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동포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피땀으로 가꾸어 온 재독동포사 45년의 생생한 역사를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제목으로 교포신문사에서는 격주로 총 40회(약 1년 6개월)의 계획으로 2면에 걸쳐 연재한다. 이 연재물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이곳 독일 땅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독일에서의 정착 및 재독동포 사회의 건설, 2세들을 위한 헌신, 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등 그 절절한 사연들을 담게 된다. 이 연재물은 지난 1년간 준비위원으로 수고해 주신 김무현, 나복찬, 이종진 준비위원님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교포신문사의 금번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연재물이 우리 재독한인사회의 온전한 45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서는 독자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 -편집실
이 시기에 또 다른 면은 車 선수가 레버쿠젠 원정 경기도중 ‘겔스도르프’에게 심한 태클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교민 중에 김xx씨가 ‘겔스도르프’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아마도 밤길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며 협박을 하여 빌트지에도 기사화 했다.
“차범근” 선수를 “차 붐”으로 애칭 되어 불러지게 되었고, 프랑크푸르트 구장에서 車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 마다 전광판에
한글표기로 “차범근”이라고 형광판으로 뻔쩍 뻔쩍이게 만든 것도 당시 통역인 홍종철씨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車 선수가 부상한 기간 동안 독일 최대 일간지 “Bild Zeitung”이 차 선수와 통역 홍종철씨를 초대하여 펜들과 전화 인터뷰 시간을 특별히 마련해 준 보도 기사 (홍종철씨 소장)
1979~80년도에 車 선수 활약상이 두드러지자 독일로 귀화(歸化)하면 독일대표팀으로 선발 할 수 있다는 기사가 보도될 정도로
그는 톱 클라스에 올라 있었다. 1983년도 車선수가 Frankfurt 에서 Leverkusen 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레버쿠젠에서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아마도 88년도 스페인 “에스파뇰” 팀과 홈에서 UEFA Cup 결승전이 였을 것으로 본다.
이날 車선수가 극적으로 3:3 동점 골을 터뜨리게 되자3만5천 관중들이 기립환호와 갈 체를 車 선수에게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승부차기에서 Leverkusen이 승리를 하게 되자, 감독인 “에릭 리벡”이 車 선수를 포옹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필자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레버쿠젠 구단을 창단이래 처음으로 UEFA Cup 우승을 차지하게 한 주역이기도 한 그는
분데스리그 11년 동안 단 한번의 경고카드<Gelbekarte> 받았을 뿐인 순둥이 기도 하다. 당시 외국인 중 최다
308번 출전기록과 98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며, 1989년도 분데스리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차선수의 초반 통역은 “이성문”씨가 맡았고, 그 뒤를 이어 “홍종철”씨로 이어지면서 그의 손, 발, 입이 되어 펜들에게 각인되기까지 그를 도우며 한국의 축구를 알리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교민이기도 하다.
<그 외에 분데스리그에 활약한 선수들>
독일에서 활동한 축구선수로서는 車 선수 외에도 김진국(Offenbach SV)박상인(MSV Duisburg)황선홍(FSV
Mainz 05)박종원(1. FC Kaiserslautern)심재원(Eintracht Frankfurt)이동국(Werder
Bremen)김민해(Oberliga) 이영표(BVB Dortmund). 지금은 차두리 (SC Freiburg)선수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니 월드컵축구대회 참가>
미니 월드컵 축구대회에 참가한 2세 선수들
1997년 이태리월드컵축구대회 홍보차원에서 이태리축구협회 후원단체가
독일에 살고 있는 이태리 월드컵 출전국 어린이 (12세 이하)미니월드컵축구대회를 본 근교 Troisdorf Aggerstadion
구장에서 20개국 어린이들이 참가한 가운데 우리들의 2세 팀이 출전했다. 단장에 윤성규, 감독 박승규, 코치 김무현, 선수는
김성년, 김영길, 김남규, 유정완, 송분도, 안민호, 박상민, 송한명, 민서울, 김두원. 정혁, 방노벨, 장지완 어린이들이
선전분투 했다. 예선전 아르헨티나와 1:1 불가리아에 1:0 이태리에 0:3으로 예선을 통과 16강전에는 캐나다를 3: 0으로
누르고 진출하였으나, 8강전 그리스에 0: 3으로 분패했다. 첫 출전인데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기록하여 교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대회 때에는 독일교민 응원단은 프랑크후르트 축구동호회 회장 안영국씨와 아헨축구동우회가 함께 추진했다. 버스
12대에 편승하여 리옹 스타디움에 도착하여 응원을 펼쳤다. 2002년도 제13대 재독한인축구협회 장재인 회장께서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 하는 한일월드컵축구대회 홍보 차 베를린에서 독일 팀과 친선경기를 했는데 선수들은 김승인, 이찬주, 박상기, 손동민,
장석영, 김동우, 김성년, 이찬기, 이성규, 황봉주, 석근웅, 조용민, 김영민, 김무정, 루게민구 등으로 2세들로 구성되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 축구대회>
Bild zeitung 에 한국응원단 이모저모
2006년 독일에서 개최 한 월드컵축구대회 슬로건은 Die Welt zu Gast bei Freunden (지구촌 손님들을 친구로
만드는 시간)으로 내 걸고 한 달 내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다. 물론 재독연합회가 주관하고 재독대한체육회 재독한인축구협회가
공동으로 응원단을 구성할 무렵 주독대사관을 통하여 재독동포사회의 몫으로 배정된 월드컵 입장권(50유로, 120유로)이 토고전에
고작 300매 (1등석 50매 중 40매는 공관용, 2등석 50매, 3등석50매, 4등석150매) 프랑스 전 200매(공관용
30매) 스위스 전 200매(공관용 30매)가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턱없이 부족한 교민용 입장권배정 권에 대하여 총연합회와
지방한인회 회장단 및 유관단체장과의 긴급간담회를 개최했다. 3
만5천명이 살고 있는 독일교민들에게 입장권 배정이 너무나 적음에 불만을 표시하며 대한축구협회가 현지 교민들을 철저히 무시한 처사로
지적, 현지교민들이 한국팀 응원을 포기하기로 하고 이 티켓들을 다시 돌려 보내기로 합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것이라도 감사하게 받을 일이지 무슨 소리냐고 빈정대기 까지 했다. 300여장의 표는 선물이나 다름없는데 그 선물이 작다고
돌려보내며 억지를 쓴다는 비하의 글을 당시 Heidelberg 한인회장이 우리신문 제94호 25쪽에 개제하므로 인해 재독축구인들은
물론 교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경기 일주일을 앞 두고서야 대한축구협회가 재독교민들을 무마하려는 목적으로 3배나 더 많은 티켓을 배정하여 각 한인회 마다
응원단을 구성하는데 뒤늦게 활기를 띄게 되었다. 각 지역 마다 전세 버스를 대절하여서 프랑크푸르트 아고라 광장에 집결하여 열띤
응원전을 펼치는가 하면 라이프찌히, 하노버, 경기장에서도 재독교민들의 힘찬 응원의 함성이 태극전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비록
본선 예선을 통과하지는 못했으나 대등한 실력을 인정 받는데 만족을 해야 했다.
티켓배정에 관한 긴급간담회
그런 반면 축구의 나라 브라질은 2004년도에 이미 축구가 스포츠라는 단일경기 종목을 뛰어 넘어 <굴뚝 없는 산업>으로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브라질 1급 축구선수들이 전세계에 무려 733명이 진출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국으로
연간 송금한 액수가 자그마치 5천만 달러 (한화 3250억 원)라는 공식 집계가 나와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정책을 곧
Sports Politik이라 말할 수 있겠다. 국경을 넘어 세계의 축구스타들이 유럽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선수들은 이재 몇몇이 유럽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최근 얼마 전부터 FIFA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사안은 앞으로 모든 구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선수들에게 출전제한을 두자
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UEFA(유럽축구연맹)에서 거세게 반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도 해가 거듭될 수록
자국선수들에게 출전의 기회를 우선으로 두자 라는 목소리가 크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해야만 FIFA가 추구하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선수들이 세계의 정상급 선수들과 맞부딪치는 실전을 통한 경기 운영의 기력을 쌓지 못한다면 긴
안목으로 볼 때, 한국축구의 장래 수준이 낮아 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장래를 위한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또 많은 경험을 쌓게 하려는 일이 중요하므로 앞으로도 대한축구협회가 촉망 받는 축구선수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한국축구를 한 단계 높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독일축구협회에서는 나이에 따라 세분화된 청소년대표선수들을
엘리트 군으로 특별관리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축구정책 중에 하나로 삼고 있다. 유럽에서 분데스리그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세리에
보다 낮게 취급 받지만, 국제적인 축구는 항상 톱 클라스에 유지하는 독일대표팀의 강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유소년축구
시스템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2008년도 대한축구협회의 예산 703억9천만 원 가운데서 특히 아마추어축구와 축구지도자 양성을 위한 직접적인
투자는 극소수 금액에 불과한 것은 한마디로 그만큼 한국축구가 대외적으로 경쟁력에 밀릴 수 밖에 없다는 예기다. 그 누구보다 앞선
선경지명으로 지난 70년대 거의 이름조차 없었던 한국축구를 중흥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독일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내
나라 청소년 축구선수들을 위해 공보내기 운동에 기꺼이 동참했는가 하면, 그 밖에도 한국축구지도자들에게도 선진축구를 현지에서 직접
배우고, 피부로 느끼면서 산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시효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물심 양면으로 모든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현명한 재독한인축구인들의 남다른 공로를 필자는 이 자리에서 기억하고자 한다.