이렇게 힘든 짐을 지고 살아가는 많은 분께 존경과 연민의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에게 힘든 짐을 줄여줄 기적 같은 방법은 없을까?
3. 시대의 변화와 수필의 기능
서두에서 밝힌 바처럼, 문학의 기능이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 측면에서도 도외시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쉽고 즐겁게 표현하는 시대이다. SNS 같은 다양한 표현 매체의 발달 때문이기도 하다. 표현 방식이나 내용도 매우 자유롭다. 형식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시, 소설, 수필을 많이 볼 수 있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그 자체에서 만족과 희열을 느낀다. 행복한 글쓰기,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문학의 기능을 다한 셈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면서 즐거움과 행복을 얻는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아픈 생채기나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는 치유 작용도 한다. 대형 서점에 시집, 수필집 판매대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문학성이 우수한 순수 시집이나 수필집보다 오히려 말장난 같은 대중시집이나 잡문 같은 수필의 선호도가 더 높은 것이 현실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글쓰기를 하고, 스마트폰 대신에 책과 함께하는 우리 사회를 꿈꾸어 본다.
빨간 글씨
공진영
전 교수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 전화가 요란스레 울었다. 받아보니 40 년 전 A여중 제자라며 자기소개를 늘어놓았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으나 음성이 차분하고 말씨에 교양과 지성이 풍기는 것 같아 호감이 갔다. 자신은 졸업 후 지금까지 하루도 나를 잊은 적이 없었다며, 이번 기회에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증거물을 가지고 가겠노라고도 했다.
교직에 종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자로부터 문안 전화를 받는 것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받은 전화는 그렇지가 않았다. 자기소개를 받았는데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성을 들으니 초로에 접어든 여인, 어느 양반집 맏며느리 같은 인상이 떠올라 반가움보다는 도리어 긴장감이 앞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교수가 초를 친다.
“제자 농사 잘 지었네. 40 년 전 묵은 제자라, 거기다 여자라면......”
“또 무슨 악담하려고?”
“악담은 무슨...... 축하 겸 경고지. 요새 제자 조심하게. 은사 하품하는 동안 금니 뽑아 가는 세상이래. 더구나 여자라면......”
“그런 제자는 자네 제자이고, 내 제자는 안 그렇다네.”
며칠 후 약속한 장소에 나갔다. 오후 6시, J호텔. 이 호텔에는 처음이라 로비에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달려와서 답싹 팔짱을 낀다.
“선생님, 애잡니다. 선생님 선생님!”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미안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도 전혀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존경하는 은사님을 모처럼 찾았는데 상대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그 제자가 느끼는 참담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렇다고 거짓으로 아는 체하는 것은 스승의 도리가 아니지 않는가.
“이걸 어쩌지,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구만.”
“당연하죠. 세월이 얼만데요.”
식당으로 곧 안내 되었다. 전교수의 비아냥이 언뜻 뇌리를 스친다. ‘요새 제자 조심하게.’
식탁에 마주앉은 그녀는 진정으로 나를 반겨하는 얼굴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를 은근히 바라보는 그 눈빛엔 진솔한 존경심과 간절한 반가움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요염하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교양으로 다듬어진 인상에 지적인 아름다움이 포개져 있어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 주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도 이제야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젊어서는 가난과 싸우느라고요. 또 중년엔 외국에 나가서 늦깎이 공부를 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최근에야 K대학교 교수직을 임명받아 며칠 전에 도착했습니다.” 라며 손가방을 열었다. 뒤적거리더니 단행본 한 권을 꺼내 들고는
“선생님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 국어시간에 그렇게도 강요하 시던 일기장입니다. 어느 날 일기장 검사를 하시다가 저의 일기장을 보시더니 도 장을 찍지 않으시고 그냥 가져가시지 않겠습니까. 그 즈음 저의 일기장은 눈물범 벅이었습니다. 한 페이지에 적어도 대여섯 군데는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을 거예 요. 당시 저희 집은 파산선고를 당해 빚잔치를 하고,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죠.”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식은 커피로 입 적심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무렵 저는 절망이란 낱말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것,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리는 것, 그리고 가물가물 다가오는 자살에의 유혹이...... 당시 저의 생활 가운데 가장 의미가 있는 시간은 일기를 쓸 때였습니다.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왈칵 일기장에 쏟아 부으며 한 없이 울어 볼 수 있는 시간이.....”
그녀의 눈가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전교수의 충고는 완전히 기우라는 확신이 섰다.
“종회를 마치고 나서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시고 는 일기장을 돌려 주셨습니다. 저는 잰 걸음으로 빈 교실로 가서 일기장을 열어 보았더니 마지막 장 여백에 빨간 글씨로 석줄 반을 쓰시고, 끝에 도장을 찍어 두 셨습니다. 그 석 줄 반의 글을 읽고 난 순간 저는 전신이 떨려 왔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혼자 이를 갈며 엉엉 울었습니다. ‘살아야지, 나도 그 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해야지.’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그녀의 두 눈에선 번쩍 하고 섬광 같은 것이 지나갔다.
“선생님, 그 일기장이 이것이고, 그 글씨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라며 책갈피를 펼쳤다.
“김교수, 잠깐.” 오랜만에 내가 참견을 했다. “김교수, 여기선 읽지 말게나. 그 때 는 그 글 내용이 보석같이 빛이 났을지 몰라도, 지금은 어쩌면 푸석한 흙이 되어 있을지 몰라. 옛날 그 보석으로 가지고 있게나.”
나의 만류가 의외로 완강했던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쉬운 듯 일기장을 덮었다.
돌아오는 길에 자그마한 단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꿀입니다. 고향 갔다가 진짜라 해서 샀습니다.”
그날따라 달빛이 밝았다. 꿀단지를 들고 달빛을 밟으며 혼자 걷는 길, 마치 담임선생님한테 칭찬을 받고 돌아오는 아이처럼, 모둠발로 깡총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운
-김경숙
일생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될까.
또한 우리의 마음을 어느 정도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오늘 아침엔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온갖 상념에 젖어들었다.
찻잔 받침을 유심히 보다가 거기에 어려진 어느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서 사는지 소식이 끊어진 그녀의 평안을 빌며 차를 마셨다.
선물이란 안 보이는 마음을 보이게 하는 정성이지 않을까.
나는 지금까지 강좌를 통해 만났다 헤어졌다 꽤 많은 사람들을 알아왔다. 그래서 가끔 선물을 받는다. 꼭 비싸거나 큰 게 아니라도 인정이 담겨있어 고맙고, 내가 받을 자격이나 있나 싶어서 미안할 때도 있다.
문화강좌의 종강인 어느 날 조그맣게 포장된 선물을 받았다.
그는 “선생님, 제가 정성들여 만든 거예요”하며 내밀었다. 집에 와서 풀어보고 깜짝 놀랐다. 색실 한 올 한 올로 수놓은 컵받침세트였다. 6개의 컵받침에는 사과, 포도, 복숭아, 먹음직스런 과일을 하나씩 수놓아 색상도 은은하고 독특하였다.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였을까 생각해보니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결코 빨리 할 수 없고 조급해서는 안 되는 게 십자수인데 천의 올을 따라 한 땀 한 땀 수를 놓을 때마다 사색을 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으며, 시간을 얼마나 들였을까 가히 짐작할 만했다. 그래서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그 작품을 보며 그의 어여쁜 마음과 수고를 헤아린다.
수예품에도 유행이 있는지 예전에는 한 때 스킬자수품이 많더니 요즈음엔 규방공예나 자수 가게가 더러 있는 걸 보면 다시 찾는 이들이 늘었나 보다. 내 어린시절엔베갯잇, 베개머리, 옷 덮개 등이 거의 십자수 작품이었다. 그러다가 차취를 감추더니 차츰 되살아나서 근래엔 태교하는 임산부나 예비 아빠들이 손바느질로 아기옷 만들기나 수놓기를 한다니 참 기특하게 여겨진다. 아마도 ‘빨리빨리병’에 질려서 반대로 느림의 아름다움을 찾게 된 것 같다. 디지털에 익숙해진 그들에게 예전의 아나로그 방식이 여러모로 뜻있게 다가선 것이리라.
그려진 도안을 보며 일일이 결에 맞춰 한 땀 한 땀 색실로 수를 놓을 때마다 작은 바늘을 몇 번이나 오르내렸을까. 끈기가 있어야만 끝까지 할 수 있는 십자수, 한 칸만 잘못 봐도 그림이 다르게 되어버리니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까.
오늘따라 십자수 컵받침은 나에게 타이른다. 의미를 헤아려라, 얼른 뚱땅하지 말고 정직하라,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하라, 급하지 말고 인내하라, 이렇게 오근자근 속삭여주니 잊지 못할 선물이요 마음의 평정은 따라오는 덤이다.
그녀의 숙제
김민숙
해가 한 뼘밖에 남지 않은 느지막한 오후. 모처럼 그녀와 마주 앉았다. 진기라곤 다 빠진 얼굴이다. 남들은 지난여름이 더웠다고 하는데 자기는 병원에서 더위 모른 채 살았으니 피서한 것 아니냐며 겸연쩍게 웃는다.
팔순의 친정어머니가 골수암 진단을 받은 것은 삼 년 전이다. 본인에게는 골다공증이라고 숨기고 치료를 시작했다. 아버지를 손아래 올케에게 부탁하고 살고 있는 집 옆 동에 아파트 한 채를 월세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간병을 시작했다. 팔순 중반에 여섯 차례의 항암치료를 견디는 일은 지옥이었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어머니가 서서히 몸을 가눌 수 있게 될 무렵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환자를 돌보면서 두 집 살림한다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대상포진이었다. 처음에는 몸살이려니 했다. 좀 쉬어야 하는데 두 집 살림에 환자까지 딸린 사람이 쉰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게다가 친정어머니의 간병인지라 남편 눈치가 보여 집안일에 소홀할 수 없었다. 환부가 뼛속에서부터 피부까지 일제히 통증으로 일어섰다. 돌아누울 수도 없었다. 이렇게 아파서 사람이 죽나 보다 싶었다. 두 달 동안 죽을 만큼 아픈 동안에 희한하게도 어머니의 체력이 돌아왔다. 병든 어머니가 쑤어주는 죽을 먹고 약을 먹었다. 그 후에도 두 번의 장염으로 병원 신세를 졌고 암환자인 어머니의 간병을 받았다. 형제들이 팔공산 근처에 작은 주택을 한 채 마련했다. 명분은 어머니에게 공기 좋은 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큰누나의 짐을 나누려는 동생들의 마음씀이었다.
산동네로 간 어머니는 봄이 되자 마당에 텃밭을 일구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자라는 채소를 손자 보듯 물주고 거두면서 어머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식들이 드나들 때마다 푸성귀 한소끔 챙겨주는 재미에 옥상까지 고추밭을 넓혔다. 겨울이 오고 어머니가 또 아프기 시작했다. 암세포가 뼛속까지 전이되어 목까지 잠식해왔고 골수가 피를 만들지 못해 매주 수혈을 받아야 했다. 아무래도 겨울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염려 속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삶이 또 한 해, 어머니는 그렇게 두 해를 버텨냈다.
텃밭에 씨를 뿌려놓고 입원했는데 여름이 다 지나갔다. 어머니는 매일 집으로 돌아갈 꿈을 꾼다. 당신의 병명이 골다공증이라고 믿고 계신 어머니는 진통제가 뼈에 해롭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전신이 무너져 내리는 통증에도 가끔 진통제를 거부한다. 어제는 간병인과 교대하고 병실을 나서려는데 느닷없이 큰 장에 가서 편한 주름치마를 사오란다. 주름치마 입고 어머니는 어디로 나들이 가시려는지. 혼자 나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동안 옥상에 심어놓은 고추를 따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더니 두 소쿠리나 따놓았다는 말에 어제부터는 날씨가 궂다고 고추 말릴 걱정이 한창이다. 암세포가 이미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데 고추라니. 반년을 비운 주인 없는 집 옥상에 고추가 어디 있느냐고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어제 밤새 숨이 버거웠다. 통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어머니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을 쏟아낸다. 또 간호사를 부른다. 다시 진통제가 들어가고 잠깐 정신이 돌아온 어머니가 링거 병을 올려다보면서‘그것참 희한하네! 아편 맞은 것 같네.’하고는 온몸의 힘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 잠에 빠진다. 아기처럼 웅크리고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종부로 살면서 한 해 열세 번의 제사를 모시고 오 남매를 길러낸 어머니의 손을 감싸 잡는다. 거죽만 남아 쭈글쭈글한데 핏줄이 선명하게 솟아 겨울나무처럼 앙상하다. 아픈 사람 앞에서 울면 안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그녀는 지금도 조금만 피곤하면 포진 자리가 도진다. 그 와중에 미수의 아버지마저 폐암 판정을 받았고 서른다섯 된 딸의 혼사 걱정으로 잠을 설친다. 주말에는 타지에 있는 형제들이 어머니를 보러 와서 그녀의 집에서 자고 간다. 이번 주엔 이모님들이 오신다고 한다. 한 며칠 계실 요량이란다. 마지막일까 하여 다녀가신 게 세 번째다. 아픈 엄마 걱정에서 금방 손님맞이 반찬 걱정이다. 살림살이도 손에 잡히지 않는데 숙제가 끝이 없다. 시장이 파하기 전에 김치와 밑반찬을 사야 한다며 모처럼 밥 한 끼 하자는 친구의 호의도 손사래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일어선다.
그녀가 떠나고도 나는 한 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아들이 대기업에 입사하고 딸이 의사가 되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운차던 그녀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빈두루경의 벽화 <안수정등(岸樹井藤)>을 떠올린다. 절벽 위에는 미친 코끼리요 바닥에는 독사의 무리다.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이 등나무 줄기에 매달린 채 한 방울씩 떨어지는 꿀맛에 취해 일희일비하는 사람의 그림,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이다. 그녀의 숙제가 내 어깨로 내려앉은 듯 전신이 뻐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